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권 관잡설품일(7p-23p) - 총론
걸승(乞僧)이며 촌승(村僧)인 자. 그는 "우주의 입"에 "눈을 던져 넣고" "절시(竊視-훔쳐 보는)"하는 자다.
"우주의 입"에서 "입"이란, 1차적으로 창자로 통하는 문이다. "창자도 또한, 닿을 데 없는, 고통스러운 긴 여로이던 것을(8p)" '고통스러운 긴 여로'라는 창자에 대한 의미 해석은, "입"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창자는 "입"의 상징성을 두텁게 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1차적 의미에서 확장된 입의 의미는, 먹어도 먹은 만큼 배가 고픈, 욕망을 충족하면 충족할 수록 욕망의 결핍감만 깊어지는, 몸의 우주(축생도)의 입구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몸의 우주의 입구로서의 입'이라는 의미는, "어만님(어머님)은 저승암캐(9p)" 상징과 만나 다시 한 번 확장된다. 입이 요니(여성의 성기)이며, 요니는 항문이고, 항문은 입인 '저승암캐 어만님'은, 생성과 소멸, 결합과 해체를 끝없이 반복하는 몸의 우주(축생도=자연)를 상징한다.
a)입 - 먹는다. 다른 생명을 죽여 흡수하는 일이다.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을 흡수하지 않고서는 생명 유지를 할 수 없다. 다른 생명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나의 옛몸을 버리고 흡수한 생명으로 새로운 몸을 만들어 입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것은 다른 생명을 죽인다는 단계에서 살욕(殺慾)에 기반한 행동이지만, 동시에 나의 새로운 몸을 만든다는 단계에서 성욕(性慾)에 기반한 행동이기도 하다.
b)항문 - 배설한다. 나의 옛몸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c)요니 - 정수(精水)를 받는다. 생명을 낳는다. 수컷은 사정의 순간에 상징적으로 죽는다. 연금술에서 요니가 해골을 의미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수컷은 성교에 있어, 요니에 대한 가학증(sadism)과 아울러 자살하고자 하는 피학증(masochism)을 동시에 경험한다. 성욕과 살욕은 얽혀 있다. 사실 둘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창조력의 결핍 상태가 파괴력이며,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요니는 이처럼 수컷의 무덤이며, 동시에 수컷이 태어나는 고향이다.
입과 항문과 요니는 "저승암캐 어만님" 상징에서 등가물로 해석된다. 입의 의미가 입구(성욕)에서 '입구(성욕)이며 출구(살욕)'로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입"에 넣어진 "눈"은 링감(남성의 성기)의 등가물로 해석될 수 있다. 눈썹이 거웃과 등가물로 해석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칠조는 훔쳐 보고 있다. 훔쳐본다는 것은 몸의 우주의 윤회에 가담하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산해기>에서, 횐 암캐에게 거세당하는 수컷들과 이를 지켜보는 짜라투스트라의 차이랄까. 훔쳐보는 것은 짜라투스트라의 시점이며, 눈 먼 예언자가 미래를 보는 시점이기도 하다.
1. 칠조의 호칭과 그 의미
1)무사걸(無事乞)
무사걸은 '배고픔'과 연결된다. 무사는 배를 채우기 위해 밭을 갈지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무사걸의 배고픔은 외부로부터의 보시에 의존한다. 수동적이다. 그래서 무사걸의 '배고픔'은 1차적으로 창자의 수동적 굶주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확장된 의미로서, 무사걸의 배고픔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욕망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크게 두 가지다. 이는 '결핍으로서의 욕망/생성으로서의 욕망'이다. 배고픔은 여타의 욕망보다 원초적인 욕망이다. 상상력의 개입에서 제일 자유로운 욕망이다. 그래서 배고픔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의 순전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무사걸은 채울 수 없는 결핍의 우주 속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 고통은 그의 촉수를 민감하게 하여,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몸의 우주의 본질을 직관하게 한다.
2)본자어마(本者語魔)
a)어마란 말을 파괴하는 자다. 여기서 말이란 기성종교의 화석화된 도그마로 해석된다. 특히 총론 부분에서는 눈썹道(화두 수행 중심의 선종, 작중에서는 육조의 수행법)의 '本來無一物'에서 '無' 화두의 부작용을 '무의미의 박제화', '무정란'이라며 비판한다.
