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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론과 묵상

2009/9/8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작성자맹물|작성시간09.09.08|조회수14 목록 댓글 0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성모님의 탄신 축일은 동방 교회에서 먼저 시작되었다. 5세기 말에 세워진 예루살렘의 ‘마리아 성당’의 봉헌일인 9월 8일을 성모님의 탄생일로 잡으면서 이 축일이 시작되었다. 성경에는 성모님의 탄생에 대한 언급이 없지만, 성모님에 대한 신심은 초대 교회 때부터 믿어 온 중요한 신심 가운데 하나였다.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을 기쁘게 경축하세. 정의의 태양, 우리 하느님 그리스도, 그분에게서 태어나셨네.
<대영광송>
자비로우신 하느님, 복되신 동정녀께서 성자를 낳으시어 저희 구원이 시작되었으니, 그분의 탄생 축일을 지내는 저희에게 천상 은총의 선물을 내려 주시어, 길이 참평화를 누리게 하소서. 성부와 성령과 …….

미카 예언자는 이스라엘을 다스릴 영도자가 베들레헴에서 나타날 것이라고 한다. 지금은 보잘것없는 고을이지만, 그때에는 막강한 고을이 될 것을 예언한다. 주님께서는 당신의 능력으로 ‘오시는 분’을 보호하시고 지켜 주실 것이다. 그는 위대한 목자가 될 것이다(제1독서). 요셉은 마리아의 일을 전혀 몰랐다. 몰랐기에 고뇌하며 괴로워했다. 마침내 자신을 포기했을 때, 천사가 나타나 모든 사실을 알려 주었다. 하느님의 사람은 먼저 시련을 겪는다. 그리고 그 시련을 통해 주님의 뜻을 받아들이게 된다(복음).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
▥ 미카 예언서의 말씀입니다. 5,1-4ㄱ<또는 로마 8,28-30>
주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신다.
1 “너 에프라타의 베들레헴아, 너는 유다 부족들 가운데에서 보잘것없지만, 나를 위하여 이스라엘을 다스릴 이가 너에게서 나오리라. 그의 뿌리는 옛날로, 아득한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2 그러므로 해산하는 여인이 아이를 낳을 때까지,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리라. 그 뒤에 그의 형제들 가운데 남은 자들이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돌아오리라. 3 그는 주님의 능력에 힘입어, 주 그의 하느님 이름의 위엄에 힘입어 목자로 나서리라.
그러면 그들은 안전하게 살리니, 이제 그가 땅 끝까지 위대해질 것이기 때문이다. 4 그리고 그 자신이 평화가 되리라.”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시편 13(12),6ㄱㄴ.6ㄷ(◎ 이사 61,10ㄱ)
<선창자가 후렴을 선창하면 교우들은 후렴을 받아 반복한다.>
◎ 저는 주님 안에서 크게 기뻐하리이다.
<이어지는 시편은 선창자가 하고 교우들은 후렴을 반복한다.>
○ 저는 당신 자애에 의지하며, 제 마음 당신 구원으로 기뻐 뛰리이다. ◎
○ 은혜를 베푸신 주님께 노래하리이다. ◎

