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뿌리 혹은 열매[新]

생물론 연애론 암수관계 꽃 벌나비 바람에 얽힌 생각 습관 습성 사고방식 고정관념 재고

작성자지옥변|작성시간17.01.06|조회수71 목록 댓글 0

한국의 어느 대중용 과학 사이트에 게재된 〈참나무를 키우는 다람쥐의 건망증〉이라는 글을 읽던 나는 ‘참나무에 붙은 상수리나무라는 별명’의 내력도 알 수 있었지만 또다른 상상나래도 펼칠 수 있었다. 그런 상상을 간략히 정리하면 대략 다음과 같다.

*

벌, 나비, 바람.

이것들과 꽃의 관계는 이성애관계가 아니었다.

그러니까 여태껏 꽃을 찾는 나비나 벌은 ‘여성을 찾는 남성’에 비유되었지만, 실제로 벌나비는 남성들이 아니라 중매자들이었고, 꽃이 궁극적으로 찾는 것도 벌나비가 아닌 다른 꽃이었다.

벌나비도 ‘꽃이 자신과 수정교배할 이성이라서’ 꽃을 찾기보다는 오히려 다른 성별을 가진 벌나비와 수정교배(번식)할 조건을 마련하느라 꽃을 찾았던 것이다.

나는 이 대목에서 두 가지 문제를 떠올린다.

 

첫째문제는 지금까지 인간대다수는 꽃과 벌나비를 연애결혼번식하려는 인간여자와 인간남자에 비유했고, 그런 비유대로 인간여자와 인간남자를 생각했으며, 두 성별인들의 연애결혼번식활동도 (그리고 심지어 불륜외도활동마저) 그렇게 비유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여자는 꽃 즉 식물 즉 수동적이고 피동적인 존재라고, 그래서 (화려하게 발색하거나 요염하게 까딱거리거나 고혹적인 향기를 풍겨서) 이성을 유혹하고 유인하여 잡아채는 정태적이고 정주적인 존재라고 인식된 경향이 다분하다.

물론 벌나비에 비유되는 남자는 다분히 능동적이고 동태적인 존재라고 인식되었다.

이런 인식버릇은 의외로 강력해서 문명사회대다수의 남여대다수가 거의 내면화했을 지경이다.

그러나 꽃을 식물로 벌나비를 동물로 간주하는 분류법이 감안되면, 이런 비유들은 어딘가 부자연스러워보인다.

왜냐면 이런 비유법은 ‘꽃이 찾는 수정교배용 상대는 다른 꽃이고, 벌나비가 찾은 상대도 다른 벌나비이다’는 사실을 완전히 무시하거나 전혀 모르는 사고습성을 시사하기 때문이다.
​식물은 수정교배용 상대로 식물을 찾고 동물은 동물을 찾는다.

서로 접촉하는 목적은 수정교배가 아닌 양분섭취이다(물론 주로 동물이 식물을 먹지만, 동물을 먹는 파리잡이끈끈이 같은 식충식물도 없지 않다).

식물은 동물에게 주로 양분을 제공하는 방식으로 식물과 수정교배하기를 노리고, 동물은 식물을 섭취하는 방식으로 동물과 수정교배하는 필요한 에너지를 얻는다.

이런 관계를 도외시한 ‘꽃-벌나비=여자-남자’ 비유법은 그만큼 여남들로 구성된 인간사회의 소산인 동시에 그런 인사간회를 규정하는 인식관습편견고정관념의 원리로서 자리잡았고 지금도 다분히 그런 실정이다.

여성을 꽃에 비유하는 오래된 사고습성!
​이토록 고질적인 사고습성에 여성조차 거의 의문을 제기하지 않고, 오히려 꽃 같은 존재가 되고파서 안달하기마저 한다.

내가 보기에 꽃은 여성적 존재가 아니다.

꽃들 중에는 암꽃도 있고 수꽃도 있으며 암수한꽃도 있다.

그래서 꽃은 다만 식물의 수정교배기관(번식기관)에 불과하다.

거기서 찾을 것은 여성성이 아닌 식물성이다.

그런 식물이 피우는 번식기관이 지녔을 이런저런 아름다움들도 여성적인 것들이지만은 않다.

