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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덕렬 데스크

수필에 허구를 맨 먼저 도입한 찰스 램-꿈에 본 아이들

작성자오덕렬|작성시간26.06.19|조회수51 목록 댓글 0

 

찰스 램은 수필(에세이)에 허구를 도입하여 에세이를 완성한 분으로 세계적으로 지금까지 추앙을 받고 있다. 작품 <꿈에 본 아이들>로 말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수필계에서는 허구를 도입한 <창작수필>이라면 고개를 졌는다창작수필에서는 이미 폐기한 <붓 가는 대로>를 무슨 수필의 이론쯤으로 여기고 있다. <붓가는 대로>는 고전문학의 방법도 아니고, 현대문학의 방법에서는 더욱 말도 안 되는 잡문·메모 론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이관희)

 

지금도 <창작수필>을 모르는 수필 하는 사람들은 찰스램의 이  < 꿈에 본 아이들>이나, 한 번 읽어 보시고 수필의 허구에 대해서 말씀하시라. ‘상상허구는 한몸인 것을 알아야 한다. 상상력의 이야기는 문학이요, 창작이다. 수필계에서는 수필에 상상은 허용하나 허구는 안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 틀린 이론을 연구 없이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다.

 

수필가들은 수필은 문학이라고 떠들고 있다. 문학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자. “문학(文學) 󰃃 생각이나 감정을 상상의 힘을 빌려 글자로 나타낸 예술과 그 작품. 시, 소설, 희곡, 수필과 이들에 관한 평론 같은 것을 포함한다.”(ᄒᆞᆫ+󰡔국어사전󰡕, 높세울 남영신 엮음) 여기서 ‘상상의 힘을 빌려’라는 표현은 ‘허구’를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 토론자료를 보태어 <한국창작수필> 카페 <오덕렬 데스크>에 올렸다. 허구를 수필적 방법으로 도입하고 있는 <창작수필>에 대해서 의견이 있는 분은 댓글을 달아 의견을 피력해 주시기 바란다. 반연간지 <한국 창작수필> 발행인 오덕렬.

 

 

 

꿈에 본 아이들

-하나의 환상-

찰스 램(Charles Lamb, 1775·런던-1834)

 

