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 뮤지컬 ,화제의 뮤지컬 작곡가
출처 : 객석
음악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의 흥행사
뮌헨 국립 오페라 연출가 마티아 세크의 조사에 의하면 91/92시즌 동안 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에서 공연된 뮤지컬은 7천6백여 편에 이른다. 뮤지컬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나라에서 한 해 동안 올려진 뮤지컬 공연이 이러할진대, 뮤지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 영국의 웨스트엔드를 위시한 전세계 극장에서 한 해 동안 올려지는 뮤지컬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것이다. 뮤지컬은 이제 전세계를 통해 가장 매력있는 공연 장르가 되었고,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굳혔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는 한 인터뷰에서 "브로드웨이 연극을 비롯한 미국의 연극 문화가 죽어가고 있다. 연극이 이렇듯 황폐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대형 상업 뮤지컬의 극장 잠식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다. 70년대 이후 다시 뮤지컬 붐이 일기 시작한 영국은 현재 뮤지컬의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웨스트엔드에 있는 극장의 반 가까이가 뮤지컬을 상영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정착시킨 제롬 컨과 리처드 로저스
뮤지컬은 오페라·오페레타·코믹 오페라·오페라 부파·보드빌·판토마임·발레 등 수많은 장르들이 혼합되어 새롭게 탄생한 음악극으로, 영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그 첫작품으로 1728년 존 게이의 발라드 오페라 '거지 오페라'를 꼽는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뮤지컬 형태의 발전은 작곡가 설리번과 대본작가 길버트의 공동작품인 '마법사'가 런던 스트랜드의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한 1877년 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영국 군악학교 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설리번은 황실 성가대원을 거쳐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14세 때 새로 신설된 멘델스존 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그가 뮤지컬에 관심을 가진 것은 1866년 왕립음악원 교수로 부임할 즈음으로, 그 이듬해 '콕스 앤 복스'를 발표하며 뮤지컬 작곡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뮤지컬 작업은 1871년 대본작가 길버트를 만나면서 본격화되었다. 길버트-설리번 콤비는 20여 년에 걸쳐 영국 뮤지컬 무대를 압도했으며, 이들 콤비가 만든 '배심판사' '마법사' '군함 피아포어' '펜자스의 해적' '미카도' '곤돌라의 뱃노래'등은 아직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이 시절, 다른 한쪽에서는 조지 에드워드가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으며 런던 게이어드 극장에서 뮤지컬 코미디를 정착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영국 뮤지컬은 자연히 식민지국이었던 미국으로 전파됐다. 1750년 '거지 오페라'의 미국 공연을 계기로 점차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866년에 이르게 되면 미국인에 의한 뮤지컬이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브로드웨이 니블로스 가든에서 공연된 '블레이크 크루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최초로 댄스가 삽입된 뮤지컬 코미디로 미국 뮤지컬을 태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사실 미국 뮤지컬에 춤이 삽입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당시 뉴욕 최고의 극장이었던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는 프랑스 발레단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극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공연이 무산됐다. 그 즈음 흥행에 부진을 면치 못하던 '블레이크 크루크'제작팀은 뮤지컬 공연에 프랑스 발레를 삽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발레도 공연하고 뮤지컬도 살려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미국의 낙천주의와 도덕성·휴머니즘·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내용에 화려한 의상과 무용수들의 율동적인 동작이 합쳐진 이 뮤지컬은 순식간에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롱런 기록을 세웠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유럽의 영향과 자국내 작곡가들의 창작 열기가 고조되면서 미국식 뮤지컬을 완성시켜나갔다. 그 선구자적인 인물이 '쇼 보트'로 유명한 제롬 컨(1885∼1945)이다.
가구상의 아들로 태어난 제롬 컨은 고등학교 시절에 오르간을 배우면서 창작에 재능을 보였다. 뉴욕 음악원을 나와 독일 유학 후 극장 보조 작곡가로 일하던 그는 1914년 '유타에서 온 처녀'를 위해서 작곡한 '그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의 성공으로 뮤지컬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다.
때를 같이해 극작가 가이볼톤·우데하우스가 그의 작업에 합류, 이들은 1920년에 복잡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미국 뮤지컬 '샐리'를 발표했고, 곧이어 '서니'(1925)를 내놓았다. 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이 두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제롬 컨을 한순간에 미국 뮤지컬 작곡계의 대부로 올려놓았다.
제롬 컨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 사람은 대본작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다. 1926년부터 같이 작업을 시작한 컨-해머스타인 콤비는 드디어 1927년에 '쇼 보트'를 탄생시켰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미국 뮤지컬 음악은 오페라적 경향에서 벗어나 대중화되면서 따라 부르기 쉬운 음악으로 바뀌었다. '쇼 보트'가 성공을 거둔 이유도 공연을 보기 전에 먼저 관객들이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쉬운 음악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곡이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와 '올 맨 리버'이다. 해머스타인이 에드너 파버의 장편 소설을 각색, 작사까지 맡은 '쇼 보트'는 음악뿐만 아니라 미국 풍토와 사회·인종 문제 등 현실문제를 처음으로 뮤지컬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20세기 초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대변해 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롬 컨은 이외에도 '로버타'를 비롯한 여러 편의 뮤지컬과 수십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대표적인 영화음악으로는 '오늘밤 당신을 만나는 법'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스윙타임'등이 있다. 이렇듯 많은 히트작을 내놓은 제롬 컨은 헐리우드로 자리를 옮긴 이후 술로 인한 정신건강의 악화로 '백년째의 여름'을 채 끝내지 못하고 1945년 가을 60세를 일기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제롬 컨의 사망과 함께 해머스타인은 또 다른 콤비를 만난다. 평생 동업자가 된 작곡가이자 대본작가·프로듀서·작사가인 리처드 로저스 (1902∼1979)이다.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고 그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던 로저스는 18세 때인 1920년 '불쌍한 부잣집 딸'로 브로드웨이에 등장했으며, 대본작가 로렌츠 허트와의 합작품 '개릭 게이어티즈'(1925)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그후 이들은 '걸 프랜드' '코네티컷의 양키' '나는 천사와 결혼했다' '팔조이' '바이 주피터'등을 히트시키며 제롬 컨과 더불어 1930년대 미국 뮤지컬를 이끌었다.
