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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혹은 열매[新]

자본 욕망 노동 가치 임금; 자본욕; 자본주의; 자본욕마도

작성자지옥변|작성시간16.06.18|조회수79 목록 댓글 0

資本慾魔圖(Devilish Map of Capitalist Desires)에 낙서하기

1. 자본욕마도

나는 지금까지 자본주의시대를 살아오면서, 자본주의의 마성(魔性)에 도전하려는 사람들의 인식이, 아니면, 적어도, 그 마성의 압력을 견뎌보기라도 하려는 사람들의 인식이, 발디딘 근본적인 ‘문제틀’에 대한 역리적(逆理的) 의혹을 품어왔다. 그 의심스러운 문제틀이란 “인간의 의지와 구조(압도적 현실, 욕망, 고정관념, 편견, 통념, 시대정신 등등)의 숙명적 대결 내지 모순”으로 요약될 수 있다. 그것은 정치적 반항운동과 반항인들이 모색해온 개혁 및 혁명을 위한 근/현대적인 기획들과 대안들이 전제로 삼아온 보편적인 ‘문제틀’이다.

그러나 현실과 의지의 대립구조나 모순구조를 파훼하고자 노력해온 이들의 모든 기획과 대안은 근본적으로 실천적 딜레마에 봉착하고 말았다. 그러니까 “인간의 의지는 그토록 가공할 ‘구조’에 맞서서 적어도 ‘상대적인’ 관철능력만큼은 존재한다거나, 아니면 인간의 의지만 가지고는 저 막강한 구조의 압력에 도저히 저항할 수 없다”는 실천논리적 갈등과 혼선만 여태껏 심화되었을 뿐 문제해결의 실마리는 여전히 오리무중이라는 말이다. 문제를 이렇게 얕보는 인식태도는 여태껏 정치적 반항운동이나 변혁운동이나 혁명운동과 그것들의 주창자들이 입지한 진영들의 차이를 결정했다.

그런데 내가 볼 때 정녕 중요한 문제는, 인간의 의지가 구조와 투쟁하여 승리했느냐 패했느냐 여부, 승리할 수 있는가 패하고 말겠는가 여부, 아니면 인간의 행복과 번영을 달성하려면 감내해야만 할 힘겨운 노동과 투쟁의 역사적 보상 가능성이나 인간진보 가능성의 존재여부가 아니다. 그것은 오히려 ‘인간의 의지와 구조는 대립하고 모순된다’는 이토록 대대하고 보편적인 ‘인식전제’야말로 자본주의 발전의 심층 원동력이라는 것이다.

이런 대결모순구조를 확인하고 해결하느라 노력한 이른바 “헤겔(Hegel)의 ‘물구나무선’ 제자” 마르크스(Karl Marx)나 이른바 “모순론(矛盾論)”을 주창한 마오쩌둥(毛澤東)도 으레 그랬듯이 ‘모순의 현상과 해결방법’이나 ‘모순력(矛盾力)의 역사적 활용법’에만 관심을 모으는 데 그쳤다. 그러나 나는 이 세계를 대결모순구조로 파악하는 인식과 문제틀 자체에 의혹을 품어왔다.

무언가 혹은 누군가 ‘인간의 의지와 현실구조는 대립적이고 모순적일 수밖에 없다’는 인식을 우리에게 강요하고, 세뇌하고, 자극해왔고, 또 목하 그렇게 하고 있는 와중에 있지는 않을까? 자본주의는 당연히 그리고 실제로 인간, 의식, 이념, 체제 등의 대립과 모순구조를 필요로 하지만, 그런 구조가 정착되고 확립되기 위한 필수조건은 ‘우리가 의존하고 귀속되는 인식틀과 문제틀’이 아닐까? 자본주의는 오히려 실재하는 대립과 모순구조를 현실적으로, 그리고 특히 최소한으로, 해소하려는 듯한 제스처를 취해보임과 동시에, 다른 한편으로는 오히려 그런 구조에 포박된 인간들의 인식을 더더욱 철저히 대립과 모순구조로 조장하고 세뇌하면서 발전하고 있지는 않은가? 어쩌면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이런 현실을 조금만 더 심층적으로 분석하는 수고를 감수한다면 자본주의 특유의 이런 이중전략 내지 이중논리를 간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혹은 이른바 주류(主流)로 자칭하거나 타칭되어온 ‘자본주의 비판론들 내지 비판가들’이 인식한, 그러나 강박된, 문제틀은 바로 이런 대립과 모순구조가 유발하고 조장해온 고통스럽고 유독(遺毒)한 ‘발전과 진보라는 패러다임’ 속에서 형성되어왔다. 그래서 지금까지 그토록 수다하고 피맺힌 자본주의 비판론들 및 비판가들이 도달했던 논리들의 정점들이야말로 오히려 ‘자본주의가 자체모순을 극복할 수 있었던 최대최고의 거점’으로 부역해왔고, 실제로도 그런 ‘자본주의에 대한 암묵적 부역’이라는 사명을 거의 완수했다고 보아도 무방할 정도이다.

다시 말하면, 나는 자본주의를 파악하는 기존 문제틀의 “한계 안에서” 이루어진 자본주의 비판들이 이룩한 성과들이라는 것이 결국은 ‘자본주의의 발전과 진보’를 위한 전략전술적 수단들만 ― 즉 자본주의가 자체의 강도(强度)와 경도를 배가시킬 수 있는 인식론적 근거들만 ― 충실히 제공했을 뿐, 자본주의의 발전을 저지하거나 무너뜨릴만한 근본적이고 결정적인 타격을 자본주의에 가하지는 못했다고 본다는 말이다. 왜냐면 자본주의 인식체계 및 현실체제는, 그것이 1차적이고 필수적인 전제로 “요구하고 조장하는” 가혹한 혹은 빈곤한 ― 이른바 저 결정적인, 고질적인, 강박적인 “상대적 빈곤감이나 경제적 박탈감이나 열등감”을 포함하는 ― 현실문제들과 그런 현실을 극복하려는 자들에게 은연중에 각인된 “모순적, 부정적, 기만적 자기이해의 고통 내지 안도감”을 해소시킴으로써 발전하지는 않기 때문이다. 더구나 그런 인식 및 현실 체계나 체제는, 오히려 바로 그런 가혹한 현실에서 느끼는 상대적 박탈감과, 그것 때문에 고통 받고 또 그런 고통에서 벗어나기 위해 그런 현실에 대항하거나 복종하는 대다수 인간들의 처절한 “자기부정감정, 자기비하감정, 자격지심, 열등감, 박탈감”을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부추기지 않으면, 그리고 동시에 이른바 “비참하고 열악하여 극복해야 할 것으로 인식되는 ‘허구적 현실’을 부정하는 의지”나 “발전과 진보를 꿈꾸고 지향하는 허구적 자기부정의지”를 선전선동하지 않으면, “자본주의적인 또는 자본주의식(式) ‘발전과 진보’라는 것”조차 도모할 수 없는 체계/체제이기 때문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런 체계/체제를 극복하기 위한 노력들 자체, 자본주의를 부정하고 비판하고 타도하기 위한 노력들 자체야말로 오히려 자본주의 발전과 진보를 위한 진정한 원동력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진정으로 자본주의에 대한 반항의 심지에 불을 댕기고픈 사람이 문제삼아야 할 것은 바로 자본주의가 이처럼 은밀하고도 공공연하게 발전시켜온 이토록 절묘한 ‘이중전략’자체이다. 여기서 나는 물론이려니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른바 우리(We)’의 극대다수도 지금까지 무수히 묘사되었고 또 여전히 묘사되기를 그치지 않는 지옥도(地獄圖)일 수 있는 자본주의의 역사적 현실을 목도할 수밖에 없다. 마르크스와 엥겔스(Freidrich Engels)뿐 아니라 근·현대를 살았던, 살아온, 살아가는 무수한 이론가, 작가, 혁명가, 예술가들이 묘사했고 또 묘사하는 자본주의시대의 참상을, 근·현대의 지옥도를, 우리는 너무나 자주 목격했고 또 그만큼 처절하고 익숙하게 알고 있지 않은가!

