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6편 1절-4절.
76편. 아삽의 시. 영장으로 현악에 맞춘 노래.
1절-4절: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1절: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유다는 무엇이며 이스라엘은 무엇이냐? 사람의 이름으로는 야곱과 레아 사이에서 나온 유다가 있다. 그리고 국호로서의 유다가 있다. 야곱으로부터 약 700년 후에 솔로몬의 범죄로 인해 통일 이스라엘이 갈라지면서 북쪽은 이스라엘, 남쪽은 유다로 불리게 되었다. 한 민족인데 남북으로 나눠진 거다. 본문의 유다는 사람의 이름이 아닌 남조 유다를 말한다. 그러면 왜 남조가 유다로 된 것인가? 야곱의 열두 아들 중에 왕 통치가 유다의 후손으로 내려갔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라고 했는데, 이 말이 유다가 그 전에는 하나님이 어떤 분인지를 몰랐다가 이제서야 하나님을 알게 되었다는 거냐? 유다백성들은 자신의 조상들이 40년간의 광야생활을 하며 약속의 땅을 향해 나아간 경험들을 구두로 전해 듣기도 했고, 체험적으로도 하나님께서 자신들에게 어떻게 행하셨는지를 모두 알고 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또 다른 어떤 역사를 하셨기에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라고 하는 거냐?
유다백성들은 가견적 역사적으로 외부로부터 많은 공격을 받았다. 암몬족속의 공격, 에돔 왕과 소바 왕 하닷에셀의 공격, 아람 왕 르신과 이스라엘 왕 베가가 연합해서 공격을 했다. 히스기야 왕 때는 앗수르 군대의 공격을 받기도 했다. 이 외에도 많은 공격을 받았다. 하나님께서는 그 때마다 이스라엘을 구원해 주셨다. 남조 유다와 북조 이스라엘이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고, 우리도 성경을 통해서 이 역사를 잘 알고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유다에 알린바 되셨으며’ 라고 하는 것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위해 이런 역사를 하신 것을 되새겨 보는 말이다.
‘그 이름은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이스라엘에 크시도다’ 라고 하는 것이 무슨 뜻이냐? 이 말씀은 창세 이후로 마지막 날까지의 모든 영적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계시로서, 모든 기독자들 속에 비진리요, 세상적이요, 이질성적이요, 육적이요, 교만한 뿔들은 아무리 종교적이라고 할지라도 이들을 여호와 하나님께서 치시고, 진리생명의 뿔들은 하나님께서 높이신다는 거다.
마지막 시대에 살고 있는 교회들이 과거 구약시대 때에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의 어떤 자를 치시고 어떤 자를 높이셨다는 것을 영적인 차원으로 보는 눈이 있다면 하나님께서 오늘날 이 마지막 시대의 영적 이스라엘의 어떤 자를 높이시고, 어떤 자를 낮추시는지를 알게 된다. 영적 이스라엘은 이것을 보는 눈이 있어야 하나님께서 사람을 높이고 낮추는 역사를 보게 된다. 알게 된다.
2절-3절: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살렘’은 예루살렘의 본 이름으로 ‘평화’라는 뜻이다. 인간이 하나님과의 평화는 인간이 하나님과 의사단일성이 되어야 한다. 인간들끼리 아무리 평화를 해도 하나님과 평화가 아니면 이는 진정한 평화가 아니다.
세상의 평화는 상호 각자가 한 발씩 물러서서 된 것이기 때문에 그 속에는 각자 자기가 유리한 것을 취하려고 하는 것이 들어 있다. 그래서 상대를 꺾으려고 하는 사단 마귀의 요소가 항상 들어 있다. 이게 언제 튀어나올지 모르기 때문에 평화를 하자고 할 때 쉽게 호응을 하면 안 된다. 하나님과의 의사단일성이라는 것은 하나님의 것으로 바꿔졌다는 거다.
‘시온’은 요새요, 정복하기 어려운 곳이고, 이곳에 성전이 있었다. 상징적인 의미로는 하나님의 백성, 이스라엘 왕국, 영적 왕국, 영원한 도성, 또는 하늘나라의 의미가 있다. 역사적으로 예루살렘 안에 성전이 있었는데, 하나님의 설계대로 지은 눈에 보이는 성전은 이 땅 위에 이 성전 하나뿐이다. 지금 예배당을 성전이라고 하는 교인들이 많은데, 이것은 성전이 아니라 예배당이다.
