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월 16일 금요일 고진실, 김상진, 김승철, 심선진, 최규호가 만났습니다.
김승철 선생님이 오랜만에 직접 참여했어요.
약간의 부상으로 불참한 이효정 선생님이 일본산 드립백 커피를 선물해 주셔서
(1)늦지 않은 사람 (2)멀리서 온 사람 기준 순서로 하나씩 골라 기분 좋게 시작했습니다.
최규호 [나르치스와 골드문트] 헤르만 헤세, 임홍배 역, 민음사
헤세의 다른 작품들도 그렇듯 이 소설도 두 세계가 대비되어 나타나는데, ‘어떤 세계에 속한 인물이 거기서 만족하거나 적응하지 못하고 다른 세계를 추구하는 모험이나 방황을 하는’ 익숙한 구조를 읽을 수 있습니다. 나르치스는 종교적이고 올바르고 흐트러짐 없는 이성을 추구하는, 독일(서구 세계)의 주류 정신세계를 대표하는 인물 같습니다. 그의 친구 골드문트는 그 주류세계(특히 그가 어릴때부터 입학한 수도원이라는 공간)에 호의를 보이면서도 대체로 억압이라 느끼며 감성과 체험과 자유와 방랑의 길을 걷게 됩니다.
집도 없이, 맨몸으로 부딪혀가며, 온갖 쾌락과 아름다운 것, 추한 것, 혹독함과 환희와 허무를 체험(선진 선생님이 올해의 책으로 꼽은 [노상관찰자]로서의 행동을 삶 자체로 보여주는게 아닌가 생각했고, 상진 선생님이 읽었던 [인생의 해상도] 또한 떠올랐습니다. 진실 선생님이 지난 달 [싯다르타]를 읽으며 진리를 스스로 발견하고 참으로 깨우치는 것이 무엇인지에 대해 던져준 통찰, 선진 선생님의 싯다르타는 ‘발 딛고 있는 지금 여기 세상’을 살았다는 지적도 모두 연결이 된다고 느꼈습니다)하며 그는 특유의 예민한 시각으로 예술(조각)의 길로 접어들게 됩니다.
하지만, 예술 자체가 목표는 아닙니다. 성직자가 되기는 싫고 예술가가 되는게 좋아보여 수도원을 떠나 방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삶 그 자체를 극도로 자유롭게 누리려는 고유의 태도가 동력이었습니다. 작품을 만들고 조각가가 되고 하는 것은 그 삶을 누리는 가운데서 자연스레 따라오는 곁가지일 뿐입니다(이것은 [데미안]의 주제―삶의 의미는 오직 자기 자신이 되는 것뿐―와도 연결되는 부분). 오히려 그는 예술의 세계마저 답답해하고, 그것마저 넘어서는 ‘게으름’과 자유를 갈망하는 듯 보입니다.
예술은 얼핏 보면 정신세계의 여왕 같지만, 실은 하찮은 것들을 너무 많이 필요로 했다. 예술을 하려면 안정된 작업 공간이 있어야 했고, 작업도구와 목재, 흙, 물감, 금 따위가 필요했으며, 노동과 인내가 요구되었다. 그는 숲에서 누리던 거친 자유를 예술에 바쳤다. 넓은 세상을 만끽하는 자유, 위험을 즐기는 짜릿한 쾌감, 안빈낙도의 자부심을 모두 바쳤다. 그러고도 그는 숨을 죽이고 화를 삭이며 자꾸만 새 제물을 바쳐야만 했다. 260쪽
저도 한때는(혹은 아직도 조금) 예술가, 글쓰는 사람의 길을 동경하고 부러워했는데, 이 부분은 예술가에 대한 다른 시각을 던져주었습니다. 창작자에겐 화려함 만이 아니라 치열한 노동이 반드시 따라온다는 것(물론 그마저도 신나게 해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그 치열한 고통을 감내해야 하는 무겁고 화려한 왕관 대신 자유롭고 이름 없는 예술 소비자의 자리를 선택한 것이라는 정신승리를(물론 창작자들은 더 폭넓고 깊게 작품들을 향유하고 있겠지만)해보았습니다.
이 소설은 제목과 다르게 골드문트의 이야기가 대부분을 차지합니다. 그럼에도 작가는 나르치도 제목에 함께 넣었습니다. 골드문트는 나르치스와 정반대의 인물이지만, 둘은 서로 영향을 주고받으며 끝까지 가장 소중한 친구로 남았습니다. 골드문트가 답답한 수도원과 나르치스를 떠나 자유를 누릴 수 있도록, 가장 합리적인 판단으로 골드문트에게 어울리는, 골드문트가 더욱 그 자신이 될 수 있는 길을 걷도록 해준 것도, 방랑 중 죽을 위기에서 구해준 것도, 예술적 영감 혹은 이상적인 모델이 되어준 것도 나르치스였습니다.
