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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개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왕상18:20-24절)

작성자백두-바나바|작성시간08.11.15|조회수26 목록 댓글 0

회개의 기회를 주신 하나님.
왕상18:20-24절, 184.487.332장.&

“아합” 왕은 지력으로는 솔로몬 왕을 견줄 만 했고 권력에 있어서도 그를 능가할 정도로 상당한 군사 전문가요 탁월한 정치 지도력을 지닌 뛰어난 왕이었습니다. 그는 22년간 왕위에 있으면서 이스라엘을 상당히 부강한 나라로 만들었던 것입니다.

그러므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런 왕의 통치에 별로 불만이 없었습니다. 그가 비록 바알 신앙을 끌어들여 바알 신당을 짓기는 하였지만 백성들은 그것을 크게 문제 삼지 않았습니다. 왜냐하면 그 어느 때보다 정치적으로 안정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아합 왕의 정치적인 공적을 크게 평가한 백성들은 왕이 선택한 종교 바알 숭배에 대해 크게 문제를 삼지를 아니했습니다. 이에 바알신을 도입한 “이세벨“의 횡포가 날로 극심해졌어도 거기에 대해 민감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이렇게 되자 바알 신앙이 이스라엘 사람들의

정신을 좀먹고 마비시킴으로 저들은 도덕적으로 점점 더 타락하였고 사회적 부정이 판을 치게 되었으며 '모세'의 율법으로 엄히 경계했음에도 불구하고 권력의 남용이 자행되어 왕권이 백성 위에 군림하게 되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국가 안보를 위해 자기들의 자유와

인권 그리고 신앙과 양심을 모두 내어 주고 말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둔감해진 양심의 온상 위에 이세벨의 횡포는 독버섯처럼 자라기 시작한 것입니다. 이에 이세벨은 하나님의 선지자들을 잡아 가두고 박해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많은 선지자들이 투옥되었고 박해를 피하여 숨은 자도 적지 않았습니다.

이제는 누가 나서서 바알 신앙을 비판하고 이스라엘 신앙을 회복하자고 외칠 자가 없을 때 흘연히 나타난 자가 있으니 그는 '엘리야'였습니다. 이에 그는 그 땅에 3년 6개월간 비가 오지 않을 것을 선포하고 바알이 풍년을 가져오는 것이 아님을 저들에게 알려 주려고,

바알 선지 450명, 아세라 선지 400명, 도합 850명 대 하나님의 선지자 한 사람이 참 신과 거짓 신을 가리는 대결을 벌이기로 한 것입니다. 이같이 제의하니 아스라엘 신앙을 가지고 있던 자들이 바알 신을 믿을까 하나님을 믿을까 하면서 머뭇머뭇 거리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엘리야가 머뭇거리는 자들에게 태도가 분명하라고 경고했습니다.

1.어느 편에 설 것인지 결단을 내리라는 것입니다. 인간들은 거슬러 올라가면 에덴동산에 서부터 두 갈래 길에 서 있습니다. 하나님의 명령을 좇는 길과 마귀의 유혹에 따르는 길 이 두 길 사이에서 우리는 항상 선택하며 살지 않을 수 없습니다.

신11:26절에 보면 "내가 오늘날 복과 저주를 너희 앞에 두나니" 했습니다. 그러나 선택의 길이 그렇게 쉬운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은 보이지 않는 이상이요 마귀의 유혹은 현실로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이상과 현실 속에서 사람들은 현실로 나타나기 마련입니다.

예수님은 그런 현상을 좁은 길과 넓은 길로 표현했습니다. 넓은 길은 당장 좋게 보여 지지만 그 길은 멸망의 길이라고 했습니다. 엘리야가 하나님 앞에 하나님을 섬기는 자는 자기만 남았다고 호소했습니다. 엘리야가 자기만 남았다고 느낄 정도로 그 사회는 다 바알에게 기울여져 있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한 사람 7천명을 남겨 두었다고 그에게 알려 주셨습니다. 그러나 이스라엘 전체 인구에 비할 때 7천명이란 지극히 적은 수에 불과합니다. 하나님과 마귀, 참과 거짓, 빛과 어두움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설 것인가? 이렇게 물을 때,

우리는 누구나 하나님과 진리 편에 선다고 분명하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의 현실 속에서는 우리가 선택한 그 길을 따라 살지 못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고난과 고통이 따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하나님과 진리 편에 담대히 설 수 있도록 하나님께 기도하며 주저하지 말고 선택한 그 길로 담대하게 나아가시기를 바랍니다.

