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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종 QT 및 설교

[스크랩] [창골산 강해]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시76:5-11)

작성자심인식목사|작성시간26.06.22|조회수0 목록 댓글 0

76편 5절-11절: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

 

5절: ‘마음이 강한 자는 탈취를 당하여 자기 잠을 자고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여기의 잠을 잔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인데, 마음이 강하면 남의 것을 빼앗아 오기가 쉬운 건데 본문은 마음이 강한 사람이 누구에게 탈취를 당하고 죽었다고 한다. 마음이 강한 것도 영의 마음이 정신적으로 강한 것이 있고, 육의 마음이 정신적으로 강한 것이 있다. 육의 마음이 강한 것은 육 주격이요, 옛사람이요, 부패성적이요, 마귀적이다. 영의 마음이 강한 것은 영 주격이요, 새사람이다.

 

영의 마음과 정신으로 살면 하나님으로부터 은혜를 받는 거고, 육의 정신과 사상과 마음으로 살면 하나님의 진노로 인해서 다 빼앗기고 죽는다. 육의 정신과 마음으로 강하게 살면 이 사람은 영적인 측면에서 보면 100% 다 빼앗기고 만다. 자기의 일생 동안에 영적인 면으로 성장하고 자라가야 할 그 시간, 그 노력, 그 정신, 그 물질, 그 젊음, 그 환경 전부가 육의 목적으로, 세상목적으로 쓰여졌으면 영생적인 생명의 건설이 아니라 전부는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고 없어질 사망으로 낭비가 되고 허비가 되어버린 거다.

 

우리는 이 세상에서 나그네로 살다가 허무하게 무로 돌아가는 게 아니라 하나님께서 인간을 만드신 목적대로 하나님의 온전한 성품을 입고 영능의 실력, 믿음의 실력, 신앙의 실력이 되는 영적인 기능과 지능 면을 탁월하게 영광스럽게 만들어 가는 거다. 그런데 육의 마음으로 강하게 살면 이것이 다 도적맞고 자기는 그 길로 죽는 수밖에 없다.

 

‘장사는 자기 손을 놀리지 못하도다.’ ‘장사’란 힘이 좋은 사람이다. 장사는 잘 먹어야 힘을 쓸 수 있다. 그런데 이 장사가 왜 손에 힘이 다 빠져서 축 늘어졌느냐? 장사는 물질의 힘으로만 산다. 물질의 힘이 끊어지면 일을 못하고 풀이 죽는다. 영의 정신이 강한 사람은 물질과 상관없이 영의 것으로 그 정신과 사상이 샘물처럼 솟는다.

 

그런데 마음이 강한 자와 장사는 사실은 공생관계다. 육의 정신과 마음이 강한 자와, 육신의 힘이 좋은 장사란 끝내는 죽고, 심판을 받고, 기운이 없어질 육의 기운과 물질의 기운을 교인들에게 불어 넣어주는 교회의 지도자를 의미한다. 목회자만이 아니라 모든 기독자들이 지금 어느 기운으로 살고 있느냐? 물질의 기운으로 목을 빳빳이 하고 살고 있느냐? 젊음의 기운으로 목을 빳빳이 하고 살고 있느냐? 직장의 힘으로 목을 빳빳이 하고 살고 있느냐? 재산이나 물질이 많기 때문에 목을 빳빳이 하고 살고 있느냐? 세상사람들은 세상적인 여러 가지 조건의 힘으로 살고 있는데 예수 믿는 사람은 어느 기운으로 살아야 하나님 앞에 합당하겠느냐?

 

6절: ‘야곱의 하나님이여, 주께서 꾸짖으시매 병거와 말이 다 깊은 잠이 들었나이다.’ ‘야곱의 하나님’이란 ‘야곱을 축복하는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은 야곱을 사랑해서 가르치고, 깨닫게 하고, 훈련과 연단을 시키고, 인도한 분이시다. 야곱 역시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다스림을 받는 신앙정신을 가졌다. 야곱의 후손들도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의 인도를 받고, 가르침을 받고, 영능의 실력을 키우는 후손들로서 명칭은 이스라엘이었다. ‘이스라엘 백성’ 하면 야곱의 후손들을 생각할 수 있다.

