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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병주의 역사산책] 광해군과 분조(分朝)

작성자서울 -전 생|작성시간26.06.07|조회수16 목록 댓글 0
 


일러스트=이철원
신병주의 역사산책 (12)임진왜란 다시 보기(상)
18세의 광해군, 7개월간 분조 지휘 전시에 임시정부의 구심점으로 활약
의병 항전 독려하며 전세 역전 큰 역할
 



1592년 4월13일 일본군의 침략으로 임진왜란이 일어났다. 16세기 이후 조선 사회는 성리학이 주류 이념으로 자리 잡으며 문치(文治)가 강조돼 일본의 침략에 대한 대비가 전혀 이뤄지지 못했다.

<선조실록>에는 일본군의 진격에 속수무책으로 방어선이 뚫린 것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200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4월24일 이일이 상주에서 패배하고, 4월28일 신립이 문경새재 대신 충주 탄금대의 넓은 들판에 배수진을 쳤으나 대패로 이어졌다. 신립의 패전 소식이 들려오자 선조는 한양을 사수할 수 없다는 판단을 하고 파천을 결정했다. 선조는 4월30일 평양으로 향하면서 명나라에 원군을 요청했다. 그러나 왕이 한양을 버리고 피난을 갔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백성들은 크게 분노했다. 백성들은 공노비·사노비의 문서가 보관된 장례원과 형조에 불을 질렀고, 심지어 궁궐에도 불을 질렀다.

5월3일 일본군이 한양에 입성하자 선조의 피난길도 빨라졌다. 5월4일 평산, 5월5일 봉산을 거쳐 5월7일 평양에 도착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고 전세가 악화되자 선조는 6월10일 평양마저 포기하고 의주로 가는 피난길을 재촉했다. 좀더 상황이 어려워지면 명나라로 가려는 뜻에서였다.

선조가 평양성을 떠난다는 소문이 돌자 평양의 행궁 앞에는 온갖 무기를 든 백성들이 찾아와 항의했고, 유성룡은 이를 수습하는 데 애를 먹었다. 선조는 서북쪽으로 피난길을 재촉하면서 6월13일 광해군을 세자로 임명하고 ‘분조(分朝)’를 지휘하도록 했다. ‘분조’는 ‘조정을 둘로 나눈다’는 뜻으로 임시정부의 성격을 띠고 있다. 선조에게 변고가 생기면 광해군으로 하여금 정부를 이끌게 한다는 뜻이 담겨져 있었다. 올해는 일제강점기 때에 독립운동의 중심 공간이 된 대한민국 임시정부가 수립된 지 100주년이 되는 해로 임시정부의 활동에 대한 관심이 더욱 커지고 있다. 그런데 임진왜란 때 광해군이 중심이 된 분조가 어느 측면에서 임시정부의 기능을 했는지 주목된다.

선조의 지시로 분조가 구성된 것은 6월14일이다. 선조는 광해군에게 강계로 향할 것을 명하면서 15명의 대신들을 분조에 참여토록 했다. 광해군은 1593년 1월 선조의 명으로 분조가 해체될 때까지 7개월간 전시 임시정부의 구심점으로 활약하며 의병의 항전을 독려했다.

분조가 자리를 잡자 이일·이귀 등은 병력을 이끌고 분조에 합류했다. 당시 광해군의 분조에 참여했던 정탁이 남긴 <피난행록>에는 분조의 활약상이 잘 기록돼 있다.

‘대저 평양을 지키지 못한 이후부터 온 나라 백성들이 대가(大駕)가 있는 곳을 알지 못하여 크게 우러러 전하를 사모하고 슬퍼하고 있다가, 동궁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인심이 기뻐하며 마치 다시 살아난 것 같았습니다. 도망쳤던 수령들도 점차 관직으로 돌아오고 호령 역시 행하여져서 회복의 기회가 조금씩 가망이 있습니다(<피난행록> 7월17일).’

분조가 백성들에게 새로운 희망이 되고 있음을 보여준 것이다. 또 7월27일에는 분조가 점차 의병 봉기의 컨트롤타워가 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다.

‘사람들이 세자께서 오셨다는 소식을 듣고 감격하지 않은 이가 없어서 심지어 눈물을 떨구는 자도 있으며, 경기도의 의병들이 곳곳에서 봉기해 서로 앞을 다투어 적을 잡아서 적세가 조금 꺾이고 있습니다.’

광해군은 풍찬노숙을 하면서도 강원도 이천을 중심으로 의병 봉기를 독려했고, 이정암으로 하여금 연안성을 사수토록 해 의주에서 연안을 거쳐 강화도로 이어지는 해상 교통로를 확보해나갔다.

분조가 적극적인 항전활동을 하는 사이 명나라 원병이 조선에 도착했고, 1593년 1월8일 마침내 조명 연합군이 평양성을 수복했다. 평양성이 수복되자 선조는 더이상 분조가 필요하지 않다고 판단, 다시 합조(合朝)가 이뤄졌다. 광해군의 분조는 비록 7개월의 짧은 기간 존속했지만 임진왜란의 초반 전투에서 전세 역전에 큰 역할을 했다. 18세의 젊은 세자 광해군은 분조활동을 통해 위기관리 능력을 충분히 보여줬고, 이것은 광해군이 후계자의 입지를 굳히는 데도 큰 도움이 됐다. 그리고 광해군이 즉위 후 국방 강화에 힘을 쓰고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서 실리외교를 추구할 수 있었던 배경에도 분조의 경험이 있었음을 기억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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