그가 해머스타인을 만난 것은 허트가 건강 악화로 은퇴한 1942년이었다. 이들은 1년 만에 '오클라호마'라는 최고의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낭만적인 노래와 코믹한 노래가 혼연일체된 '오클라호마'는 미국 뮤지컬을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정착시키는 전기를 마련하며,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그후 그들은 계속해서 '회전목마', 퓰리처 상을 수상한 '남태평양', 율 브리너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준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같은 걸작들을 쏟아놓았다.
특히 '새로운 형태의 오페레타'라는 평을 받았던 '회전목마'는 1993년에 흥행의 마술사 매킨토시가 리바이벌해 1995년 토니 상에서 최다 부문을 석권함으로써 옛 뮤지컬에 대한 향수를 다시 불러일으킨 바 있다.
리처드 로저스 이후 약 반세기 동안 미국은 어빙 벌린·거슈인·콜포터·뢰서·레너드 번스타인·러너와 로우이·스티븐 손드하임 등의 작품들로 세계 뮤지컬을 크게 주도했다.
신문팔이 소년·카페 사환 등을 거치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어빙 벌린(1888∼1989)은 1911년에 '알렉산더즈 랙타임 밴드'의 기록적인 히트와 함께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후 대본작가인 지그펄드 폴리스와 오랫동안 공동작업을 해온 그는 1945년에 '애니 겟유어 건'(1945)을 성공시키며 전후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이 뮤지컬은 총잡이 애니 오클레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로저스의 '오클라호마'와 함께 1940년대 미국의 현실을 담아낸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로 손꼽힌다.
뮤지컬·영화음악·가곡 등 1천여 곡이 넘는 곡을 남긴 어빙 벌린은 '발라드의 왕' '20세기의 포스터'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반세기에 걸쳐 미국 파퓰러 음악계의 대부로 군림했다.
재즈를 뮤지컬에 도입한 거슈인
제롬 컨이나 리처드 로저스와는 달리 거슈인(1898∼1937)은 재즈를 서양음악의 전통양식 속에서 살려내며 미국 뮤지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곡가이다. 파퓰러 음악에 매료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리믹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19년에 ‘라라루실드’를 히트시키며 브로드웨이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그후 그는 '조지 화이트의 스캔들' '위험한 여성' '달콤한 작은 악마' '밴드를 시작하라' '파리의 아메리카인'등을 선보였으며, 드디어 1935년에 최고의 걸작 '포기와 베스'를 내놓았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뮤지컬은 거슈인 스스로 '흑인 민속 오페라'라고 불렀을 만큼 흑인 민속음악의 이디엄을 충실히 담아냈다.
이밖에도 1930년대에 4개의 헐리우드 영화 주제가를 작곡한 거슈인은 마지막 작품인 '골드윈 폴리스'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1937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크 뢰서(1910∼ )는 2차 세계대전 중 육군부대의 쇼를 위해 작사와 작곡을 시작하며 뮤지컬 세계에 뛰어든 작곡가이다. 비록 그가 1940년대에 '중국행 목선 위에서'를 히트시키긴 했지만, '아가씨와 건달들'의 가사와 음악을 맡을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가씨와 건달들'을 의뢰받은 그는 뉴욕 거리에서 겪는 민중적인 작은 이야기들을 뮤지컬로 만들 생각을 했다. 하류층 사람들을 등장시켜 일상생활이 마치 크랩 게임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 뮤지컬은 미국 뮤지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뮤지컬 코미디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뉴욕 필 지휘자로 카라얀과 더불어 20세기 중후반을 이끌었던 번스타인이 뮤지컬에 뛰어든 것은 '도시에서'를 발표한 1944년부터다. 재즈와 무용음악에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던 그는 작사가이자 작곡가인 손드하임을 만나면서 뮤지컬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 결실이 1957년에 발표된 그의 최대의 걸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다. 이 뮤지컬은 '아메리카' '마리아' '한 손 한 마음'같은 주옥같은 삽입곡들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뮤지컬의 큰 전환점을 가져다준 시기였다. 그동안 미국 뮤지컬을 이끌었던 낙천적인 면이 사라지고 사회적 문제들이 사실적으로 반영되는 진지한 작품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성·예술성이 높은 작품이 선호되고, 블랙 파워가 분출하는 작품, 춤이 보다 중추적 역할을 하는 작품, 즐거움을 주는 것보다는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 주류를 이뤘다. 비틀스나 엘비스 프레슬리로 대표되는 전자 사운드 또한 이러한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는 '헤어' '코러스 라인' '지붕 위의 바이올린' '댄싱'등을 들 수 있다.
영화로도 유명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뮤지컬의 고전이다. 1965년 토니 상에서 9개 부문을 수상하는 성가를 올리기도 했는데, RCA 빅터 레이블로 출반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레코딩은 그 뛰어나고 감동적인 연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뮤지컬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특유의 인상적인 안무를 고안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제롬 로빈스가 연출과 안무를 맡고 제로 모스텔·라이자 미렐리 등 굵직한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해는 뜨고 지고' '내가 부자라면'등의 수록곡은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헤어'는 소위 록 오페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토미'와 함께 3대 록 오페라로 불린다. 작곡가 걸트 맥더모트와 제롤레니·제임스 라도 트리오의 합작품으로 당시 히피들이 거리에서 행하던 문화를 음악화·무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실험적인 뮤지컬이다. 1960년대 뉴욕 젊은이들의 사랑과 반전의식을 다룬 이 뮤지컬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기존의 틀을 깨고 있다. 특히 다른 뮤지컬에 비해 거의 두 배나 가까운 노래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록 매니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수록곡인 '아쿠라리스'는 널리 알려진 친숙한 곡이다. 이 뮤지컬은 1979년 밀로스 호만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국 뮤지컬의 자존심을 되찾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
뮤지컬의 본산지이면서도 오랫동안 미국 뮤지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영국 뮤지컬(물론 그 전에 이미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토대로 한 라이오넬 바트의 뮤지컬 '올리버'가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은 1970년대 들어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출현해 스테판 손드하임과 함께 세계 뮤지컬계를 양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런던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무대 모형을 만들고 작곡에 관심을 보이던 웨버는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지원하에 대위법·화성·이론·관현악 편곡 등을 공부했다. 10대에 로큰롤의 대가 엘비스 프레슬리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는 작사가 지망생인 팀 라이스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계에 뛰어들었다.