그것은 자본주의라는 압도적이면서도 피폐한 현실에 어떻게든 대항하려면, 아니면 그런 현실을 적어도 대면이나마 하려면 끝내 스스로를 부정할 수밖에 없을뿐더러 그래야만 현실에 쥐꼬리만큼이라도 적응할 수 있는 근·현대인들이 ― 자청하거나 강제되어 데카당스(decadence)로 치닫는 인간들, 십중팔구는 임금(賃金)을 벌지 못하면 살아갈 수 없는 노동인간들(지식인들이나 예술가들의 처지도 별반 다를 게 없는데, 의사들이나 교사들도 스스로를 이미 지식인이 아닌 노동자로 자부하니까, 그렇다는 말이다), 그리고 이른바 예술에 종사하는 부조리한 인간들이 ― 각자에게 주어진 최고급 캔버스와 붓과 물감을 가지고도, 각자에게 아무리 불평등하게 분배되어도 적어도 국가단위에서는 마구잡이로 대량생산되는 막대한 자본을 가지고도, 겨우겨우 그려내는 지옥도일 것이다. 그래서 나에게 근·현대인들이 행복하고 번영된 미래를 위해 스스로를 희생하면서 발휘하는 이른바 저 “진취적인” 생활력과 생존력을 자랑하느라 벌이는 갖은 쇼들도, 그들이 소속되어 그려대는 지옥을 벗어나기보다는 도리어 그 지옥도(地獄道)에 죽기 살기로 끼어들어 한 자리 차지해보려는 처절한 자기부정의 몸부림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이 짓거리들이야말로 무릇 현대를 사는 인간이라면 누구나 ‘적극적으로’ 해야 마땅할 ‘지극히 당연한’ 짓거리, 그러니까 누구나 마땅히 그리하도록 ‘노력하고 또 노력’해야할 정언명령이 아니던가?

자, 과연 그렇다면, 무엇으로, 어떻게, 그런 짓을 해야 할까?

자신의 노동을 팔아서, 자본을, 이윤을, 잉여가치를 생산하여, 착취하든 공동분배하든 아니면 시장에서 합리적으로 혹은 각자 장사수완에 따라 수입을 올리든 임금을 지불받든지 하여…, 그리하여 아마도 개인의 부(富)=경제력이 국가의 부(富)=경제력이 되거나 국가경제력이 개인경제력이 되거나 하여…, 국가와 사회의 안보와 번영을 위한 토대를 구축하고… 운운운…?

노동, 자본, 상품, 이따위들 중에서도 자본!

이 대대적이고 압도적이며 보편적이고 절대적인 줠뙈적인 가치!

이 시대 인간의 모든 행복과 고통을 좌지우지하는 유일절대가치? 아니 적어도 보편적이고 어디에서나 통용되는 만유가치? 자본!

인간의 의지가 영원히 항쟁하는 가치이면서도 오직 그것 때문에 괴로워하고 죽음마저 불사하지 않으면 쥐꼬리만치도 붙잡히지 않을 듯이 보이는 “위대하고도 더러운” 유일절대만유가치, 자본!

그런데도 우리는 우리가 지금까지 자본주의라는 지옥도를 그려온 원인이 무엇이었다고 믿어왔던가? 아마도, 물론, 당연히, 자본이었다고 믿어왔을 것이다. 그리고 그 자본을 사용하고 통용하는 인간 자신과 인간의 욕망도 원인제공자였다 믿어왔을 것이다. 그래서 오늘날 인간의 의식과 삶을 좌우하는 근원적인 모순으로 회자되어온 것이 바로 자본주의라는 구조, 아니면 인간의 그 몹쓸 지독한 욕망, 이 둘 중에 하나였다고 믿어왔을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그 양자를 비판하고 평가절하하고 싶어도, 지금과 같은 현실에서는 절대다수 인간들은 절대로 자본의 교활한 마성을 피할 수 없을 것이다. 그들이 자본주의를 찬성하든 반대하든, 혹은 차라리 그 마성에 아예 세뇌되어 자본주의에 적극적이고 진취적으로 헌신하든, 나아가 인간의 욕망을 아무리 조작/통제/관리하든 상관없이 말이다.

자본주의에 저항하고 반대하는 자들마저도, 자신들을 지배하는 자들, “본래 자신들의 것이 되었어야할 자본”을 착취해가는 자들의 욕망을 그토록 저주하고 개탄하면서도, 오직 “자본”만은 자신들도 얼마나 애절하게 절절하게 바라던가! 그러니까 지금까지 실로 뉘라서 그 위대하고도 저주스러운 “자본”이라는 것의 뿌리까지, 그것의 씨알맹이까지, 통절하게 저주해봤던가? 마르크스조차도 그리하지 못했거나 아니했는데….