복음 환호송
◎ 알렐루야.
○ 거룩하신 동정 마리아 님, 복되시나이다. 정의의 태양, 그리스도 우리 하느님을 낳 으셨으니, 온갖 찬미를 마땅히 받으시리이다.
◎ 알렐루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 마태오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1-16.18-23<또는 1,18-23>
짧은 독서를 할 때에는 < > 부분을 생략한다.
<1 다윗의 자손이시며 아브라함의 자손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족보이다.
2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고, 이사악은 야곱을 낳았으며, 야곱은 유다와 그 형제들을 낳았다. 3 유다는 타마르에게서 페레츠와 제라를 낳고, 페레츠는 헤츠론을 낳았으며, 헤츠론은 람을 낳았다. 4 람은 암미나답을 낳고, 암미나답은 나흐손을 낳았으며, 나흐손은 살몬을 낳았다. 5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즈를 낳고, 보아즈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았다. 오벳은 이사이를 낳고, 6 이사이는 다윗 임금을 낳았다.
다윗은 우리야의 아내에게서 솔로몬을 낳고, 7 솔로몬은 르하브암을 낳았으며, 르하브암은 아비야를 낳고, 아비야는 아삽을 낳았다. 8 아삽은 여호사팟을 낳고, 여호사팟은 여호람을 낳았으며, 여호람은 우찌야를 낳았다. 9 우찌야는 요탐을 낳고, 요탐은 아하즈를 낳았으며, 아하즈는 히즈키야를 낳았다. 10 히즈키야는 므나쎄를 낳고, 므나쎄는 아몬을 낳았으며, 아몬은 요시야를 낳았다. 11 요시야는 바빌론 유배 때에 여호야킨과 그 동생들을 낳았다.
12 바빌론 유배 뒤에 여호야킨은 스알티엘을 낳고, 스알티엘은 즈루빠벨을 낳았다. 13 즈루빠벨은 아비훗을 낳고, 아비훗은 엘야킴을 낳았으며, 엘야킴은 아조르를 낳았다. 14 아조르는 차독을 낳고, 차독은 아킴을 낳았으며, 아킴은 엘리웃을 낳았다. 15 엘리웃은 엘아자르를 낳고, 엘아자르는 마탄을 낳았으며, 마탄은 야곱을 낳았다. 16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
18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이렇게 탄생하셨다. 그분의 어머니 마리아가 요셉과 약혼하였는데, 그들이 같이 살기 전에 마리아가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한 사실이 드러났다. 19 마리아의 남편 요셉은 의로운 사람이었고 또 마리아의 일을 세상에 드러내고 싶지 않았으므로,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기로 작정하였다.
20 요셉이 그렇게 하기로 생각을 굳혔을 때, 꿈에 주님의 천사가 나타나 말하였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그 몸에 잉태된 아기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21 마리아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고 하여라. 그분께서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실 것이다.”
22 주님께서 예언자를 통하여 하신 말씀이 이루어지려고 이 모든 일이 일어났다. 곧, 23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하신 말씀이다. 임마누엘은 번역하면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뜻이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강론 후 잠시 묵상한다.>
주님, 저희가 기쁨에 넘쳐 복되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을 기념하고 이 제물을 바치며 간절히 비오니, 동정녀 몸에서 사람으로 태어나신 성자께 구원을 받게 하소서. 성자께서는 …….
이사 7,14; 마태 1,21 참조
보라, 동정녀가 아들을 낳으리니, 그분은 당신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시리라.
<그리스도와 일치를 이루는 가운데 잠시 마음속으로 기도합시다.>
주 하느님, 천상 성사로 교회의 힘을 길러 주셨으니, 저희가 온 세상의 희망이며 구원의 서광이신 동정 마리아의 탄생일을 맞이하여 더욱 기뻐하게 하소서. 우리 주 …….
요셉은 남모르게 마리아와 파혼하려 합니다. 복음은 이 사실을 담담히 이야기합니다. 그런 결정이 있기까지 요셉은 고뇌했을 것입니다. 오죽했으면 ‘본인 스스로’ 떠날 결심을 했겠습니까?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파혼에는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가 있습니다. 하지만 한 번은 ‘마음먹고’ 참아야 합니다. 요셉 성인에게 오셨던 천사를 기억하며 ‘속도’를 조절해야 합니다.
작은 생각이 ‘큰 생각’을 이해하려면 힘이 듭니다. 자신의 능력을 벗어나기 때문입니다. 오해는 그렇게 해서 생겨납니다. 요셉은 ‘자기중심’으로 생각했습니다. 당시로서는 어쩔 수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그러나 천사의 이끄심을 만나자, ‘하느님 중심’으로 전환했습니다. 이후 그는 사람이 바뀝니다. 오해는 저절로 없어졌습니다. 은총의 철저한 개입이었습니다.
지금 이해할 수 없으면 한 번쯤은 ‘건너뛰어 봐야’ 합니다. 상대의 입장에서 생각해 보는 것이지요. 다른 시각에서 바라보려 애쓰는 것이지요. 그것은 삶의 ‘닫힌 공간’을 여는 행동입니다. 그 자체만으로도 변화를 가져오는 행위입니다.
시련을 견디어 냈기에 요셉은 성가정의 일원이 되셨습니다. 성숙한 신앙인 역시 먼저 고통을 겪습니다. 하지만 주님께서는 금방 천사를 보내 주십니다. “다윗의 자손 요셉아, 두려워하지 말고 마리아를 아내로 맞아들여라.” 이 말씀을 하셨던 천사는 우리에게도 반드시 오십니다.