이 땅에 성전이 하나뿐이라는 것은 복음은 하나밖에 없고, 하나님은 한 분밖에 없고, 또한 역사적으로 예루살렘에 나타나신 그 하나님 한 분의 의사밖에 없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니까 하늘에 있는 것을 상징적인 의미로써 사상적으로 성전 안에 넣어놓은 거다. 역사적으로 구약 때 중동의 예루살렘 성전에서 하나님께 드리는 제사의식이 있었는데, 이것은 우리의 신앙정신, 사상, 소원, 목적을 알게 하는 의미가 들어 있다.
옛날 구약시대에 성전 안에서 제사장이 번제단에서 제물을 죽여서 하나님께 바치고 법궤 앞에까지 나갔는데, 이것을 영의 눈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이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 앞에 드려지는, 즉 전폭적인 순종을 말해준다. 그래서 지금도 이룰구원, 영원 궁극적 구원의 길을 가는 것은, 즉 하나님의 인간창조의 원인과 동기와 목적을 따라가는 것은 구약 때 제사장이 제사를 드린 뒤를 밟아가면서 그 신앙으로 가는 것과 같은 거다. 하나님께서는 지금도 그 신앙정신 사상을 가진 자에게 구약 때나 신약 때에 역사하신 것처럼 똑같이 역사를 하신다.
그래서 지금도 보혜사 성령을 받은 자는 성경이 깨달아진다. 말씀을 듣고 깨달아지는 자는 이미 성령님께서 역사를 하고 계신 거다. 이 성령님께서 나를 영적으로 영적으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 앞으로 다가가게 하는 역사를 하고 계신다. 단순히 시간에 맞춰서, 순서에 맞춰서 예배를 드린다고 해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옛사람이 죽고 하나님의 성품의 사람이 되는 게 아니라 말씀으로 인해서 한 걸음 한 걸음 하나님의 성품화로 되어 들어가는 거다. 이건 구약 때 하나님께 드린 제사와 같은 거다.
우리교회는 예언 방언은 안 해도 현재적으로 사건 환경 속에서 우리 가운데 하나님의 역사가 되고 있다. 어떤 사람에게는 징계로 다가가고, 어떤 사람에게는 사랑으로 다가간다. 여기에서 마음이 뜨거워져서 하나님 앞에서 자기를 쳐다보며 바로 나가는 거다. 이게 하나님 앞에 제사다. 이게 없는 자는 하나님 앞에 교만한 자요, 교만한 자는 멸망을 받게 된다. 이런 자는 먼저는 신앙정신 사상 면에서 양심적으로 이미 멸망으로 들어간 거고, 그 다음에는 사건적으로 뜨거운 맛을 보게 된다.
‘그 장막이 또한 살렘에 있음이여, 그 처소는 시온에 있도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셀라).’ ‘거기’란 살렘, 즉 예루살렘을 말한다. 예루살렘 성전 안에는 하나님의 절대적 기준적인 하나님의 말씀이 계신다. 하나님이 계시는 것은 하나님의 말씀도 함께 하는 거다. ‘거기서 저가 화살과 방패와 칼과 전쟁을 깨치시도다’ 라고 하는 것은 말씀의 심판자 앞에서 모든 정평, 정가, 진가가 다 판단이 되고 심판이 된다는 거다.
‘화살’이란 한 개인을 표적으로 해서 미움으로 날리는 독한 말을 상징한다. 말을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을 말한다. 이건 독한 화살이다. 말의 화살이다. 혀를 가지고 사람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거다. 하나님께서는 좋은 심성을 가진 사람에게 볶은 곡식을 주신다. 일반적으로도 말로써 사람을 감화 감동시키는 것이 좋다. 우리는 일반적인 것을 진리이치로 써먹을 줄 알아야 한다. 이런 데서 하나님께서 역사를 하신다.
사람끼리 미워하는 것은 진리냐, 비진리냐? 비진리다. 믿는 우리가 미워할 때는 사람이 가진 정신 사상이 미운 거지 ‘사람의 모양이 어떻고, 행동이 어떻고’ 하는 것을 가지고 사람 자체를 미워해서는 안 된다. 다른 사람의 좋지 않은 면을 볼 때 그것을 교훈으로 삼아서 자기는 그런 짓을 하지 않아야 한다. 남이 넘어지는 것을 보고 자기는 넘어지지 않도록 교훈을 삼아야지 비웃다가는 네가 또 넘어진다. 그러면 네 얼굴이 어찌 되겠느냐?
