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4년 11월부터 이듬해 1월 말까지 고되게 발품을 판 적이 있었습니다.
신학교 복학 전에 남들처럼, ‘체험-삶의 현장’ 같은 사회봉사를 해보고 싶어
무작정 찾아간 곳은 의정부 성모병원이었습니다.
간단한 면접 후, 이튿날 간호 보조사 일명 ‘오다리’ 사이에서
‘무덤’으로 통하는 응급실로 배정을 받아 내려갔습니다.
하루에도 수십 명의 환자와 보호자들, 의사와 직원들이 들락거리며 북새통을
이루는 응급실은, 그야말로 나 같은 병원 신참내기에게 상냥하게 말 붙이며
신경 쓸 겨를조차 없었던 철저한 ‘삶의 현장’ 그대로였습니다.
그렇게 정신없이 일주일이 지나고 나서야
병원 생활의 기본 가닥이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호스피스 대기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간밤에 새로 들어오고 빠져나간 환자들 명단과
응급실 물품과 약품을 인수받아 꼼꼼히 점검하는 것으로
응급실의 분주한 아침은 시작됩니다.
격월로 1일 2교대 낮 근무와 밤 근무도 해보았습니다.
월요일과 화요일에는 고질적인 ‘월요병’ 때문인지
작업장 안전 부주의로 손가락이 절단된 근로자들이 응급실로 실려 왔고,
수요일 오후부터는 싸움질에 머리가 터지고 뼈가 부러진 사람들,
금요일 저녁부터는 음주 운전 등 끔찍한 교통사고 중환자들이 쉴 새 없이
들어오곤 했습니다. 하루하루가 정말 긴장과 피곤의 연속이었습니다.
나는 그 많은 환자들 중 한 사람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나이는 40내 중반이었고, 길 이에 아사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가
어느 날 저녁 응급실로 간신히 실려 들어온 아저씨였습니다.
보호자가 없었던 그에게 병동 배정은 어려웠습니다.
몸에서는 심한 악취가 났고,
입을 열 때마다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힘든 숨소리를 토해냈습니다.
물 이외에는 아무것도 먹지 못했고, 옆구리를 뚫어
호스로 변을 받아낼 정도로 상태는 이미 악화되어 있었습니다.
수많은 환자들이 들어오고 빠져나가도 그 아저씨만은 몇 주째
응급실 한 구석에서 죽은 벌레처럼 누워있었습니다.
솔직히 처음에는 누구도 그 근처에 가기 싫어했지만
차츰 그 아저씨가 애처로워 보이기 시작했습니다.
말없이 새 시트로 갈아드리고
가끔 물을 떠다 그의 마른 입술도 축여드렸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습니다.
아저씨가 나를 부르더니 어디서 났는지 지저분하고 꼬깃꼬깃한
천 원짜리 지폐 한 장을 내보이며 배고프다는 시늉을 했습니다.
나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안 돼요!’ 라는 단호한 표정을 지었지만,
간곡한 부탁에 못 이겨 결국 간호사들의 눈치를 살피다가
비스킷을 하나 사다드렸습니다. 하루가 지나도 아저씨는
그 비스킷을 뜯지 않고 머리맡에 그냥 놓아두었습니다.
먹을 수도 없었지만 아예 처음부터 먹을 생각조차 없었던 모양입니다.
그 사이 병원 측에선 그의 퇴실이 소리 없이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그를 복지 계통의 병원이나 다른 시설로 보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저씨는 ‘꽃동네’ 라는 이름을 이야기했고,
원목실의 도움으로 그의 최종 거처가 간신히 타결을 보았습니다.
내일이면 더 이상 볼 수 없는 아저씨가 더욱 처량해 보였습니다.
나는 마땅히 해드릴 것이 없어 망설이다가 아저씨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지금 가장 하고 싶은 것이 뭐예요?” 그분의 대답은 뜻밖이었습니다.
그것은 비스킷도 아니었고 ‘날 죽게 내버려 달라!’ 는 하소연도 아니었습니다.
“한 번만이라도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고 싶다”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저는 인턴 숙직실에 붙어 있는 조그만 화장실로 모시고 가
비닐봉지를 상처 난 옆구리에 두른 다음 더운물로 목욕시켜 드렸습니다.
얼마나 오랫동안 몸을 돌보지 않았던지
앙상한 뼈마디 사이로 군데군데 심한 욕창이 드러났습니다.
머리를 감겨드리다가 결국 그의 등 뒤에서 왈칵 눈물을 쏟고 말았습니다.
다음 날, 아저씨는 구급차에 옮겨드리면서
성냥개비 같은 그의 야윈 손을 말없이 붙잡아드렸습니다.
고통으로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아이 같은 미소가 잠시 피어올랐다가 이내 사라졌습니다.
이제 그분은……. 더 이상 나와 무관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 신앙도 그렇습니다.
나 혼자 독불장군처럼 아픔과 고뇌를 이겨내는 것이
신앙의 전부는 아니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습니다.
우리는 ‘보이지 않는 꾼’으로 서로서로에게 연결되어 있습니다.
복음에서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의 만남은
초반부터 민망하다 못해 안타깝기 그지없습니다.
정작 아프고 괴로운 장본인은 마귀 들린 그녀의 딸이었지만,
이 이방인 어머니는 주변 사람들의 냉대와 모욕을 묵묵히 참아내며
사랑하는 딸을 위해 신앙으로 주님께 매달리고 있습니다.
모성에 신앙을 더한 그녀의 모습이 눈물 나도록 아름다워 보입니다.
아파하고 그 아픔에 동참하는 두 모녀의 절박한 심정을 헤아리며
신앙도 운명 공동체 속에서 새롭게 피어날 수 있음을 생각해 봅니다.
“여인아! 네 믿음이 참으로 크구나.
네가 바라는 대로 될 것이다.”(마태 15,28).
예수님은 아픈 이도 치유하시지만 그와 직. 간접으로 연결된 사람들의
마음 씀씀이도 놓치지 않으십니다. 때론 나 자신이 용서받지 못할
몫까지도 나와 보이지 않는 사랑의 끈으로 연결된 그들이 대신
나누어지곤 하기 때문입니다. 진정한 신앙은
그래서 ‘나’의 틀을 깨고 항상 ‘너’를 향해 열려 있습니다.
우리를 대하시는 예수님의 마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너’가 아프고 괴로우면 ‘나’도 아프고 괴로운 것이 신앙이고 사랑입니다.
‘너’가 불편해 하면 ‘나’의 마음도 동시에 불편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병든 ‘너’의 쾌유와 행복을 위해 오늘도 우리는
사랑의 치유를 베푸시는 그분께 신앙으로 매달리는 것입니다.
주변의 냉대와 모욕의 틈바구니를 뚫고서라도 말입니다.
수원 가톨릭대학 교수
박현창 신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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