2.태도를 분명히 해야 합니다. 1)여호와냐? 바알이냐? 여호와 하나님은 “ 아브라함” 때부터 섬겨온 하나님이요 “모세”가 확립한 유일신 종교입니다. 그러면 바알은 어떤 신입니까? 바알이란 “주인”, “소유자”란 뜻을 가진 농경의 신으로, 풍년을 비는 신이요,

풍년을 축하하는 예배가 뒤따르는 신입니다. 여기 여호와가 참 신인가? 바알이 참 신인가? 하는 문제는 한 지방에서 섬겨오던 농경신이 아니라 농경 사회를 지배하시는 유일신 하나님을 선택하는 일에는 재론할 여지가 없는 것입니다.

한데 당시의 정치적 권력 밑에서 바알 신을 참 신이라고 강요하므로 바알 신을 선택하기도 했습니다. 바알신이 참 신이 아니라고 말하면 핍박을 받아야 했고 일자리까지 잃게 되는 두려움이 뒤따랐습니다. 이러한 공포감과 여호와의 신앙이 확신이 없다 보니 머뭇머뭇 거리는 자들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나의 신앙이 분명하여 어떠한 곳에 있든지 간에 여호와가 참 신인 것을 분명히 알아야 할 것입니다. 2)정의냐? 불의냐? 정의와 불의가 분명하다면 누가 정의를 버리고 불의를 따르겠습니까? 엘리야가 정의로만 보이고 아합이 불의하게 보이면 백성이

악하고 어리석다 하여도 아합을 따르는 사람이 많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아합 편에서 바알을 따르는 것이 옳은 일이라고 선전하고 권력으로 억압을 하다보니 어리석은 민중들이 아합을 옳다 하고 따른 것입니다. 아합 시대에 정의를 따르는 사람은 오직 엘리야 한 사람뿐입니다.

먹기 위해 아합을 따르고, 살기 위해 이세벨을 따르니, 여호와 하나님을 따르는 사람은 엘리야 한 사람뿐이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이럴까 저럴까 우왕좌왕 했기 때문에 엘리야는 "너희가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거리겠느냐"고 하면서 그들에게 결단을 촉구했던 것입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거리겠느냐."고 재촉한 것은 정의냐 불의냐의 두 사이에서 오랫동안 결단을 내리지 못하고 있기 때문에 재촉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러나 성도 여러분! 우리는 정의에 서야 합니다. 주님이 이것을 요구하시기 때문입니다.

3.하나님만 의지하라는 것입니다. 엘리야가 불의 응답을 받은 것은 그에게 어떤 특별한 능 력이 있어서가 아닙니다. 첫째, 그가 응답을 받은 비결은 하나님과 은밀한 교통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는 하나님과 은밀한 교통을 항상 갖는 사람이며 그런 사람에게는,

반드시 하나님이 함께 하시어서 능력을 나타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얼마나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는지를 항상 살펴보아야 합니다. 하나님과 기도로써 은밀히 교제하지 않는 자는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것입니다.

둘째, 갈멜산의 사건에서 볼 수 있는 엘리야의 태도는 그가 하나님을 단순히 믿었다는 데에서 그 탁월성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 우편에서 있는 사람이 자기 외에는 아무도 없었다는 사실을 생각해 볼 때 인간으로서 실망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하지만 엘리야는 실망하지 않고 하나님을 단순히 믿었다는 그 위대성이 있습니다. 엘리야가 이와 같이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하나님이 어떠한 분이신가를 알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유일하신 참 신이시며 능치 못한 일이 전혀 없는 전능 자이심을 단순하게 믿었기 때문에 기적이 일어났던 것입니다.

4.참신 하나님을 시인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사람 엘리야는 아합 왕의 횡포와 탄압에 도전 하며 갈멜산에서 제단을 쌓고 참 신이 누구인가를 대결하자고 했습니다. 그리고 제단들을 쌓고 그 위에 각기 제물을 올려놓고 각기 그들이 섬기는 심의 이름을 불러 기도를 할 때,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제단이 참 신의 제단으로 간주하자고 제의하였습니다. 이에 바알 숭배자들이 제의에 응하여 자기들이 먼저 제사를 드리기로 했습니다. 이에 그들은 소를 잡아서 그 위에 올려놓고 그들의 주문을 외워 기도를 했습니다.

