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책사넷

2025년 11월 서울 책사넷 후기

작성자김상진|작성시간26.01.27|조회수86 목록 댓글 1

 

김상진  [자기 결정] 페터 비에리, 문항심 역, 은행나무

페터 비에리는 독일의 철학교수입니다. 동시에 파스칼 메르시어라는 필명으로 [리스본행 야간열차]를 쓴 작가입니다. 이 책은 그라츠 아카데미의 초청으로 2011년에 열린 강연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1강에서 저자는 자기 결정의 성공 여부를 결정하는 중요한 기준으로 '자아상'을 제시합니다. 그리고 이는 말과 큰 관계가 있음을 짚습니다. 이는 2강에서 '자기 인식'을 이야기하면서 문학 읽기와 글쓰기를 통한 '자기 표현'을 권하는 것으로 이어 집니다. 3강에서 '문화적 정체성'을 다루고 이것이 자기 결정에 미치는 영향을 이야기 합니다. 자아상, 자기 인식, 자기 표현, 문화적 정체성처럼 자기 결정에 중요한 개념을 생각해 볼 수 있고 그 예시 특히 문학 예시를 보다보면 독서 지평이 넓어지는 느낌입니다. 

 

  자아상은 우리가 어떤 모습이고 싶은가에 대한 생각입니다. 지금 여기서 말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의 삶이 내적으로 그리고 외적으로 우리의 자아상과 조화롭게 어울릴 수 있을 때, 그리고 우리가 행위와 사고와 감정과 소망에 있어서 되고 싶어하는 모습의 사람이 되었을 때, 그것을 자기 결정적 삶이라고 할 수 있다는 것이지요. 바꿔 말하면 자기 결정이 한계에 부딪히거나 실패하는 것은 자아상과 현실 사이에 큰 간극이 존재할 때라고 할 수 있습니다.  16쪽

  그런데 스스로에게 묻는다는 것 스스로를 이해한다는 것 변화한다는 것 이것들은 과연 정확하게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요? 이는 말과 큰 관계가 있습니다. 우리가 생각하고 경험하는 것들에 대한 정확한 말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자신에 관해 결정한다는 것, 이것은 자신의 생각에 관해 방향을 정하고 이어왔던 것들을 다시 한 번 시험대에 올린다는 것을 뜻하기도 합니다.  18-19쪽

 

  자신을 안다는 것 은 타인이 어떤 사람인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리고 그사람이 어떠했으면 좋겠는지에 대한 나의 생각, 그 두 가지 사이의 차이를 구별할 줄 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내가 그 사람에게 투사 하는 것이 과연 무엇인지를 꿰뚫어 보는 것이지요. 그리고 반대로 나에 대한 타인들의 투사를 알아차리고 그들의 희생양이 되지 않도록 하는 일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가 그 어떤 감정도 무위로 끝나는 포템킨 전함의 단단한 표면 같은 얼굴이 아닌, 진실하고 교류 가능한 감정들을 가지고 우리 자신을 대면하기 위해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70쪽

 

  자신이 받은 맹목적 영향에 어떤 것이 있는지 눈앞에 떠올려보고 그것에 대해 성찰하고 고민하는 법을 배우며 깊숙이 숨겨져 있던 인간에 대한 생각과 자신에 대한 시각을 의식 위로 끌어올립니다. 이렇게 인식된 대안을 통해 마침내 이렇게 말하는 자신의 목소리에 이르게 되지요. "다르게 볼 수 있다는 것을 나는 안다. 그러나 나 개인적으로는, 존엄성과 자유가 있는 삶 속에서 나는 다른 방식이 아닌 내가 보는 바로 그 방식으로 이해한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면 지구상 어느 땅에 살든 자신만의 문화적 정체성을 이뤄낸 것입니다.  87쪽

  

  

김승철  [사회사업, 열정만큼의 실력을] 김단비, 김혜지(군산), 김혜지(서울), 박서연, 방소희, 서주찬, 이애지, 이성령, 이지윤, 구슬꿰는실

공유하는 내용용을 보면서 (주로, 사례관리 업무로써) 어려움이 있는 당사자를 도울 때 이런 과정으로 도우면 좋겠다는, 나름의 진행 방침을 세울 수 있었습니다.