이들 콤비가 만들어낸 첫 작품은 1972년에 공연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이다. "뮤지컬의 뼈대는 바로 스토리다"라고 주장했던 웨버는 예수 생애 마지막 7일간의 행적을 연극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을 통해 기존 세대에 대한 부정과 자유와 평화의 갈구라는 록음악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뮤지컬은 음반으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으며, 수많은 미국의 뮤지컬 애호가들이 이 뮤지컬을 관람하기 위해 영국으로 모여들었다.
'지저스∼'를 성공시킨 웨버는 1978년에 '아르헨티나여, 날 위해 울지 말아요'라는 주제곡으로 음악팬들을 사로잡은 또하나의 걸작 '에비타'를 발표한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브레히트적인 접근방법을 택한 새로운 스타일의 뮤지컬로, 1976년에 음반으로 먼저 발매되어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1987년까지 8년간 롱런을 기록했다.
웨버는 매킨토시와 손잡고 최고의 히트작을 만든다. '지금 그리고 영원히'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한 '캐츠'(1981)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영국 뮤지컬은 미국 뮤지컬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T.S. 엘리어트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9가지 지침서'에 기초를 둔 이 작품은 미국 뮤지컬에 비해 부족했던 춤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캐츠'의 대표곡 '메모리'는 전세계의 영원한 테마로 자리잡았다.
'캐츠'에 이어 터뜨린 히트작이 '오페라의 유령'이다. 1986년 런던 초연 이래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20년째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페라 극장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알고 보니 미모의 여가수를 짝사랑하는 사내가 저지른 일임이 밝혀진다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은 그동안 어떤 뮤지컬에서도 시도된 바 없는 소프라노의 최고 음역이 선보인다.
웨버가 영국 뮤지컬의 세계 석권을 주도한 인물이라면 스티븐 손드하임(1944∼ )은 브로드웨이를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옆집에 살던 해머스타인2세를 거의 아버지처럼 따르며 자랐으며, 해머스타인은 그의 뮤지컬 창작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자로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브로드웨이 정통 뮤지컬을 체득한 그였지만, 정작 그는 정통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실험으로 작품세계를 열어갔다. 제리 허만이 그를 일컬어 "극장 음악을 새로운 것으로 이끌고 가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의 이런 실험정신 때문이다.
70년대 초 그는 '컴퍼니' '폴리스' '리틀 라이트 뮤직'을 선보이며 아방가르드 팬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리틀 라이트 뮤직'은 뮤지컬 작곡가로서의 손드하임의 위치를 한단계 올려놓았다. 이어서 내놓은 작품이 토니 상 8개 부문을 석권한 '스웨니 토드'(1979)이다. 역사상 가장 어둡고 음침한 뮤지컬로 기록되는 이 작품은 산업혁명으로 황폐화된 적막한 도시 런던을 배경으로, 정부와 관리로부터 아내를 겁탈당하고 뺏기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오는 주인공의 복수가 주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이 인간을 먹어치우는 자본주의의 황폐화를 보여주는 묘사는 다분히 브레히트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조지와 공원에서의 일요일'(1984)은 하나의 그림이라는 주제에 바탕을 둔 손드하임 특유의 컨셉 뮤지컬이다. 그림과 실제를 넘나드는 연출과 그림그리는 과정을 묘사한 음악이 매우 인상적인 이 작품은 그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뮤지컬로는 이례적으로 1985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주제간의 불분명한 구분과 반복, 전환의 새로운 기법에 의한 그의 최근작 '열정'은 95년도에 토미 상 4개 부문을 석권하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벌거벗은 두 남녀가 침대 위에서 애무하며 듀엣을 부르는 첫 장면부터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 작품은 스펙터클한 무대장치도, 춤도, 감동적인 주제곡도 없다. 다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주인공들이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무대의 각기 다른 쪽에서 각자의 심정을 듀엣 혹은 트리오로 노래하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이 '열정'을 '시대적 산물'로 평가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지의 비평가 캔비는 이 작품을 '대단히 대담한, 가장 현대적인 뮤지컬'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웨버와 손드하임 사이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미셸 쇤베르크
웨버와 손드하임이라는 현대 뮤지컬의 큰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사람이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 (1945~)이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손자인 그는 대본작가 일렌 부브릴과 손잡고 첫 작품 '프랑스 혁명'(1973)을 발표해 25만 장의 앨범이 발매되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콤비는 뮤지컬 흥행의 귀재 매킨토시와 손잡고 1980년에 또 하나의 대작을 내놓는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레미제라블'이 그것이다. 바비칸 센터가 처음 '레미제라블'을 올렸을 때 비평가들은 '격 낮은 뮤지컬'의 극장 사용에 대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웨스트엔드 팔레스 극장으로 옮긴 이후 1989년 토니상을 받을 만큼 유명해지자 예매표가 1백만 달러를 넘어섰고, 3년 후에는 3백만 달러에 이를 만큼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뮤지컬은 반드시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정설을 깨고 새로운 뮤지컬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긴 스토리를 간결하고 기능적인 무대전환을 통해 템포감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인데, 이러한 기술은 셰익스피어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국 연극인들의 아이디어에서 도입한 것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뮤지컬이 금기시했던 비극적 상황을 무대에 올려 성공한 첫번째 사례이다.
'레미제라블'이 한참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할 즈음 그는 다음 히트작 '미스 사이공'(1987)을 발표했다. '나비부인'의 월남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런던 공연에 이어 1988년 미국으로 진출해 브로드웨이 사상 최고의 예매기록을 세웠다. 매킨토시와 손잡고 만든 최신작 '마틴 귀레'(1996) 역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그 성공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에 버금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또 다른 걸작이 존 칸더의 '거미 여인의 키스'(1990)와 록 그룹 '후'(THE WHO)의 '토미'(1993)이다. 존 칸더는 정치색이 짙은 작품들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이다. 그의 대표작인 '거미 여인의 키스'는 3층 높이의 감옥 철창을 배경으로, 2인 감방에 동성 연애자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이 함께 수감되며서 벌어지는 그들의 갈등과 유혹·사랑·밀고 등을 그리고 있다. 탱고·삼바·룸바·차차차·쿠바의 맘보 등의 라틴 리듬과 발라드로 조화를 이루는 음악, 무대 전체를 뒤덮는 거미줄의 시각적 창출, 뮤지컬이 갖고 있는 극적 상황과 시·공간의 변화 등은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게이 문제를 정면 돌파한 최초의 뮤지컬로 기록되고 있는 이 작품은 1993년 토니 상을 '토미'와 반씩 나누어 가졌다.