=> "幻이든 아니든, 프라브리티에 주어진 살은 '과정'을 겪도록 되어 있는 것은, 프라브리티의 법칙이거든입지(23p)"
->돈오(어선파)와 점오(온육파)의 한계 극복 = 중도론
b)어마란 언어를 통해, 무동태인 '배고픔'과 '간지러움'을 능동태인 '먹고 싶음'과 '긁고 싶음'으로 역전시키는 자다. "무동태의 능동태화"는 몸의 우주의 두 자장인 성욕과 살욕을 언어를 통해, 피안으로 넘어가는 도약력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c) a는 파괴하는 어마, b는 생성하는 어마.
3)유사걸(有事乞)과 근사남(勤事男)
유사걸과 근사남은 본자어마의 실천태적 호칭이다. 특히 기성 종교의 도그마로부터 환속한 칠조의 조사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호칭이다. 손말명에게 정수를 쏟아 주는 자. 어부왕.
2. 희생양(18p-19p) - 지라르의 <성스러움과 폭력>
오르페우스적 제의, 혹은 무속적 제의, 혹은 몸의 우주적 제의
3. 몸의 우주의 두 자장인 성욕과 살욕이, 피안으로 넘어가는 도약력임.
=>氣, 魂, 프라나, 당, 샥티
---------------------------------------
한 남자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런 세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을까, 자문해 본다. 그의 남다른 욕망이 비틀어 놓은 언어의 밭에서, 나는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수확하고만 싶다.
그는 왜 몸의 우주를 성욕과 살욕의 易의 우주라 말하는 것일까. 그는 왜 욕망의 이념형(ideal type)을 획책하는 것일까. 자칫 욕망의 다층성을 단지 두 개의 욕망으로 환원시키는 우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인데......
보편에의 욕망, 혹은 형이상학에의 욕망이 <칠조어론>에서 넘쳐난다.
라다크리슈난은 <인도철학사>에서 말한다. 인간의 삶은 '각성(깨어있음)/몽면(꿈 꾸는 잠)/숙면(꿈 없는 잠)' 이상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진정한' 형이상학은 삶의 세 가지 양상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또한 그는 서구 형이상학을 각성 상태에 한정되어 있는 그것으로 진단한다.
각성 상태의 철학은 경험성과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데아(idea)와 독사(doxa)라는 형태로, 이원적이다. 그러나 몽면과 숙면을 각성과 병렬시킬 때, 각성 상태는 몽면 상태에 상대적이며, 그 반대 또한 성립된다. 그리고 숙면 상태는 이들을 포괄하는 절대 준거가 된다. 운동은 존재에 준거하기 때문이다.
박상륭의 보편에의 욕망이란, 그래서 살욕과 성욕이라는 이념형적 욕망을 통해,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란, 숙면 상태를 향한 그의 지난한 몸짓인 것은 아닐까.
나는 그의 형이상학에의 욕망이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웬지 그의 도식을 따라 가는 일이란 불편하기도 하다. <성욕과 살욕> 박상륭을 이해하는 제일의 키워드다. <성욕과 살욕>의 의미에 대한 폭이 넓어질 수록 그의 세계에 대한 접근의 층위도 확장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성욕과 살욕에 대한 의미의 폭을 무작정 넓히는 일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 비평은 작품 그 자체를 근거로 진행되어야 한다. 꼼꼼한 독해를 통해 작중의 인물을 근거로 성욕과 살욕의 의미를 재구성해 내야 한다.
어쩌면 <칠조어론>의 인물들만이 아닌, 박상륭의 모든 작중 인물들의 사건 목록표를 작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손은 게으른데, 마음만 앞서니, 큰일이구나.
2002.7.26
걸승(乞僧)이며 촌승(村僧)인 자. 그는 "우주의 입"에 "눈을 던져 넣고" "절시(竊視-훔쳐 보는)"하는 자다.
"우주의 입"에서 "입"이란, 1차적으로 창자로 통하는 문이다. "창자도 또한, 닿을 데 없는, 고통스러운 긴 여로이던 것을(8p)" '고통스러운 긴 여로'라는 창자에 대한 의미 해석은, "입"의 의미를 확장시킨다. 창자는 "입"의 상징성을 두텁게 하는 매개로 기능한다. 1차적 의미에서 확장된 입의 의미는, 먹어도 먹은 만큼 배가 고픈, 욕망을 충족하면 충족할 수록 욕망의 결핍감만 깊어지는, 몸의 우주(축생도)의 입구로 해석될 수 있다.
