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김미환

빼앗긴 들에도 봄은 다시 오고

작성자김미환|작성시간26.06.09|조회수20 목록 댓글 0

빼앗긴 들에도 봄은 다시 오고

 

 

   “주문, 피청구인 대통령 윤석열을 파면한다.”

   “와! 파면이다!”

   “대한민국 만세!”

 

   2025년 4월 4일 11시 22분. 대한민국의 새 역사가 또 한 페이지 작성되는 순간이었다. 정기진료차 안과에 와서 순번을 기다리며 대기실의 TV 앞에 앉아서 탄핵 최종 판결 실황을 시청하고 있었다.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9개 병실 전체가 판결문을 낭독하는 20 여분 동안은 잠시 휴무 시간을 갖기로 환자 및 내원객들과 사전에 합의가 된 상태였다. 주치의, 간호사, 검사원, 환자 등 수십 명이 대기실에 모여 숨죽인 채 TV를 지켜보던 중, 파면 선고가 떨어지자마자 여기저기서 일제히 탄성이 터져 나왔다. 서로 얼싸안고 기쁨을 나누기도 하고, 눈물을 흘리며 감격해하는 이들도 있었다.

 

   나는 애초부터 100% 탄핵이 인용될 거라고 확신해 왔던 터라 소리를 지를 정도로 놀라지는 않았었다. 그렇지만 확정판결이 나올 때까지는 불안하고 긴장되는 마음을 숨길 수 없었다. 피청구인과 변호인들이 제아무리 핑계를 대고 변명과 거짓 진술을 늘어놓더라도, 진실은 반드시 밝혀지기 마련이고 정의는 결국 승리하리라 믿었기 때문이다. 이 당연한 말 한마디를 꺼내기까지 112일이라는 시간이 흘렀고, 애꿎은 시민들은 123일 동안이나 불면의 밤을 보내야 했다.

 

   유난히 춥고 긴 겨울이었다. 한파가 몰아친 12월의 여의도 국회 앞과 함박눈이 쏟아지던 1월의 한남동 관저 앞, 또한 칼바람 불어대던 2월의 경복궁 앞과 꽃샘추위가 기승을 부리던 3월의 헌법재판소 앞까지, 시민들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내란 수괴의 탄핵과 파면을 외치며 성난 파도처럼 모여들었다. 그리고 눈보라 휘몰아치는 광장의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서 은박 담요 한 장을 몸에 두른 채 인간 키세스가 되어, 하얀 밤을 지새우며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를 부르짖었다. “무 살생, 비폭력은 가장 위대한 사랑이고 최상의 법칙이며 인류를 구하는 유일한 길”이라고 마하트마 간디가 말했듯이, 촛불을 대신한 ‘응원봉’과 ‘선결제’라는 신개념 집회 문화의 등장과 함께, 축제처럼 즐기며 비폭력 저항으로 맞서나갔다.

 

   상식과 법의 테두리를 벗어난 행동이 어이없는 왜곡과 조작으로 부인되고, 불법과 폭력을 비호하고 궤변으로 선동하여 국민을 극한 대립과 혼란 속으로 빠뜨렸다. 거짓과 기만을 의견의 차이인 양 교묘하게 포장해서 퍼뜨려, 온갖 억측과 가짜뉴스가 난무하며 사회적 불안과 불신은 커져만 갔다. 그야말로 춘래불사춘이었다. 계절상으로는 분명 봄이 왔으나, 시국은 외려 꽁꽁 얼어붙고 어수선하여 도통 풀릴 기미가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그렇게 지루하고 애타게 선고를 미뤄왔던 헌재가 오늘 명쾌하고 단호하게 전원일치의 파면 판결을 내림으로써, 마침내 탄핵 심판에 종지부를 찍었다. 깨어있는 시민들의 조직된 힘과 행동하는 양심이 헌정 질서를 회복했고, 도전받던 민주주의를 지켜냈다. 헌법의 적을 헌법으로 물리친 것이다.

 

   오늘은 대한민국 민주주의의 강한 생명력이 다시 한번 확인된 날이었다. 어둠의 세력을 몰아내고 내란의 겨울을 이겨냄으로써 놀라운 민주주의의 회복력을 보여주었다. 썩어 자빠져가는 고목에서 한 떨기의 성스러운 민주화民主花를 피워내기 위해, 위대한 시민들은 살을 에는 듯한 맹추위와 폭설 속에서도 백스무 사흘간을 버텨낸 것이다. 이번 파면으로 대한민국은 21세기 새로운 민주주의의 전범을 보여주었으며, 자유민주주의 국가들에 깊은 영감을 주기에 충분했다. 또한 역사는 때때로 곁길로 새기도 하지만,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는다는 진실을 다시 한번 입증시켜 주는 날이기도 했다. “과거가 현재를 돕고, 죽은 자가 산 자를 구한다”라고 했던 한강 작가의 말처럼, 이번 파면은 4·19 혁명과 5·18 광주민주화운동, 6·10 민주항쟁 등 한국 민주화 투쟁의 역사가 원동력이었음을 다시 한번 확인할 수 있었다.

 

   돌이켜보면 한바탕 북풍한설이었다. 해가 바뀌고 입춘이 지나고 춘분이 지나도록, 탄핵 찬반 집회는 쉽게 잦아들지 않았다. 급기야 꽃샘바람까지 이어지도록, 차갑고 어지러운 광풍은 넉 달 동안 지속되었다. 그렇게 마음졸이며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봄기운이 무르익고 하늘이 맑아진다는 청명淸明을 맞이한 오늘, 비로소 겨울 공화국에서 민주공화국의 봄을 되찾았다. 빼앗길 줄 알았던 들에 봄이 다시 온 것이다. 하늘은 맑아졌지만, 그 맑음은 결코 저절로 온 것이 아니었다. 수백만 애국시민들의 투쟁과 기다림, 그리고 포기하지 않은 신념의 결과였다.

 

   연분홍 꽃구름 타고 곱디고운 숨결로 일렁이는 벚꽃 숲 사이를 박차고 날아오르는 종다리의 노랫소리가, 감미로운 환희와 함께 창공으로 여울져가는 사월이다. 민주주의 최후의 보루로서 빛의 광장을 굳건히 지켜냈던 민중의 힘으로 빼앗긴 들에서 기어이 되찾은 사월의 봄. 사월은 갈아엎는 달이고 일어서는 달이라 했던가. 이젠 극심해진 사회 분열과 갈등의 벽을 송두리째 갈아엎고, 국민 통합과 사회 안정을 추구하는 민주 헌정 회복의 씨앗을 뿌리고 가꿔나가야 할 때다. 머잖아 황금물결로 넘실거릴 약속의 땅에, 천지개벽을 불러올 대변혁의 서곡이 울려 퍼져나가길 기원하면서…….

 

   계절의 봄은 스스로 찾아오지만, 역사의 봄은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 갈 때 찬란한 우리 인생의 봄도 우리가 꿈꾸는 세상도, 반드시 우리 곁으로 다가올지니. 해가 지는 것을 보려면​​​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해가 지는 쪽으로 가라고 했다. 바람개비도 잘 돌아가려면 바람이 불 때까지 기다리지 말고, 바람이 불어오는 쪽을 향하여 힘차게 달려가야 하지 않을까.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