록 그룹 '후'의 '토미'는 60년대 후반의 탐구하는 젊은이들의 분노와 저항이 담겨 있는 '후'의 음악과 '에비타'에서 보이는 안무에 의한 경쾌한 이야기 진행, 로버트 윌슨의 연극의 시적 영상화 등이 조화를 이룬 가장 미국적인 록 오페라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새로운 애인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정신이상자가 된 토미를 걱정하고 그를 정상인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주변사람들의 잔혹함과 어린시절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토미의 내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극 전체가 모자이크를 만들 듯이 강한 이미지를 주며, 토막토막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록에 대한 기성세대의 편견을 깨고 세계 오페라 극장에 록 그룹이 최초로 상륙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1993년 브로드웨이에서 극장용 뮤지컬로 첫 무대화되어 그해 토니 상을 휩쓸었다. 1993년 오리지널 캐스트 레코딩은 비틀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매끄러운 사운드가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곡가는 지난해 뉴욕 뮤지컬계를 뒤흔들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렌트'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이다. 라슨은 '렌트' 초연 두 달 전까지도 뉴욕에서 가장 값싼 이스트 빌리지에 살았고, 술집 웨이터로 일하며 예술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비운의 작가이다. '렌트' 이전에도 2개의 뮤지컬과 록 모놀로그를 작곡했던 그는 에이즈로 하나 둘씩 쓰러져 가는 절친했던 친구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94년에 '렌트' 데모 테이프로 손드하임 상과 로저스 상을 받은 그는 그 상금으로 이 작품을 본격적인 무대용으로 만들었으며, 96년 2월 다운타운의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라슨은 '레트' 초연 전날 밤 심장 대동맥 파열로 35세의 젊은 생을 마감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무대를 가난과 마약, 에이즈로 점철되는 199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로 바꾼 이 록 뮤지컬은 라슨이 직접 경험한 삶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의 희망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가스펠 송·리듬 앤 블루스·하드 록·발라드·탱고 등 다양한 음악이 사용된 이 작품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헤어' 이후 최고의 뮤지컬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뮤지컬은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토니상 드라마 데스카 상을 수상했다.
글·백성현 기자
출처 : 객석
음악으로 세계를 움직이는 최고의 흥행사
뮌헨 국립 오페라 연출가 마티아 세크의 조사에 의하면 91/92시즌 동안 오스트리아·독일·스위스에서 공연된 뮤지컬은 7천6백여 편에 이른다. 뮤지컬의 변방이라 할 수 있는 이들 나라에서 한 해 동안 올려진 뮤지컬 공연이 이러할진대, 뮤지컬의 본산이라 할 수 있는 미국의 브로드웨이와 헐리우드, 영국의 웨스트엔드를 위시한 전세계 극장에서 한 해 동안 올려지는 뮤지컬은 그 수를 헤아리기도 힘들 것이다. 뮤지컬은 이제 전세계를 통해 가장 매력있는 공연 장르가 되었고, 최고의 히트 상품으로 그 위치를 확고히 굳혔다.
이를 뒷받침하듯 미국 극작가 아서 밀러는 한 인터뷰에서 "브로드웨이 연극을 비롯한 미국의 연극 문화가 죽어가고 있다. 연극이 이렇듯 황폐화의 길을 걷고 있는 이유 중 하나는 바로 대형 상업 뮤지컬의 극장 잠식 때문이다"라고 진단했다.
이러한 현상은 비단 미국뿐만이 아니다. 70년대 이후 다시 뮤지컬 붐이 일기 시작한 영국은 현재 뮤지컬의 황금기를 구가하면서 웨스트엔드에 있는 극장의 반 가까이가 뮤지컬을 상영하고 있다.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정착시킨 제롬 컨과 리처드 로저스
뮤지컬은 오페라·오페레타·코믹 오페라·오페라 부파·보드빌·판토마임·발레 등 수많은 장르들이 혼합되어 새롭게 탄생한 음악극으로, 영국에서 먼저 시작됐다. 일반적으로 그 첫작품으로 1728년 존 게이의 발라드 오페라 '거지 오페라'를 꼽는다. 그러나 좀더 중요한 뮤지컬 형태의 발전은 작곡가 설리번과 대본작가 길버트의 공동작품인 '마법사'가 런던 스트랜드의 사보이 극장에서 공연되기 시작한 1877년 경부터라고 할 수 있다.
영국 군악학교 교관의 아들로 태어난 설리번은 황실 성가대원을 거쳐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전공했다. 14세 때 새로 신설된 멘델스존 상을 수상하며 일찌감치 두각을 나타낸 그가 뮤지컬에 관심을 가진 것은 1866년 왕립음악원 교수로 부임할 즈음으로, 그 이듬해 '콕스 앤 복스'를 발표하며 뮤지컬 작곡가로 첫발을 내디뎠다.
그의 뮤지컬 작업은 1871년 대본작가 길버트를 만나면서 본격화되었다. 길버트-설리번 콤비는 20여 년에 걸쳐 영국 뮤지컬 무대를 압도했으며, 이들 콤비가 만든 '배심판사' '마법사' '군함 피아포어' '펜자스의 해적' '미카도' '곤돌라의 뱃노래'등은 아직도 자주 공연되고 있다. 이 시절, 다른 한쪽에서는 조지 에드워드가 관객들의 좋은 반응을 얻으며 런던 게이어드 극장에서 뮤지컬 코미디를 정착시키는 작업을 했다.
이러한 영국 뮤지컬은 자연히 식민지국이었던 미국으로 전파됐다. 1750년 '거지 오페라'의 미국 공연을 계기로 점차 뮤지컬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1866년에 이르게 되면 미국인에 의한 뮤지컬이 만들어지기에 이른다. 브로드웨이 니블로스 가든에서 공연된 '블레이크 크루크'가 바로 그것이다. 이 작품은 최초로 댄스가 삽입된 뮤지컬 코미디로 미국 뮤지컬을 태동시키는 역할을 했다.