왜냐면 암꽃은 그렇다 치더라도 수꽃의 아름다움마저 여성적인 것이라고 확언될 수는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사회에서 꽃을 주로 여성적인 것에 비유하는 관습이 무슨 문제이냐?’고 반문하는 인간도 분명히 있을 것이다. 그러나 여성의 아름다움이 꽃의 이미지에 비유되면, 설령 꽃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비유하는 유용한 방편이더라도, 그런 비유는 여성의 식물화(수동화; 정주화)로 귀결할 가능성이 농후하고, 실제로도, 역사적으로도, 사회적으로도 다분히 그렇게 귀결했다.

그러니까 여성의 아름다움을 꽃에 비유해버릇하는 습관은 여성을 식물적 존재로 인식해버릇하는 습관을 조장할 수 있다.
​그러면 이제 아름다움마저 식물성을 띠어서 식물적 아름다움이야말로 최상의 아름다움이라고 인식하는 풍조마저 조장될 지경에 이른다.

오늘날에 그런 “여성의 식물적 아름다움”이 인간여성 대다수의 뜨거운 감자요 계륵이라는 사실을 모르는 인간은 거의 없으리라.
​아름다우려는 인간을, 아름다운 존재의 이름으로 호명되고픈 인간을, 아름답기는커녕 식물적인 존재로 변이시키는 회로에 빠뜨려버리는 이 비유법의 귀결점, 이 뜨거운 감자, 계륵이야말로 오늘날 인간여성들의 고민들을 본질적으로 대변하는 듯이 보인다.

이른바 “이름을 불려야만, 호명되어야만, 비로소 존재하기 시작할 수 있는 꽃”의 이미지는, 문명사회 대다수의 인간여성 대다수가 여태껏 앓은 존재병(存在病)일 수도 있다.

왜냐면 타의로나 자의로나 여태껏 꽃에 비유된 여성성이 여성의 아름다움을 구현하기보다는 오히려 여성의 식물적 존재성을 강화시켜 고정시켰을 가능성은 아주 다분하기 때문이다.

그래도 굳이 꽃에 비유되고파 안달하는 여자가 있다면, 그런 여자는 수꽃이나 암수한꽃을 생각하거나 상상할 수는 없을까? 역사상 여성을 구속하고 억압한 사회를 변화시키고픈 인간은 먼저 이토록 고리타분하고 전형적인 비유법부터 재고해봐야 할 것이다.


​둘째문제는 ‘바람’과 관련된 것이다.

바람은 꽃이나 벌나비 같은 생물이 아니라 무생물이지만, 자연스럽게 운동하는 ‘활물(活物)’이므로 비유 가능성을 풍부하게 머금은 자연물이다.

그러나 인간들은 여태껏 바람에 대체로 남성의 이미지를 부여했다.

상대적으로 능동하면서 때로는 거세게 때로는 온유하게 때로는 자유롭게 세상을 주유한 대인(大人)이나 나그네나 방랑무사 같은 남자들이 주로 바람에 비유되었다.

그러나 바람도 자연적 사실에 비치면 여성적 성격을 겸비한 듯이 보인다.
​바람을 생성시키는 것은 대체로 과학되었다시피 태양열이다.

바다에서나 땅에서 태양열을 받아 가열되어 상승한 더운 공기의 빈 자리로 쇄도하는 차가운 공기의 흐름이 바람이고, 그렇게 뜨거움(양)을 향해 움직이는 차가움(음)이 바람이라면, 바람이 여성적 성격을 부여받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바람은 식물이나 동물을 수정교배할 짝으로 여겨서 찾아다니고 방랑하는 것이 아니다.

바람은 뜨거움을 찾아가는 차가움이다.

그래서 꽃과 바람을 여자와 남자에 비유하는 관행도 부자연스럽다.

차라리 뜨거움과 차가움을 비유요소들로 삼는 편이 더 자연스럽게 보인다.

