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3.춘포역(春浦驛)을 돌아보고~★
일제는 대한제국을 강제병합 후 억압과 핍박, 착취와 차별, 수탈 등을 일삼으며 3·1운동 직후에는 군대나 경찰 등으로 무력 억압 통치하는 ‘무단통치(武斷統治)’로 조선 총독부 설치, 헌병 경찰제 실시, 정치 활동 금지, 식민지 교육 등을 헌병경찰제(憲兵警察制)와 같이 군대를 통치에 직접적으로 이용하는 무단통치를 실시하더니, 만주사변(滿洲事變)이후에는 ‘눈 가리고 아웅’하는 유화정책(宥和政策)으로 속 보이는 문화통치(文化統治)를 병행했다.
그러나 그들의 음흉한 속셈은 손바닥만한 한반도 통치에 있지 않았고 대륙(大陸)과 소위 남양군도(南洋群島)의 정복을 위해서 군비증강의 군량미(軍糧米) 병참기지를 염두에 두고 대한제국 그 중에서 호남지방을 집중적으로 공략하였다.
그래서 전남지방 나주평야 일대의 군량미를 공출(供出) 수합 집결지를 나주, 영산포로 정했으며 목포 항구를 이용하여 일본으로 선적하기 위한 목포항 부두가의 양곡 창고는 현재 주위 건물과 비교해도 그 당시는 엄청난 매머드급의 창고였기에 가히 식량 수탈의 규모를 짐작 할 수 있다.
우리 전북 김제평야와 옥구평야는 그들에게는 노른자 위의 곡창지대였기에 더더욱 악랄한 착취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있다.(*하시모토 농장사무실 - 전북 김제시 죽산면 죽산리, *백구 금융조합 - 전북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월봉도정공장 - 전북 김제시 백구면 월봉리)
만경강의 상류 지류인 완주 고산천에서부터 제방을 높이고 직강공사(直江工事)를 실시하여 쌀 수확량 증산을 위한 ‘고양이 쥐 생각’식의 공사를 강행하여 역시 춘포역과 대야역(大野驛: 지경역)에서 기차에 실어 군산 해망동 창고에 보관하여 일본으로 실어갔던 창고와 부잔교(浮棧橋:뜬 다리)가 그 당시 찬탈의 흔적을 증명하고 있다.
이곳 춘포면 춘포리는 일제강점기 시절 미곡 수탈을 위해 철로를 놓으면서 춘포면의 중심지가 된 마을이다. 본래 논밭으로 둘러싸인 시골 촌락이었으나 일제 강점기 때 이 지역을 차지한 쿠마모토의 영주 호소카와가 이 곳에 기차역을 세우면서 면의 중심지로 변모한 것이다. 본래의 중심지는 봉개산 부근이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주택 몇개 만 붙어있는 외로운 마을이 되었다. 이곳 춘포면은 식민지 통치의 잔재가 아직도 많이 남아있기 때문에 '대장촌', '중촌', '신촌' 등 일본식 마을명을 아직까지도 사용하고 있다.
‘넓은 들’이라는 뜻으로, 춘포’라는 이름 대신 ‘대장(大場)’은 일본인들이 지은 것이란다.
그 외에도 이곳은 ‘쌀촌’, 등 다른 별명으로 불리기도 했는데 쌀촌이라는 별명은 이곳에서 쌀이 많이 나기 때문에 쉽게 이해할 수 있다.
일본인들은 이 지역에서 생산되는 쌀을 일본으로 가져가면서 화물 운송량을 줄이기 위하여 이 ‘대장정미소’에서 8분도로 도정한 후 실어갔던 곳이 ‘춘포역이다.
춘포의 일제 수탈의 흔적은 ‘호소가와 농장주 가옥’, ‘에또 가옥’, ‘대장 정미소’ 그리고 ‘춘포역’등이 있다. 이렇게 특히 곡창지대인 호남지방에서의 약탈의 흔적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백 여년 전의 민족의 아픔을 토로하고 있는듯하여 애잔한 마음 어떻게 위로해야 할지 발길이 주춤거려진다.
춘포역은 우리나라의 현존하는 역들 중에서 가장 오래된 간이역 역사를 가지고 있는 곳으로 이곳에 지어진 것은 지금과는 무려 103년이라는 긴 시간을 사이에 두고 있다.