사실 미국 뮤지컬에 춤이 삽입된 것은 우연에 의한 것이다. 당시 뉴욕 최고의 극장이었던 아카데미 오브 뮤직에서는 프랑스 발레단의 공연이 예정돼 있었다. 그러나 갑자기 극장에 불이 나는 바람에 공연이 무산됐다. 그 즈음 흥행에 부진을 면치 못하던 '블레이크 크루크'제작팀은 뮤지컬 공연에 프랑스 발레를 삽입하는 것이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했다. 발레도 공연하고 뮤지컬도 살려보자는 의도에서였다.
미국의 낙천주의와 도덕성·휴머니즘·유머와 위트가 넘치는 내용에 화려한 의상과 무용수들의 율동적인 동작이 합쳐진 이 뮤지컬은 순식간에 관객들의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으며, 미국 뮤지컬로는 처음으로 롱런 기록을 세웠다.
20세기로 접어들면서 미국은 유럽의 영향과 자국내 작곡가들의 창작 열기가 고조되면서 미국식 뮤지컬을 완성시켜나갔다. 그 선구자적인 인물이 '쇼 보트'로 유명한 제롬 컨(1885∼1945)이다.
가구상의 아들로 태어난 제롬 컨은 고등학교 시절에 오르간을 배우면서 창작에 재능을 보였다. 뉴욕 음악원을 나와 독일 유학 후 극장 보조 작곡가로 일하던 그는 1914년 '유타에서 온 처녀'를 위해서 작곡한 '그들은 나를 믿지 않는다'의 성공으로 뮤지컬 작곡가로 인정을 받았다.
때를 같이해 극작가 가이볼톤·우데하우스가 그의 작업에 합류, 이들은 1920년에 복잡하고 새로운 스타일의 미국 뮤지컬 '샐리'를 발표했고, 곧이어 '서니'(1925)를 내놓았다. 마릴린 먼로가 주연한 이 두 작품은 공전의 히트를 기록하며 제롬 컨을 한순간에 미국 뮤지컬 작곡계의 대부로 올려놓았다.
제롬 컨의 명성을 더욱 확고하게 해준 사람은 대본작가 오스카 해머스타인 2세다. 1926년부터 같이 작업을 시작한 컨-해머스타인 콤비는 드디어 1927년에 '쇼 보트'를 탄생시켰다. 이 작품을 기점으로 미국 뮤지컬 음악은 오페라적 경향에서 벗어나 대중화되면서 따라 부르기 쉬운 음악으로 바뀌었다. '쇼 보트'가 성공을 거둔 이유도 공연을 보기 전에 먼저 관객들이 노래를 흥얼거릴 수 있을 만큼 쉬운 음악 때문이었다. 그 대표적인 곡이 '그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수 없네'와 '올 맨 리버'이다. 해머스타인이 에드너 파버의 장편 소설을 각색, 작사까지 맡은 '쇼 보트'는 음악뿐만 아니라 미국 풍토와 사회·인종 문제 등 현실문제를 처음으로 뮤지컬로 끌어들였다는 점에서 20세기 초 브로드웨이 뮤지컬을 대변해 주는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제롬 컨은 이외에도 '로버타'를 비롯한 여러 편의 뮤지컬과 수십 편의 영화음악을 작곡했다. 대표적인 영화음악으로는 '오늘밤 당신을 만나는 법' 아카데미상을 수상한 '스윙타임'등이 있다. 이렇듯 많은 히트작을 내놓은 제롬 컨은 헐리우드로 자리를 옮긴 이후 술로 인한 정신건강의 악화로 '백년째의 여름'을 채 끝내지 못하고 1945년 가을 60세를 일기로 비극적인 생을 마감했다.
제롬 컨의 사망과 함께 해머스타인은 또 다른 콤비를 만난다. 평생 동업자가 된 작곡가이자 대본작가·프로듀서·작사가인 리처드 로저스 (1902∼1979)이다. 여섯 살 때 처음으로 뮤지컬을 보고 그 세계에 흠뻑 빠져들었던 로저스는 18세 때인 1920년 '불쌍한 부잣집 딸'로 브로드웨이에 등장했으며, 대본작가 로렌츠 허트와의 합작품 '개릭 게이어티즈'(1925)로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거머쥐었다. 그후 이들은 '걸 프랜드' '코네티컷의 양키' '나는 천사와 결혼했다' '팔조이' '바이 주피터'등을 히트시키며 제롬 컨과 더불어 1930년대 미국 뮤지컬를 이끌었다.
그가 해머스타인을 만난 것은 허트가 건강 악화로 은퇴한 1942년이었다. 이들은 1년 만에 '오클라호마'라는 최고의 히트 상품을 만들어냈다. 낭만적인 노래와 코믹한 노래가 혼연일체된 '오클라호마'는 미국 뮤지컬을 하나의 예술형식으로 정착시키는 전기를 마련하며,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새로운 지평을 열어놓았다. 그후 그들은 계속해서 '회전목마', 퓰리처 상을 수상한 '남태평양', 율 브리너를 최고의 스타로 만들어준 '왕과 나' '사운드 오브 뮤직'같은 걸작들을 쏟아놓았다.
특히 '새로운 형태의 오페레타'라는 평을 받았던 '회전목마'는 1993년에 흥행의 마술사 매킨토시가 리바이벌해 1995년 토니 상에서 최다 부문을 석권함으로써 옛 뮤지컬에 대한 향수를 다시 불러일으킨 바 있다.
리처드 로저스 이후 약 반세기 동안 미국은 어빙 벌린·거슈인·콜포터·뢰서·레너드 번스타인·러너와 로우이·스티븐 손드하임 등의 작품들로 세계 뮤지컬을 크게 주도했다.
신문팔이 소년·카페 사환 등을 거치며 힘겨운 어린 시절을 보낸 어빙 벌린(1888∼1989)은 1911년에 '알렉산더즈 랙타임 밴드'의 기록적인 히트와 함께 작곡가로서 입지를 굳혔다. 그후 대본작가인 지그펄드 폴리스와 오랫동안 공동작업을 해온 그는 1945년에 '애니 겟유어 건'(1945)을 성공시키며 전후 르네상스를 맞게 된다. 이 뮤지컬은 총잡이 애니 오클레이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것으로, 로저스의 '오클라호마'와 함께 1940년대 미국의 현실을 담아낸 가장 미국적인 뮤지컬로 손꼽힌다.