1. 어려움이 있는 당사자를 도울 때는 우선, 개별적으로 접근(Case Work) 하여 현재 마주한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듣고 그분과 함께, 실현 가능한 욕구를 먼저 합의 합니다.

2. 그 과정에서 그 분이 가지고 있는 장점을 발견하고 그 장점을 강점으로 발휘시킬 수 있는 주민 모임(Group Work)을 제안하고 주선합니다. 

3. 나아가 자기 역량과 강점으로써 지역사회에 기여하고 더불어 살아 갈 수 있을 환경(Community Organization)을 당사자와 함께 설계하고 자기 역할을 발휘할 수 있게끔 지원합니다.
(그런 점에서 '세대교류 - 마을선생님' 활동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이렇게 사회복지 실천 3대 방법론을 때에 맞게 적용하여 당사지를 돕는 것이 곧 지역밀착형 통합실천임을 다시 배우게 하는 제게 좋은 책이었습니다! 

 

  

최규호  [채식주의자] 한강, 창비

주인공 영혜는 고기를 먹지 않게 되었는데, 왜 이렇게까지 ‘유별나게, 기이한 행동을 보이며, 극단적으로’ 그려지고 있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채식주의자란 ‘초식동물되기’를 실행하는 존재적 변환일텐데, 영혜는 그것을 넘어서 ‘식물(나무)되기’를 시도한다. 서서히, 자발적으로, 거의 모든 것을 거부하며, 죽음으로 나아간다.

감히 떠오르는 생각은, 그녀에게서 예수의 모습을 발견할 수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것. 살육을 숨쉬듯 해온 모든 인류를 대신해 십자가를 지고 나아간다. ‘저들은 저들이 하는 짓이 죄인 줄 모르고 있습니다’ 예수가 ‘지적’하며 ‘호소’했듯이, 사람들은 아무 거리낌 없이, 잡아서, 죽여서, 해체시켜서, 씹고 뜯고 맛보고 즐기며, 때로는 과시하며, 과식하며, 포식하며, 먹지 않겠다는 이를 이상하게 취급하며, 먹지 않겠다는 이의 입을 억지로 벌려 쑤셔 넣는다. 우리가 죄짓는 게 아니라 네가 이상한거야! 하며 악착같이 자신들의 죄를 은폐하고, ‘선지자’에게 비정상이라는 낙인의 뺨을 후려갈긴다. 자신들이 자연스럽게 행하는 것들을 죄인 것처럼 만드는 유별난 자들의 행태를 서둘러 진압해야 한다. 

이렇게까지 유별나지 않으면, 아무도 눈길조차 주지 않을 것이다. 
이렇게까지 극단적이지 않으면, 문제의식이 조금도 생겨날 수 없을 것이다. 

다만 그녀 자신을 위해서라도, 채식의 이유에 대해, 적극적으로 ‘자기 표현’(이효정 선생님, 김상진 선생님 두 분의 나눔에서 이것이 중요한 키워드 중 하나로 이해되었는데, 소설 속 이 비극적 인물에게 알맞은 ‘처방’이 되겠다고 생각했습니다)을 하고 설명하고 항변했다면 좋지 않았을까. 꿈을 꿨다는 말만 하지 말고, 동물이 얼마나 불쌍한지 헤아려 본 적 있느냐는, 육식이 온실가스를 배출하는 가장 치명적인 행위인 것을 모르냐는, 그런 말이라도 외쳐 봤으면 어땠을까. 하지만 그녀는 신념에 따른 채식‘주의’자가 아니다. 그저 몸이 느끼는 대로, 영혼이 시키는 대로, 자신만의 감각에 정직하게 반응하는 것일 뿐이다. 그것이 마치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인 양, ‘고기 거부자’의 윤리를 끝까지 밀고 나아간다. 

