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21년 9월 22일 연중 25주간 수요일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제자들을 보내셨다.>
✠ 루카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9,1-6
그때에 1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를 불러 모으시어, 모든 마귀를 쫓아내고 질병을 고치는 힘과 권한을 주셨다.
2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를 선포하고 병자들을 고쳐 주라고 보내시며,
3 그들에게 이르셨다. “길을 떠날 때에 아무것도 가져가지 마라. 지팡이도 여행 보따리도 빵도 돈도 여벌 옷도 지니지 마라.
4 어떤 집에 들어가거든 그곳을 떠날 때까지 거기에 머물러라.
5 사람들이 너희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그 고을을 떠날 때에 그들에게 보이는 증거로 너희 발에서 먼지를 털어 버려라.”
6 제자들은 떠나가서 이 마을 저 마을 돌아다니며, 어디에서나 복음을 전하고 병을 고쳐 주었다.
파리외방전교회와 순교 생활
기해박해(1839)당시 충남 청양 다락골에서 숨어서 사목하던 모방 나 베드로(1803-1839)신부, 샤스탕 정 야고보(1803-1839)신부는 당시 교구장이신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1796-1839)주교의 편지를 받습니다. “위급한 경우가 닥치면 착한목자는 자기 양떼를 위하여 목숨을 바치는 법이오, 그런 즉 아직 범선을 타고 떠나지 아니하였거든 포졸들과 함께 속히 이리로 오시오.”라는 편지를 받고 주교님의 뜻에 따라 순명하여 순교를 받아들입니다. 그래서 서른여섯의 젊은 나이의 프랑스 신부들은 이역만리 한국의 땅에서 군문효수의 참형으로 순교를 합니다.
한국의 천주교회는 파리외방선교회의 선교구역에 배당되었습니다. 그래서 조선교회에는 파리외방선교회 신부님들이 파견되어 선교활동을 하였었습니다. 피의 순교를 두려워하지 않고 머나먼 동양의 나라로 떠나는 젊은 선교사들의 비장한 얼굴, 그리고 자식과 형제를 머나먼 극동의 나라로 떠나보내야 했던 선교회원들과 가족들의 심정을 생각하면 마음이 아프지 않을 수 없습니다.
파견을 앞둔 선교사들은 선교회 성당에서 파견미사와 파견식을 거행한 후 본부 정원의 성모상 앞에서 회원들과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보르도 항구로 가서 선교지로 떠났다고 합니다. “떠나라! 복음의 군대여, 그대들의 소망을 이룰 날이 왔다. 선교사들이여, 그대들의 발자취는 얼마나 아름다운가. 친구들이여, 이 생애에선 안녕을. 언젠가 천국에서 다시 만날 것이오.” 라는 선교사 파견 노래가 울리는 속에서 부모들은 아들의 발에 입 맞추며 ‘오! 거룩한 선교사의 발이여!’라고 마지막 축복의 기도를 울면서 바쳤다고 합니다.
1843년 말 파리외방전교회 성가대 책임자로 4년 반 정도 일했던 19세기 프랑스의 대작곡가 ‘구노’는 친한 친구였던 앵베르 범 라우렌시오 주교가 조선 땅에서 순교한 소식을 접하고 조선교회와 순교자를 위해 작곡한 곡이 현재의 「가톨릭성가」 284장 ‘무궁무진세에’라고 합니다. 프랑스 파리 중심가 ‘128 뤼드 박(Rue du Bac)’ 거리. 한 지붕 아래서 가장 많은 성인이 나왔다고 해서 농담 삼아 ‘순교 전문대학’이라 불리는 파리외방전교회는 1658년 아시아 지역 선교를 목적으로 교구 소속 신부들로 결성된 프랑스 최초의 외방선교회입니다.
