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동교회(공간,김수근)
종교건축(개신교)
2005/05/12 13:19
http://blog.naver.com/hanpig2000/20012596370













경동교회
설 계 자 ; Swoo-Geun,Kim((고)김수근 / 金壽根)
공 사 명 ; 한국기독교장로회 경동교회 신축공사
대지위치 ; 서울특별시 중구 장충동 1가 26-7
대지면적 ; 1,663.5㎡
건축면적 ; 877.1㎡
연 면 적 ; 2,399.26㎡
건물규모 ; 지하 2층, 지상 3층
구조 ; 철근콘크리트조
주요내외장재 ;. 외부바닥 : 붉은 벽돌 깔기
. 내부바닥 : 흑수석 깔기, 일부 아스타일, 쿼리타일, 크링카타일
. 외 벽 : 붉은 벽돌 치장쌓기
. 내 벽 : 콘크리트 노출, 또는 그위 본타일스프레이, 일부 붉은 벽돌
. 천 정 : 콘크리트 노출, 또는 그위 본타일스프레이, 일부 합판위 O.S.F
공사기간 ; 1980. 02 ~ 1981. 08
하늘로 열리다
김수근
경동교회의 설계작업은 나의 두번째 교회 건축이었다. 이번 교회 건축에서의 여러 어려움들은 좋은 성전을 이루겠다는 같은 목적아래 서로 배우고 이해하려는 노력으로 극복되어졌고, 또 하나의 교회가 그 어떤 질서와 섭리에 의해 이루어졌다.
● 계획의 개념
지하 분묘에서 관을 제단삼아 예배하던 동굴(Catacomb)에서 비롯된 교회, 기독교가 공인되면서부터 신중심의 권위를 유지해오던 현대이전까지의 교회, 마틴 루터의 종교개혁후 인간중심적인 분위기를 추구하며 변모해오고 있는 현대교회에서도 신애 대한 예배는 교회가 가져야할 변할 수 없는 기능이며 어떠한 양식으로 변모해가든, ‘만민이 기도하는 집’ 즉 예배의 장(場)이 되어야한다는 것이 교회가 가져야할 기능상의 궁극적인 목적이 될 것이다.
기도가 신과 인간의 만남이라면, 인간과 인간의 만남 또한 이 장(場)에서 이루어져야 하며, 그 만남의 대상이 무엇이든, 그것은 기쁨과 즐거움으로 충만해야만 한다.
인간과 그 신앙의 대상인 신의 관계가 인간과 인간과의 관계의 표본이 되어 신자와 성직자, 그리고 그들이 이루는 교파와 그들을 둘러싼 사회, 나아가서는 인간과 다른 피조물간의 관계를 대립적 관계로서가 아닌 신 안에서 하나라는 ‘공동체의식’아래 이루어지는 만남의 관계를 만든다. ‘공동체의식’아래 이루어지는 만남, 이 만남이 이루어지는 장(場) 그것을 교회라고 말할 수 있지 않을까.
이러한 만남이 이루어질 때, 그 기쁨은 넘쳐 찬양과 기도로써 드리는 예배가 이루어지며, 그것이 신과의 만남이 이루어진 축제의 영적 기쁨이 된다면, 교회는 과연 신과의 만남에 의해 영적 기쁨이 이루어지는 축제의 장(場)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교회가 전도의 소명을 수행함에 있어서 교회건축이 가지는 상징성은 그 자체로서 신도, 비신도를 가리지 않고, 그들의 이미지 형성에 상당한 영향을 주게 될 것이다. 마치 어둠을 밝히는 빛처럼, 그들이 어디서 무엇을 하든지 그들의 마음 속에서 그 어떤 마음의 근원을 기억하게 해주는 형태, 죽 교회의 외형이나 내적인 면에서의 독자성이 부여될 필요가 있다.