도대체 우리는 어쩌다가 이런 지경이 되었을까? 혹자는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가 자본주의 시대이기 때문’이라는 동어반복적인 답변을 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우리는 왜 자본주의 시대를 살고 있는 것일까? 어찌하여 한 시대를 사는 인간의 절대다수가 깡그리 이 더럽고 위대한 하나의 가치=자본에 놀아나게 되었을까? 우리는 왜 이런 ‘단 하나의 가치의 가공할 만한 전체화(全體化)’에 대해서만은 일말의 의문도 갖지 못했거나 갖지 않았던 것일까? ‘너무나 당연한’ 역사의 운동, 흐름, 대세, 세월이기 때문에? 아마도 그것이 그토록 당연지사이기 때문이지도 모른다. 그래서인지 우리는 그 더러운 가치를 획득하고 소유하고 분배하는 주체의 정체(定體)와 소속과 거취만 기준으로 삼아 편갈라왔고/편가르며, 지배자들이나 저항자들을 불문한 모두가 자본이라는 독보적 가치의 존엄성과 위력과 보편성만큼은 근본적으로, 의식무의식적으로, 본능적으로 인정하고, 묵인하고, 공인하고, 담합하고, 공모해왔을/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니만큼 자본을 서로 차지하고 전유하기 위하여 서로 목숨까지 거는 투쟁과 전쟁도 불사하면서 “역사는 언제나 자기들 편”이라는 듯 자랑스럽고 비장하게 법석을 떨고 아귀다툼해온/하고 있는 이 “적대적 공모자들”의 의식과 언동이야말로 자본주의 역사발전의 원동력이었음/임을 어쩌면 자각할 수 있는 이도 우리 중에 (설마?)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면서도 지금까지 자본주의에 대항하여 혈투해온 자들은, 자신들이 자본주의에 맞서서 대항하고 반항하는 근거가, 자신들이 사로잡힌 하나의 가치기준이, 자신들의 욕망과 정체성을 이해하고 확인하는 근본적인 가치기준이, 자신들의 인간적인 온갖 감정과 의식과 의지와 심경을 좌우하는 가치기준이, 그리하여 자신들의 그런 심경을 일말이라도 표현하려면 필히 발디뎌야하는 막강한 가치기준이, 다름 아닌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저주해온 바로 그 가치기준, 자신들이 비판하고 맞서 싸우고 숙청하고 처단하려는 자들의 존재를 뒷받침하는 가치기준, 자신들을 그토록 착취하고 괴롭혀왔다는 탐욕스러운 "이른바 한 줌도 되지 않는" 악귀들에게 악력(惡力)을 부여해온 가치기준 즉 자본이라는 것을 과연 인정할 수 있을까?

다시 말하면, ‘그들은 자신들의 적들이 중시해온 가치를 자신들의 반항과 투쟁의 근거로 삼아, 자신들은 소유하지 못하거나 부족하거나 본래 자신들의 몫이었어야 할 가치들마저 적들이 착취한다는 이유로 적들을 비난하고 타도하기 위해 처절한 투쟁을 벌여왔다’는 사실을, ‘자신들이 그토록 증오하고 저주하는 적들이 중시하는 가치에 의거하여 지금까지 자신들이 반항하고 투쟁해왔으며, 바로 그런 적들이 중시하는 가치에 준거하여 자신들의 욕망과 인생을 평가하고 이해하고 표현해왔다’는 사실을, 그리하여 그들자신이 중시하는 가치와 그들자신의 적들이 중시하는 가치가 동일한 것이었음을, 또 그리하여 그들 자신이 ‘본래’ 중시한 자신들의 가치라는 것은 ‘본래’ 존재하지 않았음을, 또, 또 그리하여 그들 자신을 대변하는 가치라는 것도 ‘본래’ 존재하지 않았음을, 그들은 과연 어떻게 이해할 수 있을까? 아니, 도대체 이해하고 싶기는 할까?

하기야 본래 싸움이란 서로 짝짜꿍이 맞았던 치들끼리 하는 것이라지 않던가!

자, 그래서, 오늘날 번창하는 자본주의의 민주주의와 복지라는 것이 그토록 그것을 원했던 자들을 만족시키고 있는가? 그들은 이토록 민주적인(?) 현실을 저 처절했던 인간의 정치경제사회문화역사적 투쟁의 찬란한 결과로서 망상하고, 그들이 바라마지않던 역사의 목적이 거의 달성되었다고 평가할 수 있을까? 그들이 과연 그렇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아마도 그럴 리는 없겠지만, 우선 그렇다고 가정해보자. 그래서 이 정도면(?) 저 눈물겨운 자유와 평등의 이상이 실현될 물질정신적 조건으로서 경제적 평등, 이른바 “희소가치의 권위적 분배”가 어느 정도 실현된 것으로 볼 수 있다고 가정해보자. 특히 유래 없이 다양해졌다고 미망되는 인간욕구를 실현시켜줄 수 있을 듯이 ‘부유(富裕~浮游)해진’ 시대처럼 보이는 오늘날 자본주의가,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언젠가는… 개선되고야 말 잔존 불평등과 잔존 아픔들을 우리가 감수하는 만큼, 그만큼, 더더더 많은 자본주의적 가치를 우리에게 선사하고 있으며, 또 향후에도 선사해줄 것이라고 낙관할 수 있다는 꿈이라도 꾸어보자.

그러나 대관절 이게 어찌된 일인가? 우리는 한편으로는 자본주의역사만큼 피비린내 나고 비도덕적이며 착취와 폭력으로 얼룩진 역사는 없었다고 비난할 수도 있고, 더구나 지금까지 너무나 자주 비난하고 저주해오지 않았는가? 그러니까 우리는 이토록 민주적인 시대도, 대다수 인간은 자유롭고 평등하기보다는 여전히 부자유하고 불평등하게 억압당하는 가운데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계급만 쾌락과 안락을 누린다는, ‘소수가 다수를 지배하는 체제’와 다름없다는 느낌에 사로잡혀있지는 않은가? 그리하여 우리는 이 시대를 인간의 다양한(?) 충동과 욕구를 억압하고 오직 “돈욕과 성욕”만을 허락하는, 아니, 차라리, 오직 그런 ‘욕들’만 가져야한다는 듯이, 참을 수 없는 경쟁과 감시체계로 자발적으로 포획되려고 안달하면서, 저 무구한, 그래서 잔혹한 자연에 대한 파괴만 일삼는 악귀들의 지옥도를, 두려움에 진저리치면서도, 망연자실 바라보고만 있지 않은가?

자본주의는 이처럼 이율배반적인 평가와 감정과 의식과 심경을 조장하면서, 참으로 징그러운 동어반복적인 평가와 감정과 의식과 인식만 대량생산하면서, 어느 순간 우리에게 너무나 익숙하면서도 낯선 모양으로 다시, 또다시, 우리 앞에 버티고 선다. 저 “에로틱한 황금의 철옹성”이 요사스러운 괴물의 형상으로 “산업시대의 돈키호테들” 앞에 위용을 드러내고 군림하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인간에게 “보편적 쾌락”을 허용하는 듯하면서 “보편적 고통”을 강요하고 있다. 나는 한 시대의 경제적 조건이 이처럼 극대다수 인간의 모든 것을 좌우할 수 있다는 사실을 도대체 믿을 수 없다. 그러나 나는, 어느새 이토록 역겨운 자본주의에 봉사하지 않으면 도저히 어찌할 수 없는 자신을 발견하는 내가, 그리고 그런 나 때문에 또 괴로워하는 내가 더욱더 낯설게 느껴진다. 거대한 향응은 희소하게 분배되나 향응욕(饗應慾)만은 참으로 평등하고 풍부하게 분배되는 지옥도 같은 이 자본주의시대라는 한 시대는, 비단 나뿐만 아니라 이 시대를 살아가는 이들의 극대다수에게도 익숙한 만큼이나 낯설게 느껴질 것이다.

그러나 자본주의는 바로 이런 “낯섦”이라는 무기로 자본주의시대의 인간을 즐거움으로도 자유로도 고통으로도 죽음으로도 몰아간다. 너무나 익숙한 것들의 이토록 낯섦!

그렇다면 이런 낯섦은 도대체 어디서 비롯되었을까?

