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월 17일 내 마음의 하느님
어떤 서양 고대철학자는 신 또는 절대자를 ‘규정할 수 없는 존재’라고 정의했다. 신은 이렇다저렇다 말하는 그 순간 그것은 신이 아니라는 뜻이다. 복잡할 거 없다. 너무 맛있는 음식을 먹으면 말은 하지 못하고 얼굴로, 온몸으로, 때론 감동하여 흘리는 눈물로 표현한다. 그리고 그걸 보는 사람들도 그게 무슨 뜻인지 바로 다 알아듣는다. 오히려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 맛과 감동이 사라진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빠 아버지라고 부르셨는데 하느님은 가깝고 친밀한 분이라는 뜻일 거다. 예수님이 하느님을 아버지라고 부르셨다고 성모님을 하느님 아내라고 여기는 교우는 없다. 하늘나라를 오직 비유로만 가르치신 것도 마찬가지다. 하느님은 살아계시고 내 삶에 관여하시는 분, 우리 그리고 나와 계약을 맺으신 아주 가까운 분이라고 말하지만, 사실 우리는 하느님을 잘 알지 못하고 또 알 수도 없다. 그저 그분의 선하심과 자비로움을 믿고 신뢰할 따름이다. 그것이 얼마나 큰지 예수님은 만 탈렌트 빚을 탕감해 주는 임금으로 비유하셨다. 그 돈은 현시가로 수십조 원인데, 그 당시 헤로데 임금의 연간 세입이 900 탈렌트였다고 한다. 그러니 그 말씀은 당연히 과장법이다.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가 그렇게 아니 그보다 더 크다고 믿는다. 예수님은 십자가 희생으로 그걸 몸소 증언하셨다. 죄인을 살리기 위해 외아들을 희생시키는 아버지, 그런 부모는 이 세상에 없다.
내가 갖고 있는 하느님에 대한 지식은 입이 아니라 몸으로 표현하는 거다. 선행은 밥 먹듯 아침에 양치질을 했는지 안 했는지 기억하지 못할 정도로 하고, 기도는 홀로 아무도 보지 않는 곳에서 하고, 희생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는 거다. 그래야 예수님 제자 그리스도인이다. 남들이 그것을 알고 칭찬해 주는 그 순간 그 모든 것의 가치는 없어져 버린다. 그 음식 맛을 말로 표현하는 순간 그 맛이 사라져 버리는 거처럼 말이다. 함께 모여 기도하고 봉헌하는 미사가 아름답지만, 그 안에서 하느님은 우리가 아니라 나를 만나시고 나와 관계를 맺으시는 거다. 하느님과 나 사이 매우 은밀한 관계다. 사실 우리는 모두 나중에 하느님과 그렇게 단둘이 만나는 줄 알고 있다. 지금 우리는 그 만남을 이렇게 준비하고 있는 건지 모른다.
하느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고 나보다 나를 더 사랑하신다. 하느님은 나보다 나에게 더 가까이 계신다. 듣기 좋게 멋지게 하는 말이 아니라, 이게 전부 사실이고 이보다 더할 테지만 지금 여기에서는 이렇게밖에 설명할 수 없다. 하느님은 아니 계신 곳 없이 어디에나 계시지만 숨어계신다. 우리가 하느님을 온전히 다 알 수 없어서 그렇게 말하는 거다. 그러면서도 그분은 숨은 일도 다 보고 기록해 두신다. 내가 잊어버린 거까지 다 기억하신다고 믿는다. 내 잘못과 죄는 당신 사랑의 심연에 빠트려 당신도 찾을 수 없게 만드시고 말이다. 그래서 말하기 쉽게, 그분은 내 마음의 하느님이라고 하는 걸 거다. 마음 밖으로 나오면 그것은 하느님이 아닌 거다. 여기서는 마음 안에서만 온전히 만날 수 있는 하느님이다.
예수님, 기도는 늘 메마르지만, 그럴수록 주님이 거기 계시다는 믿음은 더 커집니다. 기도는 홀로, 선행은 자연스럽게, 희생은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하겠습니다. 아니, 그렇게 되기를 소원합니다.
영원한 도움의 성모님, 어머니 작은 입을 바라보며 조용히 살게 도와달라고 청합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