뮤지컬·영화음악·가곡 등 1천여 곡이 넘는 곡을 남긴 어빙 벌린은 '발라드의 왕' '20세기의 포스터'라는 별명을 얻었을 만큼 반세기에 걸쳐 미국 파퓰러 음악계의 대부로 군림했다.
재즈를 뮤지컬에 도입한 거슈인
제롬 컨이나 리처드 로저스와는 달리 거슈인(1898∼1937)은 재즈를 서양음악의 전통양식 속에서 살려내며 미국 뮤지컬에 새로운 전기를 마련한 작곡가이다. 파퓰러 음악에 매료되어 고등학교를 중퇴하고 리믹 출판사의 피아니스트로 음악계에 발을 들여놓은 그는 1919년에 ‘라라루실드’를 히트시키며 브로드웨이에 본격적으로 진입했다.
그후 그는 '조지 화이트의 스캔들' '위험한 여성' '달콤한 작은 악마' '밴드를 시작하라' '파리의 아메리카인'등을 선보였으며, 드디어 1935년에 최고의 걸작 '포기와 베스'를 내놓았다. 공전의 히트를 기록한 이 뮤지컬은 거슈인 스스로 '흑인 민속 오페라'라고 불렀을 만큼 흑인 민속음악의 이디엄을 충실히 담아냈다.
이밖에도 1930년대에 4개의 헐리우드 영화 주제가를 작곡한 거슈인은 마지막 작품인 '골드윈 폴리스'를 채 완성하지 못하고 1937년 뇌종양으로 세상을 떠났다.
프랑크 뢰서(1910∼ )는 2차 세계대전 중 육군부대의 쇼를 위해 작사와 작곡을 시작하며 뮤지컬 세계에 뛰어든 작곡가이다. 비록 그가 1940년대에 '중국행 목선 위에서'를 히트시키긴 했지만, '아가씨와 건달들'의 가사와 음악을 맡을 것이라곤 아무도 상상하지 못했다. '아가씨와 건달들'을 의뢰받은 그는 뉴욕 거리에서 겪는 민중적인 작은 이야기들을 뮤지컬로 만들 생각을 했다. 하류층 사람들을 등장시켜 일상생활이 마치 크랩 게임과 같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다. 이 뮤지컬은 미국 뮤지컬의 새로운 방향을 제시하며 뮤지컬 코미디의 새 지평을 연 작품으로 평가된다.
뉴욕 필 지휘자로 카라얀과 더불어 20세기 중후반을 이끌었던 번스타인이 뮤지컬에 뛰어든 것은 '도시에서'를 발표한 1944년부터다. 재즈와 무용음악에 탁월한 감각을 지니고 있던 그는 작사가이자 작곡가인 손드하임을 만나면서 뮤지컬에 대한 많은 경험을 쌓았다. 그 결실이 1957년에 발표된 그의 최대의 걸작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다. 이 뮤지컬은 '아메리카' '마리아' '한 손 한 마음'같은 주옥같은 삽입곡들로 인해 많은 사랑을 받고 있다.
1960년대와 70년대는 뮤지컬의 큰 전환점을 가져다준 시기였다. 그동안 미국 뮤지컬을 이끌었던 낙천적인 면이 사라지고 사회적 문제들이 사실적으로 반영되는 진지한 작품들이 선보이기 시작했다. 또한 문학성·예술성이 높은 작품이 선호되고, 블랙 파워가 분출하는 작품, 춤이 보다 중추적 역할을 하는 작품, 즐거움을 주는 것보다는 호소력이 강한 작품이 주류를 이뤘다. 비틀스나 엘비스 프레슬리로 대표되는 전자 사운드 또한 이러한 변화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 시대의 대표작으로는 '헤어' '코러스 라인' '지붕 위의 바이올린' '댄싱'등을 들 수 있다.
영화로도 유명한 '지붕 위의 바이올린'은 몇 손가락 안에 꼽힐만한 뮤지컬의 고전이다. 1965년 토니 상에서 9개 부문을 수상하는 성가를 올리기도 했는데, RCA 빅터 레이블로 출반된 오리지널 브로드웨이 캐스트 레코딩은 그 뛰어나고 감동적인 연주를 그대로 보여주고 있다. 이 뮤지컬은 '웨스트 사이드 스토리'에서 특유의 인상적인 안무를 고안해 세계를 놀라게 했던 제롬 로빈스가 연출과 안무를 맡고 제로 모스텔·라이자 미렐리 등 굵직한 브로드웨이 스타들이 대거 참여해 화제를 모았다. '해는 뜨고 지고' '내가 부자라면'등의 수록곡은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킨다.
'헤어'는 소위 록 오페라를 얘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작품으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 '토미'와 함께 3대 록 오페라로 불린다. 작곡가 걸트 맥더모트와 제롤레니·제임스 라도 트리오의 합작품으로 당시 히피들이 거리에서 행하던 문화를 음악화·무대화시키는데 초점을 맞춘 실험적인 뮤지컬이다. 1960년대 뉴욕 젊은이들의 사랑과 반전의식을 다룬 이 뮤지컬은 내용과 형식 모두에서 기존의 틀을 깨고 있다. 특히 다른 뮤지컬에 비해 거의 두 배나 가까운 노래가 삽입되어 있다는 점에서 록 매니어들에게 많은 사랑을 받았다. 수록곡인 '아쿠라리스'는 널리 알려진 친숙한 곡이다. 이 뮤지컬은 1979년 밀로스 호만에 의해 영화화되기도 했다.
영국 뮤지컬의 자존심을 되찾은 앤드류 로이드 웨버
뮤지컬의 본산지이면서도 오랫동안 미국 뮤지컬에 가려 빛을 보지 못했던 영국 뮤지컬(물론 그 전에 이미 찰스 디킨스의 '올리버 트위스트'를 토대로 한 라이오넬 바트의 뮤지컬 '올리버'가 처음으로 브로드웨이에서 성공을 거두긴 했지만)은 1970년대 들어 새로운 전기를 맞는다. 앤드류 로이드 웨버가 출현해 스테판 손드하임과 함께 세계 뮤지컬계를 양분하기 시작한 것이다.