그러나 '몸의 우주의 입구로서의 입'이라는 의미는, "어만님(어머님)은 저승암캐(9p)" 상징과 만나 다시 한 번 확장된다. 입이 요니(여성의 성기)이며, 요니는 항문이고, 항문은 입인 '저승암캐 어만님'은, 생성과 소멸, 결합과 해체를 끝없이 반복하는 몸의 우주(축생도=자연)를 상징한다.
a)입 - 먹는다. 다른 생명을 죽여 흡수하는 일이다. 어떤 생명도 다른 생명을 흡수하지 않고서는 생명 유지를 할 수 없다. 다른 생명의 몸을 먹는다는 것은, 나의 옛몸을 버리고 흡수한 생명으로 새로운 몸을 만들어 입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먹는 것은 다른 생명을 죽인다는 단계에서 살욕(殺慾)에 기반한 행동이지만, 동시에 나의 새로운 몸을 만든다는 단계에서 성욕(性慾)에 기반한 행동이기도 하다.
b)항문 - 배설한다. 나의 옛몸을 자연으로 되돌리는 일이다.
c)요니 - 정수(精水)를 받는다. 생명을 낳는다. 수컷은 사정의 순간에 상징적으로 죽는다. 연금술에서 요니가 해골을 의미하는 것도 이와 연결된다. 수컷은 성교에 있어, 요니에 대한 가학증(sadism)과 아울러 자살하고자 하는 피학증(masochism)을 동시에 경험한다. 성욕과 살욕은 얽혀 있다. 사실 둘은 동전의 앞뒷면이다. 창조력의 결핍 상태가 파괴력이며, 그 반대 역시 마찬가지다. 요니는 이처럼 수컷의 무덤이며, 동시에 수컷이 태어나는 고향이다.
입과 항문과 요니는 "저승암캐 어만님" 상징에서 등가물로 해석된다. 입의 의미가 입구(성욕)에서 '입구(성욕)이며 출구(살욕)'로 확장된 것이다.
그래서 "우주의 입"에 넣어진 "눈"은 링감(남성의 성기)의 등가물로 해석될 수 있다. 눈썹이 거웃과 등가물로 해석되는 것도 같은 맥락이다. 그러나 칠조는 훔쳐 보고 있다. 훔쳐본다는 것은 몸의 우주의 윤회에 가담하고 있지 않음을 뜻한다. <산해기>에서, 횐 암캐에게 거세당하는 수컷들과 이를 지켜보는 짜라투스트라의 차이랄까. 훔쳐보는 것은 짜라투스트라의 시점이며, 눈 먼 예언자가 미래를 보는 시점이기도 하다.
1. 칠조의 호칭과 그 의미
1)무사걸(無事乞)
무사걸은 '배고픔'과 연결된다. 무사는 배를 채우기 위해 밭을 갈지 않음을 뜻한다. 그래서 무사걸의 배고픔은 외부로부터의 보시에 의존한다. 수동적이다. 그래서 무사걸의 '배고픔'은 1차적으로 창자의 수동적 굶주림을 의미한다. 그러나 확장된 의미로서, 무사걸의 배고픔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으로 해석될 수도 있다. 욕망에 대한 전통적인 시각은 크게 두 가지다. 이는 '결핍으로서의 욕망/생성으로서의 욕망'이다. 배고픔은 여타의 욕망보다 원초적인 욕망이다. 상상력의 개입에서 제일 자유로운 욕망이다. 그래서 배고픔은 결핍으로서의 욕망의 순전한 형태로 볼 수도 있다.
무사걸은 채울 수 없는 결핍의 우주 속에서 고통받는 자다. 그 고통은 그의 촉수를 민감하게 하여, 채워도 채워도 채울 수 없는 몸의 우주의 본질을 직관하게 한다.
2)본자어마(本者語魔)
a)어마란 말을 파괴하는 자다. 여기서 말이란 기성종교의 화석화된 도그마로 해석된다. 특히 총론 부분에서는 눈썹道(화두 수행 중심의 선종, 작중에서는 육조의 수행법)의 '本來無一物'에서 '無' 화두의 부작용을 '무의미의 박제화', '무정란'이라며 비판한다.