‘방패’란 진리의 보호가 아니라 인간의 수단과 방법으로 자기의 보호대책을 쓰는 것을 말한다. 그리고 ‘칼’이란 닥치는 대로 휘둘러서 사람을 죽이는 세상의 권세를 말한다. ‘전쟁’은 사람을 죽여서라도 세상을 자기 수하에 놓고자 하는 여러 가지 수단 방법들이다. 오늘날의 전쟁은 총으로 싸우지만 옛날에는 화살을 쐈다. ‘화살과 방패와 칼’은 다 전쟁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것을 영적 신앙 사상적으로 보면 거룩한 성도를 죽이고자 하는 여러 가지 잡다한 악한 사상들을 말한다. 세상적이고, 육적이고, 인간적이고, 마귀적인 여러 가지 잡다한 사상들을 말한다.
이런 악한 것들은 하나님의 고차원적인 진리생명의 복음 앞에서라야 만이 깨진다. 하나님의 진리생명의 복음으로라야 만이 어떤 정신 사상이 거룩한 성도를 해치는 것인지를 알 수 있다. 교인이면서 진리가 아닌 것을 가지고 사람을 겨누는 게 있다. 미움의 눈, 미움의 입술, 미움의 혀가 얼마든지 많이 있다. 진리이치, 도덕이치, 생명이치 앞에서라야 만이 이런 것을 다 깨버릴 수 있다. 깨진다는 것은 자기 속의 악한 것이 들통이 나는 것을 말한다.
사람을 해코자 하는 것이 자기 속에 들어있는 것을 가르쳐 주었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그러고 있다면 그 화살이 자기에게로 날아와서 자기를 죽인다. 네 속의 미움의 화살로 누구를 죽이려고 하는 거냐? 그러면 하나님께서 어떤 사건을 통해서라도 그 화살을 너에게 도로 박히게 하신다. 자기 속에 그런 요소가 들어 있기 때문에 그 미움이 자기에게 박히게 되는 거다. 미사일이 비행기를 따라가서 폭파를 시키는데, 미사일이 비행기를 좇아갈 수 있는 것은 비행기에 미사일이 좇아올 수 있는 성분이 있기 때문이다. 비행기에서 이걸 제거하면 미사일이 못 좇아온다.
4절: ‘주는 영화로우시며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악한 자들을 향한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의미한다. ‘약탈한 산’이란 약탈을 감행한 자들이 모여 있는 곳을 말한다. 그러면 이들이 누구의 것을 약탈했기에 하나님께서 이들을 심판을 했을까? 1. 이방인들끼리 약탈을 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심판을 했다는 말이냐? 2. 이방인들이 이스라엘의 것을 약탈해서인가? 3. 이스라엘 중에 두목들이 악한 짓을 해서 백성들의 것을 빼앗았기 때문인가? 3번이 정답이다. 1번은 생각할 필요가 없고, 2번은 말은 맞는 것 같으나 우리의 구원도리가 없다. 3번에는 우리의 구원도리가 들어 있다.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께서 산에서 약탈한 자들의 것을 빼앗았다는 것인데, 이는 주님께서 물질이 탐이 나서가 아니라 참 사람으로 온전자가 되게 하려고, 즉 죄를 안 짓게 하려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심판이다. 이 말씀은 남에게 하는 게 아니라 이 말씀을 보는 자신에게 하는 말씀이다. 그래서 이 말씀이 우리의 구원도리가 되는 거다. 이렇게 깨달아야 만이 ‘하나님께서 나에게 역사를 하셨구나’ 하고 깨닫고 현재적으로 자기의 신앙을 회복하게 된다.
사람이 자타를 해롭게 하는 것을 가졌을 때는 그것을 빼앗고 바른 사람으로 만들어야 하듯이 믿는 우리 속에 자타를 해롭게 하는 것을 주님께서 빼앗아야 우리가 존귀케 된다. 그래서 ‘약탈한 산에서 존귀하시도다’ 라고 하는 것은 주님이 무언가 아쉬워서 사람의 것을 약탈한다는 것이 아니라 사람을 사랑으로 바로 세우려고 징계하고 심판하시는 것을 말하는 거다. 우리가 이 주님을 바로 안다면 주님의 존귀성으로 올라가게 된다.
그러면 자기는 오늘날까지 살아오면서 주님께 많이 빼앗겼느냐, 아니면 빼앗아가는 것은 뒷문제이고 빼앗길 것을 자꾸 달라고 하느냐? 신앙이 어떻게 들어갔느냐?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