마르크스는 인간역사를 계급투쟁역사로 파악하면서 시대들을 관통하는 구차한 물질적 조건에 대한 인간의 투쟁이 그런 낯섦을 조장한다고 보았다(마르크스, 『경제학-철학에 관한 1844년 초고』 참조). 특유의 유물론적 역사관, 저 헤겔의 변증법이 던져주는 기막힌 환상 ― 이른바 '비약(飛躍)' ― 의 논리에 사로잡혀, 그리고 과학이라는 기술적 발명품의 경이로움에 매혹되어, 그가 역시(逆視)한 역사는 계급투쟁과 혁명의 역사로 역시(逆示)되었던 것이다.

혁명시대는 언제나 계몽시대이기 마련이다. 이 필연적인 우연, 이 필연적인 낯섦을 앞둔 인간은 시대의 계몽을 필요로 하고 시대를 계몽하고자 노력한다. 그러나 마르크스가 볼 때 “계몽”은 투쟁가들이 추구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자신의 투쟁의지를 불태운 이상(理想)과는 너무나 다르게, 어느새 자신 앞에 다가온 새로운 낯선 세계에 대한 인간의 (참으로 보잘것없는) 적응방식에 불과했을 것이다. 마르크스에게 계몽된 인간은 오직 수동적으로 적응하기만 할 수밖에 없는 존재로 보였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물질에 붙들려 얽매이고 결박된 인간정신의 무기력함”을 그토록 저주했으리라(마르크스, 『독일 이데올로기1』참조).

그런데 오늘날 자본주의시대를 살아가는 (약간의 여가와 취미도 즐길 수 있게 된) 그래도 꽤 많은 사람들이 그런 낯선 시대의 낯섦에도 적응하고, 더욱이 그것을 즐기고 활용할 수도 있게 되었다는 사실은 또 무엇을 의미하는가? 그것은, 자본주의시대의 자기표현법들 중에 하나인 모더니즘(modernism:현대주의)이 모더니즘자체의 낯섦 안에서 그 낯섦을 부여잡으려고 애쓰면서 그 낯섦에 힘겹게 적응한 보상으로 다시금 자체에 주어지는 모더니티(modernity:현대성)를 자체의 존재성으로 이해하고자 그토록 심각했던 한 시대가, 이제 그 시대의 내부에 새로운 시대를 서서히 준비하고 있다는 하나의 징후인가?

그래서 우리는 이른바 포스트모더니즘(postmodernism; 후기현대주의)이라는 낯섦의 첨단표현에 흥분하고 그 ‘첨단’낯섦을 가볍게 일회적으로 즐기며 소비해버릴 수 있는 시대를 살게 된 셈일까? 억압된 쾌락과 고통이 뒤엉켜 몸부림치던 그토록 낯설던, 그러나 무지기도 심각했던 모던(modern; 현대스러운) 시대를 가볍게 소비해버리고, 또다른 낯섦을 찾아 눈알을 휘두르는 인스턴트(instant; 즉석일회성)시대로, 그리하여 하나의 쾌락과 하나의 고통만이 인생의 참된 의미였던 그 ‘진부한 진취적인’ 시대가, 현란하지만 덧없는 온갖 잡다한 쾌락과 고통이 소용돌이치는 시대로 거침없이 이행하기 시작했다는 말일까? 이제 자본주의는 “후기(post)”자본주의로 거듭나고 모든 문화현상에 “후기[또는 포스트, 또는 탈(脫)]”이라는 접두어들이 난빙(亂憑)해도 무방한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말일까? 그리하여 이제는 모더니즘이 이른바 묵시론적 “세기말”을, 즉 시대와 인간과 역사의 “위기”나 “종말”을 외치며 야단법석을 떨지 않으면 더는 자체의 그토록 ‘남루한 낯선’ 모더니티를 참아낼 수 없는 시대가 다가오기라도 했단 말일까? 이런 고쾌(苦快)하게 느껴지는 현상들을 우리는 과연 시행착오의 교훈 따위로 평가할 수 있을까? 그것들은 필경 고루하고 부정적인 허무주의 시대의 증상들을 드러내고 있는 듯이 보이는데도.

2. 반(反)자연적 자연의 필살기: “눈물 젖은 빵”

이처럼 내가 헤적거려본 억측들은 불안하게나마 내 고질적 편견의 균형을 잡아보려는 무모하고 불행한 노력의 발로이리라. 그래도, 하여간, 나는 지금까지 자본주의를 상대로 제시된 비관론의 시각과 낙관론의 시각을 아울러 감안하여 ‘자본욕마도’ 같은 것을 억도(抑塗)해보려고 했다는 것만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비관론과 낙관론은 모두 부정적 허무주의 감정과 의지의 변종에 불과하다고 여긴다. 왜냐면 이 두 가지 “관론(觀論)”은 모두 인간을 미래에 집착하게 만들어 미래의 진보와 행복을 꿈꾸게 만들고, 그런 미래의 환상에 현재와 과거를 비견하여 현재와 과거를 고통의 시절로 평가하도록 조장하는데, 나는 바로 그런 과거와 현재를 비하하고 미래를 높이 치는 모든 심리감정인식의식관념(慣念)을 허무주의의 징후로 여기기 때문이다. 다시 말하면, 한 시대의 모든 관심을, 최대다수의 관심을, “자본욕과 성욕” 곧 현대의 “권력 메커니즘의 제1수단”에 대한 강박과 집착으로 몰아가는 이 자본주의라는 이중가치전략체계는, 부정적 허무주의를 조장하고, 과거와 현실과 자아를 부정하도록 세뇌하며, 미래라는 보상적이고 유혹적인 환상을 인간에게 적선=강요함으로써 유지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시대는 현재로서는 불치로 보이는 하나의 증상 즉 돈과 셕스(번식겸쾌락행위)를 갈망하는 인간들의 처절한 강박욕과 집착욕을 유혹/조장/강제함으로써 그 자체의 낯섦을 ‘희소하게 보이도록 착색하면서 대량으로’ 생산하여 매매하는 시대로 보인다는 말이다.

자본주의문화 또는 근/현대(혹은 후기-자본주의, 또는 포스트-모더니즘)문화 전체가 ― 본질적으로는 유럽/미국식 문화가 ― 이런 “낯섦, 자기부정, 부정적 허무주의”라는 주제를 벗어나면 존재할 수 없다는 현실은, 이 시대가 하나의 심각한 병적인 욕망들을 유통시킴으로써 현상유지되거나 활성화되고 있다는 인상을 물씬 자아낸다. 여기서 돈과 셕스(번식겸쾌락행위)가 문제인 까닭은 그것들이 이 시대의 쾌락과 고통의 대부분을 관제한다는 사실에 있다. 그래서 자본주의적인 쾌락과 고통에 대한 욕망을 필수적으로 가져야만, 내면화해야만, 그 욕망에 사로잡히고 강박되어야만, 이 시대도 이 시대에 속한 인간들도 “존재”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 심각히 추문해야할 문제는 “인간은 왜 돈과 셕스(쾌락겸번식행위)에 미치는가?”도 아니고 “인간이 그런 돈욕과 성욕의 굴레로부터 어떻게 자유로울 수 있는가?”라는 문제도 아니다. 그것은 “자본주의는 이 두 가지 욕망을 어떻게 자극하고 통제함으로써 자체를 유지확대될 수 있는가? 그리고 자본주의는 이런 인간욕망들을 어떻게 심리질병과 부정적 허무주의로 몰아서 자체의 활력(권력)을 발휘하고 증산할 수 있는가?”라는 것이다.