=> "幻이든 아니든, 프라브리티에 주어진 살은 '과정'을 겪도록 되어 있는 것은, 프라브리티의 법칙이거든입지(23p)"
->돈오(어선파)와 점오(온육파)의 한계 극복 = 중도론
b)어마란 언어를 통해, 무동태인 '배고픔'과 '간지러움'을 능동태인 '먹고 싶음'과 '긁고 싶음'으로 역전시키는 자다. "무동태의 능동태화"는 몸의 우주의 두 자장인 성욕과 살욕을 언어를 통해, 피안으로 넘어가는 도약력으로 역전시키는 것이다.
c) a는 파괴하는 어마, b는 생성하는 어마.
3)유사걸(有事乞)과 근사남(勤事男)
유사걸과 근사남은 본자어마의 실천태적 호칭이다. 특히 기성 종교의 도그마로부터 환속한 칠조의 조사로서의 면모를 강하게 부각시키는 호칭이다. 손말명에게 정수를 쏟아 주는 자. 어부왕.
2. 희생양(18p-19p) - 지라르의 <성스러움과 폭력>
오르페우스적 제의, 혹은 무속적 제의, 혹은 몸의 우주적 제의
3. 몸의 우주의 두 자장인 성욕과 살욕이, 피안으로 넘어가는 도약력임.
=>氣, 魂, 프라나, 당, 샥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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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남자 사람이, 도대체 왜, 이런 세계를 구성할 수밖에 없었을까, 자문해 본다. 그의 남다른 욕망이 비틀어 놓은 언어의 밭에서, 나는 일상을 살고 있는 우리가 먹을 수 있는 먹거리를 수확하고만 싶다.
그는 왜 몸의 우주를 성욕과 살욕의 易의 우주라 말하는 것일까. 그는 왜 욕망의 이념형(ideal type)을 획책하는 것일까. 자칫 욕망의 다층성을 단지 두 개의 욕망으로 환원시키는 우에 빠질 수도 있는 것인데......
보편에의 욕망, 혹은 형이상학에의 욕망이 <칠조어론>에서 넘쳐난다.
라다크리슈난은 <인도철학사>에서 말한다. 인간의 삶은 '각성(깨어있음)/몽면(꿈 꾸는 잠)/숙면(꿈 없는 잠)' 이상의 세 가지로 구성되어 있다고. '진정한' 형이상학은 삶의 세 가지 양상을 포괄하는 것이어야 한다고. 또한 그는 서구 형이상학을 각성 상태에 한정되어 있는 그것으로 진단한다.
각성 상태의 철학은 경험성과 실용성을 강조한다. 그것은 이데아(idea)와 독사(doxa)라는 형태로, 이원적이다. 그러나 몽면과 숙면을 각성과 병렬시킬 때, 각성 상태는 몽면 상태에 상대적이며, 그 반대 또한 성립된다. 그리고 숙면 상태는 이들을 포괄하는 절대 준거가 된다. 운동은 존재에 준거하기 때문이다.
박상륭의 보편에의 욕망이란, 그래서 살욕과 성욕이라는 이념형적 욕망을 통해, 우주를 설명하고자 하는 그의 욕망이란, 숙면 상태를 향한 그의 지난한 몸짓인 것은 아닐까.
나는 그의 형이상학에의 욕망이 이해되기도 한다. 그러나 웬지 그의 도식을 따라 가는 일이란 불편하기도 하다. <성욕과 살욕> 박상륭을 이해하는 제일의 키워드다. <성욕과 살욕>의 의미에 대한 폭이 넓어질 수록 그의 세계에 대한 접근의 층위도 확장될 것임에 분명하다.
그러나 조심해야 할 것은, 성욕과 살욕에 대한 의미의 폭을 무작정 넓히는 일이 능사가 아니라는 점이다. 문학 비평은 작품 그 자체를 근거로 진행되어야 한다. 꼼꼼한 독해를 통해 작중의 인물을 근거로 성욕과 살욕의 의미를 재구성해 내야 한다.
어쩌면 <칠조어론>의 인물들만이 아닌, 박상륭의 모든 작중 인물들의 사건 목록표를 작성해야 하는지도 모른다.
손은 게으른데, 마음만 앞서니, 큰일이구나.
2002.7.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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