 

 

 

 

오늘은 예수님을 낳으신 마리아님의 생일을 기념하는 날이다. 성모님은 우리에게 가장 값진 선물을 주신 분이시다. 성모님의 탄생은 세상에 전혀 드러나지 않았다. 그러나 그분의 탄생은 인류에게 커다란 희망을 주는 계기를 마련했다. 그것은 바로 성모님의 삶 때문이리라. 그러기에 성모님의 탄생에 대해서보다 성모님의 삶을 조명해 보는 것이 나의 삶에 희망을 더하게 되리라고 본다.
사실 오늘 복음에서 읽어 내려가기조차 힘든 예수님의 족보를 나열하고 있다. 그 끝에 야곱의 아들인 요셉과 혼인한 마리아한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고 전한다. 그렇지만 곧이어 마리아의 예수님 잉태는 성령으로 말미암은 일이라고 한다. 그렇게 보면 요셉과 예수의 혈연 사이에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일이다. 그래서 족보에 대한 문제를 제기할 수도 있겠지만 중요한 것은 인간 구원을 위해 하느님께서 성령을 통해 개입하시고 이루어 가신다는 것이다.

여기서 마리아의 위대함을 볼 수 있다. 성모님은 성령께 자신의 마음을 활짝 열어놓으신 분이시다. 그리하여 가브리엘 천사를 통해 받은 하느님의 뜻을 즉시 수용하여 이 세상에 태어나시고자 하는 구세주의 어머니가 되는 것이다. 물론 여기서 성모님께서 걸으신 길을 다 열거할 수는 없지만 한마디로 요약한다면 ‘하느님의 뜻에 자신을 완전히 바치신 분’이라는 것이다.
예수님께서도 “언제나 아버지의 뜻만을 하신다.”라고 하셨으며, “아버지의 뜻이 자신의 양식”이라고까지 하셨다. 또 스승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 얘기를 하기 위해 밖에서 기다린다고 했을 때 나의 어머니, 형제자매는 아버지의 뜻을 행하는 사람이라고 하시지 않았던가. 이처럼 성모님께서도 언제나 하느님의 뜻만을 충실하게 행하신 분이심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십자가 아래 외로이 서 계시면서 아들이 아버지의 뜻을 따르기 위해 죽어가는 모습을 바라보며 철저하게 하느님의 뜻에 동참하시고 구원의 길을 함께하셨다. 그러기에 성모님의 탄생축일을 지내면서 성모님께서 계셨기에 우리의 구원자이신 예수님께서 우리와 같은 인간이 되시는 길을 열어주셨음을 묵상하고, 또 성모님께서 예수님을 양육하시면서 하느님의 구원 사업을 완성하고자 자신의 모든 것을 내어놓고 동참하신 성모님의 삶을 닮아가도록 노력해야겠다.

김석인 신부(포콜라레한국본부)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마태오 1장 1-23절



“보아라, 동정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고 하리라.”