왜냐면 돈욕과 성욕은 유독 자본주의시대에만 존재한 것이 아니고, 부정적 허무주의도 유독 자본주의시대만의 질병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들 욕망과 심리질병과 관련된 자본주의시대 특유의 문제가 존재한다. 그것은 돈과 셕스(번식겸쾌락행위)를 갈망하는 인간의 자연적 욕망이 자본주의 생산양식과 생산관계라는 특정한 존재양식에 따라 특정한 방식으로 기능해왔다는 데 있다. 그런 메커니즘은 일종의 근/현대적 무의식으로서, 근/현대적 선악을 구분하는 기제로서, [이른바, 막스 베버(Max Weber)가 생각하는 의미의] 근/현대적 에토스(ethos)로서, [이른바, 루이 알튀세르(Louis Althusser)가 생각하는 의미의] 근/현대적 이데올로기로서, [이른바, 미셸 푸코(Michel Foucault)가 생각하는 의미의] 근/현대적 에피스테메(episteme;)로서, 자본주의 활성화를 위한 전략적 동력거점이 되어왔다.

그런 전략이 채택하는 일반적인 전술은, 단적으로 말하면, “유한한 것의 영원한 재생산”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전술은 구체적으로 경제적 재화뿐 아니라 경제동물들 즉 “자본주의적 (혹은 근/현대적인) 인간형”을 재생산하고 지속적으로 쇄신하는 과정의 정착과 활성화를 목표로 삼는다. 이 전술적 목표는 “자본주의세계의 유기체화(organization)”라는 역사적 목적에 부응한다.

그래서 마르크스가 예언한 자본주의라는 특유한 역사적 인간존재양식이 오늘날 과거의 모든 물질정신적 성과들을 자체의 고유한 법칙으로 재현(복제, 재생, 쇄신)하는 모습은, 역설적인 표현이긴 하지만, “반(反)자연적 자연”이라는 기괴한 인간생산양식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이런 자본주의적 인간생산양식 즉 “자연화된 반자연”은 자연보다 훨씬 가혹하다. 자본주의의 이 막강한 무위(武威)는 역사상 가장 활달하고 발랄하게 인간의 거의 모든 (극단적이기까지 한) 욕망과 감정들을 가공생산하고 있다. 이 반자연은 그것이 선정하고 강제하는 위력적인 사출구(射出口)로 그것의 피조물들을 몰아붙임으로써 그것이 고시하는 가치 즉 돈과 셕스(쾌락겸번식행위)를 “신성화=세속화”시킨다. 돈과 셕스(번식겸쾌락행위)는 이 시대 인간들의 삶과 죽음을 관통하며 돈욕과 성욕을 생산하고 관제한다.

자본주의시대의 인간은 돈과 셕스(쾌락겸번식행위)를 대가(代價)로 너무나 많은 것을 희생해야만 했고 또 하고 있으며 또 할 것이다. 과거에는 상상조차 못한 엄청난 물질과 정신을 낭비해야만 했고/하고/할 것이며, 종국에는 자신이 인간이라는 사실마저 부정해야만 했고/하고/할 것이다. 급기야 자본주의적 인간은, 넥타이를 매고하든 푸른 작업복을 입고하든, 불가피하게 혹은 진취적으로 종사하는 자신의 곤고(困苦)한(또는 희망적인?) 노동을 자기소외와 자아상실의 원흉으로 느껴야하는 기계인간들의 시대를 맞이해야만 했다. 그리하여 이른바 “노동하는 인간”의 위대성(?)은 곧 바로 자신이 생산한 상품과 이윤의 위대성(?)에 압살되어버린다. 노동하는 인간은 이제 말도 못하는 동물로 “변신[카프카(Kafka)]”해버리거나, 적어도 상대적 빈곤감 내지 끝없는 박탈감의 굴레를 맴돌아야만 하는 자본생산기계로 전락해야만 했다/한다/할 것이다.

우리시대에는 아직은 우리의 위대하고 신성한 노동이 우리에게 어떤 보람과 미래의 행복을 부여하리라는 “실낱같은” 희망이 꼼틀대고 있기는 할 것이다. 그런 보람과 행복의 대부분은 자본이 허락하는 돈과 셕스(번식겸쾌락행위)의 표현 즉 “쥐꼬리만한” 여가로부터 얻어질 것이다. 그러나 돈과 셕스(쾌락겸번식행위)로 표현되는 여가는 오늘날, 결코 즐거운 노동의 산물이 아니다. 그 노동은 이른바 “상품화된 노동, 소외된 노동, 상실된 자아의 노동”이다.

“돈과 셕스(쾌락겸번식행위)=여가”는 결국 “노동의 심리적 감옥”으로 확립된다. 이토록/저토록 하기 싫은 노동, 죽지 못해하는 노동, 이 너저분한 생활을 근근이 유지하기 위한 구차한 노동은, 돈과 셕스(번식겸쾌락행위)를 적선받지 못하면, 그러니까 이른바, 저 쥐꼬리만한 “인센티브(incentive:성과급?)나 메리트(merit)나 보너스(상여금?)”라도 적선받지 못하면, 무의미해질 따름이다. 오늘날 극대다수 노동은 이처럼 지극히 자본주의적인 노동의 동기(動機), 즉 돈과 셕스로 대변되는 여가, 곧 "자본주의욕망들의 불쏘시개들"로써만 추동될 뿐이다.

자본주의 전략적 목적은 바로 이런 욕망들을 자극하고 관제하여 자본주의를 유지확대하는 것이다. 그래서 이들 화려하고 현란하며 쾌락스럽지만 끝없이 자체쇄신해야 잘도 돌아갈 동어반복적이며 헛되고 헛되어 헛된 보람의 상징들은 곧 바로 좌절과 절망의 상징들로 변신해버린다. 자본주의적 노동을 자극하는 현란해보이지만 지극히 단순한 동기인 돈과 셕스(쾌락겸번식행위)로 즐기는 여가는, 이른바 저 우스꽝스러운 “성취동기”(나의 희미한 기억으로는, 1980~1990년대 한국의 중고등학교 도덕·윤리교과서는 이 덕목을 꽤 중요하게 선전하고 있었다)를 자극하는 굳건한 “자본욕망의 구조”만 닦았을 뿐이다.