아침부터 저녁때까지 큰 소리로 고함을 지르며 "바알이여바알이여 우리에게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하였으나 아무런 응답이 없는 저들은 불안과 초조가 가중되었고, 엘리야는 옆에서 조롱하기를 "너희 신이 잠들었는가 보니 크게 소리 질러라. 혹은 출타해서 응답이 없는가?"라고,

저들의 정성에 자극을 주니 나중에는 칼로 자기네 몸을 상하여 피를 철철 흘리며 광적(狂的)으로 떠들어대도 불은 고사하고 연기도 없었습니다. 이에 저들은 맥없이 물러가고 엘리야의 차례가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제단을 수축하되 열두 돌을 취하여 쌓고 나무를 벌리고,

송아지를 잡아 각을 떠서 그 위에 놓고 단 주위로 도랑을 파고 그 귀한 물을 구해다가 네 통에 채워 세 번 부어 제물과 나무를 적시고 도랑에 가득하게 물을 채웠습니다. 준비가 완료되자 엘리야는 기도하기를 "아브라함과 이삭과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여 주께서 이스라엘 중에서,

하나님이 되심과 내가 주의 종이 됨과 내가 주의 말씀대로 이 모든 일을 행하는 것을 오늘날 알게 하옵소서.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으로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저희의 마음으로 돌이키게 하시는 것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흙과 돌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까지 태웠습니다. 이로써 그들이 참신이 누구인가를 그들도 알게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도 우리의 주위에서 일상생활에 참 신이 되신 하나님을 삼아서 역사하심을 보이며 증거를 해야 할 것입니다.

5.바른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옳은 것은 옳다 아닌 것은 아니라 하라" (마5:37)고 했습니다. 이 말은 옳게 분별하여 분명한 태도를 가지라는 뜻입니다. 창세기 27장에서 '이삭'은 '에서'인 줄을 알고 동생인 '야곱'에게 장자의 축복을 했고 그 결과 형제간에 원수 같이 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29장에는 야곱이 “라헬”인 줄 알고 신방에서 하루를 자고 나니,“레아”(라헬의 언니)였습니다. 그래서 본의 아닌 첩을 얻었고 가정의 불화가 그칠 날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삭“의 경우는 먹고 싶은 욕망 때문에 저지른 실수였고 ”야곱“의 경우는 사랑의 욕망이 지나친 데서 온 실수였습니다.

우리는 아무리 급해도 확인할 것은 확인하고 가릴 것은 가려야 하는 것입니다. 특히 내 육신이나 영혼 문제에 있어서는 더욱 심사숙고해야 합니다. "너희가 어느 때까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려느냐" 이것은 바른 선택을 하라는 내용입니다. 왼편도 아니고 오른편도 아닌 중간에서,

머뭇거리지 말고 자신의 진로를 선택하라는 독촉입니다. 상식적인 안목으로 볼 때 이 대결은 어리석은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이쪽은 엘리야 한 명이요, 우상을 섬기는 쪽은 바알의 선지자 450명과 아세라의 선지자 400명으로 합해서 850명이나 됩니다.

그리고 그 뒤에는 왕후의 막강한 권력이 도사리고 있습니다. 신앙을 가졌던 자들이었지만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신앙의 사람 엘리야는 1대 850이었지만 승리를 했습니다. 결정한다는 것은 불필요한 것을 잘라내어 버린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취한다는 태도가 아니라 더 나은 편을 선택한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는 '마리야'는 말씀을 듣지 않고 열심히 예수님과 봉사하려는 '마르다'보다 더 좋은 편을 택하였다는 칭찬을 들었습니다. '롯'의 아내는 바른 선택력이 부족했습니다.

불타고 있는 소유물에 애착을 두었다가 천하보다 더 귀한 자기 생명을 잃어버렸습니다. 끊어버려야 할 것을 단호히 끊지 못하였기 때문입니다. 결정할 때 결정을 내리지 못하면 어리석은 자가 되어 버리고 맙니다. 모세는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은 능욕을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도 더 큰 재물로 여겼던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신자들 가운데서 저주하는 자들이 많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주저하는 것에 대하여서 본문의 말씀에 아합 왕과 이세벨은 바알 신을 참 신이라고 전파하고, 엘리야는 여호와를 참 신이라고 전파하는 데 모든 민족은 바알과 여호와 두 사이에서 머뭇머뭇 하면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주저하여 패망을 자초했음을 유의하여 이제 우리들은 바른 선택을 하여 패망이 아니라 금생의 축복과 내세의 영생을 얻어야 할 것입니다.

