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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사 사료 [고대]

[고구려]고구려와 당나라의 전쟁5-당나라의 군사조직체계

작성자[운영자]푸른 장미|작성시간07.02.13|조회수376 목록 댓글 0
 

고수 제 2차 전쟁에서 수 양제는 좌우익 24군과 친위 6군에 113만 명을 동원하였다고 하며 이것을 근거로 계산한다면 수나라 1군의 규모는 3만 7천5백 명이 된다.


『논어(論語)』<술이편(述而篇)>에서 1군의 규모를 1만 2천명이라고 한 것에 비한다면 현격한 차이를 보인다. 수나라 1군은 기병 4개단(團)과 보병 4개단, 치중병(輜重兵:수송병)4개단의 2만 명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기병 100명, 보병 200명을 1대라 하고 10대를 1단이라고 한다. 즉 수나라 1군의 기병 4개단 4000명과 보병 4개단 8000명 그리고 치중병 4개단 2만 명을 합하면 3만 2천명이라는 결과를 볼수 있고 논어의 기록과는 차이가 나지만 위에서 본 단순계산의 3만 7천5백 명과도 근접한 수치가 되어 수나라의 병력이 100만에 육박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만약 수나라시대 1군의 병력인 3만 2천명으로 당태종의 친위 6군을 계산하면 19만 2천명이며, 이적의 6만 명과 장량의 수군 4만 3천여 명을 합해 29만 5천명이 되지만 친위부대가 이적이 이끄는 주력부대보다 3배나 많아지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그렇다면 당나라 군의 규모는 어느 정도 될 것인가...

당나라의 기본적인 군사체제는 부병제(府兵制)다. 부병제란 20∼60세에 이르는 장정들에게 병역의무를 주어 농사철에는 농사짓게 하고 농한기(農閒期)에는 군사훈련을 받게 하는 제도이다. 당나라초기 전국에는 농한기에 장정들을 훈련시키는 곳인 절충부(折衝府)를 두어 세 집중 한 집의 장정을 뽑아 훈련시켰다. 다시 말해 3년에 한집 꼴로 징집하여 병사로 활용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본래 당나라는 관중을 근거지로 삼았기 때문에 기본적인 당나라의 군사제도는 관중지역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처음 건국 직후 당 고조는 관중지방을 12개의 도(道)로 분할하였고 각 도에는 군부(軍府)를 설치하여 표기장군(驃騎將軍)과 거기장군(車騎將軍)에게 다스리도록 하였다. 620년 12도를 폐지하고 12개의 군(軍)으로 편성하여 각 군에 최고 책임자로 장군(將軍)을 한 명씩 두었고 623년에는 12군을 폐지하고 표기장군은 통군(統軍), 거기장군은 별장(別將)으로 개칭하였다. 그러나 돌궐과의 전쟁이 치열해지자 625년에 다시금 12군을 복구시키고 장군 1명과 부장(副將) 1명씩을 배치시켰다. 그리고 636년에는 통군을 절충도위(折衝都尉), 별장을 과의도위(果毅都尉)로 개칭하고, 각도에 설치한 군부들을 절충부라 명명했다.


당나라 초기 이렇게 생겨난 절충부는 이후 전국에 630여개를 만들었고 효율적인 군사운영을 하였다. 이 절충부를 40∼60개를 묶어 16개의 위(衛)로 분속시키고, 여기에 상장군(上將軍)·대장군(大將軍)·장군(將軍)·절충도위(折衝都尉)등을 배치시켜 놓았으며 절충도위가 대부분의 절충부의 일을 도맡아 처리하였다. 그리고 위(衛) 위에 사령부 총부(總部)가 중앙에 위치하여 중앙과 지방의 군령권(軍令權)을 행사하였다.

각 절충부는 단(團)­여(旅)­대(隊)­화(火)로 구성으로 되어 있고, 절충도위 밑으로 교위(校尉)­여수(旅帥)­대정(隊正)­화장(火長)이 각각 통솔하게 하였다.


보통 절충부는 1000명으로 구성되었고, 절충도위 1명, 교위 5명, 여수 10명, 대정 20명, 화장 100명으로 체계가 이루어졌고 화 다섯을 대라 하였고 대 둘을 여라 하였으며 여 둘을 단이라 하였고 단 다섯을 절충부라 하였다. 당나라 630여개의 절충부에 각각 천 명씩 배속되어 있었기 때문에 당나라 최대 병력은 약 63만 명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에 수도방위를 맡은 병사들과 각 변방을 지키는 방병(防兵)들의 20∼30만 명을 제외하면 실제 유동병사는 30만 명 정도였다고 한다. 하지만 대규모의 원정이 감행될 때에는 별도로 행군(行軍)을 조직하여 부족한 군사를 충당시켰다고 한다. 외정에 참여할 수 있는 인원을 30만 명으로 제한시킨다면 당 고종이 661년 조직한 35군은 아무리 그 병력이 많다 한들 30만∼40만 명을 넘을 수는 없다는 계산이 나온다. 그리고 661년 조직한 35군은 당나라 외정의 최대 군사규모였다. 그러므로 이때의 35군을 30∼40만 명의 수준으로 볼 수 있을 것이며 이것을 근거로 당나라 1군의 규모를 추측해 본다면 1군에 약8천명∼1만 명 정도가 배속되어 있으며, 35군이라는 병력은 28만 명∼35만 명 정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것은 삼국사기 신라본기 문무왕조에서 당나라 35군을 35만군이라고 기록한 것과도 일치한다. 물론 당 태종의 6군은 이런 계산만으로도 추측이 가능하지만, 당 고종의 35군은 그야말로 대규모의 원정군이기 때문에 행군이라는 특수한 부대도 고려해 봐야 하기 때문에 단순 계산만으로 35만 명 정도라는 계산에는 문제가 생긴다. 하지만 661년 당시 당나라의 인구수(640년경 인구 수:약 1000만 명)를 생각해 본다면 35만 명∼40만 명을 최대병력이라 하여도 무난할 것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당 태종의 친위 6군은 4만 8천명 내지 6만 명 정도였을 것이라고 추측이 가능해지고 고·당 제 1차 전쟁에 투입한 병력은 당 태종의 6군(4만 8천∼6만 명 )+이적의 보기 6만 명+장량의 수군 4만 3천명+장검의 호군(+α) 로 약 17만명+α 라고 볼 수 있다.


[참고문헌]

<三國史記>

<三國遺事>

<東國兵鑑>

<舊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傳>

<新唐書 - 東夷列傳 高句麗傳>

<資治通鑑>

<日本書紀>

<對隋唐戰爭을 통해 본 高句麗의 靺鞨支配> 동아대학교 석사논문 1993

<高句麗의 軍事力量과 對隋·唐전쟁> 조선대학교 석사논문 1996

<640년대 高句麗 對唐 戰爭의 戰爭尿素別 分析> 육군 제3사관학교 논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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