<존재의 기반, 존재의 이유>


   자녀를 위해 철저하게 헌신(獻身)하는 부모님들을 만납니다. 자신의 인생 안에 자신은 애당초 없습니다. 모든 안테나가 오로지 자녀에게로 맞춰져 있습니다. 자신에게 주어진 모든 에너지 전부를 자녀에게 쏟아 붓습니다.


   ‘도대체 인생 왜 저렇게 사나?’ 해도 아랑곳 하지 않습니다. 그저 자녀 앞길 잘 풀리는 것만이 소원입니다. 자녀 인생만 잘 풀린다면 자신의 인생은 어떻게 되든 상관없습니다. 자녀를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도 문제없습니다.


   약간은 어리석어 보이고, 약간은 무모해 보이는 그분들의 삶에서 오늘 우리가 기억하는 성모님의 흔적을 발견합니다.


   성모님, 그분 존재의 이유는 바로 아들 예수님이셨습니다. 성모님, 그분 존재의 기반 역시 아들 예수님이었습니다. 성모님의 운명은 예수님의 운명에 초점이 맞춰져 있었습니다.


   자녀에게 목숨 바치는 부모님들, 자녀를 얼마나 끔찍이도 챙기는지, 자녀가 가는 곳 마다 따라다니는 어머니들이 계십니다.


   어머니의 스케줄은 오직 자녀에게 달려있습니다. 등교시간이 오면 만사를 제쳐두고 운전기사 노릇을 자처합니다. 학교 문 앞까지 태워줍니다. 끝나는 시간 맞춰 정문 앞에 차를 대령합니다. 곧바로 학원으로, 또 다시 집으로...자녀가 원하는 것은 뭐든 ‘척척’ 입니다. 이 세상에 하녀도 그런 하녀가 없습니다.


   성모님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성모님은 그야말로 ‘주님의 종’이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그 어떤 희생이나 고통도 달게 참아내셨습니다. 예수님을 위한 것이라면 그 어떤 노고도 힘들지 않으셨습니다.


   뿐만 아니었습니다. 성모님의 Fiat(순명)은 단 한번으로 족하지 않았습니다. 다양한 상황에 따라 부단한 ‘예!’가 필요했습니다.


   시시각각으로 성장해 가신 예수님에 따라 성모님 역시 성장해 가셔야 했습니다. 나자렛에서의 오랜 준비를 끝낸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위해 길 떠나실 때, 성모님 역시 또 다른 먼 신앙의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공생활을 무사히 마치신 예수님께서 지상생활을 마무리 짓고 아버지께로 향해 가실 때, 성모님 역시 또 다른 기약 없는 먼 길을 떠나셔야 했습니다.


   한평생 요구되었던 지속적인 떠남의 삶, 수시로 요청되었던 지속적인 자기포기의 삶이 바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단 한번이 아니라 평생 계속되었던 Fiat(예!)의 삶, 끝도 없이 요구되었던 변화와 쇄신의 삶, 안주하지 않고, 고집하지 않았던 영원한 이방인의 삶이 바로 성모님의 삶이었습니다.


   한 평생 아들 예수님과 긴밀히 연결되어 있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깨어날 때나 잠이 들 때나, 길을 갈 때나 집에 있을 때나, 기쁠 때나 슬플 때 언제든 어떻게 해서든 예수님과의 일치 속에 계셨던 분이 성모님이셨습니다.

 

    †살레시오회 수도원 수련원장  양승국 스테파노 신부† 

                        

 

 

 

    ◆ 요셉 신부님의 매일 복음 묵상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 “마리아, 당신 아드님의 딸”

 

 

 

오늘 조금 어렵거나 이상하게 들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그러나 차근차근 잘 묵상해보시면 성모님의 참 모습을 더 깨닫게 되시리라 믿습니다.

