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두려워하지 마라.” 하고 여러 번 말씀하십니다. 왜 그렇게 자주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셨을까?
인간이 얼마나 쉽게 불안해하고 흔들리는 존재인지를 아셨기 때문입니다. 미래에 대한 걱정, 건강에 대한 염려,
사람들의 시선, 실패에 대한 두려움…. 우리는 살아가면서 수많은 두려움 속에 살아갑니다.
그런 우리에게 오늘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참새 두 마리가 한 닢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한 마리도 아버지의 허락 없이는 땅에 떨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두려워하지 마라. 너희는 수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마태 10,29-31) 당시 참새는 아주 하찮고 값싼 새로 여겨졌습니다.
시장에서 몇 마리를 동전 몇 개에 살 수 있을 정도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그렇게 작은 참새 한 마리조차
하느님의 눈길 밖에 있지 않다고 말씀하십니다. 하물며 하느님의 자녀인 우리는 얼마나 더 소중한 존재이겠습니까?
그런데 우리는 종종 자신의 가치를 잊고 살아갑니다. 실패하면 스스로를 초라하게 여기고, 남과 비교하며 낙심합니다. 누군가에게 인정받지 못하면 마치 아무 가치 없는 사람처럼 생각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우리의 가치는 세상의 평가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께서 우리를 얼마나 사랑하시는가에 의해 결정됩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신 이유도 바로 그것입니다.
“너는 내게 그만큼 소중한 존재다.”라는 사랑의 증거입니다. 우리는 우연히 존재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느님께서 이름을 부르시며 사랑하시는 사람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은 두려움 속에서도 희망을 잃지 않습니다. 물론 믿는다고 해서 두려움이나 어려움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병이 생기지 않는 것도 아니고, 눈물이 없어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어떤 순간에도 하느님께서 우리를 홀로 버려두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린 시절 시골의 한밤중에 화장실 갈 때 방문을 열어두기만 해도 어머니가 지켜보고 있다고 믿고 두렵지도 무섭지도 않았고
안심했습니다. 아이들은 어두운 길을 걸을 때 부모의 손만 잡고 있어도 안심합니다. 길이 밝아서가 아니라, 함께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신앙도 그렇습니다.
인생길이 늘 평탄해서가 아니라, 주님께서 함께하신다는 믿음 때문에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두려워하지 마라.” 이 말씀은 단순한 위로가 아닙니다. “내가 너와 함께 있다.”는 약속입니다.
그리고 “너는 참새보다 훨씬 더 귀한 존재다.”라는 하느님의 선언입니다.
오늘 하루만이라도 나를 불안하게 만드는 걱정보다, 나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하느님을 더 크게 바라보면 좋겠습니다.
그리고 내가 소중한 존재이듯이, 내 곁의 사람들도 하느님께 귀한 존재임을 기억하며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두려움보다 사랑이 더 크고, 걱정보다 하느님의 돌보심이 더 크다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되었으면 합니다.
글 : 高峯湖 Peter 神父 |全州敎區
내 안의 프란치스코 교황님
저는 주로 신문에 글을 쓰며 살았지만, 틈틈이 어린이들에게 삶의 길잡이가 될 수 있는 분들을 소개하는 책들도 썼습니다.
마틴 루터 킹, 헬렌 켈러, 넬슨 만델라 같은 분들이 제가 소개한 분들입니다. 킹 목사나 헬렌 켈러는 저의 소개로 꽤 많은 우리나라 어린이와 만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그런 책을 몇 권 더 쓰면 인세로 노후 생활을 영위할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망상(?)까지
한 적도 있었습니다.
그렇다고 인세 욕심 때문에 이분들의 삶에 관심을 가졌던 것은 결코 아닙니다. 사회적 약자였던 그들이 추구하는 정의에 대해
공감했고, 그들이 정의를 추구하는 과정에서 겪은 좌절과 고통을 타자와의 연대와 화해로 승화시켜가는 모습에 마음이 끌렸기
때문입니다.
10년 전 프란치스코 교황님을 어린이에게 소개하는 책을 낸 이유도 기본적으로는 비슷합니다. 하지만 가톨릭 신자인 제게 이 책은 위의 책들과 달리 가톨릭교회에 대한 저의 믿음을 회복하고 좀 더 단련하려는 노력이기도 했습니다. 저는 초등학교 때 입교한 이래 가톨릭 신자라는 정체성을 저버린 적은 없습니다. 하지만 독실한 신자는 전혀 못 되었습니다. 교회가 우리 사회에서 제 역할을
다하지 못하는 데 대한 불만을 제 나태한 신앙생활의 핑계거리로 삼기도 했습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그런 제게 교회가 달라지리라는 희망을 주시고 저를 다시 교회로 부르신 분입니다.
‘가난한 이들을 위한 자비의 교회’를 지향으로 내세운 교황님은 2014년 한국을 방문해 세월호 희생자 유가족을 마음을 다해
위로하셨습니다. 그것을 정치적 행동으로 규정하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인간의 고통 앞에 중립은 없다.”며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이때부터 저는 그분이 쓰신 글과 그분에 대해 쓴 글을 찾아보았습니다. 그 결과 그분도 한때는 독선과 아집으로 지탄과 외면을
받은 적이 있었고, 가난하고 고통 받는 사람들 편에 서야 한다는 그분의 확고한 믿음은 그런 독선과 아집에 대한 철저한 반성과
통회의 결과임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로 이 점이 제가 삶이 아직 완결되지도 않으셨던 그분을 소개하는 모험을 감행하기로
마음먹은 이유였습니다.
이후 그분의 말씀과 행동은 제 삶에, 그리고 제 신앙생활에 버팀목이 되었습니다. 최근 몇 년 이런저런 일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인간은 단순히 삶이라는 정글에서 살아남기 위해서가 아니라, 역사를 만들어 가기 위해 창조되었다.”는 그분의 말씀이 저를
붙들어 주었습니다. 덕분에 끝까지 버틸 수 있었습니다. 그립습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프란치스코 교황님!
글 : 권태선 Mary | 放送文化振興會 理事長