내가 누리고 있는 자유는 어떻게 보면 내가 조금은 무시하고 때로는 비판적으로 보기도 하는 어떤 전통적인 것, 고리타분하고 뻔한 가치와 체계에 일정 부분 빚지고 있는 것이 아닌가? 또 내가 어떤 가치과 사상이 옳다고 여겨 그것을 추구한다고 할 때, 전적으로, 극단적으로 가는 것 보다는 역시 반대쪽과 어느 정도의 균형을 맞추거나 최소한 참고 정도는 하고 가야 건강한 공부가 되지 않겠는가, 하는 생각을 해봅니다.
김상진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 최진영, 핀드
[단 한 사람]의 소설가 최진영이 제주도에 머무는 동안 쓴 [내 주머니는 맑고 강풍]을 읽었습니다. 1월 12일부터 16일까지 '복지요결 심화 교육' 동안 제주에서 읽을 요량으로 책을 챙겼습니다. 다 읽지 못했지만 그래도 작가가 제주에서 쓴 글을 그곳에서 읽는 맛이 있었습니다.
대정 바다에서 돌고래를 볼 수 있을까 내심 기대하고 기다렸는데 이번에는 보지 못했다. 하지만 전혀 아쉽지 않았다. (돌고래 관광 선박선 같은 야만적인 배를 이용하지 않아도 바다가 보이는 길가에 서 있으면 가까운 바다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는 돌고래를 충분히 볼 수 있습니다. 송악산 둘레길을 걸으면서도 볼 수 있고요. 돌고래 관광선은 돌고래 무리를 아주 가깝게, 집요하게 쫓아다니기 때문에 돌고래가 스트레스를 많이 받는다고 합니다. 지느러미를 다치기도 하고요. 멀리서 봐도 관광선 때문에 돌고래가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는지 느껴질 정도입니다.) 62쪽
최진영 작가랑 똑같이 저도 대정 바닷가를 자주 나갔지만 돌고래를 볼 수 없었습니다. 조금 아쉬울 뻔했으나 괄호 안 문장들을 보고 그 조금마저 깨끗이 사라졌습니다.
소설을 시작해야 하는데 어째서 못 하고 있나. 책상 앞에 않으면 머리가 하얘진다. 명확한 인물이 머릿속에 있는데 얼굴을 보여주지 않는다. 나를 등지고 서 있어. 인물이 바라보는 곳에는 온갖 사람이 뒤엉켜 있다. 여름날 무성한 넝쿨처럼 무질서하게 뒤섞여서 울고 웃고 화를 내고 무서운 표정으로 뭔가를 씹어 먹는다. 그것을 바라 보는 인물의 눈동자를 보고 싶다. 바람처럼 속삭이는 그 말을 듣고 싶은데 무섭다. 요즘 바다를 바라보고 있으면 문득 무섭고 하늘을 바라보고 있어도 문득 무섭다. 짙푸른 한라산을 바라보다보면 무섭다. 72쪽
나도 머리가 하얘지는 느낌, 이것저것에서 무서움을 가끔 느낍니다. 작가에게 소설처럼 내게 중요한 것인데 어디서부터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모르는 때가 있습니다. 잘해보고 싶은 마음에서 그렇죠. 그냥 무서움을 티 내지 않고 적당히 지내거나, <흑백요리사2>의 최강록 셰프처럼 아닌 것을 좋은 척하거나 잘하는 척 했어요.
책과 노트와 펜만 있으면 나는 계속 살아갈 방법을 찾아낼 것이다. 사람에게는 절반만 의지하고 책과 글에 절반을 의탁하면서, 의젓하고 담대한 존재를 꿈꾸며 조용히 살아갈 수 있다.
여기 노트와 펜이 있다.
오늘을 쓸 수 있다.
하루를 살 수 있다.
언젠가 내가 쓴 글이 나를 일으켜 세울 것이다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겠지만, 이제 다시 걸어보자고 말을 걸진 않겠지만, 늘 거기에 존재하는 것만으로도 스스로 일어나도록 만들 것이다.
거듭 넘어질 나를 위해 매일 글을 쓴다. 8-9쪽
작가가 매일 글을 쓰는 것과 그 속에 마음을 담는 것처럼 나도 사랑하는 것과 옳다고 믿는 일을 매일 조금씩 해 나가려 합니다.
ps. 책 곳곳에 한창 지던 시기의 독수리 야구팀 이야기가 나옵니다. 서울책사넷 멤버 중 타이거즈 팬으로 작년 호랑이팀을 겪은 이예림 선생님께 무릎 탁 치며 재미있게 읽게 될 거라며 권했습니다.