 

요한 세례자는 그의 어머니 태중에서 마리아의 인사를 들었을 때 성령으로 가득 차 기뻐 뛰놀았다고 합니다. 어머니가 성령으로 가득 차니 태중의 아들도 성령으로 가득 차고 성령의 열매인 기쁨을 이미 태중에서부터 누렸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이미 당신 어머니의 태중에서 당신의 선구자로 선택된 요한을 물과 성령으로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것을 의미합니다. 요한 세례자는 이미 태중에서부터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 하느님께 봉헌된 나지르인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여자의 몸에서 난 사람 중에 세례자 요한보다 큰 사람은 없다고 하셨던 것입니다.

이렇게 태중에서는 예수님께서 요한을 영적으로 새로 나게 하셨지만 성장하셔서는 그 상황이 역전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요한을 찾아가셔서 당신에게 세례를 베풀어 줄 것을 청합니다. 요한은 예수님께 물과 성령으로 세례를 줌으로써 그리스도로 다시 태어나게 하고 바로 그 때부터 요셉의 아들이 아닌 하느님의 아들로서 공생활이 시작됩니다. 이번엔 세례자 요한이 예수님을 새로 태어나게 하신 것입니다.

 

이 두 분이 서로 상대를 탄생시키는 모습은 우리 그리스도교 안에서 상상할 수 없는 중요성을 지닙니다.

먼저 삼위일체 안에서부터 이런 현상이 일어나기 시작해서 모든 인간관계 안에서도 일어나고 있고 이렇게 서로 새로 태어나게 하는 삶이 아니라면 아직은 삼위일체 하느님의 영원한 생명에 들어선 것이 아닙니다.

하느님은 성령 안에서 성자를 태어나게 하십니다. 그러나 성자가 없었다면 아버지도 있을 수 없고 성령님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따라서 서로서로가 존재하기 위해 상대를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아버지가 아들이 없어서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보낼 대상이 없다면, 또 아들이 아버지께 받은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 돌려드리지 않는다면 아버지도, 아들도, 성령님도 존재하실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사랑이신데 각자 혼자서는 사랑이 이루어지지 않기 때문입니다.

사랑이란 아버지께서 아드님께 당신의 모든 것인 성령님을 보내심으로써 아들을 새로 태어나게 하시는 것이고, 또 아들이 당신이 받은 성령님을 다시 아버지께 보내심으로써 아버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움직임입니다. 즉, 사랑 자체가 상대를 새로 태어나게 하는 원인이요 목적인 것입니다.

하느님이 사랑이 아니라면 하느님도 세상 어떤 것도 존재할 수 없는 것처럼, 그 새로 태어나고 새로 탄생시키는 움직임이 없는 누구도 하느님의 생명에 참여할 수 없는 것입니다.

 

부모는 자녀가 생기기 전부터 자녀를 사랑합니다. 물리적 시간이 아닌, ‘이성적인 시간 안에서’ 아버지와 성령님은 성자께서 생기기 전부터 그 분을 사랑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성자를 통해서만이 아버지는 참 아버지가 되고 성령님은 참 사랑이 되시기 때문입니다.

결혼을 한 두 사람은 그 사랑 안에 충분한 행복을 누리지만 그 사랑의 열매를 바라고 상대를 사랑하는 만큼 앞으로 생기게 될 자녀를 사랑합니다. 마찬가지로 성부와 성자께서도 성령 안에서 사랑하시며 새로 탄생될 열매를 이미 사랑하고 계셨습니다.

마치 하와가 아담에게서 나와 한 몸을 이루듯이 그리스도께로부터 나와 한 몸을 이루기 위해 태어나신 분이 계셨으니 바로 ‘마리아’입니다. 우리는 흔히 마리아가 예수님의 어머니라고 알고 있지만, 그 이전에 성자께로부터 마리아가 태어나신 것입니다. 이에 교회 안에서 자주 마리아는 “당신 아드님의 딸”로 표현되기도 합니다. 마리아는 하느님의 창조 이전에 하느님으로부터 사랑을 받은 첫 열매입니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사랑을 위해서 태어나게 하셨듯이 마리아도 하느님으로부터 사랑받기 위해 창조된 것입니다.