그러나 이른바 “자본주의정신(또는 자본주의윤리)”은 지독하게 “자비롭고 교활하게도” 자본주의의 안정된 생산력을 증진하기 위해 노동 ― 과거에는 주로 죄와 벌과 게으름과 가난과 고난과 불행의 상징이자 교정교화용 형벌기법이던 ― 에 약간의 긍정적이고 비장한 가치를 부여했다. 그런 가치부여는 그렇게 불행했던 노동하는 인간들에게 금욕적이고 도덕적인 “윤리성”을 선물하고 포장하고 보장해주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인내하며 근면하게 노동하여 금욕적으로 저축하여 도덕적으로 소비하면 내세 혹은 먼 현세에는 쥐꼬리만한 알콩달콩한 쾌락이나마 맛볼 수 있으리라는 신비롭기 그지없어서 더 교활한 논리가 노동하는 인간의 윤리성을 보증하게 된 것이다. 자본주의윤리는 바로 이런 윤리성을 노동하는 인간들에게 적선함으로써 노동윤리로 정착된다.

이런 노동의 윤리적 신성화는 두 가지 방향에서 이루어진다. 거듭 말하지만 자본주의 이전의 노동은 본시 형벌과 속죄의 의미를 지니고 있었다. 그래서 노동과정은 “인간 아닌 인간” 즉 “노동하는 인간”에게 윤리성을 적선하여 “인간화”시키는 하나의 방편이기도 했다. 유럽에만 국한시켜보더라도 중세의 형벌체계가 근대의 사법체계로 변이하는 과정에서 가혹한 처벌(체형, 고문, 사형) 대신에 애용되기 시작한 노동은 비(非)인간들을 사회인간들로 사육(社育)하는 윤리도덕적 메커니즘으로 작용한다. 그러나 그때까지도 노동하는 인간은 여전히 죄악이나 야성에 휘둘리는 악하고 비천하며 불완전한 인간으로 간주되었다(미셸 푸코, 『감시와 처벌』 참조).

그러다가 근대유럽에서 형성된, 이른바 막스 베버가 노출시킨 프로테스탄티즘 곧 자본주의정신은 노동을 인간의 도덕적 존재양식으로 간주하기 시작했고, 특히 헤겔은 아예 근본적 인간존재양식으로까지 규정하기에 이른다. 헤겔은 노예는 주인을 상대로 인정투쟁을 벌임으로써 근대적인 시민으로 성숙한다고 보면서, 그런 인정투쟁과정이 다름 아닌 노동과정이라고 파악했다(헤겔 『정신현상학』과 임석진 『헤겔의 노동의 개념』 참조). 이제 노동은 형벌과 속죄라는 부정적 과정이 아니라 “신성하고 역사적인 인간화 과정”으로 탈바꿈한다. 그토록 힘겨운 비인간적 노동이 인간적인 진보와 민주화의 활로로 거듭난 것이다. 이로써 노동이야말로 자본주의시대 대다수 인간의 진정한 도덕적 윤리적 인간적 존재양식으로 성립된다.

이제 노동하지 않고 무위도식하던 과거의 주인들(왕, 귀족)이 죄인들이자 사악한 존재들로 비난받고, 노동과 노동자들이 신성을 얻기 시작한다. 이로써 노동은 과거에는 비천한 무지렁이에 불과했던 노동하는 다수들에게 진정한 “존재의미”를 부여하는 듯이 보였다. 그리하여 이른바 사회성원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노동계급은 주체적 인간으로서 사회적 존재가치를 자신들의 노동으로써 발견할 수 있다고 여겼을 것이다.

특히 노동관의 결정적 전환은 두 명민한 과학자(마르크스와 엥겔스)가 “한 줌도 못되는 소수의 악마들인 자본가들이 노동자들의 신성한 노동의 산물을 착취하고 노동자들의 노동가치를 끝없이 평가절하하면서 노동자들을 지배해왔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이루어졌다. 그런 깨달음을 반영하는 것이 이른바 저 “노동가치론”이다. 노동자들은 이제 자신들의 노동가치를 반환받기 위해 정치사회계급역사적 혈투에 돌입할 수밖에 없는 처절한 역사를 예감해야만 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인식론적 전환 아닌 전환, 혹은 전복 아닌 전복의 과정에 오히려 편승한 자본주의는 멋들어지게 발전해버린다. 사실 마르크스주의가 떠받드는 노동의 신성함이란 그것이 비판하고 도전하는 기득권자들의 경건하고 도덕윤리적인 허울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실제로 노동자들이 원했던 것은 “신성한 노동자체”가 아니라 노동의 “신성한 산물”이었다! 아니, 한발 양보해서 그들이 원했던 것이 노동의 보람이라고 치자. 그럼에도 그 보람이라는 것 역시 자본주의적 욕망을 충족시키는 희소한 것들의 평등한 분배에 좌우되던 것이 아니던가. 그들이 노동으로 얻으려던 것은 그들의 노동의 진정한 가치와 신성함이라기보다는, 저 “눈물 젖은 빵”을 얻기 위한 돈, 치욕적인 한 판의 셕스(번식겸쾌락행위)를 위한 돈, 유치하기 그지없이 덧없고 덧없는 한 순간의 여가를 얻기 위한 돈이었을 뿐이다. 아, 피눈물 빼는 빵이여, 돈이여, 셕스(쾌락겸번식행위)여!

그래, “가진 것은 쇠사슬과 곤고한 육체밖에 없다!”던 그 슬픈 노동자들이 얻은 것이 진정 빈곤탈출과 계급해방이었던가? 아니다. 노동자들이 얻은 것은 민주주의라는 환상적 정치권력이 살포하는 권력=자본의 부스러기가 풍기는 용연향(龍涎香)으로써 시술되는 최면술이 적선하는 덧없는 환각이었다/이다/일 것이다. 그 최면술은 “인간은 본래 자유롭고 평등하다(혹은 그래야만 한다)”는 근/현대적 환상을, 이 어처구니없는 이상(理想)만 계몽한다.

노동자들의 노동력은, 아니, 진실로 말하자면, “신성한 노동으로부터 탈피하기 위한 몸부림”은 종래에는 진리의 반열에까지 오르는 이 환상적인 이상들(인권, 자유, 평등, 민주, 복지…)만 자신들의 뇌리에 이식하고 말았다. 자신들의 욕망으로, 자신들의 원망으로, 자신들의 원한으로, 자신들의 저항과 투쟁으로. 그러나 그 환상적인 이상들이 실현된 곳도 실현되어야할 곳도 바로 “지금-여기”가 아니다. 저 머나먼 미래이며 희망의 세계이다. 그곳은 또다른 환상의 장소인 평등하고 자유롭고 민주적인 “시민사회”일 것이지만, 그곳조차도 유혈만장한 투쟁의 역경을 요구하는 어설프고 황감한 “개념의 세계”에 불과하다.

그런데 그런 환상적인 시민사회는 자본주의가 생산한 또 하나의 매혹적인 선전물이다. 시민사회는 “소비”라는 옛 지배자들의 “사치”를 “모방/유혹”하면서, 노동자들로 하여금 또 다시 자본주의적 노동소외를 자극하면서도 그것을 망각하게 만드는 ― 노동자들을 농락하는 ―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소비시장”이 된다. 그러므로 자본주의인간이 “자유롭고 평등하다”는 말은 그런 소비시장에서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비한다”는 말이다.