아이들은[3인칭 시점: 몽테뉴 1인칭찰스 램 3인칭] 어른들의 어린 시절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할 뿐만 아니라 상상력[허구와의 관계는? 허구 도입. “상상은 표현되지 않은 허구요, 허구는 표현된 상상이다.”(이관희)]을 활용함으로써 자기네가 한 번도 본 일이 없는 전설적인 종조부니 할머니니 하는 분들이 아마 이러이러한 분이었으리고 생각해 보고 싶어 한다. 수일 전에 있었던 일이다.[허구의 이야기 시작] 저녁에 어린 것들이 내게[램의 어머니] 기어와서 피일드[램의 할머니메리 필드]라는 성을 가졌던 증조모에 대한 얘기를 듣고자 한 것도 바로 이런 마음에서였으리라. 피일드 할머니는 노오포크[norfolk: 잉글랜드 동부의 주]에 있는 큰 저택에서 살았는데 [플루머가의 가정부로 있었음]집은 애들이나 그들의 아빠가 살고 있던 집보다도 백 배나 더 컸으며 애들이 최근에 󰡔숲속의 아이들󰡕1)이란 민요를 통해 잘 알게 된 비극적 사건들의 무대(적어도 그 지방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그렇게 믿고 있었다)이기도 했던 것이다. 아이들과 그들의 잔인한 삼촌에 대한 얘기 중에서 방울새가 나오는 대목(역주민요에 의하면 살해된 아이들이 숲속에 버림받았을 때 방울새가 잎으로 시체를 덮어 주었다고 함)까지가 이 집의 커다란 홀 속 벽난로 판자 장식 위에 곱게 새겨져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어떤 부유했으나 지각없는 사람이 그 판자를 헐어 내고, 그 대신에 현대식 대리석 장식을 하면서, 그 얘기는 사라지고 말았다. 이 말을 듣자 앨리스는 그 짓을 나무랬다기에는 너무나 부드러운 표정, 즉, 자기 엄마가 흔히 짓곤 하던 표정을 지었다. 그러자 나는 피일드 증조모께서 몹시 경건하고 착한 분이셨다는 얘기랑, 모든 사람들이 그분을 좋아하고 존경했었다는 얘기랑, 그 할머니가 그 큰 저택의 마나님은 아니었고, 주인이 그녀에게 맡긴 일을 돌보는 데 그쳤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그녀가 그 저택의 마나님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의 위치에 있었다는 얘기 따위를 애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저택의 주인은 인근 군(郡) 어딘가에 사두었던 보다 새롭고 보다 유행을 따라 지은 저택에 살고자 했기 때문에 피일드 할머님께 그 집의 관리를 부탁했었는데, 그녀는 마치 그것이 자기 집이라도 되는 것처럼 거기서 거처하고 있었고, 그녀의 생전에 대저택의 품위를 지탱해 왔었다. 그러나 이 집도 훗날에는 황폐하게 되었고 거의 헐리다 시피 되자 그 모든 옛날 장식들을 때어서 주인의 다른 저택으로 옮겨갔지만 새 집에 맞춰놓은 옛 장식들은 어색하게 보이기가 마치 애들이 최근에 웨스트 민스터 사원2)에서 본 일이 있는 옛 무덤들(역주: 런던에 있는 이 중세 사원에는 명사들의 무덤이 있음)을 누군가가 옮겨다가 C부인의 번지르르한 황금빛 응접실을 장식해 놓은 것 같았던 것이다. 이 말을 듣자 조는 “그 참 바보 같은 짓이었군”이라는 말이라도 하듯이 미소를 지었다. 그러자 나는 할머니께서 돌아가시게 되자 그녀의 장례식에는 여러 마일에 걸친 이웃의 모든 가난한 백성들이 운집하였으며 가문이 좋은 집안에서도 몇몇 사람들이 와서 그녀를 추념했는데 그것은 그녀가 하도 훌륭하고 경건한 분이셨기 때문이다. 훌륭하기로 말하자면 그녀는 시편(詩篇)을 모두 외우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성경의 상당히 많은 부분도 외우고 있을 정도였었다.[ ]. 이 말을 듣자 어린 앨리스가 놀란 표정을 지으며 두 손을 펼쳤다. 나는 또 애들에게 필드증조모께선 한창때에 키가 무척 크고 몸이 곱고 우아하게 생긴 분이었으며, 젊은 시절에는 가장 훌륭한 무용가로 존경받기도 했다는 말을 해 주었다. 그랬더니 앨리스의 작은 오른 발이 무의식적으로 움직이기 시작하다가 내가 무거운 표정으로 쳐다보자 그쳤다. 그녀는 실로 군에서도 가장 뛰어난 무용가였지만 암이라고 하는 몹쓸 병에 걸려서 고통 때문에 꺾이고 말았다. 하지만 그 병도 그녀의 그 훌륭한 기품만은 꺾지 못했었다. 그녀는 하도 훌륭하고 경건하였기 때문에 그녀의 그 기품은 언제나 꼿꼿했던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녀가 그 크고도 외로운 저택의 호젓한 방에서 혼자 잠을 자곤 하던 얘기랑, 한밤에 자기 침실 근처에 있는 커다란 계단에 두 명의 아이 유령이 미끄러지듯 오르내리는 것을 그녀가 보았으되 “그 철부지들이 내게 해를 끼치기야 할라구”라고 말하던 것도 얘들에게 들려주었다. 