 

그러면 야곱의 하나님께서 왜 병거와 말들을 꾸짖었느냐? 말씀을 따라, 주의 종을 따라, 인도자를 따라 약속의 땅을 향해서 가는 이스라엘을 죽이려고 애굽군대들이 미친 듯이 달려드니까 하나님께서 이들을 홍해바다에 다 수장을 시켜버렸다. 이스라엘이 영적인 훈련을 받고 연단을 받으면서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는데 이들을 죽이기 위해 병거와 말과 무장의 힘을 믿고 얼마나 활기차게 따라붙는지? 주께서 이들을 꾸짖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났다는 말이다. 영적으로 말을 하면 애굽의 정신과 사상을 가진 자들이 하나님의 성품의 온전함을 자체화 시키고자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광야교회를 훼방하고 죽이려고 할 때 하나님께서는 이 운동들을 죽이신다는 거다.

 

기독교 안에서 종교적 사업주의, 종교적 건설을 하는 것은 애굽의 성질이다. 교회 전체적으로 이렇게 돌아갈 때는 뭐가 망했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영적인 차원에서 깡그리 망한 거다. 즉 애굽화 된 거다. 이렇게 되면 깨닫는 것은 전혀 없다. 이와 같이 교회 전체가 애굽화 된 정신 사상의 가르침들이 있는가 하면, 개체적으로 개인 속에 이런 요소가 들어있다면 이 사람은 하나님을 믿고 주님의 말씀을 좇아서 살기는 하지만 자기가 부분적인 면에서 세상화로 되어 있는 것이 잘못된 것인 줄을 알지 못하게 되고, 그것이 자기의 원수인 것을 모르기 때문에 이것은 자기가 자기에게 잡아먹히는 꼴이 되는 거다. 약속의 땅으로 올라가는 이스라엘 속에서 이런 부패성의 반역자들이 일어났는데 이들은 저주를 받아 땅속에 묻혔다. 이것은 자기 무덤을 자기가 판 거다.

 

멸망을 받은 이들은 그 정신 사상이 옛사람 육이 주격이었고, 세상성질의 하나인 종교적인 사상이다. 우리교회는 종교적인 사상은 안 된다. 신앙적인 사상, 바꿔진 사상, 너도 나도 하나님의 온전으로 향해 달리는 정신 사상이라야 한다. 이 면으로 같이 가자고 당기고 밀어주는 게 아가페 사랑이다. 하나님께서는 성도들의 모든 것을 착취하는 육적인 강한 마음을 가진 자를 베어버린다.

 

깨닫고 회개한 자는 이스라엘을 인도하신 야곱의 하나님을 찾아서 진리생명의 말씀을 따라 광야의 신앙사상으로 나간다. 그런데 자기가 신앙 사상적으로 이렇게 살지는 않고 남의 것을 갖다가 자기 것으로 챙겨두고(주-다른 목사님의 설교를 자기 설교인 것처럼 하며 전하는 것), 여기에 세상을 혼합시켜서 그것을 자기의 힘으로 삼는 자는 교회를 착취해 먹겠다는 발상이니 이런 자는 하나님의 징계를 받게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참으로 두렵고 떨리는 일이다. 그런데 거짓 인도자들은 이걸 모르고 있다. 이들에게는 졸지 간에 하나님의 역사가 임하게 된다.

 

7절: ‘주 곧 주는 경외할 자시니 주께서 한 번 노하실 때에 누가 주의 목전에 서리이까.’ 하나님은 인간으로부터 경외를 받으실 분이요, 우리 인간은 이 분으로부터 절대 정확한 사랑을 받으며 살았고, 특수은총과 자연은총을 받았고, 진리의 말씀을 받았고, 훈련을 받았다. 그런데 왜 주께서 노하실까? 그것은 주의 사랑의 은혜를 저버리고 세상과 세상 것이 더 좋다고 따라가고, 자타의 아름답고 훌륭한 구원을 말살시키고, 짐승처럼 저질스럽게 사니 이것을 죄로 여겨서 진노를 하신 거다.

 

하나님께서 진노를 하실 때는 변명이 있을 수 없다. 왜냐하면 누가 억지로 그렇게 하게 한 것이 아니라 모두가 자기가 좋아서 하다가 심판을 당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누구 때문’이라고 변명을 했다가는 더 악한 자가 되고 얻어맞기 일쑤다. 영적 이스라엘은 여호와께서 노하실 때 먼저 자기를 살펴봐야 한다. 다른 사람이 죄 짓는 것을 볼 때도 먼저 자기를 살펴봐야 한다. 남만 쳐다보고 남만 말을 하는 자는 악한 자다. 이러면 다른 사람의 그 죄가 도리어 자기에게 돌아온다.