파리외방전교회는 그간 4,300여 명의 선교사를 아시아 각국으로 파견했습니다. 그리고 170여 명의 순교자를 배출했습니다. 이들 중 12명이 한국에서 순교했고, 그중 10명의 순교자가 1984년 시성됐습니다. 20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선교사들이 현지에서 보낸 수명은 평균 3년이 넘지 못했다고 합니다. 순교로 인한 죽음도 있었지만 전염병, 기아, 강도 피습 등의 이유로 선교사로서의 짧은 생을 마감해야 했습니다.
나에게 세례를 주신 파리외방선교회의 백 요한 신부님은 지금 대전 거룩한 말씀의 회 수녀원에서 고령임에도 불구하고 원로사목자의 길을 걷고 계십니다. 지금 연세가 96세니까 한국에 오신지 벌써 69년이 넘었습니다. 인도에 발령을 받으시고 가시던 중 배 안에서 전쟁 중에 납치되고 살해된 사제들의 후임으로 발령 변경을 받아 한국에 오신 것입니다. 나는 신부님을 아버지로 여기며 살았고 지금도 아버지로 여기며 살고 있습니다. 신부님을 뵈올 때마다 오늘 복음 말씀이 생각납니다. 제자들을 파견하시면서 아무것도 가지고 가지 말고 오직 주님만 의지해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순교하려는 자세로 복음을 전하고, 순교하려는 자세로 하느님 나라를 선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살아야 하겠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셨습니다.>
▥ 에즈라기의 말씀입니다. 9,5-9
저녁 제사 때에, 나 에즈라는 5 단식을 그치고 일어나서, 의복과 겉옷은 찢어진 채 무릎을 꿇고 두 손을 펼쳐,
주 나의 하느님께
6 말씀드렸다. “저의 하느님, 너무나 부끄럽고 수치스러워서, 저의 하느님, 당신께 제 얼굴을 들 수가 없습니다.
저희 죄악은 머리 위로 불어났고, 저희 잘못은 하늘까지 커졌습니다.
7 저희 조상 때부터 이날까지 저희는 큰 잘못을 저지르며 살아왔습니다. 그리고 저희의 죄악 때문에 오늘 이처럼,
임금들과 사제들과 더불어 저희가 여러 나라 임금들과 칼에 넘겨지고,
포로살이와 약탈과 부끄러운 일을 당하도록 넘겨지고 말았습니다.
8 그러나 이제 잠깐이나마 주 하느님께서 은혜를 내리시어, 저희에게 생존자를 남겨 주시고,
당신의 거룩한 곳에 저희를 위하여 터전을 마련해 주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저희 눈을 비추시고,
종살이하는 저희를 조금이나마 되살려 주셨습니다.
9 정녕 저희는 종입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종살이하는 저희를 버려두지 않으시고,
페르시아 임금들 앞에서 저희에게 자애를 베푸시어 저희를 되살리셔서,
하느님의 집을 다시 세우고 그 폐허를 일으키도록 해 주셨고, 유다와 예루살렘에 다시 성벽을 쌓게 해 주셨습니다.”
축일9월 22일 성 이냐시오 (Ignatius)
신분 : 신부
활동 지역 : 산티아(Santhia)
활동 연도 : 1686 –1770년
같은 이름 : 이그나티오, 이그나티우스, 이냐시우스
산티아의 성 이냐시오는 1686년 7월 5일 북부 이탈리아 베르첼리(Vercelli) 지방의 산티아에서 태어났다. 그는 로렌조 마우리지오(Lorenzo Maurizio)라는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부유한 벨비소티(Belvisotti) 가문의 육남매 중 넷째로 자랐다. 그는 훌륭한 신부로부터 초기 교육을 받으며 그로부터 사제직에 대한 영감을 받았다. 1710년에 교구 신부로 서품을 받은 그는 6년 동안 사제 직무를 수행한 뒤 카푸친 수도회에 입회하였다. 그때 그를 이해하지 못하는 가족들과 본당 신자들의 비난을 받기도 했지만 성 이냐시오는 카푸친회에서 그가 그토록 갈망했던 내적인 평화를 아시시의 성 프란치스코(Franciscus, 10월 4일)를 따르는 생활 속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1717년 5월 24일 서원을 한 그는 장상들에게 순명하는 삶을 살았다. 그의 영적인 여정은 이탈리아 북부 사부아(Savoie) 지방에서 집집마다 돌아다니는 것으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복종을 넘어서 그의 형제들을 섬기는 것을 명예롭게 생각하였다. 그는 완전히 ‘주님의 의향’을 따랐다. 1727년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Torino-Monte)의 수도원으로 보내졌다. 이 공동체에서 그는 아버지와 같은 존재로 여겨졌고 예수님의 제자로서 보여줄 수 있는 모든 영적 지혜를 베풀었다. 그래서 신부들과 영성적으로 성숙한 이들 그리고 타락한 죄인들이 수도원으로 그를 찾아와 죄를 고백하고 영성지도를 받았다.