그 당시에 나는 아직도 하녀와 같이 자는 어린이였는데, 나는 피일드 할머니에 비해서 반만큼도 착하거나 경건하지 못했기 때문에 그 유령 얘기를 듣고 몹시 겁을 먹곤 했었다. 하지만 내가 그 아기 유령들을 본 일은 없었다. 여기서 존은 온통 눈살을 활짝 펴고 용기 있는 소년처럼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리고 나는 그분께서 휴일이면 손자들을 그 큰 저택으로 불러서 친절하게 대해 주시던 얘기도 해 주었다. 그 저택에 갔을 때 특히 나는 혼자서 로마의 황제들이었던 12명의 시이저들(역주: 줄리우스 시이저에서 도미티언에 이르는 황제들을 가리킴)의 그 오랜 흉상(胸像)들을 지켜보면서 여러 시간을 보내곤 했는데 그러다 보면 그 낡은 대리석 두상(頭像)들이 다시 살아나는 것 같거나 내가 대리석으로 변하여 그들처럼 되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기도 하였다. 나는 또 이 거대한 저택 속을 내가 이리 저리 해매고 다니던 얘기도 들려주었다. 그 넓고도 텅 빈 방이랑, 닳아빠진 벽걸이 천이랑, 펄럭이던 장식용 그림무늬 천이랑, 금박(金箔)이 거의 마멸되어 버린 그 장식용으로 조각된 참나무 널판자를 구경하며 다니다가 이따금 그 넓은 구식 정원을 지칠 줄 모르고 거닐기도 했는데 거기선 간혹 외로운 정원사(庭園師)를 볼 수 있었을 뿐 나밖에 아무도 없었다. 담에는 유도(油桃)니 복숭아니 하는 것들이 매달려 있었지만 나는 한두 번을 제외하고 이 금단의 과실에 손을 댄 적이 없었다. 내가 더욱 즐긴 것은 침울해 보이는 주목(朱木)이나 전나무 사이를 거닐며 그저 관상용일 뿐, 아무데도 쓸모가 없는 빨간 열매나 전나무 열매를 따던 일, 주위에서 향기로운 정원 냄새가 풍겨오는 가운데 싱그러운 풀밭에 누워서 뒹굴던 일, 귤을 재배하는 온실에서 따뜻한 햇볕을 쬐면서 그 포근한 온기(溫氣)속에서 내 자신도 귤이나 라임열매처럼 익어가고 있는 듯한 착각을 느끼던 일, 그리고 정원의 맨 아래쪽에 있던 연못에서 황어가 날쌔게 이리저리 해엄치고 있을 때, 이들이 까부는 꼴을 조롱이라도 하듯 연못 속에 가만히 떠있던 실죽한 곤들메기를 쳐다보던 일 따위였다. 아이들이란 일반적으로 복숭아니 유도(油桃)니 귤이니 하는 것 때문에 유혹을 받는 법이지만 나는 이런 달콤하고 향기로운 열매보다도 이와 같은 한가로우나 열띤 기분 전환 속에서 더 많은 즐거움을 찾고 있었던 것이다. 얘기가 여기에 이르자 존은 한송이의 포도를 약삭빠르게 접시위에 되돌려 놓았다. 그는 앨리스의 눈에 띄지 않을 수가 없어서 그녀와 그 송이를 나누어 먹으려고 했지만 하여간 당장에는 포도 따위가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하고 오누이는 그것을 내어놓았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약간 언성을 높여서 얘기를 계속하기를 피일드 증조모께서는 자기 손자들을 고루 사랑하셨지만 그 중에서도 특히 애들에게 큰아버지가 되는 존·L(역주: 존 램으로 찰스 램의 친형이었음)을 자별하게 사랑하셨더라는 말을 해주었다.[인정이나 노력 따위가 나보다 특별하다] 그렇게나 잘생기고 기개가 높은 청년으로서 우리 모두에게는 왕과 같은 존재였는데 우리들 중의 몇몇처럼 구석진 곳을 찾아 빌빌대는 일이 없었으며 애들 또래의 몸집 작은 개구쟁이 시절부터 벌써 근처에서 구할 수 있던 가장 사나운 말을 잡아타고 아침으로 온 고장을 돌아다니다시피 하였고 사냥꾼 들이 출렵하는 날이면 그들을 따라다니기도 하였다. 그분 또한 그 커다란 옛 저택과 정원을 좋아하긴 했으나 워낙 혈기가 왕성하여 그 좋은 울 속에만 늘 갇혀 있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이 큰 아버지께서는 잘 생긴 데 비하여 조금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용맹스런 성인(成人)으로 성장하여 모든 사람들의 찬탄을 샀지만 특히 피일드 조모님의 각별한 찬양을 받았었다. 또 내가 다리를 절고 있던 소년 시절에 그는 나보다도 여러 살 더 위였기 때문에 나를 업고 다니곤 했다. 그는 고통으로 말미암아 걷지 못하는 나를 업고 여러 마일을 돌아다녔다. 훗날 그도 또한 다리를 절게 되었지만, 그가 참을 수 없이 고통을 당하고 있을 때에도 나는 그의 처지를 조금도 참작하지 않았으며 내가 다리를 절던 시절에 그가 내게 얼마나 사려 깊게 대해 주었던 가를 조금도 기억하지 못하고 있었던 것이 아닐까. 지금 생각하니 미안하기만 하다. 