그러나 여자도 뜨거울 수 있고 남자도 차가울 수 있다.
​물론 《주역(周易; 역경; 易經)》처럼 오래된 사고습관들은 만물의 기본성격을 ‘음=여성=차가움=약하고 부드러움(연약함)=수동성=정주성, 양=남성=뜨거움=강하고 거칠음=능동성=이동성’으로 대별하는 음양론(陰陽論)을 여태껏 견지했지만, 그런 음양론을 확고부동하게 고정시키지는 않았다.

이른바 ‘오행론(五行論)’은 음양의 변화무쌍한 가능성들을 잘 보여주는 사고법이다.

그리하여 꽃과 벌나비의 관계나 꽃과 바람의 관계가 진실로 자연스럽게 재고된다면, 그런 관계들은 인간남녀의 연애결혼번식관계와 무관하다고 인식될 것이다.

그런 반면에 그런 관계들이 인간녀남관계에 비유되면, 인간의 고유한 동물성(육식성이나 사나움이나 짐승스러움이나 야만성을 의미하기보다는 오히려 그녕 활동하고 이동하는 역동성을 의미하는 동물성)을 꽃의 식물성으로, 아니면, 비인간적 동물성으로 변질시키는 결과를 초래하여, 여성의 뜨거운 감자나 계륵인 아름다움의 의미마저 협소한 식물적 아름다움으로 축약시키버리는 당착사태를 조장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런 당착의 함정을 피해가려는 인간은, 꽃과 벌나비와 바람의 관계들을 새롭게 바라보려는 인간은, 꽃의 자연성, 벌나비의 자연성, 바람의 자연성을 더 깊이 넓게 관찰하고 상상해봐야 할 것이다.

그러니까 새로운 관점을 바라는 인간은 이것들을 인간용 연애결혼번식의 관점에서만 바라보기보다는 오히려 먼저 식물계와 동물계와 자연활물계의 고유한 원리들을 깊게 관찰상상한 다음에 그런 ‘계(界)’들의 상호관계들을 또 깊게 관찰하고 상상해봐야 한다.

이런 맥락에서 ‘벌나비와 바람은 식물들의 중매자들이다’고 여기는 인식은 진일보한 사례라고 이해될 수 있다.
그러나 이런 ‘중매자론(仲媒者論)’에도 더 깊고 넓은 상상의 나래가 달려야 한다.

 

꽃, 벌, 나비, 바람의 자연스러운 생리나 활리(活理)는 여전히 우리에게는 미지의 영역일 수 있거늘 그것들을 포함하는 각‘계’들을 가로지르는 관계들은 얼마나 더 아련한 미지의 것들이련가!
​그래도 자연과학은 인문학보다 그것들을 더 많이 알고 더 열심히 연구한다.

그런 반면에 인문학은 여전히 ‘꽃을 찾는 벌나비’의 이미지에 얽매인 생각버릇(사고습관)을 벗어나지 못한다.

문학과 예술의 대다수도 같은 실정이다.

그래서 김춘수의 꽃은 아직 연애감정의 상징을 불과하는 것으로만 이해될 따름이다.

‘인간의 존재하려는 인내’가 ‘자신과 연애결혼번식할 사람을 기다리는 인내’로 해석될 수밖에 없었던 까닭도 바로 이런 ‘꽃을 찾는 벌나비바람’의 이미지에 사로잡힌 생각버릇(사고습성)이었다.
자연은 여전히 인식과 상상을 촉구한다.

우리는 이미 자연의 대부분을 이해했다고 과신하지만, 실제로 자연은 여태껏 자신의 대부분을 우리에게 숨겼다.

마치 바다를 떠도는 빙산처럼.

그래서 자연은 자연의 자손들에게 자연을 이해하라고 염원한다.

우리는 여태껏 꽃을 찾는 벌나비를 보면서 인간사의 일면을 이해했다.

그러니까 그것들이 더 깊이 넓게 관찰상상된다면, 인간사도 더 깊이 넓게 이해될 수 있을뿐더러, 어쩌면, 훨씬 다양하게, 풍부하게, 아름답게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아랫그림은 프랑스 화가 프랑수아 부셰(François Boucher, 1703~1770)의 1769년작 〈바람을 불러달라고 아욜로스(Aiolos; 아이올로스)에게 부탁하는 유노(Juno; 헤라; Hera)(Junon demandant à Éole de libérer les vents)〉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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