● 이미지의 추출
이 개념들에서 추출(抽出)되는 요소들과 기능을 수용하고, 이들 각각이 개체이면서도 신 안에서 하나의 공동체임을 상징적으로 나타내기 위해, 나는 크고 작은 부정형의 벽들을 하늘 위의 한 점을 정하여 하나로 이루어지게 하고, 그 형성된 벽들의 외부를 하나로 이루어지게 하고, 그 형성된 벽들의 외부를 하나 하나의 부서진 벽돌을 사용하여 성전을 짓기 위한 인간의 고뇌와 노력을 부조하듯이 새겨갔다. 인간만의 순수한 뜨거움이 느껴지도록 하려는 뜻에서였다.
도로에 접한 전정(前庭, Plaza)을 완전히 개방하여 모든 사람들을 받아들이려는 교회의 정신을 표현하고, 좁아지며 길게 위로 인도되는 성전으로의 길은, 신과의 만남을 준비하는 마음의 길이 되게 도입부로 삼아, 그 끝남에서 예수고난의 저 십자가를 그대로 재현하여 성전 입구에서 옷깃을 여밀 수 있도록 배려했다.
시끄러운 도심에서의 온갖 소음을 차단해 버리고, 오직 십자가를 통해서만 하늘로 열린 성전, 그 성전을 이루는 꾸밈없이 노출된 벽들과 천정과 하나가 되어, 옛 바벨탑을 쌓던 이들의 우(愚)를 범하지않고, 신 안에서 하나됨을 갈구하는 공동체의식을 느끼게 하여, 예배의 장, 만남의 장이며 또한 祝祭의 장이 되게한 본당.
개개가 모여 오로지 한 곳을 향한 영적 갈구가 하늘로만 열린 옥상교회는 번잡한 도시에서 홀연 신과의 대화가 가능한 기도의 장으로 주어지게했다.
이제 장(場)의 이루어짐은 있었으니, 이것은 끝이 아니요, 시작인 것이다.
조악한 주변경관 및 소음 속에 위치한 이 개신교 교회는 Interior Space Quality의 유지를 위하여 주 입구를 전면도로와 정반대 편에 위치시켰다.
전면도로와 맞붙은 프라자에 진입한 신도들은 길고 상승하는 순례자의 길을 통하면서 神과의 만남에 대한 준비를 갖게 하며, 주입구앞의 경사진 십자가 앞에서 반전하고 두터운 교회문을 열고 내부로 들어오면서 전면의 빛과 조화된 십자가를 쳐다보며 종교적 공간의 체험을 느끼도록 계획되었다.
이 교회가 가진 다양한 Activity를 수용할 수 있도록 경사진 옥상을 이용하여 Open Church의 개념이 건축가에 의해 제안실현되었고, 이 Open Church의 내부공간감을 높이기 위해 주변 파라펫을 차음기능을 갖는 조형요소로 만들었다.
새 교회당의 신학적 조명
강원용
교회의 목사를 20여년 하면서 늘 자신의 한계상황에 부딪치게 된다. 예배 인도, 성서를 읽고 기도하고 설교할 때 현상의 세계를 설명하고 합리적으로 이해시키는 일에는 언어라는 수단을 통해진다. 그러나 모든 종교가 같지만 특히 성서를 기본 텍스트로 삼는 기독교가 성서의 진리를 사람들의 삶의 심층지대에 전달하며, 초월적 세계와의 교통을 시키는데 언어매체만으로는 불가능하기에 성서는 근원적인 진리를 개념화하지 않고 이미지, 상징(symbol)과 은유(metaphor)로 표현한다.
그러기에 교회의 역사, 예배는 미술과 음악과 축제와 상징적인 의식으로 가득 차게 되었다. 지하의 카타콤의 벽화에서 교회당건축은 비잔틴, 로마네스크, 고딕, 르네상스, 바로크 그리고 현대에 이르기까지 미술과의 연관이 있어왔다.