그가 세상을 떠났을 때, 숨을 거둔 지 미처 한 시간도 되지 않았는데, 마치 그가 죽은 후 상당한 세월이 흐른 것처럼 느껴지곤 했었으니 참으로 삶과 죽음 사이에는 그만한 거리가 있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내가 그의 죽음을 꽤 잘 견디어냈다고 생각했지만 얼마 후에 그 죽음이 계속하여 내 마음 속에 떠오르곤 했다. 어떤 사람들은 형제의 죽음을 당해서 울며 애통해 하겠지만, 그리고 내 생각에 아마 내가 죽었더라면 그가 필경 그렇게 했으리라 생각되지만, 나는 결코 울거나 그의 죽음을 너무 애통해 하거나 하지는 않았다. 그러나 나는 온종일 그를 그리워했으며 그가 죽고 난 후에야 비로소 내가 그를 무척 사랑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그가 내게 친절히 대해주던 일이랑 내게 화를 내던 일이 그리워졌고, 그가 내 가까이에 없기 보다는 차라리 그가 되살아와서 나와 함께 싸움이라도 하고 있는 편이(우리는 이따금 싸우기도 했었다) 낫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애들의 이 가엾은 큰아버지께서는 의사가 그의 다리를 절단해 버렸을 때 몹시 애통했겠지만 그를 잃은 나 또한 그에 못지않게 마음이 아팠던 것이다. 얘기가 거기에 미치자 애들은 모두 울음보를 터뜨리고 말았다. 그들은 자기네가 입고 있던 그 작은 상복이 바로 존 큰아버지의 별세 때문이 아니냐고 물으면서 제발 큰아버지 얘길랑 그만 해 두고 돌아가신 그네들의 어여쁜 어머니에 대한 얘기나 들려달라고 졸랐다. 그래서 나는 7년이란 세월에 걸쳐서 더러는 희망에 쌓여, 더러는 절망한 채, 그러나 계속 끈기 있게 아름다운 앨리스·Wn(역주: 램의 첫사랑의 여인 앤 시몬즈를 가리키는 가명 앨리스 윈터튼임)에게 구애(求愛)하던 얘기를 들려주었다. 그리고 나서 나는 처녀들에게 있어서 수줍음이나 냉담함이나 거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애들이 이해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설명해 주었다. 그 때 문득 앨리스 쪽을 향하니까 앨리스 어머니의 영혼이 딸 앨리스의 눈을 통해 나타났는데 그것이 하도 생생하게 구현(具現)되었기 때문에 나는 앞에서 있는 것이 어머니와 딸 중의 어느 쪽인지 그리고 그 빛나는 머리카락이 누구 것인지를 분간 하지 못할 지경이 되었다. 내가 그 모습을 응시하고 있을 때 두 아이의 모습은 내 눈앞에서 점점 더 흐려지고 계속 뒤로 물러서는 듯하더니 결국은 저 멀리 서서 애도(哀悼)하고 있는 두 사람의 모습으로 보였는데 말없이 서 있던 그들의 자태는 이상하게도 언어의 효과를 가지고서 내게 감명을 주고 있는 것이었다. “우리는 앨리스의 아이가 아니요. 당신의 아이도 아니며 도대체 우리는 아이들이 아니란 말이요. 앨리스의 아이들은 바아트럼이란 사람[램의 첫 애인 앤 시먼스 남편]을 아버지라고 부르고 있소. 우리는 아무것도 아니요. 아무것도 아닌 것에도 미치지 못하며 꿈일 뿐이요. 우리는 어쩌면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르는 어떤 가능성의 소산(所産)[개연성: 그러나 내 집 안 일이나 사사일즉 사실의 소재가 구성 작업을 거쳐서 문학화-상상력화-된 뒤에는 더 이상 사실의 세계와 1:1의 관계가 아니다. 개연성(蓋然性, probability)의 세계, 즉 상상력의 이야기가 된다. 이 이론은 아리스토텔레스의 플롯론에서부터 시작된 가장 오래된 창작론이다.(참고: 󰡔소설의 양상󰡕 E.M. 포스터) ]에 불과[사실이 아님]하며 우리가 실제로 태어나서 이름을 갖자면 억만 년 동안 망각의 강[레테의 강그리스 신화의 망각의 강죽어서 영혼이 강물을 마시면 생존 시의 모든 것을 다 잊는다고 함]가에서 지루하게 기다리고 있어야 할 것이요.” 이 말을 듣고 곧 잠을 깨니[이전은 꿈속의 일 즉 <창작수필>의 허구적 사실의 소재 형식 <수필>사실의 소재 형식총각 신세인 내가[수필로 돌아가기(꿈속의 세계현실의 세계) 사실의 소재 세계.] 알락의자에 조용히 앉아있는 것이 아닌가. 의자에서 내가 잠이 들어버렸던 모양이었다. 충실한 브리지트는[램의 누님인 메리 램을 말함램은 정신 질환으로 인해 독신으로 살았던 그녀를 평생 돌보면서 자신도 독신으로 살았음] 이전 모습대로 내 시중을 들고 있었지만 존·L(일명 제임스 엘리아)만이 영영 세상을 떠나고 없었다.(200자 원고지 28.1현재의 창작수필 신인문학상 공모 10: 수필의 창작적 변모 양상) (찰스 램 저 / 이상옥 역: 범우에세이선51, 『엘리아 수필선』, 범우사, 1982)에서 요약 발췌.

