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
갈라디아서 2:16-21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16)
오늘 설교의 제목은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의롭게 된다는 뜻이 무엇입니까? 의롭게 된다, 의, 이런 단어의 뜻은 너무나 중요함에도 어떤 때는 알 것 같고 어떤 때는 참 이것이 무엇인가 고민이 생깁니다. 성경에는 의롭게 된다. 의인이다. 의로 여겨졌느니라 등의 말이 이미 창세기때부터 등장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노아와 아브라함에게 이런 칭호가 붙붙었죠, 시편에 참 많이 나오죠? 의인은 하나님께서 인정하시나 악인은 망하게 된다는 시구절이 있는 것을 우리는 알고 있습니다. 또 잠언에도 많이 나오는 주제가 아닙니까? 욥기는 어떻습니까? 욥기의 주제가 바로 의로운 사람이 왜 고난을 받는가가 아닙니까? 이사야서에도 의에 대한 말씀이 많이 나옵니다. 예수님 시대에는 말할 필요가 없습니다. 예수님이 가장 먼저 하신 말씀 중에 하나가 아닙니까?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산상수훈에 바로 나오지 않습니까? 의에 주리고 목마른 자는 복이 있다고 하셨지않습니까? 의를 위해 박해를 받는 사람은 천국이 그들의 것이 되리라 약속해주셨습니다. 의는 그 만큼 하나님이 우리 인생들에게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바이여 진정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의롭게 산다, 의인이라고 할 때 그 의는 무엇을 말합니까? 16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줄 알므로 우리도 그리스도 예수를 믿나니 이는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써가 아니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의롭다 함을 얻으려 함이라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의롭게 된다는 것은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가지는 것을 말합니다.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를 맺을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이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 우리와 바른 관계를 가지게 해 주셨습니다. 행위를 통해, 다시 말해 율법을 지킴으로 하나님과 바른 관계성을 이루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믿음으로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전기가 통하고 막힌 것이 열려 하나님의 충만함을 누리게 되었습니다.예수님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막힌 담이 이미 허물어졌습니다.
갈라디아 교회는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1차 전도여행을 하는 동안에 개척한 이방 교회입니다. 오늘날 이 지역은 튀르키예의 중남부 지방으로 튀르키예의 수도인 앙카라가 있는 지역입니다. 당시는 이방 땅이었습니다. 그리스 로마 문화가운데 우상숭배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런 면에서 이 곳은 복음을 받아들인 사람들이 거의 이방인들이 많았다는 뜻이 아닙니까? 바울과 바나바가 처음에 회당에 들어가 복음을 전했지만 유대인들의 방해가 많았습니다. 그러나 이방인들에게는 이 복음을 듣고 놀라운 변화의 역사가 있었습니다. 특히 이 곳 루스더라에 나면서 서지 못하는 앉은뱅이가 바울이 전하는 복음을 듣고 일어서는 놀라운 역사가 있었습니다. "네 발로 서서 일어서라" 그가 바울의 말을 듣고 바로 일어섰습니다. 그래서 그 곳 사람들이 바울과 바나바를 제우스와 헤르메스 신으로 여기고 그들에게 황소를 잡고 화환을 가지고와 제사를 드리려 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그리이스 이방 신들을 믿던 이방인이었습니다. 이런 그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을 믿고 의롭다 함을 얻었습니다.
그런데 이곳에 유대인들도 섞여 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들은 철저히 율법을 지키고 살았습니다. 안식일을 지키고 할례를 행하고 부정한 음식을 먹지 않았습니다. 율법을 잘 지키는 사람을 보면 어떻습니까? 뭔가 있어보입니다. 신앙생활을 잘 하는 것처럼 보입니다. 갈라디아 사람들도 차차 이것을 보게 되었고 온전해지려면 율법이 말하는 행위도 잘 지켜야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몇몇 사람들이 이들을 속이고 이 거짓복음을 퍼뜨렸습니다. 이 문제는 그렇게 쉬운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심지어 예수님의 수제자인 베드로도 이런 문제에 휩싸여서 바울의 책망을 받았습니다. 갈라디아서 2장 11절에서 13절에 보면 베드로도 이방인들과 밥을 먹다가 할례자들이 들어오자 그 자리를 피했습니다. 바울과 함께했던 바나바도 그만 유혹되었습니다. 그들에게는 아직 율법의 행위가 있었습니다. 율법을 지켜야 의롭게 된다는 것이 무의식 속에 자리했습니다. 그러나 바울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런 베드로를 대면하여 책망했습니다. "네가 유대인으로서 이방인을 따르고 유대인답게 살지 아니하면서 어찌하여 이방인을 유대인 답게 살게 하려느냐?" 아마 베드로는 깜짝 놀랐을겁니다.