런던에서 태어나 8세 때부터 무대 모형을 만들고 작곡에 관심을 보이던 웨버는 영국 왕립음악원에서 작곡을 가르치던 아버지의 지원하에 대위법·화성·이론·관현악 편곡 등을 공부했다. 10대에 로큰롤의 대가 엘비스 프레슬리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는 작사가 지망생인 팀 라이스를 만나면서 본격적으로 뮤지컬계에 뛰어들었다.
이들 콤비가 만들어낸 첫 작품은 1972년에 공연된 '지저스 크라이스트 슈퍼스타'이다. "뮤지컬의 뼈대는 바로 스토리다"라고 주장했던 웨버는 예수 생애 마지막 7일간의 행적을 연극적으로 재구성한 이 작품을 통해 기존 세대에 대한 부정과 자유와 평화의 갈구라는 록음악 정신을 극명하게 보여주었다. 이 뮤지컬은 음반으로 제작되어 세계적인 히트를 기록했으며, 수많은 미국의 뮤지컬 애호가들이 이 뮤지컬을 관람하기 위해 영국으로 모여들었다.
'지저스∼'를 성공시킨 웨버는 1978년에 '아르헨티나여, 날 위해 울지 말아요'라는 주제곡으로 음악팬들을 사로잡은 또하나의 걸작 '에비타'를 발표한다. 아르헨티나의 대통령 부인이었던 에바 페론을 주인공으로 한 이 작품은 브레히트적인 접근방법을 택한 새로운 스타일의 뮤지컬로, 1976년에 음반으로 먼저 발매되어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1987년까지 8년간 롱런을 기록했다.
웨버는 매킨토시와 손잡고 최고의 히트작을 만든다. '지금 그리고 영원히'라는 캐치프레이즈로 유명한 '캐츠'(1981)가 바로 그것이다. 이때부터 영국 뮤지컬은 미국 뮤지컬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T.S. 엘리어트의 '지혜로운 고양이가 되기 위한 9가지 지침서'에 기초를 둔 이 작품은 미국 뮤지컬에 비해 부족했던 춤의 능력을 유감없이 보여주고 있다. 특히 비참한 현실 속에서도 행복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의 기억을 되새기며 내일에 대한 희망을 잃지 않는다는 '캐츠'의 대표곡 '메모리'는 전세계의 영원한 테마로 자리잡았다.
'캐츠'에 이어 터뜨린 히트작이 '오페라의 유령'이다. 1986년 런던 초연 이래 브로드웨이와 웨스트엔드에서 20년째 흥행에 성공하고 있는 이 작품은 오페라 극장에 유령이 나온다는 소문이 알고 보니 미모의 여가수를 짝사랑하는 사내가 저지른 일임이 밝혀진다는 드라마틱한 줄거리를 갖고 있다. 이 작품은 그동안 어떤 뮤지컬에서도 시도된 바 없는 소프라노의 최고 음역이 선보인다.
웨버가 영국 뮤지컬의 세계 석권을 주도한 인물이라면 스티븐 손드하임(1944∼ )은 브로드웨이를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이라 할 수 있다. 어려서부터 어머니 밑에서 자란 그는 옆집에 살던 해머스타인2세를 거의 아버지처럼 따르며 자랐으며, 해머스타인은 그의 뮤지컬 창작에 대한 실질적인 조언자로 그의 작품 세계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이렇듯 브로드웨이 정통 뮤지컬을 체득한 그였지만, 정작 그는 정통의 답습이 아닌 새로운 실험으로 작품세계를 열어갔다. 제리 허만이 그를 일컬어 "극장 음악을 새로운 것으로 이끌고 가는 유일한 사람"이라고 말하는 것도 바로 그의 이런 실험정신 때문이다.
70년대 초 그는 '컴퍼니' '폴리스' '리틀 라이트 뮤직'을 선보이며 아방가르드 팬들을 사로잡았다. 특히 '리틀 라이트 뮤직'은 뮤지컬 작곡가로서의 손드하임의 위치를 한단계 올려놓았다. 이어서 내놓은 작품이 토니 상 8개 부문을 석권한 '스웨니 토드'(1979)이다. 역사상 가장 어둡고 음침한 뮤지컬로 기록되는 이 작품은 산업혁명으로 황폐화된 적막한 도시 런던을 배경으로, 정부와 관리로부터 아내를 겁탈당하고 뺏기지만 누명을 쓰고 감옥에 들어오는 주인공의 복수가 주된 줄거리를 이루고 있다. 이 작품에서 인간이 인간을 먹어치우는 자본주의의 황폐화를 보여주는 묘사는 다분히 브레히트적인 관점을 보여주고 있다.
'조지와 공원에서의 일요일'(1984)은 하나의 그림이라는 주제에 바탕을 둔 손드하임 특유의 컨셉 뮤지컬이다. 그림과 실제를 넘나드는 연출과 그림그리는 과정을 묘사한 음악이 매우 인상적인 이 작품은 그 예술적인 가치를 인정받아 뮤지컬로는 이례적으로 1985년에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주제간의 불분명한 구분과 반복, 전환의 새로운 기법에 의한 그의 최근작 '열정'은 95년도에 토미 상 4개 부문을 석권하며 화제를 불러일으키고 있다. 벌거벗은 두 남녀가 침대 위에서 애무하며 듀엣을 부르는 첫 장면부터가 대단한 충격으로 다가오는 이 작품은 스펙터클한 무대장치도, 춤도, 감동적인 주제곡도 없다. 다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는 주인공들이 '편지'라는 매개체를 통해 무대의 각기 다른 쪽에서 각자의 심정을 듀엣 혹은 트리오로 노래하는 것이 특색이라면 특색이다. 그러나 평론가들은 이 '열정'을 '시대적 산물'로 평가하고 있다. '뉴욕 타임스'지의 비평가 캔비는 이 작품을 '대단히 대담한, 가장 현대적인 뮤지컬'이라고 평가하기도 했다.