 

여호와 하나님께 멀리서 노하시면서 나의 주위로 점점 다가오기도 하는데, 이것은 나를 깨닫게 해 주려는 거다. 여기서 깨닫지 못하면 그 다음에 내 가정, 내 사업, 내 몸을 치고 들어온다. 이렇게 되면 먼저는 나에게서 하나님의 은혜가 떠나게 된다. 성경에 ‘육체가 되니 하나님의 신이 떠났다’고 했다. 나에게서 하나님의 신이 떠나면 말씀을 깨닫는 은혜도 떠난다.

 

믿는 우리는 물질로 배부른 게 다가 아니라 심령이 메마른 것을 빨리 깨달아야 한다. 심령이 메마르면 모든 사고방식이 메말라 들어가고, 이해타산 평가성도 어두워지고, 그 머리로 생활을 하니 생활 면에서도 부작용이 나타난다. 이걸 빨리 고치지 못하면 남 핑계만 하다가 스스로 고통을 당하고 죽게 된다.

 

8절-9절: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하늘의 판단과 판결은 위로부터 오는 판결이요, 최고의 판결이요, 절대 정확하고 공의로운 판결이요, 지극히 세밀한 판결이요, 영적인 판결이요, 영원불변의 판결이다.

 

하나님은 영원 궁극적인 결과의 유익을 생각하면서, 그 면의 이해타산을 생각하면서 판결을 하신다. 당신의 감정대로 하는 게 아니다. 이 하나님을 믿고, 이 하나님의 말씀을 좇아 사는 모든 교회도 하나님의 판결과 같은 바른 판결이 나와야 하고, 자기에게 이 판결이 내려지면 여기에 이의를 달면 안 된다. 왜 그러냐? 자타의 이룰구원에 관계가 있는 것이니까. 하나님의 온전을 위한 하나님의 판단을 인간 자기가 구부리면 하나님의 대적자가 되는 거고, 자기가 하나님 위에 군림을 하겠다는 거고, 자기가 재판자가 되겠다는 거다.

 

성경에 ‘재판은 하나님께 속한 것’이라고 했다. 그래서 설교도 일종의 재판이요, 일종의 판단이요, 일종의 판결인데, 이것을 다른 각도로 보면 말씀 한 마디 한 마디 속에는 축복이요, 사랑이요, 하나님의 온전과 영원 궁극적인 구원이 들어 있는 거다. 설교에서 이런 게 안 나온다면 하나님 앞에 잘못된 재판이요 잘못된 판결이다. 말씀 한 마디에 사람이 죽고 사는 문제가 달린 것이기 때문에 설교를 할 때는 하나님 앞에서 벌벌 떨어야 한다. 그럼에도 교회를 우습게 여기고, 교회를 우습게 다니면 안 된다.

 

사람은 누구든지 다 자기의 생각대로 자기가 되는 거다. 그래서 바로 안 된 사람을 좋게 보면 ‘앞으로 더 나아지겠지. 더 발전이 있겠지’ 라고 하는 거지만 나쁘게 보면 ‘언제까지 그렇게 있을래?’ 이렇게 되는 거다. 자기의 행복과 축복은 물질에서 되는 게 아니라 자기를 인도하시는 하나님을 발견을 하는 데서 된다. 하나님의 손에 있다. 땅은 창조주 하나님으로부터 지음을 받았기 때문에 땅 위의 모든 존재들은 하나님의 판결을 받을 수밖에 없는 거다. 땅의 모든 존재들은 창조주 하나님의 자연은총을 받는 거고, 성도들은 일반은총과 특수은총을 받는 거다.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하나님께서 이적과 기사와 징조로 자연법칙을 순간적으로 이동을 시키거나 자연법칙을 초월하는 사건을 일으키면 인간들은 꼼짝없이 고스란히 죽을 수밖에 없다. 지진이나 화산이나 지각변동이 일어나면 해일도 일어나고, 땅도 그대로 있지를 않는다. 바다 밑에서 지진이 일어나면 그 다음에는 큰 물결로 인해 땅에서는 재앙이 일어난다. 이럴 때 인간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뿐이지 어떤 손도 못 쓴다. 어떤 인간이 이 일을 하시는 하나님을 향해 뭐라고 하겠느냐?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없다.