1731년에 그는 몬도비(Mondovi)의 수도원으로 파견되어 수도원의 총대리 겸 수련장을 담당하게 되었다. 그는 14년 동안 수련장으로서 자신의 지도에 맡겨진 수련자들이 주님의 진실한 추종자로 그리고 성 프란치스코의 순종적인 아들이 될 수 있도록 지도하는데 유일한 관심을 두었다. 성 이냐시오의 가르침은 두 기둥에 그 기반을 두고 있었다. 즉 수련자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사랑하는 것과 말보다는 행동으로 그들을 가르치는 것이 그것이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수련자들에게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함께 해 주었고, 그들의 양성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일로 여겼다. 1744년 그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눈병으로 인해 거의 실명 상태가 되었고, 그로 인해 수련소를 떠나 토리노로 돌아오게 되었다. 어느 정도 치료가 된 뒤에 그는 다시 활동 사도직으로 복귀할 수 있었다.
1743년부터 1746년까지 피에몬테(Piemonte) 지방에서 발생한 전쟁으로 인해 많은 희생자들이 생기고 질병이 돌기 시작하였다. 사르디니아(Sardinia) 왕국(사르디니아와 피에몬테)의 샤를 엠마누엘 3세(Charles Emmanuel III) 왕은 카푸친회 수도자들에게 병원에서 의료적이고 영성적인 지도를 부탁하였다. 그래서 성 이냐시오는 군종신부의 책임자로서 아스티(Asti), 비노보(Vinovo), 알레산드리아(Alessandria)의 병원에서 복음적인 사랑을 실천하며 2년 동안 활동하였다.
피에몬테 지방이 평화를 되찾았을 때 성 이냐시오는 토리노 몬테의 수도원으로 돌아와 생의 마지막 24년 동안 영적 지도자와 고해신부로서 지냈다. 그는 병든 이들을 찾아 다녔고 불쌍한 이들을 위해 돈과 먹을 것들을 구하러 다녔다. “낙원은 게으름뱅이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어서 일을 하자!”라고 줄곧 이야기하던 그는 1770년 9월 22일 토리노 몬테 수도원에서 선종하였다. 그는 수도자들과 평신도들을 포함한 모든 이들에게 거룩한 길을 안내하였고, 하느님으로부터 버려졌다고 느끼던 사람들을 자신의 말과 행동으로 다시 진정한 신앙에로 이끌었다. 그는 카푸친회 신부로서 특히 충성심, 검소함, 겸손함을 통해 성 프란치스코의 정신에 충실했다. 그는 영성적으로 병든 이들을 잘 이해할 수 있었기 때문에 ‘죄인과 고립된 이들의 아버지’라고 불렸다. 그는 1966년 4월 17일 교황 성 바오로 6세(Paulus VI)에 의해 시복되었고, 2002년 5월 19일 바티칸의 성 베드로 광장에서 교황 성 요한 바오로 2세(Joannes Paulus II)에 의해 성인품에 올랐다.
오늘 축일을 맞은 이냐시오 형제들에게 주님의 축복이 가득하시길 기도합니다.
야고보 아저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