스테인드글라스, 벽화, 조각, 아이콘 그림 등의 미술, 음악, 축제도 교회의 품에서 성장되고 발전해왔다. 그러나 애석히도 한국의 개신교는 이런 흐름에서 거의 이탈하고 말았다. 그것은 개신교의 전통이 아니라 17세기의 영국의 청교도혁명의 흐름을 이어 받은 미국 선교사들에 의해 오도된 현상이었다. 이런 푸리탄이즘은 교회건축에 있어서나 예배의식에 있어서 이미지나 상징을 거의 무시해 버렸다. 그 결과로 몸으로 드리는 예배가 귀와 입만 가지고 드리는 예배가 되고 내면주의, 주관적 정신주의, 현대판 영지주의(gnosticism), 앙상한 교리주의, 심리적 엑스타시와 성령을 혼동 하는 타락상들이 본의 아니게 파생되었다고 생각된다.
내가 섬기는 경동교회는 그 교회당이 전쟁 후 임시로 지은 가건물로서 교회당으로서의 이미지나 상징이 없는 교회였다.
창립20주년인 1965년부터 구 건물을 헐어 버리기로 하자는 데는 의견일치를 봤으나 어디에 어떻게 건축하느냐는 문제는 어려움이 많았다. 현재의 터전을 주차장, 녹지 등을 고려할 때 너무 협소하여 변두리 넓은 곳으로 나가려 했으나, 대지가 팔리지도 않고, 팔릴 전망도 없어서 부득이 현 대지에 짓기로 하고 신축할 바에는 평소 생각해온 신학적 측면을 예술적으로 살리면서 기능적으로도 손색이 없는 교회당을 짓고 싶었으나 대부분의 교인이 재정적으로 어려운 처지에 무리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 창립35주년인 1980년을 맞이하여 신축하되 재정적 무리가 지나치지 않은 범위 안에서 우리의 뜻을 설계자와의 협의를 통해 최대한 반영시켜 짓기로 했다.
우선 교회당의 외형과 내부에 다양성 속의 일치를 나타내는 에큐메니칼 정신을 강조했다. 이런 주장이 교회당의 외형에 비교적 잘 나타났다고 본다.다음으로 메인타위는 끝없이 치솟아 하늘과 키스하는 고딕식도 아니고, 종탑과 십자가가 치솟아 있는 일반 개혁파교회에서 흔히 보는 식도 아닌 궁극적으로는 하나님 나라가 역사의 현장에 임해 오는 것을 기원하는 타위는 뜻대로 되었으나, 처음 계획에는 남북통일이 성취되기까지 불이 타오르는 기도의 장소를 타위 안에 구상했으나, 이것은 뜻을 이루지 못했다.
교회당 내부는 교회가 지니는 다양한 측면을 조화시키고 싶었다. 우선 한국말로 예배당 혹은 교회당이라고 불리는 두 측면을 조화시키려는 것이다. 가르치는 장소로서의 교회당은 이미 지은 교육관이 있기에 아래층에 교육을 위한 강당을 만들고, 예배당에 많은 배려를 했다. 그 중 중요한 면은 예배에 있어서의 수직선적인 측면과 수평선적 측면의 조화라 하겠다. 제단 뒷면은 삼위일체 하나님을 향한 수직선을 높게 하고, 그 꼭대기는 하늘을 통해 햇빛을 하나님의 은총과 영광의 상징으로 받아들이고 인간과 하나님 사이를 이어놓는 십자가를 그 벽에 달고, 사람들이 앉는 장소는 수평선적 측면을 최대한 살리려했다. 의도한 바로는 서로서로 얼굴을 마주 대하게 하고 싶었으나 현실적으로 어려움이 있어 조정을 했다.제단(Altar)앞에 설교대 하나만 높이 놓는 개신교의 전통과, 개신교에서 흔히 등한시되는 성찬대와 세례대를 좌우에 설치하여 성례전과 설교의 조화를 나타내고 단상에는 좌석을 만들지 않음으로서, 목사는 설교하고 성례를 집행하는 성직자인 동시에 일반신도와 같이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신도인 것을 나타내려 했다.