 

‘주께서 하늘에서 판결을 선포하시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라고 하는 것을 교훈적인 측면으로 보면 심령골수를 찔러 쪼개는 판결을 말하는데, 이는 사람 속의 은밀한 정신과 사상과 양심에 속하는 판결이다. 단순히 지식에 관한 것만이 아니라 사람의 오각의 오감성까지, 느낌성까지, 양심적으로 생각하는 것까지 판결이다. 이 판결에 땅의 그 어떤 수준급의 인간이라도 잠잠히 있을 수밖에 없다. 항의가 나온다면 그는 악인이다. ‘땅이 두려워 잠잠하였나니’ 라는 말씀은 사건 환경을 영의 귀로 듣고 거기에서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서 자기의 신앙을 바로 세우고 하나님의 뜻대로 살겠다고 하는 순종의 의미가 들어있다. 이렇게 깨닫는다면 이 사람은 희망적이다.

 

‘곧 하나님이 땅의 모든 온유한 자를 구원하시려고 판단하러 일어나신 때에로다(셀라).’ 구원 받은 온유자들이 어떤 자들인가? 세상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온유한 자와, 하나님 보시기에 온유한 자를 구별을 못한다. 세상사람들은 성격이 모나지 않고, 부드럽고, 난폭하지도 않고, 얌전하고, 고분고분한 사람을 온유한 자라고 한다. 그런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을 받지 않는 자가 많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이다. 일반적인 이해타산과 일반적인 사고방식과 일반적인 사회의 윤리도덕의 개념으로 사람을 보는 것은 하나님 앞에 교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척도로 바꿔야 한다.

 

하나님께서 구원해 주시는 온유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말씀대로 지혜지식적으로, 도덕적으로, 능력적으로 잘 다듬어진 사람을 말한다. 깨달음이 좀 부족해도 하나님의 온전의 인격과 성품으로 만들어져 간다면 이 사람은 겸손한 사람이요 희망이 있는 사람이다. 아무리 환난과 핍박과 박해를 받아도 목숨을 내놓을 진정 진리의 신앙정조를 잘 지키고 이겨 나온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온유한 사람을 구원하신다.

 

이걸 돌려서 말을 하면 세상적인 온유한 자는 하나님 앞에 교만자이니 하나님께서 이것을 판단을 하여 심판을 하시지만 세상 어디에나, 어느 지역에 있더라도 하나님 앞에 온유한 자로 만들어진 사람은 하나님께서 다 찾아내어 구원을 하신다는 말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는 온유성을 잘 구별하고 판단해서 하나님의 성품으로 잘 만들어져야 한다.

 

10절: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진노에는 하나님의 진노와, 인간의 진노가 있다. 하나님의 진노는 영원한 것에 해당되는 진노이고, 인간의 진노는 인간 세상에 해당되는 진노다. 부모가 자식에게 진노를 할 때 어느 면에 염두를 두고 진노를 하는 것인지? 안 믿는 사람이 진노를 하는 것은 인간기준이요 세상기준이다. 그런데 우리교회 부모들이 자식에게 진노를 할 때 세상사람들처럼 기준을 세우고 진노를 한다면 이 부모는 악하다. 하나님을 기준을 세워놓고 자녀를 양육해야 한다.

 

인간 자기의 마음에 안 맞으면 진노하는 것은 영원에 해당되는 것이 아니다. 교인들의 진노는 하나님의 진리본질에 맞는 하나님의 온전으로 만들어 가는 영원한 면의 진노이어야 하고, 이 진노는 생명과를 먹고 나온 진노가 되는 거다. 선악과 먹고 나온 진노는 하나님의 심판이다. 예수님이 채찍을 만들어서 성전에서 장사하는 자들을 쫓아냈는데 ,이 진노는 어디에 붙은 진노냐? 생명과 쪽에 붙은 진도다. 그래서 마땅하고 당연한 진노다. 일반사람들의 진노는 선악과 따먹은 진노요, 하나님 앞에 심판받을 진노다.

