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록의 결
이현섭
초록빛이 캠퍼스 잎새 사이로 출렁이는 아침.
강의동 창가마다 초록 물결 번지고 풀벌레들은 초록의 결을 풀어놓는다. 나무 그늘에 서면 자연스레 말들이 피어나는 내 입.
수십 년 걸어온 교정의 길 위로 초록빛 그리움은 더욱 높아지고 은빛 세월은 손짓한다. 초록에 붙잡힌 내 마음은 강의실 너머 먼 들판이거나 어릴 적 놀던 달천계곡 어디쯤 있다.
펄럭이는 긴장과 설렘으로 시작되던 젊은 날의 아침들도 함께 깨어난다.
나 자신을 관조하며 빈 마음으로 세상을 다시 채색하고 싶다. 내일도 오늘처럼 푸른 별 위의 캠퍼스를
풋풋한 웃음이 스미는 길, 새들이 잎새를 쪼아대는 아침이면 내 안의 푸른 울음 별처럼 솟구친다.
조약돌
달천 계곡 물살은 밤새 목이 쉬었다.
낙하하는 물줄기 끝에서
내 그림자 하나 버드나무 숲으로
달아나고, 낡은 고무신 한 켤레
앞산만 바라보던 뼈마디마다
세월은 고독을 깎아
둥근 조각으로 밀어 넣었다.
물빛에 오래 다듬어진 돌들
저마다 다른 상처와 무늬를 품고도
한 손에 쥐면 금세 체온으로 살아나는
정다운 얼굴들
손바닥 위 조약돌 하나 가만히
쥐고 있으면 소 몰던 어린 날의
풀냄새와 흙 묻은 발등,
먼 하늘에 풀어놓은 구름 떼가
가슴 속으로 천천히 되돌아온다.
바람도 강물도 친구들도
이제는 추억의 둥근 결이 되어
메마른 가슴을 두드린다.
모난 마음 먼저 여울에 띄워 보낸 뒤
나 또한 작은 조약돌 되어
세상이라는 거친 강바닥 위를
부딪히며, 닳아가며,
끝내는 부드러운 숨결로
굴러간다.
실개천
동구 밖 여울물은 오래 접힌 선율처럼 돌 틈마다 맑은 숨을 고른다
버들강아지 하나둘 은빛 화음의 눈을 뜨고 봄바람은 연둣빛 리듬을 흔들어 가지마다 여린 떨림을 건다
고향을 품은 너의 그림자
물결 위로 번져와 가슴 깊은 곳 잠들었던 후렴을 깨운다 묻어둔 이름 하나 잔잔한 물소리의 음계 되어 내 안에서 다시 울린다
실개천은 아직 미완의 악보처럼 그리움의 박자를 적시고 시간 너머 향수의 멜로디를 밀려오게 한다
보라,
잊힌 계절의 현 위에서 내 오래된 심장이 조용히 첫 음을 켠다
풀잎
낯익은 풀 내음이 바람에 실려 온다. 스스로 무성해지는 풀밭, 초록이 초록을 덮으며 살아간다. 마치 창 너머 교회 첨탑처럼 어느 날은 크게 보이고, 어느 날은 아주 작아 보이지만 풀 내음은 늘 내 곁을 맴돈다. 내 중심으로 풀이 자라고 내 중심으로 종소리 번지는 것 같다. 풀잎이 주는 작은 편지 하나, 푸른 종소리 되어 가슴에 닿는다. 올곧게 살아가라는 당부일까. 더 단단해지라는 질책일까. 굳건히 자라고 번성하는 그 몸짓으로 세상은 한 철 환하게 빛난다. 언덕을 넘어오는 바람 따라 풀들은 제 몸 끝마다 초록별 하나씩 매달고 스스로 행복해지는 향기를 피워올린다. 결국, 모든 것은 제자리에서 빛나고 있다.
금목서
십자가 종탑을 우러러
사시절 명상하는 계절의 구도자
서늘한 늦가을이 나뭇잎에 스며들면
진한 꽃향기로 손짓한다
목마른 그리움으로 찾아가면
언제나 넓은 품으로 열어준다
황등색 꽃향기가 가슴 깊게 스며드는 날이면
황홀한 미련으로 아낌없이 속삭인다
지난밤 늦가을 비에 낙하한 향기는
뜨거웠던 한 시절의 회포를 되새긴다
바람결에 멀어져가는 그리운 향기를
가슴속 깊은 곳에 가득 채운다
아쉬움으로 사라져 가는 것은
또 다른 것들을 잉태하는
더 큰 사랑을 소망한다
겸허한 순례자의 가슴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