마리아 또한 그리스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교회를 탄생시키십니다. 그러므로 마리아를 “교회의 어머니”라 불립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와 마리아의 열매로 탄생 이전부터 그분들로부터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교회는 마리아와 한 몸을 이룸으로써 그리스도와 일치하게 됩니다. 마치 마리아께서 성자와 한 몸을 이루어 아버지와 일치하시는 것과 같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의 족보가 나옵니다. 가만히 살펴보면 ‘아브라함은 이사악을 낳았고 이사악은 야곱을 나았으며...’ 라고 끝까지 가다가 “야곱은 마리아의 남편 요셉을 낳았는데,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라고 불리는 예수님께서 태어나셨다.”라고 끝을 맺습니다.

이스라엘 족보에서 여자는 빠지는 것이 당연하고 그래서 ‘요셉이 예수를 낳았다.’가 되어야 하는데 느닷없이 ‘마리아에게서 그리스도가 나셨다.’고 여자가 족보에 들어가고 예수님께서 스스로 태어나신 것처럼 쓰고 있습니다.

이는 예수님이 수동적으로 나신 것이 아니라 스스로 여자를 통하여 세상에 오셨다는 의미와 성모님에게서 예수님이 탄생하시는데 요셉과의 부부관계에서 탄생하신 것이 아님을 의도적으로 보여주기 위해서 그렇게 쓴 것입니다.

그리스도는 성모님께서 하느님과 일치하여 나셨으며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루는 교회의 머리가 되셨습니다. 모든 교회의 신앙인들은 그리스도의 모범을 따르며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루고 성모님과 한 몸을 이룸으로써 결국 성령 안에서 성자와 성부와 한 몸을 이룹니다. 그리스도는 인간과 하나 되기 위해 성자께서 마리아께로부터 육신을 취하신 분이십니다. 성자께서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그리스도가 될 수 없으셨던 것처럼, 우리들도 성모님을 통하지 않고서는 참 성자를 만날 수 없습니다.

 

오늘 성모님의 탄생을 기념하는 날입니다. 마리아께서 요아킴과 안나를 부모님으로 두고 있지만 그 분의 참 부모님은 하느님이십니다. 그 분만이 성자께로부터 직접 창조된 첫 번째 열매이고 그래서 그 뒤에 오는 아담과 하와의 원죄에 물들지 않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그 분은 성자께로부터 태어나셨지만 다시 그리스도를 탄생시키십니다. 마치 예수님과 요한이 서로를 탄생시키셨던 것처럼 성자와 마리아는 서로를 탄생시키신 것입니다.

부부가 혼인하여 살다보면 서로 변해갑니다. 한 사람만 변하는 일은 없습니다. 왜냐하면 사랑은 서로를 새로 태어나게 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누구나 하느님 안에서 이웃의 어머니가 되고 또 이웃의 자녀가 되기도 합니다. 그래서 관계가 중요하고 사랑으로만 새로 날 수 있는 것입니다.

 

 

 

빠다킹 신부와 새벽을 열며

2009년 9월 8일 복되신 동정 마리아 탄신 축일
 
 
 
Behold, the virgin shall be with child and bear a son,
and they shall name him Emmanuel,

which means “God is with us.”
(Mt.1.23)
 
 
제1독서 미카 5,1-4ㄱ
복음 마태오 1,18-23
 
 
진주조개라고 있지요. 아름답고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내는 조개입니다. 그렇다면 이 진주는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일까요? 솔직히 제가 좀 무식해서 잘 몰랐습니다. 그냥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생기는 것이 진주인 줄 알았지요. 하지만 진주는 조개가 모래알 같은 자극물에 의해 몸속에 상처가 생겼을 때, 그에 대한 내부반응에 의하여 만들어지는 것이랍니다. 즉, 상처 회복에 필요한 온갖 성분이 상처 입은 부분으로 급히 보내지고, 오랜 시간 동안 상처를 치유하다가 마지막으로 얻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라는 것이지요.

