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6일 미움이 아니라 다름
어제에 이어 오늘도 이웃을 사랑하라는 예수님 말씀을 듣는다. “‘네 이웃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네 원수는 미워해야 한다.’고 이르신 말씀을 너희는 들었다. 그러나 나는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는 원수를 사랑하여라. 그리고 너희를 박해하는 자들을 위하여 기도하여라.”(마태 5,43-44) 이웃과 원수에 관한 말씀은 레위기 이 말씀을 인용하신 거 같다. “너희는 마음속으로 형제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동족의 잘못을 서슴없이 꾸짖어야 한다. 그래야 너희가 그 사람 때문에 죄를 짊어지지 않는다. 너희는 동포에게 앙갚음하거나 앙심을 품어서는 안 된다.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나는 주님이다.”(레위 19,17-18)
그런데 레위기뿐만 아니라 구약 성경 전체에 ‘원수를 미워하라.’ 하는 계명은 없다고 한다. 예수님이 성경을 안 읽어 보고 그렇게 말씀하셨을까? 성경이나 율법을 잘못 해석하셨다기보다는 이웃과 원수에 대한 사람들의 일반적인 생각과 마음 태도를 말씀하셨던 거 같다. 이웃은 서로 잘 지내고 도와주고 사랑해야 하는 사람이고, 원수는 미워하고 적대하는 사람인 거다. 원수는 본래 미워하는, 아니 미워해야 하는 사람인 거다. 오죽하면 집안의 원수, 즉 그 미움을 대물림까지 하는, 꼭 지켜야 하는 무슨 큰 계명처럼 돼버렸을까.
예수님은 사람들의 그런 일반적인 생각에 정면으로 도전하신다. 특히 하느님의 자녀는 그러면 안 된다고 가르치신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미워하면 안 된다. 오직 사랑만 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시기 때문이고, 사랑만이 영원하기 때문이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지 잘 몰라도 미움은 분명 나를 병들게 한다. 지옥에는 불가마가 아니라 미움만 있을 거다. 그런데 일반적으로 실제로 정말 미운 사람, 원수가 있을까? 나는 거룩하지 않아도 그에게 조금도 해를 끼치고 싶지 않은데, 그도 그렇지 않을까? 나도 실수하듯 그도 그렇고, 왠지 모르게 그와 함께 있으면 불편하듯 나를 그렇게 여기는 사람이 있지 않을까? 우리는 다름을 미움으로 착각하는 걸 아닐까? 종교가 다르고 정치적 성향이 다르다고 그가 원수가 되는 건 아니지 않나?
예수님께도 불편한 사람이 있었을 거다. 당신과 대립했던 바리사이 율법학자들에게 호감을 가질 수는 없었을 거다. 당신을 팔아넘길 줄 아셨던 유다에게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다. 불편하고 싫어도 함께 살아야 한다. 그 다름과 싫음이 내 안에서 언제 어떻게 생긴 건지 모른다. 그건 그냥 그런 걸 거다. 다름을 싫음이 아니라 다양함으로 여길 수 있으면 좋겠다. 이런 꽃 저런 나무처럼 이런 사람, 저런 사람 말이다. 저 풀이 내게는 잡초지만 하느님 눈에는 사랑스러운 당신 작품이라고 여길 수 있어야 하겠다. 게다가 우리는 그를 판단이나 심판할 권한이 없다. 그렇게 미움과 싫음에서 벗어나면서 우리는 하느님 마음을 닮아가는 걸 거다. 누구에게나 햇빛을 비추고 비를 내려주시는 하느님 마음, 그런 마음 안에 미움과 원수가 있을 자리는 없다.
예수님, 미움을 호감으로 바꾸기는 어려울 거 같습니다. 그 대신 저의 판단 기준을 버리겠습니다. 그래도 불편하면 주님 사랑으로 참겠습니다. 싫은 사람이 좋아질 거 같지는 않지만 그를 위해 기도하고 잘 대해 줄 수는 있습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 눈을 바라보며 청하오니 제 안에 있는 미움을 쓰레기처럼 내다 버리게 도와주소서.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