하긴 뭐라 뭐라 설명했다 한들, 이런 기이함을 받아줄, 들어줄 사람은 영혜 주변에 없다. 그녀를 사랑한 적이 단 한 순간도 없는, 그저 자신에게 도움이 되도록 ‘아내로서의 역할’만을 충실히 해주기를 원하는 남편뿐 아니라, 부모와 형제자매들도 마찬가지다. 가족이란 그저 아무 성찰 없이 그 시대의 이데올로기에 순응하는 사람들에게나 든든하고 따뜻한 울타리일 뿐, 조금이라도 자기 자신에게 충실한 윤리적 모험을 나서는 이들에겐 그 섬세한 감수성을 말살시키려 드는 감옥이 되고 마는 게 아닌가?

그저 고기를 먹으라고만 압박할 뿐, 누구도 영혜의 마음을 들여다보려고, 들어보려고 하지 않았다. 사회사업실천의 제1원칙이라는 ‘개별적 접근’(김승철 선생님이 보내주신 내용을 읽으며, ‘어려움에 대해 충분히 듣고’ ‘실현 가능한 욕구를 합의’한다는 표현은 정말로 영혜에게 절실했을 부분이 아니었을까 생각했습니다)은 사실 현장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인간관계에서 적용되어야 하는 것이 아닐까? 이것만 어느 정도 지켜졌어도 그녀가 정신병동에 ‘가둬’지지는 않았을 것이다(물론 그래도 여전히 죽음으로 나아가려 했을지도 모르지만, 적어도 그 과정은 온전히 그의 삶이었을 것). 개별적 접근이란 말 그대로 사회·문화·관습적 ‘압력’에서 자유로워야 한다. 어떤 ‘정상성’이라는 기준을 정해놓고서 그 기준과의 거리에 따라 사람을 판단하지 말아야 하는 것. 남편이 먹는 미역국에 소고기를 넣지 않아도, 부부동반 임원 모임에서 브래지어를 하지 않은 옷차림으로 말없이 밥과 김치와 샐러드만 먹어도, 그는 여전히 영혜 그 자신으로 존중받는 것에서 출발해야 한다. 

그는 우리에게 불편함을 선사하는 문제적 인간임은 분명하다. 이 소설은 이렇게 묻고 있는 듯하다. 이 불편하고 연약한 선지자를 극히 일부분이라도 이해하고, 그가 겪는 고통에, 그가 꾸는 악몽에 조금이라도 함께 참여할 사람, 있는가?

 

 

이효정  [호의에 대하여] 문형배, 김영사

  판사로서 사건을 처리하다 보면 '착한 사람은 법을 모르고, 법을 아는 사람은 착하지 않은 경우'를 종종 본다. 그런 사건일수록 해결이 어렵고, 착한 사람을 보호하고자 궁리를 해보나 한계가 있게 마련이다. 착한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고 착하지 않는 사람에게 적용되는 법 따로 있을 수는 없으니까.

  그렇다면 정의로운 사회를 만들기 위하여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법을 아는 사람에게 착하기를 요구할 것인가? 불가능은 아니나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할 것이다. 남는 방법은 착한 사람이 법을 아는 것이다. 그 길만 이 법이 나쁜 사람을 지켜주는 도구 역할을 하지 못하게 하는 지름길이다.

 

  판사가 죽은 사람을 살릴 수는 없다. 그러나 멀쩡한 사람을 죽일 수는 있다. 선고 전날 아파트 단지 내 공원을 산책한다. 내일의 판결을 머리로 그려보고, 결론에 자신 있는지를 검증한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정보원 | 작성시간 26.01.27 자기 결정...

    발췌한 내용조차 독해하기가 버겁네요.
댓글 전체보기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