그런데 이미 노동은 “자유롭고 평등하게 생산”하는 단계에 있다. 이제 필요한 것은 “소비의 자유와 평등”이다. 노동자들이 자유롭고 평등하게 생산한 노동생산물을 ‘도덕적이고 윤리적으로 그러나 자유롭고 평등하게’ “소비하는” 시장은 이제 유혹시장(誘惑市場)이 되어간다. 생산현장이 강제와 억압과 착취로 점철되어 왔다면, 유혹시장은 욕망에 대한 자극과 매혹, 현란하고 화려한 선전과 광고로 점철된 상품의 분류(糞流)가 된다.

그러나 이 시장은 조잡하고 투박한 모사품들과 대량복제품들을 대량소비하기 위한 시장이다. 특히, 이른바 특화된(specialized), “결코 낯설지 않은 낯섦”으로 광고되는 상품들의 대량복제! 이로써 상품이라는 사물 역시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는 듯이 보인다. 그렇다면 이제 거의 완벽하게 “상품화된 노동자들” 역시 이미 자유와 평등의 원리를 구현하고 있는 셈은 아닌가?

어쨌거나 이런 자본주의의 재기발랄함은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체하는) 부르주아와 소박하고 순진한 노동자들의 소비욕이 잡탕된 위대(胃大)하고 천박하면서도 늘 새로운 그러나 전혀 새로울 바 없는 “대중문화”를 생산한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이 감내한 피맺힌 투쟁과 생산/재생산의 고역 덕분에 이젠 어엿한 자본주의의 근간이자 주체로서 자리 매김된다. 시장의 주체로서 노동자들은 이제 “어엿한 인간”인 자신들의 신성한 노동으로 얻은, 비록 최저생계비를 찔끔 웃돌기는 하지만, 자신들의 “노동의 정화(精華)인 임금(賃金)”이 부여하는 어엿한 “시장참정권(市場參政權)”을 빼앗길 새라 소중히 품고 현란한 유혹시장을 기웃거릴 수 있게 된다.

이 처량한 임금, 쥐똥만한 임금, 눈물겨운 임금, 소중한 임금, 땀의 정수인 임금은 소박하고 단란한 가정, 밥은 굶지 않는, “남들이 보기에도 그럭저럭 ‘사람같이’ 살아가는 가정”, “남부럽잖은 가정”을 꾸릴 수 있게 해주고, 천박하고 단순하지만 그마저도 희소하기 그지없는 (이른바 여가니, 취미생활이니, 자아실현이니, 자기계발이니 하는 갖은 포장언어로 자신의 비속함을 감싸는 속류 미메시스, 댄디스트, 딜레탕트 등등이 홀짝거리는 쾌감도 포함한) 쾌감이나마 몇 쪼가리정도는 향유할 수 있게 해준다….

아, 이 얼마나 치졸한 임금(賃金;王)이련가…

3. 정신이 되고픈 자연적 반(反)자연

그런데, 자본주의라는 이 교활한 불가사리는 또 얼마나 발빠른 배불뚝이인가! 그래서 이 괴물은 얼마나 탐욕적이고 유치한 “아이 폐하!”이던가! 이 녀석은 기분 좋으면 평화와 인도주의의 탈을 쓰고 역겨운 교태로 자선무(慈善舞)를 추기도 한다. 그러나 이 위선적 괴물의 자선춤은 내 눈에는 실로 역겹고 교활한 교태로 보이고, 나로 하여금 인생을 치졸하고 넌더리나게 여기도록 부추기면서, 나의 정신과 의지를 가지고 노는, 저 빌어먹을 “희소성, 희소가치의 원리”로만 보인다.

도대체 자연이 인간에게 그리도 인색하고 잔인했던가? 우리가 진저리치며 자선받는 저 “눈물 젖은 빵” 한 조각, 쥐꼬리만한 일용할 양식이 과연 자연의 인색함에서 비롯되던가? 그토록 지독한 인생의 의미가, 그토록 처절한 적자생존이라는 정언명령이, 저 풍요로운 자연자원의 지독한 희소성에서, 저 가혹한 자연의 비소성(卑小性)에서 비롯되던가? 과연 자연은 자신이 낳은 자신자체 또는 자신의 분신에게, 자신의 자녀 겸 자신자체에게마저 그토록 인색하고 치졸한 자신의 어미이자 아비이던가?

혹자들의 사시눈깔에는 고깝기 그지없게 들릴 이런 질문들을 연신 끼적질해대는 나는 진정 “눈물 젖은 빵”의 의미를 모르는, 그저 곱게 길러진, 그래, 그래, 빌어먹을, 그래, 그렇게 자비로운 자본주의가 곱디곱게 길러낸 행복에 겨운 게으른 꾀죄죄한 투정꾼에 불과하게 보일지도 모르리라. 그런데도 이토록 행복에 겨워 어쩔 줄 모르는(?) 나는 저 가혹하고 비소한 자연으로부터 나를 구원하여 행복하게 해주는 이 자본주의에 감사하거나 환호자약하기는커녕, 왜 이리도 자본주의를 수치스러워하고 치욕스러워 하는가? 나는 왜 이리도 자본주의를 역겨워하는가?

나는 아직도 믿을 수 없다. 자연이 진정 그토록 인색하고 가난한 것인지를.

그러니까 프랑스 철학자·정치경제학자·사회인류학자 조르주 바타유(George Bataille)의 《저주받은 몫(La Part maudite)》을 참조하여 내가 말하건대, 자연은 차라리 엄청난 사치꾼이다! 자연의 존재양식은 오히려 걷잡을 수 없는 낭비, 최대낭비이다!

인간은 왜 이 사치스럽고 헤프기 그지없는 자연을 희소하고 인색하고 가난하고 초라한 것으로 오해해왔을까?

자본주의는 바로 이 어처구니없는 오해를, “자연은 인색하다! 자연은 희소하다!”는 이 졸렬하고 비겁한 오해를 ― 자연이 자신의 권태를 이기기 위해 낳았을 최대의 사치꾼이요 최대의 낭비자인, 어쩌면 자연이 보기에도 참으로 조악해보기는 하겠지만, 하여간, 그래도 자신이 낳기만 하고 방치해버린 자녀들인, 이토록 사치스럽고 낭비쟁이인 ― 인류라는 최대의 숙주요 기생자들에게 이식하여 배양해야만 생존하고 활동할 수 있는 불가사리처럼 보인다.

자본주의인간이라는 자비롭고 영악한 “노동=욕망기계들”이 탄생한 원인이, 혹시, 우리 인간 자신이야말로, 이토록 엄청난 낭비자인 인간 자신이야말로, 자연이 낳은 모든 생명 가운데 가장 막대한 낭비자라는 사실을, 인간 스스로 전율스럽게 각성한 결과는 아닐까? 극대다수는, 그러니까, 사드(Marques de Sade)나 바타유나 니체나 박상륭 같은 정신들을 제외한 대다수는 “설마 그럴 리가?”라고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보라! 지구상 생명들에게 불평등하게 주어진 생명력을 ― 적어도 근/현대 이후 ― 가장 많이 낭비해온 생물은 바로 인류였다. 지구상에서 소비되는 생물에너지의 거의 대부분을 인류가 소비하지 않는가!