심선진 [싯다르타] 헤르만 헤세, 최유경 역, 올리버
올해는 책 고르는 것도 지쳐서 선생님들이 읽은 책을 이어 따라가보기로 했다. [싯다르타]는 ‘정답’을 주는 책이 아니라, 끝까지 스스로 걸어가 보라고 등을 떠미는 책이다.
오랜만에 다시 읽은 이 소설은 예전에 읽었는지조차 희미할 만큼 새롭게 다가왔다. 경전과 지식, 타인의 가르침으로는 채워지지 않는 공허, 그리고 ‘내 삶을 구원할 수 있는 사람은 오직 나 하나뿐’이라는 문장이 맴돈다.
브라만의 아들로 태어나 모든 사랑을 받던 싯다르타는 정작 자기 자신에게서 기쁨을 찾지 못한다. 그는 고행을 선택하고, 붓다의 가르침 앞에서도 머물지 않으며, 결국 세속으로 뛰어든다. 사랑과 돈, 타락과 절망을 지나 강가에 이르기까지—이 여정은 깨달음이 ‘지식’이 아니라 ‘경험’이라는 사실을 반복해서 증명한다.
싯다르타는 고타마에게 말한다.
"당신은 깨달음을 얻었지만, 그 깨달음의 본질은 말로 설명되거나 가르쳐질 수 없습니다. 지혜는 전달될 수 없고 오직 경험으로만 얻을 수 있습니다."
아무리 위대한 스승의 가르침이라도, 그것을 자신의 삶으로 체화하지 못하면 진정한 깨달음이 될 수 없을테다. 싯다르타는 고빈다와 헤어져 홀로 새로운 여정을 시작한다.
강물은 말하지 않지만,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동시에 흐르고 있음을 보여준다. 모든 것은 연결되어 있고, 선과 악조차 하나의 노래로 합쳐진다는 것을. 스마트폰이 없던 시절, 주구장창 흘러가는 강물을 봤던 때를 떠올려본다. 그 강이 이 강이겠지 생각하며...
이 책이 오래 남는 이유는 실패를 부정하지 않기 때문이다. 싯다르타는 실패하고, 다시 실패한다. 그러나 그 모든 순간이 결국 하나의 지혜로 수렴된다. 완벽한 해답을 찾으려는 집착을 내려놓을 때, 비로소 세계는 있는 그대로 아름답게 드러난다. [싯다르타]는 묻는다. 아직도 누군가의 가르침에 기대고 있는가, 아니면 자기 삶의 강물에 귀 기울이고 있는가.
AI로 나의 말과 글이 사라졌다. 실패가 두려워 나의 글을 온전히 드러내기 싫었다. 올해는 좀 더 내 것을 찾을 수 있을까.....
태양과 달이 빛나고, 강은 출렁였으며 벌은 윙윙거렸지만, 이전에는 이 모든 것이 싯다르타에게는 부질없이 느껴졌다. 그의 눈에는 거짓으로 보였다. 그래서 싯다르타는 이 모든 것을 믿지 못했고, 이것들은 뻗어 나가는 생각에 따라 그에게 침투했지만, 곧 파괴될 운명이었다. 왜냐하면 이것들은 본질적인 존재가 아니기 때문이었다. 본질은 눈에 보이는 것 너머의 저편에 있는 존재였다. 하지만 이제 그의 해방된 눈은 저쪽이 아닌 이쪽 세상에 머물러서, 그는 눈에 보이는 것을 그대로 보고 인지하게 되었다. 싯다르타는 이제 이쪽 세상에서 살고자 했고, 더 이상 진정한 본질, 보이는 것 너머에 존재하는 그 무엇을 목표로 하지 않았다. 이제 그에게 아름다운 것은 이쪽 세상이니, 무언가를 구함 없이 단순한 어린아이처럼 이쪽세상만을 보았다. 달과 별들, 시냇물과 들, 숲과 바위, 염소와 풍뎅이, 꽃과 나비까지 모든 것이 아름다웠다. 아름다운 이 세상을 따라 아이처럼 걷는 것은, 깨어난 채로, 가까운 것들에 마음을 연 채로, 그렇게 불신 없이 세상을 따라 걷는 것은
고진실 [증상이 아니라 독특함입니다] 토머스 암스트롱, 강순이 역, 새로온봄
정신장애들이 우리 사회에서 비정상으로 규정되어 온 이유 중 하나는 중요한 사회적 가치나 덕목에 반하기 때문이라는 점을 언급하고 싶다. (...) 이 책에서 살펴 본 나머지 장애들도 현시대의 특정 가치나 덕목에 반하는 것들이다. 자폐성 장애는 사회성, 우울증은 행복, 불안은 평정, 지적장애는 지성, 조현병은 합리성에 반한다.