에크레시아(Ecclesia) 즉, 모이는 교회와 디아스포라(Diaspora) 흩어지는 교회의 조화를 시도했다. 이는 두가지로 표현되었는데, 교회에 모여들어오면 제단 위의 하나의 십자가와 마주치나 예배가 끝나고 나갈 때는 교회당 중 유일한 스테인드글라스에 마주서서 나가게 된다. 이것은 여러 가지 색깔 모양의 십자가로 되어있다. 이것은 2000년간 교회의 선교를 위해 십자가를 진 사람들의 후계자로서 각기 제 십자가를 지고 역사의 현장으로 나가는 것을 뜻한다. 또 하나는 예배당 입구와 큰 길 사이의 좁은 계단 길이다. 큰길에서 교회지역으로 들어오면 바로 예배당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교회지역에 들어올 때부터 예배는 시작된다. 한계단 한계단 명상과 회개를 통한 예배준비를 하면 예배당 입구로 들어가며 이 길은 마태복음 7장 13절의 생명을 향한 좁은 길도 되고, 골고다 언덕을 행한 길이 될 수도 있다. 예배가 끝나고 축도와 송영을 들으며 십자가를 지고 세상을 향해 행진하는 성도들의 결단을 계속 다짐하며 층계를 거쳐 세상 속으로 들어간다.
이 교회당의 특징적인 것은 옥상교회라 하겠다. 여기에는 두가지 의미가 있다. 예배와 축제와의 관계요, 인간과 하나님, 인간과 인간, 그리고 인간과 자연의 관계 아울러 전 피조물과 함께 드리는 예배와 축제를 뜻한 것이다. 이 장소는 특히 젊은이들의 축제가 푸른 하늘을 쳐다보며 햇빛과 별빛 아래서 펼쳐지는 것이다.
우리의 교회당은 결국 세층으로 되어지고 있는데 아래층은 친교를 위한 장소로서 음식과 다과를 나누며 친교 하는 장소와 교육받는 사람들의 강당이 있고 그 위층이 예배당이고 그 위가 옥상교회로서 교회의 기본과제인 예배 성례 축제 교육 친교 봉사와 선교로 이어지는 것이다.
다민 교회당에 대한 신학적 측면 중 꼭 살리고 싶었던 몇가지를 이루지 못했는데 중요한 것이 보편성과 특수성의 관계다. 교회는 세계적이고 시대를 초월하고 영원과 이어지는 보편성이 있는 반면 “지금 여기에”있다고 하는 특수성이라는 두 측면 중에서 어느 한 쪽으로 치우쳐도 안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한 반성으로서, 우선 서양식 건물구조에 치우쳐서는 안 되고 한국의 전통과 문화가 건물에 반영되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설계자로서는 기술적으로 어려운 문제도 있었겠지만 한국적인 것은, 곧 생명력인데 이 건물에는 생명력이 충분히 나타나 있느냐? 아니냐? 하는 문제를 판단하기는 나로서는 매우 어려운 점이라 하겠다.
또한 흐린 날씨나 밤에는 전등이 시각에 띄지 않는 간접조명을 하고 햇빛이 밝은 날에는 자연광선에 의한 빛으로 예배드릴 수 있게 한다는 시도나 음향이 완전에 가깝게 하려는 시도 등은 현재까지는 뜻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요는 이 건물을 지을 때 개신교 선교 100주년을 맞이하는 한국교회사에서 처음이자 앞으로 길이길이 표본이 될 수 있는 교회당을 짓는다는 야심은 없었으나 많은 비판이 있을 것을 예상했었다. 그러한 비판이 한국교회의 갱신을 위해 구체적인 도움이 될 것을 기대한 것이기에 보다 더 좋은 교회 건물이 계속해 나와 주기를 기대하는 바이다.