우리는 누구나 율법의 행위로 의롭다함을 얻고자 하는 마음이 가지고 있습니다. 요즈음 월드컵이 열려 정말 쓰릴이 넘치고 얼마나 재미있는지 알 수 없습니다. 무엇보다 우리 팀이 먼저 1승을 거두어 얼마나 다행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패배한 팀을 생각해보십시오. 한 번 패배하면 그래도 다시 일어설 수 있지만 여러 번 지고나면 마음에 어떤 생각이 듭니까? 어떻게 하면 온전한 선수가 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멋진 선수가 될 수 있을까, 이런 생각을 하지 않습니까?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공부를 하는 학생들의 경우 성적이 별로이면 얼마나 마음에 불완전하다는 마음이 생길까요? 실패감이 가득차지 않습니까? 직장인들도, 그리고 믿음으로 사는 우리도 사람은 늘 온전하지 못하다는 생각에 휩싸일 때가 있습니다. 갈라디아 사람들이 처음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고백했을 때 그 기쁨은 충만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선교팀들이 가고 그들 홀로 믿음을 지키고 일상의 삶을 살아갈 때 죄와 허물에 빠지고 마음이 허허로울 때 뭔가 해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요? 믿음으로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는 생각을 할 수 있었을 것입니다. 이런 때에 할례자들이 가만히 들어와 그들을 부추겼습니다. 율법의 행위를 지켜야 구원을 받는다, 선한 행위로 구원을 얻는다, 이런 주장을 했습니다.
그러나 사람이 선한 행위를 할 수 있습니까? 17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는 자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 17절에서 바울은 우리가 의롭게 되려다 죄인으로 드러난다고 했습니다. 바울의 경우, 로마서에 보면 각양 탐심이 들어와 죄에 빠지고 원하는 바 의로운 행위는 하지 않고 도리어 탐심으로 망하게 된 자신을 발견했다고 고백했습니다.
고대로부터 인간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한 질문이 많았습니다. 사람이 의를 행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조금 양보해서 의를 약간이라도 행할 수 있는 존재라고 생각합니까? 도덕과 책임의 존재이긴 하지만 하나님 앞에서는 철저히 절망적인 존재가 인간이 아닙니까? 구원에 있어서는 울어도 안되고 그 어떤 고행으로도 안되지 않습니까? 하나님 앞에서 무엇을 많이 했다고 결코 의롭게 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뭔가 우리가 해야된다고 생각합니다. 아무 것도 하지 않은 나를 주님이 의롭게 해주셨다는 것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또 무엇인가 하지 않으면 마음이 불안합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을 위해 예수님을 보내주셨습니다. 바울은 이것에 대하여 말했습니다. "우리가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게 되려 하다가 죄인으로 드러나면 그리스도께서 죄를 짓게 하냐 결코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호하게 말합니다. 죄인으로 드러나면, 이 말이 무슨 뜻입니까? 나의 허물과 연약함, 죄로 말미암아 믿음과 기쁨을 잃는 것이 아닙니까? 예수님이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십니까? 예수님은 우리를 정죄하시는 분이십니까? 결코 그럴 수 없다고 바울은 단호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 세상에서 육체로 의롭다함을 얻을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고 했습니다. 다른 무엇이 필요하다고 말하는 사람은 다 속이는 사람입니다. 내 마음에 그런 마음이 든다면 이는 사단의 음성입니다.
18절을 보십시오.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만일 내가 헐었던 것을 다시 세우면 내가 나를 범법한 자로 만드는 것이라." 우리가 다시 율법으로 돌아간다면 그리스도께서는 죄를 조장하시는 분이 되고 우리도 범죄자가 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율법의 행위에 의해 의롭게 된다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은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죽으심은 우리로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됨을 나타내려 합니다. 19절을 보십시오. 바울은 분명히 말합니다. 나는 율법에 대하여는 죽은 사람이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살려고 하기 때문이었습니다.