정신질환의 숨겨진 강점에 초점을 맞춤으로써 그 장애들로 인한 피해를 회피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다. 그게 사실은 장애가 아니라거나, 또는 어떻게든 그런 장애를 ‘차이’라고 부르면 고통이 모두 사라질 거라고 말을 하는 것도 아니다. 그렇게 해도 고통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하지만 긍정적인 면에 집중할 때 얻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장애 자녀를 양육하는 어머니에게 소개 받은 책으로 ‘신경다양성’을 다루고 있다. 왜인지 손이 잘 가지 않다가 이제야 완독했다.
책을 보면 새삼 우리가 얼마나 많은 질병 속에서 살고 있는지 깨닫게 된다. 동시에 질병으로 규정하는 다양한 기준들이 학자 개인의 신념으로 만들어지거나 문화적 배경에 따라 다르게 인식되는 사례들을 보면 한순간 모두 부질없게 느껴지기도 한다. 질병이 '악'이 되는 사회에서... 세상은 정말 믿을 것이 없다.
그런 의미에서 신경다양성에 주목하는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신경다양성은 “이례적인 신경 발달은 사람들 사이의 정상적인 차이이고, 인간의 다른 차이처럼 용인되고 존중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개념이다. 그래서 문화의 다양성이나 생물의 다양성처럼 비유된다. 나는 뇌의 다양성 정도로 이해했다.
책을 읽고 난 뒤, 결국 다시 질문은 돌아온다.
나는 현장에서 어떤 관점과 의식으로 일하고 있는가.
다양성을 이야기하면서도 여전히 실체없는 ‘정상’을 좇고 있는 것은 아닐까?
김승철 [나무를 심은 사람] 장 지오노, 김경온 역, 최수연 삽화, 두레
2026년 새해 첫 달 1월을 맞아 새로운 희망을 심자는 마음으로 이 소설을 읽었습니다. 전체 페이지 103쪽이고 본문은 68쪽 밖에 안되는, (게다가 글 간격이 넓고, 그림도 많은) 얇은 소설이지만 그 안에 담긴 메시지는 깊고 넓습니다.
거칠고 메마른 황무지를 바라보며 누군가는 절망하고 그곳을 떠나지만, 누군가는 희망의 도토리를 골라서 그것을 심습니다. 이 책에 등장하는 주인공 양치기 엘제아르 부피에는 후자의 인물입니다. 누가 알아주지 않아도 희망의 도토리를 골라서 황무지에 심는 자신의 일이 마땅하다고 여기기에 매일매일 꾸준히 그 일을 합니다. 그렇게 해 온 일의 결과는, 여기 있는 동료 회원님들의 짐작대로의 모습이 펼쳐집니다.
그런 과정과 결과가 만들어진 것을 넘어 제게 더 인상 깊게 와닿은 포인트가 있었는데, 하나는 사람들은 황무지가 어떻게 살아나게 되었는지에 대한 과정을 모른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이렇게 이룬 일에 대해 엘제아르 부피에는 아무런 상훈도 받지 않는다는 것이었습니다!
책에 소개된 엘제아르 부피에의 삶을 통해 사회사업가로서 실천을 성찰하며 나름대로 적용 포인트 두 가지를 뽑아봤습니다.
1. 지금 내가 하는 일이 마땅하다면 누가 알아지 않아도, 그저 묵묵히, 꾸준히 실천하기.
2. 그 과정이 보이지 않게 하며, 상훈과 멀어지기.
(복지기관에서 일한다면 2번은 적용하기 어렵겠습니다..)
황무지의 땅에 희망의 도토리를 심어 마침내 숲과 사람을 불러 은 엘제아르 부피에처럼 각자의 현장에서 이웃과 인정을 심으며 마침내 사람 사는 사회를 불러오는 사회사업가로서 2026년 한 해를 살아내길 희망합니다.
2026년 2월 서울 책사넷 모임 안내
일시 : 2월 12일(목) 저녁 7시 30분 ~ 9시 30분
장소 : 가람작은도서관 (가양5종합사회복지관 1층)
참여자 : 참여를 원하는 당신!
준비물 : 이야기 나누고 싶은 책 1~2권
신청 : 기존 참여자 외에 참여를 원하는 분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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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락책 : 김상진 (010-7308-243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