춘포역은 1914년 11월 17일 대장역(大場驛)으로 영업 개시이후 1996년 6월 1일 춘포역(春浦驛)으로 역명 변경, 그 뒤 배치 간이역으로 격하, 무배치 간이역으로 격하하더니, 2009년 4월 1일 여객취급 중지와 결국 2011년 5월 13일 전라선 복선 전철화 사업으로 폐역(廢驛)되어 쓸쓸한 외딴집으로 남아 겨울에는 바람막이 하나 없어 시베리아의 북풍을 온몸으로 받고 있고, 농사철에는 모기떼가 온몸을 쑤셔 선잠을 자게 하며, 심술궂은 메뚜기떼들 볏잎 갉아먹고 낡아 빠진 지붕은 그들의 해우소(解憂所)로 변했고 잠깐 쉬어가는 들새들도 덩달아 꼭 영역표시를 하여 서투른 페인팅 솜씨처럼 온 지붕은 새똥으로 지저분하다.
죄(罪)라고는 그 옛날 인간이 시킨대로 한 부역(附逆)죄 밖에 없는데 이것저것 똘똘 몰아 뒤집어 씨워 폐역(廢驛) 선고를 하니 토사구팽도 유분수길래 길을 막고 물어보니 사람은 도망가고 소는 웃고 있다.
인간들이 겨우 뉘우치면서 한 것은 대장역(大場驛)을 춘포역(春浦驛)으로 개명(改名)한 것 외에는 무엇이 있는가?
거만하고 골리앗 같은 전철 시렁위에 ‘KTX 산천호’는 비아냥거리듯 춘포역 지붕위를 폭음을 내면서 이륙하는 제트기 마냥 날아가고 있어 얄밉기 그지없다.
이웃의 익산역은 호남 철길의 요충지로 석탄기차 정리하고 전철(電鐵)로 새 단장하여 ‘비 내리는 호남선’과 ‘고향 역’은 노래비로 남겨두고 날로 달로 발전하며, 임피역과 남원의 서도역은 역사(驛舍)보존을 위해 리모델링하였고 온갖 집기와 소품들을 긁어모아 수북하게 쌓아 놓고 치렁치렁 달아 놓아 새록새록 추억을 되살려주는데 불쌍한 춘포역은 오두막의 신세로구나~
무엇이 그리 급하여 철길은 후다닥 걷어내고 간이역에도 있을 법한 신호기 하나 없고, 좁은 플랫폼 난간에서 까치발 들어가며 먼 길 떠나던 임을 배웅하며 임들이 오고간 흔적 알 수 있는 ‘통표’ 걸이 온데 간데 없어 점령군이 지나간 탱크 궤적과 군화 발자국만 상상된다.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동물은 인간으로 알고 있다.
나와 같은 생각 가진 사람 많을 진데 그 뜻한테 모아 수혈하고 진료시켜 역의 임무는 못할 지언정 육신이라도 의지하도록 국민들과 나랏임들에게 간절히 간절히 ‘춘포역’에 눈길 있길 바라옵니다.
그렇게 허전한 마음안고 역전마당 한바퀴도니 엿판에 찰떡같은 엿 뭉치를 가위와 끌로 가락에 맞춰 도려내는 정겨운 엿가위소리가 들리는 듯하며 옆에 방물장수 아낙이 내 옷 꼬리를 잡는 것 같아 휙 뒤돌아보니 나뭇가지 꼬챙이에 옷자락이 걸려있다.
조금 시내 쪽으로 걸으니 ‘역전식당’과 ‘꽃 다방’의 간판이 보여 영업유무는 고사하고 그 옛날에 북적거렸을 사람들 모습이 떠오른다.
춘포 시내를 돌다 ‘대장정미소’ 앞을 지나니 왜놈들이 흘리고 간 싸라기를 어린새끼들과 죽이라도 쑤어 먹으려고 바가지에 주워 담을 여인네들이 어른거려 호의호식 내 모습이 죄스럽다.
부디 ‘봄의 개천’, ‘봄개’, ‘춘포(春浦)’에도 언젠가는 그 이름만큼이나 따뜻한 봄이 춘포역에도 찾아왔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