웨버와 손드하임 사이에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미셸 쇤베르크
웨버와 손드하임이라는 현대 뮤지컬의 큰 흐름 속에서 나름대로 독자적인 위치를 확보한 사람이 프랑스의 작곡가 클로드 미셸 쇤베르크 (1945~)이다. 아놀드 쇤베르크의 손자인 그는 대본작가 일렌 부브릴과 손잡고 첫 작품 '프랑스 혁명'(1973)을 발표해 25만 장의 앨범이 발매되는 대단한 성공을 거두었다.
이들 콤비는 뮤지컬 흥행의 귀재 매킨토시와 손잡고 1980년에 또 하나의 대작을 내놓는다. 빅토르 위고의 소설을 뮤지컬로 만든 '레미제라블'이 그것이다. 바비칸 센터가 처음 '레미제라블'을 올렸을 때 비평가들은 '격 낮은 뮤지컬'의 극장 사용에 대해 눈살을 찌푸렸다. 하지만 웨스트엔드 팔레스 극장으로 옮긴 이후 1989년 토니상을 받을 만큼 유명해지자 예매표가 1백만 달러를 넘어섰고, 3년 후에는 3백만 달러에 이를 만큼 대단한 선풍을 일으켰다. 이 작품은 '뮤지컬은 반드시 엔터테인먼트적 요소가 있어야 한다'는 정설을 깨고 새로운 뮤지컬 형태를 보여주고 있다. 긴 스토리를 간결하고 기능적인 무대전환을 통해 템포감있게 전달하고 있는 것이 특색인데, 이러한 기술은 셰익스피어의 역사를 배경으로 한 영국 연극인들의 아이디어에서 도입한 것이다. 이 작품은 그동안 뮤지컬이 금기시했던 비극적 상황을 무대에 올려 성공한 첫번째 사례이다.
'레미제라블'이 한참 전세계를 떠들썩하게 할 즈음 그는 다음 히트작 '미스 사이공'(1987)을 발표했다. '나비부인'의 월남판이라고 할 수 있는 이 작품은 런던 공연에 이어 1988년 미국으로 진출해 브로드웨이 사상 최고의 예매기록을 세웠다. 매킨토시와 손잡고 만든 최신작 '마틴 귀레'(1996) 역시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지만, 그 성공여부는 아직 미지수다.
'오페라의 유령' '레 미제라블'에 버금가는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또 다른 걸작이 존 칸더의 '거미 여인의 키스'(1990)와 록 그룹 '후'(THE WHO)의 '토미'(1993)이다. 존 칸더는 정치색이 짙은 작품들로 널리 알려진 작곡가이다. 그의 대표작인 '거미 여인의 키스'는 3층 높이의 감옥 철창을 배경으로, 2인 감방에 동성 연애자 몰리나와 정치범 발렌틴이 함께 수감되며서 벌어지는 그들의 갈등과 유혹·사랑·밀고 등을 그리고 있다. 탱고·삼바·룸바·차차차·쿠바의 맘보 등의 라틴 리듬과 발라드로 조화를 이루는 음악, 무대 전체를 뒤덮는 거미줄의 시각적 창출, 뮤지컬이 갖고 있는 극적 상황과 시·공간의 변화 등은 전통적인 브로드웨이 뮤지컬의 진수를 느끼게 한다. 게이 문제를 정면 돌파한 최초의 뮤지컬로 기록되고 있는 이 작품은 1993년 토니 상을 '토미'와 반씩 나누어 가졌다.
록 그룹 '후'의 '토미'는 60년대 후반의 탐구하는 젊은이들의 분노와 저항이 담겨 있는 '후'의 음악과 '에비타'에서 보이는 안무에 의한 경쾌한 이야기 진행, 로버트 윌슨의 연극의 시적 영상화 등이 조화를 이룬 가장 미국적인 록 오페라이다. 이 작품은 아버지가 어머니의 새로운 애인을 살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정신이상자가 된 토미를 걱정하고 그를 정상인으로 되돌리려는 노력에서 비롯되는 주변사람들의 잔혹함과 어린시절의 충격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토미의 내적 세계를 그리고 있다. 극 전체가 모자이크를 만들 듯이 강한 이미지를 주며, 토막토막 진행되어 나가는 것이 특징이다.
이 작품은 록에 대한 기성세대의 편견을 깨고 세계 오페라 극장에 록 그룹이 최초로 상륙하는 전기를 마련했다. 1993년 브로드웨이에서 극장용 뮤지컬로 첫 무대화되어 그해 토니 상을 휩쓸었다. 1993년 오리지널 캐스트 레코딩은 비틀스의 프로듀서 조지 마틴의 매끄러운 사운드가 특징이다.
마지막으로 소개할 작곡가는 지난해 뉴욕 뮤지컬계를 뒤흔들며 공전의 히트를 기록했던 '렌트'의 작곡가 조나단 라슨이다. 라슨은 '렌트' 초연 두 달 전까지도 뉴욕에서 가장 값싼 이스트 빌리지에 살았고, 술집 웨이터로 일하며 예술가가 되기 위해 몸부림쳤던 비운의 작가이다. '렌트' 이전에도 2개의 뮤지컬과 록 모놀로그를 작곡했던 그는 에이즈로 하나 둘씩 쓰러져 가는 절친했던 친구들에게서 영감을 얻어 이 작품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1994년에 '렌트' 데모 테이프로 손드하임 상과 로저스 상을 받은 그는 그 상금으로 이 작품을 본격적인 무대용으로 만들었으며, 96년 2월 다운타운의 오프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렸다. 그러나 라슨은 '레트' 초연 전날 밤 심장 대동맥 파열로 35세의 젊은 생을 마감했다.
푸치니의 오페라 '라 보엠' 무대를 가난과 마약, 에이즈로 점철되는 1990년대 뉴욕 이스트 빌리지로 바꾼 이 록 뮤지컬은 라슨이 직접 경험한 삶을 배경으로 우리 시대의 희망과 좌절을 그리고 있다. 가스펠 송·리듬 앤 블루스·하드 록·발라드·탱고 등 다양한 음악이 사용된 이 작품은 무대에 오르자마자 대단한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켰으며, '헤어' 이후 최고의 뮤지컬이라는 찬사를 받았다. 이 뮤지컬은 퓰리처상 드라마 부문, 토니상 드라마 데스카 상을 수상했다.
글·백성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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