서울의 광희문을 채 못가서 장충단 쪽으로 돌면 바로 왼쪽에 중세기 고성을 연상케 하는 장엄한 붉은 벽돌의 건물이 지나는 이의 발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곳은 교인들의 정성으로 지난 9월 6일 첫 입당예배를 드리게 된 새로운 경동교회의 모습이다.
교회라면 어디를 가나 뾰족한 종탑 위나 지붕꼭대기에 아크릴이 아니면 전광판 십자가를 달아놓은 것이 상례인데 경동교회는 외형상의 십자가로 교회임을 자처하지는 않고 있었다.
교회는 마치 깊은 침묵을 가슴에 간직한 채 하늘을 향해 손을 들고 겸허한 자세로 기도하고 있는 거인처럼 보였다.
거인! 그렇다 경동교회는 분명 거인의 자태다. 역사가 오래고 고색창연한 전통을 자랑한다거나 건물이 웅장하고 이른바 교세가 확장되었다고 해서 거인일 수는 없다.
35년전 이곳에 경동교회의 첫 머릿돌을 세운 이래로 이 교회가 끈덕지게 추구해온 일관된 신앙은 역사의 현장속에서 교회란 무엇인가라는 물음과 그 물음에 대한 응답이었다. 이미 도래해 있 지만 아직도 완성되지 못한 그 나라와 그 의를 실현하기 위해 몸부림쳐 온 교회임은 역사가 증명한다.
그러기에 때로는 현실참여를 못마땅히 여긴 권력으로부터 질시와 박해를 받기도하고 폐쇄적이며 은둔적인 교권의 율법을 깨뜨린다고 해서 종권(宗權)을 가진자들로부터 이단시되어 수많은 오해와 상처를 입기도 했다.
그러나 교회가 구체적인 역사의 현실과 유리된 채 영혼의 구원과 내세의 안식처만 바라보게 될 때 그 교회는 존재 가치를 상실한다는 것이 뚜렷한 지론이다.
두 갈래로 높이 솟은 메인타워는 마 치 벧엘 광야에서 야곱이 목격한 사다리와 같다고나 할까?
서로 손을 잡고 있다는 것은 기쁨을 나누기도 하지만 오히려 고통을 함께 한다는 의미가 더욱 크지 않을까.
벽면은 아무런 장식도 없다 .오히려 못자욱과 판넬 자욱이 상흔처럼 그대로 남아있고 시멘트의 회색빛이 우리사회에 한때에 만연된 불의와 부정을 반영하고 함께 책임을 지려는 아픔처럼 느껴진다. 은총의 밝은 빛과 고통스런 회색의 빛 , 하나님을 향한 수직적인 관계와 성도와 세상의 수평적인 관계가 십자가와 빔을 통해 선명하게 들어나 있다 .
■ 텅 빈 제단과 회랑
제단은 비어있었다 .목사나 장로가 착석할 의자가 없다. 하나님의 계시만이 임하는 장소처럼 비어있다. 그곳은 마치 휘장이 찢어진 지성소이거나 만인 제사장의 심볼처럼 느껴졌다.
또한 벽과 기둥 사이에 비어 있는 회랑과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빈 공간 그곳은 만남을 위한 공간이며 기다림을 위한 공간이며 참회를 위한 공간인 동시에 미래를 여는 공간이다. 은총의 바람은 언제나 공간을 향해 불어오니까!
■ 흩어지는 교회
좌석에 앉았다가 돌아서자 들어올 때 선명하지 않던 출입구 스테인드글라스에 영롱한 색깔의 십자가가 빼곡히 그려져 있었다. 예배를 드릴 때는 하나의 단색 십자가를 향했는데 나갈 때는 여러 형태 여러 색깔의 십자가를 확연히 볼 수 있다. 그렇다. 저것이 바로 교인들 각자가 세상으로 지고 나갈 흩어지는 교회의 상징이로구나.