20절을 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20절 말씀은 참으로 놀라운 말씀입니다. 하나님께서 나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찬찬히 살펴 봅시다. 먼저 바울은 자신이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혔다고 했습니다. 이 말은 자신이 죽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바울은 정말 과거 얼마나 펄펄 살아있었던 사람이 아닙니까? 율법을 얼마나 자랑했습니까? 그의 중심이 자신에게서 하나님에게로 바뀌었습니다. 자신이 온전히 죽었고 그래서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고 고백했습니다. 우리는 어떻습니까? 자신의 생각을 많이 합니까? 예수님이 내 안에 살아계셔서 그 분의 뜻을 말하고 그 분의 뜻을 행하고 삽니까? 바울의 표현을 깊이 생각해야겠습니다.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다고 했습니다. 사실 바울은 12사도들처럼 직접 예수님을 따라 다니지 못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을 직접 듣지 못했습니다.
이런 그가 어떻게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신다고 말할 수 있을까요? 그의 삶이 다메색 도상에서의 살아계신 예수님을 만나고는 완전히 바뀌었기 때문이 아닙니까? 그는 그 이후 자신의 삶의 방향을 완전히 바꾸었습니다. 지금까지 가졌던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오직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가장 고상한 것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이 주님 앞에 자신의 삶을 산 제사로 드렸습니다.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안에서 사는 것이라." 바울의 고백이 얼만나 아름답고 얼마나 복음적인지 알 수 없습니다. 그의 고백을 보십시오. 그는 예수님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합니다. 하나님이 보내신 그리스도라는 말이 아닙니까? 이 한마디 고백속에 그의 신앙이 다 들어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이 자신의 삶의 구원이요, 전부가 되었다는 뜻이 아닙니까? 옛날 팝송의 제목처럼 You mean everything to me가 아닙니까? 순간의 고백이 아닌 영원의 고백이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런 주님의 사랑을 말합니다. 나를 사랑하사 자기 자신을 버리셨다고 말합니다. 이는 자신은 정말 사랑받을 가치가 없는 무익한 존재였다는 말이 아닙니까? 사실이 그러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박해하고 핍박하고 잔멸하려고 했던 자가 아닙니까? 그런 자신을 사랑하신 예수님이 그의 마음에 박혀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런 자신을 의롭다해주시기 위해 자기를 버리신 것을 마음에 잊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것 때문에 지금 육체 가운데 살고 있다고 합니다.
갈라디아 성도들이 이 놀라운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도 믿음으로 말미암는 구원을 놓치고 마음이 흔들리는 것을 바울은 지금 안타깝게 책망하고 있습니다. 주님이 자신을 버리신 것은 무슨 우리의 공로가 있어서가 아닙니다. 크신 사랑 때문이셨습니다. 의로움은 오직 믿음으로 주어집니다. 바울은 지금 왜 다른 복음에 마음이 흔들리는가 묻습니다.
20절을 같이 읽어 보겠습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폐하지 아니하노니 만일 의롭게 되는 것이 율법으로 말미암으면 그리스도께서 헛되이 죽으셨느니라." 그렇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의롭게 하시는 이유가 우리가 무슨 잘해서 된 것이 아니라 오직 은혜임을 말해줍니다. 어그스틴이 그렇게 외치고 종교 개혁자들이 그렇게도 말했던 sola gracia를 바울이 먼저 말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이 이것을 증거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선진들은 다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고 우리 또한 다른 행위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의롭게 되었습니다. 갈라디아서는 오늘 우리에게 이것을 선포해줍니다. 그것으로 말미암아 바울이 다시 5장에서 재차 강조합니다.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자유롭게 하려고 자유를 주셨으니 그러므로 굳건하게 서서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말라."(5:1)
다시는 종의 멍에를 메지 말라입니다. 우리가 복음을 깊이 생각하고 복음에 매인 바 되어야 겠습니다. 우리가 의롭게 됨은 오직 주님의 은혜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루어짐을 굳게 붙잡아야겠습니다.
기도하고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