그러면서도 우리는 “눈물 젖은 빵이야말로 인생의 참다운 의미를 가르친다!”는 이 지겹디지겨운 신파적 교훈에, 그러나 아직도 너무나 당연하고 처절하게 흉식(胸植)된 이 구차한 신파오설(新派誤說)에 진저리치고 만다.

나는 감히 묻는다. 대관절 경제학자들을 위시한 갖은 학자들은 지금 무엇을 계산하고 생각하고 써대느냐고. 이 신파극의 저열한 조연출자들이 바로 경제학자, 정치학자, 사회학자, 학자, 학자, 학짜들은 아니냐고.

우리는, 우리의 학자들은, 우리의 자연, 인간의 자연, 이 자본주의라는 “자연적 반(反)자연” 내지 “반(反)자연적 자연”을, 저 인색하고 가난하고 연약하고 초췌한 것으로 착각되는 자연의 공과(供過)로 치부하면서,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전적으로 “자연의 희소성”에 돌려버리는 버릇을 버리지 못하고 있다. 우리는 혹시 이 반자연적 괴물을, 자본주의를, 각박하고 빈한하고 인색한 “자연이 선택한 적자(適子)”로 믿는지도, 믿고 싶은지도 모른다. 과연 그럴까? 오히려 자연은 인간에게 너무나 과도하게 베풀지 않았는가? 대지는 차라리 인간에게 너무나 풍부하고 넘쳐나는 의미의 자궁이 아니던가?(작은 예로, 지구상에 쏟아져 나온 무수한 “서정시”들을 보라!)

……

그런데, “정신” 한 떨기를 키우려면 육체 한 덩이를 키우는 데 낭비되는 물질과 에너지보다 훨씬 더 많은 물질과 에너지가 낭비되어야 한다는 사실도 우리는 안다(그런데, 과연? 알까?).

그래서 인간의 정신은 자연의 불꽃이요 정화이리라. 자연이 그토록 엄청나게 자신을 낭비해온 까닭도 어쩌면 스스로 “정신”이 되고 싶었기 때문이리라. 그러므로 자연진화의 미래는 정신진화일 것이다!

오, 그런데 자연은 왜 하필 정신이 되고팠을까? 왜 하필 그토록 뜨거운 정신의 불길, 고통의 불길이 되고팠을까?

그러나 명민하고 이해관계와 계산에 지독히 밝은 오늘날 갖가지 정치학자들 경제학자들 사회학자들 의학자들 과학자들이 이런 자연과 정신의 의미를 제대로 체감한다면 그것이야말로 난센스에 불과하리라. 그러므로 이 갖은 학자들이 할일은, 차라리, 오히려, 도리어, 제발, 제발, 제발, 그들이 할일은 그들의 특기중의 특기인 계산, 계산, 개산(犬算)일 것이다. 바꿔 말하면, 지구상에서 연간생산 가능한 식량과 인구를 조사하여, 과연 인류가 필연적으로, 진실로, 참으로, 어쩔 수 없이, 불가피하게, 운명적으로, 오늘날뿐 아니라 인류사와 함께해온 그 빌어먹을, 빈곤의 악순환, 그 악령 같은 “부익부빈익빈의 악순환을 감내할 수밖에 없다!”는 공갈 중의 공갈을, 그들이 침튀겨대는 그토록 진지한 공갈을 “참회”하여보기를!

진정한 계산은 바로 그런 처절한 “반성과 참회의 계산”이어야 하지 않을까? 진실한 반성은 그런 솔직하고 정직하고 진실한 인간적 계산으로써 입증되어야 하지 않을까?

제발 이토록 진부하고 진부한, 헛되고 헛된, 고루하고 남루한, 낡고 낡은 헛소리, “지구자원은 제한되어있고 희소하다!”는 그 신파조의 변명일랑은 늘어놓지 말자. 그들의 진심은 차라리 “자연은 폭력적이고 폭식적이다!”라고 말하고 싶을 것이라는 것이 더욱 진실에 가까울 것이니까 말이다. 그리하여 “풍부한 지구자원에 비해 인류의 욕심이 너무 과하다!”는 말이야말로 더더욱 진실에 가깝다는 것을 깨닫고 시인(是認)하자, 시인(詩人)하자. 아니, 아무래도, 어쩌면, 이것은 이미 누구라도, 속칭 개나 소나 깡그리 깨닫고 시인하고 있는 진실이어서, 차라리, 도리어, “지구자원은 희소하다!”는 거짓부렁이 더욱 절절한 진실로 들릴지도 모르겠다. 아, 이런 지경에, “자연의 희소성”이라는 거짓부렁을 이용하여 눈물 젖은 빵과 돈과 셕스(번식겸쾌락행위)를 강조하고 유혹하는 자들이 진실로 “눈물 젖은 계산”을 어찌할 수 있으랴….

오, 다행히도! 이토록 무모한 이상주의자로 보일 나에게는 그런 계산, 계산, 곗싼, 괴싼, 개산, 괬쏸 능력이 없다. 그러니까 참으로 계산, 계산, 곘싼, 개산, 괴싼에 밝은 자들에게는… 이토록 계산머리라고는 쥐꼬랑지만큼은커녕 아예 일절 없는 이 몽상꾼의 무능력이야말로 행운일지니….

그럴지라도 나는 이렇게 언제까지나 “인간이라는 지구상 최대의 낭비동물이야말로 진정 스스로를 가장 절절히 오해하고 있지는 않은가?”를 의심해댈 것이다. 참으로 무모하게, 그리고 이른바 참으로 “비현실적”으로, 어쩌면 참으로 이상주의적으로, 아마도 참으로 어리석게, 그리고 관념(慣念)이 아닌 관념(冠念)이 아닌 관념(棺念)이 아닌 관념(觀念)으로!

앗, 그런데! 어쩌면 계산쟁이들은 으레 버릇대로 정신마저 “독점판매하기”를 원할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과연 허리둘레와 정신의 둘레는 비례하는 것일까?

어쨌거나 오늘날 “인간의 자연은 자본주의이다!”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닐 지경인데, 이것은 굳이 내가 “덧썰”하지 않아도 누구나 알고 있을 보편적 사실일 것이다. 힐끔 돌이켜보건대, 근검절약을 모토로 삼는 자본주의는 “어린” 자본주의였다. “어른” 자본주의는 소비와 낭비를 모토로 삼을 것이다. 자연진화를 더 빨리빨리 마감하려고, 무려 정신이 되려고 …. 미친 듯이 처먹고 처쓰며 처싸고 처버리는 … 인생을 독점판매하고 할인판매하며 염가판매할 것이다. 그러던 자본주의가 늙으면 혹여나 정신마저도 소비해야 살아갈 수 있는 허무괴물(虛無怪物)로, 살기자연(殺己自然)으로, 변신해버리지는 않을까?

헛, 그런데, 자본주의가 정, 정신, “정신되기”를 목적으로 한다? 이런! 자본주의정신이 “자본정신”이 된다? 그것은 과연 무엇으로 진화할 것인가….

(2001,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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