 

주1) 󰡔숲속의 아이들󰡕: the children in the wood: 1595년 경에 쓰인 것으로 토머스 퍼시 의 작. 어린조카 남매에게 남겨진 유산을 탐낸 삼촌이 불량배를 시켜 그들을 없앤다.사주받은 불량배 중 한 사람이 회개하여 다른 불량배를 죽이고 아이들을 숲 속에 버린다. 숲속을 헤매다가 아이들은 죽고, 그들의 방울새들이 나뭇잎은 물어다 덮어주었다는 내용이다.

주2) 웨스트 민스터 사원: 런던에 있는 중세 사원저명 인사들이 묻힌 묘역이 있음.

 

[참고 사항]

1. 찰스 램은 7남매 중 막내. 형 존과 누이 메어리만이 생존. 호스피털 학교에서 7년간 재학, 친구 낭만파 시인으로 이름을 날린 S·T·코올리지.

2. 학우 중의 한 사람: “정답고 점잖은 아주 민감하고 관찰력이 예리했다.”

3. 타고나면서부터 말을 더듬다-성직자의 길을 포기.

4. 집이 가난: 1792∼1825. 인도 동인도 회사에서 1825년, 은퇴시까지 근무.

5. 그는 친구 S·T·코올리지 영향, 외조모 필드 부인이 가정부로 있던 허어트포트셔의 어떤 저택에서 휴가를 보내곤 했는데, 거기서 그는 「꿈에 본 아이들」과 같은 수필 속에서 그가 앨리스 원터튼이라 부른 바 있는 여인을 만났다. 또 이 무렵에 그는 정신착란증을 일으켜서 6주 동안 병원에 입원. 집안의 혈통 속에 흐르고 있던 정신증이라는 저주가 일생을 통해 그에게 어두운 그림자를 던지고 있었음.