각자에게 부여된 선교의 올바른 과제를 자기가 처한 위치에서 수행하기 위해 각각 다른 색깔의 십자가를 지고가야 한다는 것을!
출입문을 나서 옥상에 올라가니 구부러진 타워 밑으로 우리나라에서는 처음인 옥상 교회가 극장식으로 자리잡고 있었다.
기독교 문화예술의 장래를 위해 이 교회가 앞서갈 것을 엿볼 수 있다 .아래층엔 교우들의 다정스러운 만남을 위한 친교실이 있었다. 신입교우들의 등록과 친교를 위한 코너도 아담하게 마련되어 있었다.
인류역사의 장래는 종교에 희망을 건다는 토인비의 예언을 들지 않더라도 2천년대 위기의 시대를 극복하기 위해 교회는 새로운 태동을 할 것이다.
새술은 새부대에 담듯이 경동교회의 신축은 그와 같은 뜻을 지닌 것이 아닐까.
영원한 나라와 현실의 사회를 연결하면서 격변하는 세속화의 물결을 막으려는 파수꾼마냥 의연하면서도 중후하다. 새로 지은 경동교회의 외양은 단순히 교세를 신장하고 외적인 성장을 표방키 위해서가 아니라 새로운 도약을 위한 내적인 교인들의 의지를 발산하듯 벽돌 하나하나가 암시해주고 있는 것 같았다.
■ 신발을 벗으라
외양을 관찰한 후 내면을 보기위해 입구를 들어섰다. 철책도 철문도 없는 열려진 교회의 의미는 만민이 기도하는 개방된 교회의 상징일까 .
뒤편에 있는 출입문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교회건축에 사용한 벽돌로 축조된 긴 층계를 비스듬히 올라가야한다. 어째서 출입문을 들어가기에 편리한 앞쪽에 두지 않고 층계를 걸어올라 뒤편으로 들어가도록 구상했을까?
그러나 그 의문은 층계를 올라 출입구에 당도하는 순간 자연스럽게 감지되었다.
생각하는 층계, 회개하는 층계, 신을 벗는 층계가 아닐까. 골고다 언덕을 생각하게도 될 것이고 세속에 더러워진 자신을 돌이키며 회개하는 층계로 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신발을 벗는 층계로서의 역할이 중요할 것 같았다.「네가 선 곳은 거룩한 땅이다. 신발을 벗어라」이 말씀은 모세가 사명을 받기 위해 하나님 앞으로 나갔을 때 하신 말씀이다. 누구나 하나님 앞에 나올 때는 신발을 벗어야한다. 그 신분의 귀천을 가릴 것 없이 자신의 신발을 벗고 하나님 앞으로 나아가야만 부족한 죄인으로서의 자신을 볼 수 있게 된다.
진정 그럴 때만이 세속적인 초월하여 신앙고백을 함께하는 교제가 가능하지 않을까 .
「네가 신은 신발을 벗어라」층계는 피아노의 건반처럼 그렇게 연주하고 있는 것 같았다 .
■ 수직과 수평
교회 안으로 들어서면 먼저 빛을 받으며 우뚝 서 있는 십자가의 위엄이 가득하다. 그곳이 바로 밖에서 보았던 메인타워의 중심이었다.
하늘로부터 십자가를 통해 비춰지는 빛이 죄인들을 용서하고 무한한 은혜를 내려주시는 것 같아 그 신비감은 자연스럽게 예배의 대상이 누구인가를 깨달을 수 있게 했다.
그것은 곧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십자가를 통하여 수직적인 관계가 이루어 져야함을 암시하는 것이 아닐까 !
의자에 앉아 천정을 쳐다보면 기둥으로부터 연결된 장중한 빔이 줄지어 늘어서 있는데 그 모습은 언뜻 고통스럽게 느껴지기도 하고 무한한 힘을 내재한 채 모든 것을 버티고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렇다. 저 빔은 성도들이 손을 잡고 있는 연결의 모형이다.
출처; www.space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