6.하나님보다 인간을 두려워해서 머뭇거린 것입니다.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신앙 상태 를 살펴보면 그들은 아합 왕의 강압적 우상 숭배 정책에 눌린 나머지 여호와 신앙을 고수하지도, 그렇다고 내팽개치지도 못하는 어정쩡한 상태에 있었습니다.

즉 그들이 머뭇거린 중요한 이유는 인간 아합을 두려워했기 때문입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보다 사람을 두려워할 때, 사람들의 비난을 받는 대상이 될까봐 죄악의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한 마디로 이들은 영적인 겁쟁이들입니다.

또한 이들은 다른 사람의 손가락질 받는 것을 두려워 하다가 결국엔 지옥으로 가야 하는 답답한 사람들입니다. 여기 본문에 나오는 엘리야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여호수아도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수 24:15)고 고백하여 인간보다는 하나님을 두려워했습니다. 옳습니다.

이들은 인간의 제한적인 권세나 폭정을 두려워하기보다는 역사의 주관자, 천지의 창조자이신 하나님을 마땅히 두려워함으로 바른 신앙을 정립한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엘리야와 여호수아를 본받아 몸은 죽여도 영혼을 죽이지 못하는 인간보다는 오직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에 멸하시는 자를 두려워하는(마 10:28). 담대한 신앙의 소유자가 되어야 하겠습니다.

7.내일이 있다는 생각으로 머뭇거리지 말라는 것입니다. 보통 사람들은 오늘의 고달픔을 내일의 희망 속에서 위안 받으려 합니다. 즉 '내일이 되면 괜찮아지겠지'라고 생각합니다. 마찬가지로 이스라엘 백성들도 아합의 우상 숭배 정책 속에서도 언젠가 다시 자유스럽게,

여호와를 섬기는 날이 올 것이라 여기며 오늘의 결단을 유보했을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내일이 있다고 믿기에 머뭇거립니다. 그러나 그것이 얼마나 어리석은 믿음인지 성경은 잘 전하고 있습니다. 인생은 잠깐 보이다 없어지는 안개 같고(약 4:4), 들의 풀 같다고 했습니다.(시103:15).

많은 재물을 모아 놓고 내일부터 평안히 살아보려 했던 어리석은 부자에게 주님은 "오늘밤 네 영혼을 데려가면 네 재물이 뉘 것이 되겠느냐"고 질문하셨습니다.(눅12:20).어리석은 다섯 처녀처럼 시간이 있다고 믿었다가 어느새 밤이 찾아오고(마 25:3-10), 생각지 않은 때에(눅 12:40),

도적 같이(살전 5:12), 주의 날이 임할 것입니다. 그리고 일단 문이 닫히며 열리지 않고 "나는 너희가 어디로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눅 13:25)는 음성만 들릴 뿐입니다.
내일이면 시기가 지난 것입니다. 오늘 어떠한 문제가 있다 하더라도 지금 당장 하나님을 선택해야 합니다.

머뭇머뭇 거리던 백성들은 망했으나 혼자라도 하나님 편에서 담대하게 신앙을 지키던 엘리야는 승리하여 바알 선지자, 아세라 선지자 850명을 “기손강”에서 멸망시키었던 것입니다.

8.말씀을 정리합니다. 세상과 하나님 사이에서 머뭇머뭇하고 있는 사람들을 향하여 야고보 사도는 약4:4절에 "누구든지 세상과 벗이 되고자 하는 자는 스스로 하나님과 원수 되게 하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과 세상 안락, 하나님과 재물을 동시에 섬기려는 위험한 생각도 다 버리십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영광만을 위하여 끊을 것은 끊고 버릴 것은 버려서 거룩한 성도의 생애로 일관하여 나아가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축복과 저주는 항상 여러분 앞에 놓여 있습니다. 육신의 이성을 좇아 선택하면 저주요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아 선택하면 축복입니다.

하나님의 계시의 말씀인 성경 말씀을 매일 읽고 묵상함으로 성령님의 인도하심을 받아 하나님의 합당 뜻에 순종함으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이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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