6. 1796.9.22. 광기로 인한 불행한 가정의 비극. 누이 메어리가 심한 발작, 어머니를 단도로 찔러 죽이고, 부친에게 상처를 입힘. 메어리는 법정에서 무죄 판정-평생동안 정신증의 발작을 두려워하며 살아야 했음.

7. 1797. 부친 별세하자 램은 누이의 간호를 위해 일생을 바치기로 결심. 그 결과 경제적 빈곤과 정신적 불안의 상태에서 한 순간도 해방을 맛보지 못함. 역설적으로나마 빈곤을 예찬한 「오래된 도자기」 같은 수필은 그가 겪었던 궁핍의 상태를 감상적으로 회고한 글.

8. 램으로 하여금 영문학사에 있어서 불멸의 위치를 차지하게 한 계기는 1820년에 그가 엘리아(Elia)라는 필명으로 ≪런던 매거진≫誌에 수필을 기고하기 시작함으로써 이루어졌다. 1823년에 󰡔에리아 수필집(Essays of Elia이 출판되자 당대의 낭만파 시인이던 사우디는 “이 수필에 보다 건전한 종교적 감정이 곁들여 있었던들 글의 독창성에 못지않는 즐거움을 주었을 것”이라고 평했다.

9. 1833년 코올리지가 세상을 떠나자 큰 충격을 받음. 이듬해 그는 가벼운 낙상을 입은 끝에 병을 얻어 12월 27일에 세상을 떠났으니 그해 그의 나이 57세.

10. 누이를 간호, 후세의 비평가나 전기 작가들은 누이를 위한 그의 영웅적 헌신을 찬양. 누이의 간호에 몰두, 자신의 결혼 따위는 생각도 못함. 그의 성격의 유일한 결함은 음주벽, 그가 겪어나가야 했던 정신적 긴장 상태.

11. 그의 수필 속에는 생활인의 예지가 번득이고 있으며 거의 모든 수필의 기조는 인간성에 대한 열렬한 탐구와 영원한 동경이다.

12. 램의 수필들은 우리들에게 정통적인 영국수필의 면모를 엿볼 수 있게 해 준다. 「꿈에 본 아이들―하나의 환상」은 안락의자에 앉은 채 깜박 잠이든 저자가 꿈에 본 이이들에 대한 얘기다. 평생을 독신으로 지낸 그가 꿈에 엘리스 위터튼이라는 첫사랑의 여인과 자기가 결혼했었으며, 거기서 난 애들에게 옛 이야기를 해 주었다는 것이 이 수필의 줄거리다. 그래서 이 글은 마치 자서전적 소설에 나올법한 환상적 회고의 한 토막을 연상시킨다.

13. 꿈의 주인공은 실명 그대로 등장하는 외조모 필드 부인이랑, 그녀가 가정부로 관리하던 시골의 어느 대저택이랑, 자기 형 존에 대한 우애 어린 회상을 하는데 수필의 끝 부분에 이르러 이야기가 극적인 역전을 해서야 비로소 독자들은 그것이 어쩌면 그렇게 되었을 지도 모르는 어떤 가능성의 소산에 불과 했다는 것을 알게 된다.

14. 그의 수필은 환상적인 세계에서 신비(神秘)의 안개를 피우기도 한다. 슬픔 속에서 행복 같은 것을 맛보아야 했다. 웃음 속에서 비애(哀愁)를 느껴야 했다.