 

‘진실로 사람의 노는 장차 주를 찬송하게 될 것이요.’ 여기 ‘사람의 노’란, 첫째는 사람 되어 오신 예수님의 진노를 말한다. 이 진노는 온유에서 나온 진노다. 두 번째는 하나님의 본질을 닮은 성도들의 진노를 말한다. ‘그 남은 노는 주께서 금하시리이다.’ 주께서 억제하고 제재하는 남은 노란 선악과 따먹고 나온 노를 말한다. 이 진노를 어떻게 억제시키시느냐? 일반사람들의 세상의 진노를 하나님께서 무슨 이유로, 어떻게 억제를 시키시느냐? 이방인 그들 차원의 법을 허용하여 사회질서를 어느 정도 정화시켜서 마지막 날까지 그 진노를 막고 성도가 이룰구원을 이루게 한다. 만일 그들의 마음대로 내버려두면 모든 성도가 세상에서 살아남지 못한다. 그래서 그들의 노를 억제시키는 거다.

 

예수를 믿는 우리 속에도 억제되는 성질이 있다. 무슨 말이냐? 우리가 사회적으로 악한 일을 보거나 들을 때 분이 솟는 일이 있다. 알고 보면 이 분(노)은 결코 좋은 것이 아니다. 이 분을 그대로 놔뒀다가는 누구를 죽일지도 모른다. 우리 속에 이런 요소가 얼마든지 들어 있다. 하나님께 이것을 억제해 달라고 해야 한다.

 

현재 우리 속에 장차 찬양이 될 노, 하나님의 성품으로 자체화 된 노, 하나님의 뜻대로 되어지는 노, 하나님의 생각대로 되어지는 노가 얼마나 들어 있는지? 아니면 억제를 해야 만이 자기가 사는 노는 얼마나 들어 있는지? 이 자기를 발견해야 한다.

 

11절: ‘너희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께 서원하고 갚으라. 사방에 있는 모든 자도 마땅히 경외할 이에게 예물을 드릴찌로다.’ 하나님께 대한 서원이, 첫째는 물질적으로 무엇을 하나님께 드리겠다고 하는 서원이 있고, 두 번째는 자기 속에서 ‘내가 앞으로 정신 사상적으로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겠습니다’ 라고 결정을 하고 하나님 앞에 서원을 하는 게 있다. 어느 게 더 좋겠느냐? 후자다. 물질로 서원을 할 때는 물질을 드리는 자체보다는 물질 속에 담긴 신앙사상이 더 중요하다.

 

예수님 탄생 때 동방박사들이 처음부터 황금과 유향과 몰약을 가지고 간다고 했느냐, 아니면 평소에 메시아를 사모했기 때문에 아기 예수님을 만나자마자 가지고 간 그것이 나온 거냐? 마음이 열려야 물질이 나오는 거다. 물론 황금과 몰약과 유향을 가지고 갔으니까 예수님께 드린 거지만 그것보다 예수님을 보자마자 마음이 열렸기 때문에 드릴 수 있었던 거다. 이렇게 보는 것이 더 유익하다.

 

이들은 평생토록 별을 연구한 별 박사들이다. 계시적으로 보면 주님을 만나려고 주님을 연구한 사람들이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에 그 주님을 만나고 죽어야겠구나’ 하며 산 사람들이다. 계시적으로는 진리를 깨닫는 것이 주님을 만나는 거다. 바른 이치를 깨달으면 그 깨달음이 자꾸 확장이 돼 나간다. 주님이 많이 발견이 된다. 그런데 예수를 믿으면서 한 이치도 깨달은 것이 없이 그대로 죽는 사람도 있다. 불쌍하고 가련한 자다. 불쌍하고 가련한 자를 안 믿는 세상에서 찾지 말고 교회 안에서 찾고, 자기 안에서 찾아라.

 

진리말씀을 깨달아서 하나님 앞에 바른 서원을 할수록 하나님께서는 이 사람을 복된 사람으로 만드신다. 이런 서원을 하는 사람은 정신적 사상적으로 연단이 되고 연마가 되어서 도덕적 성품적으로 신적으로 고상하고 복된 사람이 된다. 그런데 잘못된 교회에서는 서원의 참 뜻을 모른 채 성경의 문자대로 물질을 바치고 사역적으로 어떤 일을 하도록 서원을 하게 하니 교인들은 깨달음이 없고, 가정이 파탄이 나고, 하나님 앞에 심판을 받아서 영원히 망하는 사람이 많다. 옳고 바른 서원을 모르면 결국은 거짓 종들에게 이용물만 되고 많다. (계속)

 

김경형목사님의 설교를 정리했습니다. http://cafe.daum.net/909k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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