상처 입은 조개가 그 상처를 아물게 하기 위해 노력하는 과정 속에서 영롱한 진주를 만들어낸다는 것에 깊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사실 상처 입은 조개의 아픔이 얼마나 컸을까요? 그러나 그 아픔에 대해서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이겨내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 그 결과 진주라는 영광을 생산할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들 각자에게도 진주가 겪은 것과 같은 상처와 아픔이 삶 안에 분명 존재합니다. 그렇다면 그 고통과 아픔을 과연 어떻게 대하고 있을까요? 진주조개처럼 말없이 스스로 이겨내기 위해 노력하고 있나요? 아니면 쉽게 포기하고 좌절하면서 결국은 남에 대한 불평과 불만 속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것이 아닐까요?

상처와 아픔을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만이 진주와 같은 영광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오늘 탄신 축일을 지내는 성모님의 삶에서 분명히 발견할 수 있습니다.

복음에도 나오듯이 성모님의 삶은 상처와 아픔이 계속된 삶이었습니다. 당시의 사람들이 도저히 인정하지 못하는 처녀의 몸으로 아기를 잉태해야 했으며, 첫아기를 허름한 마구간에서 낳아야만 했지요. 또한 산후 조리도 하지 못하고 이집트로 피난가야 했고, 이집트 피난에서 돌아온 뒤에도 평생을 부유하고 안정되게 산 것이 아니라 어렵게 생계를 이어가며 힘들게 사셔야만 했습니다. 이것도 부족해서 하나밖에 없는 아들이 서른 살이 되어 집을 나갔고,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미쳤다’라고 합니다. 그리고 결국은 사랑하는 아들이 십자가의 못 박혀 죽는 장면을 직접 보았고, 죽은 아들을 당신의 품으로 안아야 하는 아픔을 겪으셔야만 했습니다.

이러한 아픔과 상처를 견디어 내기가 쉬울까요? 그러나 성모님께서는 모두 이겨내셨습니다. 그래서 천상모후의 관을 쓰실 수 있었던 것이고, 우리 모두의 어머니라고 불림을 받으시게 되었습니다.

이제 상처받고 아파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사실 이 세상에 상처받고 아파하지 않는 사람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 상처와 아픔이 나에게 진주와 같은 영광을 주기 때문에 끝까지 참고 견디어 내는 인내가 필요합니다. 이러한 인내를 보여주신 성모님께서 우리 모두의 어머니가 되어 우리와 함께 하신다고 합니다. 따라서 성모님과 함께 하면서 진주와 같은 영광을 만들어 내시길 바랍니다.



부지런한 사람에게는 모든 것이 쉽고 게으른 자에게는 모든 것이 어려운 법이다.(벤자민 프랭클린)




행복한 오늘을 위하여(민주현, ‘가슴에 묻어둘 수 없는 사랑’ 중에서)

세상을 사노라면
둘이지만 하나임을 느낄 때가 종종 있다.
부부 사이에서, 친구 사이에서,
교우 사이에서...

마치 하나의 막대기 양 끝을
잡고 있었던 것을 발견하듯,
외모는 달라도 생각이 같을 때
그런 순간을 느낀다.
살맛나는 순간이기도 하다.

내가 행복할 때 남을 행복하게 하는 것처럼,
내가 슬프면 그 끝을 잡고 있는
상대도 슬프기에, 되도록이면
나는 언제나 행복해야 한다.

어떤 이유를 대서라도 행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 해야 한다.
오늘 하루의 행복을 위하여 목숨을 걸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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