15. <창작 문학>의 세계는 사실의 세계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다. 상상력의 세계니 비현실 세계다. 그러므로 문학화란 소재의 비현실화를 의미하게 된다. → 사실의 소재를 문학화, 상상력의 세계화, 창작문학화 시키는 본질적인 방법이 창작적 구성 방법이다. → 작품화란 한마디로 문학화를 의미하고 문학화란 소재의 비현실화를 의미하고, 소재의 비현실화란 사실의 소재를 상상력의 세계로 만드는 것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문학이란 본질상 상상력의 소재이기 때문이다. 문학은 왜 상상력의 세계일 수밖에 없는가? 인간은 신적 창조를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신적 창조란 사실적 창조.문학적 창조란 신적 창조가 아닌 인간이 상상력 속에서 할 수 있는 창조를 의미한다. 즉 사실적 창조가 아닌 상상력의 세계에서의 상상적 창조인 것이다.

→사실의 소재를 작품화, 문학화, 상상력의 세계화시킨다는 것은 ‘사실의 세계’를 ‘상상력의 세계’로 만든다는 뜻이다.

 

16. 소재의 출처는 주관적 경험에 있다. 그러므로 소재가 소재 상태로 있는 동안은 주관적 경험의 현실적 세계일 수밖에 없는 것이다.

 

17. 「꿈속의 이이들」, 「고도자기」―빈곤 예찬 이야기, 모든 문학은 이야기― 들과 같은 작품이 있었음으로써 찰스 램인 것이다. 아무리 대가의 글이라 하여도 배울 것은 그 대표작에 있다.[모델이 있어야]

(찰스 램 저 / 이상옥 역: 범우에세이선51, 『엘리아 수필선』, 범우사, 1982)에서 요약 발췌함.

 

☞ 몽테뉴: 고전 인용

☞ 찰스 램: 이야기·서사

 

☞ 백일몽(白日夢)  대낮에 꿈을 꾼다는 뜻으로,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공상을 이르는 말. 백일(白日): 환히 밝은 낮.

☞ “가장 독창적이고, 참신하고, 개성 있는 수필가의 시선은 대상을 응시하는 눈과 대상이 말하는 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갖는다. 소리를 보고 빛을 듣는 관음(觀音)의 길이 곧 수필의 길임을 깨닫는다(유병근)

 

18. 「백일몽」 백일몽에 대한 국어사전의 뜻풀이는 ‘실현될 수 없는 헛된 공상’이다. 찰스 램은 백일몽의 부제가 달린 「꿈속의 이이들」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첫사랑이었던 여자와 아이 둘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꿈을 꾼다. 아들에게는 자신이 좋아했던 형의 이름을, 딸에게는 첫사랑 아내의 이름을 붙여주고 저녁이면 아비의 발 앞으로 모여 앉은 아이들에게 증조부나 할머니, 커다란 저택과 정원, 고향이나 축제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그러나 어느 순간 사랑스런 아이들은 슬픈 눈으로 차츰 멀어져가고 안타까움에 마음이 아파질 무렵, 그는 자신이 몸을 기대고 잠들었던 독신자의 안락의자에서 그만 잠을 깨고 만다. 헛된 공상이 사라진 자리에는 정신병으로 어머니를 칼로 찔러 죽인 누이가 의자 옆을 지키고, 램은 그 누이를 보살피며 사는 변함없는 현실로 돌아오게 된다.(장재연 소설집, 󰡔‘찰스 램’을 일는 시간󰡕에서)

 

19. 액자 구성법(고저문학의 수미쌍관법): 창작에세이도 소설적 허구 창작에 제한을 두지 않는다. 소설적 허구 부분에 대해서는 ‘액자구성법’ 등의 문학적 장치를 해야 된다는 것이 창작에세이의 작법이다. 수필을 수필이라는 이름으로 그 장르적 특성을 구분하고 있는 문학 이론적 근거는 수필은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양식의 문학이라는 데에 있다. 이 점이 수필문학이라는 것의 본질이고, 존재 양식이고 존재 이유다.

“사실의 소재 자체를 작품의 제재로 삼는 태생적 본질을 타고난 에세이(수필) 문학이 찰스 램을 거쳐서 오늘에 이르는 동안 소설적 허구는 물론 사물과의 감성의 상상력 세계 창작이라는 허구 창작을 하는 창작에세이로 진화하게 되었다.”(이효정: 「차마 돌아섰던 발길」(선집1, 2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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