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6년 제너럴 셔먼 호 사건 이후 이 사건의 생존자가 없기에 미국 정부로서는 제너럴 셔먼 호의 행방에 대하여 추적을 하면서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면서 대동강에서 국적불명의 이양선 한 척이 해적질을 하나가 불탔다는 정보를 듣고 베이징 주재 미국공사인 프레드릭 F. 로우는 미국 아시아 함대 사령관 로저스와의 회담을 거쳐 청나라 예부에 제너럴 셔먼 호의 행방에 대해 조사할 수 있도록 조선에 입국하게 주선해 줄 것과 자신의 서신을 조선 조정에 전달해 줄 것을 요청한다.
결국 제너럴 셔먼 호 사건과 병인양요가 있은 지 5년 후인 1871년, 미국공사 로우의 서한이 청나라 예부를 통하여 조선 조정에 도착한다.
그 내용은 5년 전 조선에 들어간 두 척의 배 중 조난당하였다가 구조된 상선, 즉 서프라이즈 호를 제외한 다른 한 척의 상선, 제너럴 셔먼 호의 수색을 위해 협조하여 달라는 것이었다. 문서의 어투는 공손해 보였지만 실질적인 내용은 위압적인 것이었다. 물론 조선 조정은 이 요구를 거부한다.
이러한 조선의 반응은 미국 입장에서는 조선에 대한 무력 도발에 대한 명분을 제공해주는 셈이었다. 사실 미국으로서는 이미 조선 침공을 준비하고 있었다. 이를 위해 프랑스에 조선에서 프랑스 신부가 죽었으니 공동으로 원정하자는 제의도 하였으나 프랑스 정부가 프랑스는 이미 보복-즉 병인양요를 말함-을 하였기에 또다시 군사를 일으킬 필요가 없다고 한 일까지 있었다.(병인양요에 대하여 조선과 프랑스 정부는 모두 자신들이 승리하였다고 믿고 있었던 셈이었다) 그리고 한 때는 주중영국공사인 웨이드도 영국의 참전 가능성을 문의하기도 하였다.
당시 남북전쟁에서 북군을 지휘한 장군 출신이었던 미국 대통령 그랜트는 1870년에 이미 로우 공사를 수교도 하지 않은 조선전권공사로 임명하여 로저스 제독과 함께 조선 문제를 처리하도록 위임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미국의 조선침공의 표면적인 명분은 제너럴 셔먼 호 사건에 대한 보복이었다. 하지만 최근의 이라크전이 경제적 이권이 걸려 있었던 것처럼 이 당시에도 미국의 조선 침공계획의 이면에는 경제적 문제가 존재하고 있었다.
미국은 18세기 후반부터 코네티켓, 메사추세추 지방에서 야생되는 인삼이 중국인에게 인기가 많은 상품이라는 것을 알고 중국 인삼시장에 진출하려 하였는데 중국에서는 고려 인삼의 인기가 높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미국의 조선에 대한 관심은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제너럴 셔먼 호가 대동강으로 거슬러 올라온 것도 이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이었다.
결국 미국 아시아함대를 주축으로 한 함대는 로저스 제독의 지휘 하에 기함인 콜로라도 호를 비롯하여 파로스 호, 모노카시 호, 베니시아 호, 알래스카 호 등 5척의 군함과 함재대포 85문, 해군과 해병대 총 1,230 명을 이끌고 5월 16일 일본의 나가사키 항구를 출발하여 5월 19일(음력 4월 6일) 남양만 풍도 앞바다에 도착하여 닻을 내렸다.
그리고 남양부사와 접촉한 뒤 다시 북상하여 부평 앞바다에 이른다. 한편 조선 조정은 정기원을 진무사-강화도에 위치한 군영 진무영을 지휘하는 자리-에, 어재연을 진무중군으로 임명하여 강화도로 파견, 미국의 공격에 대비한다.
미국함대는 인천읍사 김진성과 접촉한 뒤 조선 조정의 회답을 기다렸지만 아무런 회답이 없자 로저스 제독은 파로스 호와 모노카시 호, 두 함정에 강화도 연안의 수심을 측정하고 함대의 위력을 과시하라는 명령을 내린다.
명령을 받은 두 척의 배는 블레이크 중령의 지휘 하에 강화도와 내륙 사이의 손돌목으로 접근한다. 이 일대는 병인양요 이후 포대가 확충되고 어떠한 선박도 사전 승인 없이 지나갈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런 해역으로 미국 군함이 진압하였으니 조선군은 곧 포격을 개시하여 쌍방 간의 포격전이 일어나 조선과 미국은 본격적인 전쟁 상황으로 접어들었다.
대포의 위력은 미국이 우세하지만 조선군의 포대는 엄폐되어 있고 미국 군함은 노출되었기에 미군으로서는 위협적일 수밖에 없었다. 결국 미국 군함은 톼각을 결정하는데 블레이크 중령은 이 포격전에 대하여 남북전쟁에서도 볼 수 없었던 치열한 포격전이었다고 회상한다. 하지만 이 포격전으로 인한 피해는 조선군 사망자 1명, 미군 부상자 1명에 불과하였다.
이 포격전 이후 미군은 강화도에 대한 공격을 결정한다. 이 때 로저스 제독은 병사들에 대한 훈시에서"서울까지 진격하여 이교도들의 버릇을 고쳐주어라!"라고 한 것으로 알려진다. 미국 함대는 파로스 호와 모노카시 호를 주축으로 5월 31일 초지진 앞바다로 진출하여 함포사격을 개시한다.
그리고 킴벌리 중령이 이끄는 해병대원 450여 명이 상륙을 개시하여 초지진을 점령하고 다음날 광성진에서 다시 조선군과 전투를 벌인다. 이 전투에서 진무중군 어재연이 전사하는 등 조선군은 막대한 피해를 낸다. 미군의 피해는 전사자 3명에 부상자 10여명에 불과하였다. 이 전투가 끝나고 미군은 어재연의 수자기를 비롯하여 총포, 문서 등을 노획한다. 이 때 노획된 물품들은 현재 미국 해군사관학교 박물관에 보관되어 있다.
하지만 미군은 5년 전 프랑스군이 그러했던 것처럼 강화성을 공격하지 않고 모선으로 철수한다. 그러는 사이 조선군의 강화도에 대한 방비는 더 강화되었고 조선이 계속 강경한 입장을 보이자 결국 미국 함대는 조선인 포로들을 돌려보내고 40여일 만에 조선에서 돌아간다.
조선은 전투에서 전사한 어재연에게 병조판서와 지삼군부사를 추증하는 등 전사자들에 대한 조치를 취하고 쇄국정책을 더욱 강화한다.
신미양요에 대하여 조선은 미국 함대가 물러나자 자신들이 이긴 것으로 생각하였고 오늘날에도 그렇게 생각되는 경우가 많지만 사실 벌어진 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것은 미국이었고 게다가 그것은 거의 일방적인 것이라 할 정도였다. 하지만 미국으로서도 어재연의 수자기를 비롯한 일부 물품을 노획한 거 외에는 별다른 소득 없이 물러나야 했으므로 비록 군사적으로는 승리했다고 할 수 있을지언정 정치적인 승리까지 차지하는 데는 실패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