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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이야기

대구10월폭동

작성자뽈뚝농장|작성시간26.06.05|조회수12 목록 댓글 0

대구 10월 폭동

 

해방 후 있었던 좌익의 폭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 우리는 그때의 사건을 바라보기에 앞서 나는 누구이고 이 나라는 어떤 과정으로 건국되었는지 먼저 이해해야 한다. 우리는 자유민주주의를 기반으로 하는 이 나라에 살면서, 이 체제가 우리에게 준 혜택으로 많은 것을 누리고 있다. 하지만 우리는 누릴 것 다 누리면서 우리 체제를 부정하는 희한한 시대에 살고 있다. 왜 우리는 자기부정의 논리에 빠져있는지를 알아야 하는 이유는 여기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우리의 눈으로 우리를 보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부정하고 무너뜨리고자 하는 세력이 만든 색안경으로 자신을 바라보니 내 모습이 초라해지는 것이다. 이 체제를 지키기 위한 정당한 진압이 체제 거부 세력에게는 탄압이요 학살을 당한 것이 되는 것이다. 폭동이 민주주의를 향한 항쟁이 되는 것이다.

 

-1946년 남한은 미군정의 식량정책 실패로 쌀값이 최고 60배 폭등했고 많은 국민들이 굶주림에 허덕였다. 대구. 경북에는 콜레라까지 창궐해 사망자가 속출했고 해방으로 고조됐던 기대감은 분노로 바뀌어 민심은 극도로 흉흉했다.

 

조선정판사 위조지폐사건으로 체포령이 내려져 월북한 박헌영에게는 호기였다. 박헌영은 체포령을 무효화하기 위해 미군정에 대한 위력과시가 필요했다. 최종 지령은 소련에서 받아야 했다.

 

당시 북한 통치자인 소련 중령 스티코프는 비망록에 이렇게 기록. ‘1946년 9월 9일 조선공산당 당수 박헌영이 당이 사회단체들을 어떻게 지도해야 하는지를 물어왔다. 압제에 반대하는 대중시위를 벌이고 항의 집회를 개최하라고 9월 11일과 16일 지시했다’

 

당초 10월로 계획된 총파업이 한 달 정도 앞당겨진 것은 스티코프의 지령 때문이었다.

 

9월 23일 조선공산당 산하 조직인 조선노동조합전국평의회(전평)가 총동원돼 25만 명이 가담한 전국총파업이 시작되었다.

 

<1946년 9월 28일 스티코프 비망록>

로마넨코 북한 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이 남조선 파업 투쟁이 확산돼 학생들까지 합류했다며 500만 엔의 자금지원을 요청했다. 200만 엔은 지급했다. 임금인상, 체포된 좌익활동가 석방, 좌익 신문 복간, 공산당 지도자 체포령 철회가 받아들여질 때까지 파업투쟁을 계속하라고 지시했다.

 

스티코프는 이런 내용을 소련 통치자 스탈린에게 암호 전문으로 보고함.

 

파업의 물결은 대구도 휩쓸게 된다. 9월 중순 조공 대구시당 위원장 손기영, 전평 경북도위원장 윤장혁 등이 ‘남조선노동자총파업 대구시투쟁위원회’를 조직하고 9월 24일 파업에 돌입. 철도, 우편, 공장, 신문까지 모두 멈춰서게 된다. 전 산업이 파업한 것은 전국에서 대구가 유일했다.

 

10월 1일 대구 금정로, 전평 주도의 대규모 시위 발발. 이곳에는 전평 대구지부 격인 ‘조선 노동조합 대구지역평의회’(노평) 투쟁본부가 2층 건물인 운수노조 사무실 2층에 들어와 있었다.

 

1만 5천 명의 군중이 “쌀 배급제 폐지, 박헌영 선생 체포령 취소를 외치면서 적기가와 해방의 노래를 불렀다. 오후 6시 노평 투쟁본부에서 경찰 저놈을 죽여라라는 고함 소리가 퍼져나오자 시위대는 경계 임무를 하던 150여 명의 경찰관들을 포위하고 돌을 던짐. 돌에 맞은 경찰관들이 투쟁본부 건물을 향해 발포했고 현장은 아비규환이 됨.

 

*방송과 각종 매체에서는 해방 후 있었던 큰 사건들과 마찬가지로 대구폭동도 동일한 논리로 다룬다. 시위대는 평화롭게 질서 정연하게 요구 조건을 외치며 집회를 하고 있는데 군과 경찰이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를 하고 이에 흥분한 시위대가 과격시위를 하게 되는 그림 이다. 경찰이 발포하는 상황이 오게 되는 과정에 대한 설명이나 그 집회가 평화 집회였는지, 집회 내용에 대한 설명, 집회 주도 세력이 목적한 바가 무엇인가에 대한 설명 등은 언급을 하지 않는다. ‘평화시위대를 향한 경찰의 무차별 발포로 시민이 죽었다’라는 말로 발포의 원 인 제공자인 시위대의 모든 행위는 정당성을 부여받는다. 군과 경찰의 진압행위는 학살이 된다. 이런 과정으로 인민공화국 건설을 위한 폭동이 민주주의로의 항쟁으로 만들어지는 것이다.

 

<시위 주동자 이일재 전평 경북위원회 간사 진술>

”연탄공장 직원 황말용이 사망했습니다. 경찰이 사람들을 죽였다“는 소문이 대구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다음날인 10월 2일 오전 9시 흰 가운에 마스크를 쓴 대구의대 학생회장 최무학 등 의대생들이 시트를 덮은 시체를 메고 나와 “어제 대구역에서 경찰에 의해 죽은 노동자의 시체”라고 선동. 그러나 이 시체는 해부용으로 도립병원에 안치돼 있던 콜레라 환자의 시체였다. 방부제에 젖은 변색된 시체를 최근 숨진 것처럼 속이려고 최무학이 밤새 수돗물로 씻어냈다고 함.

 

최무학의 대구의대 동기인 김집 전 체신부 장관은 1960년대 초 미국유학 중에 이런 내용의 미군정재판 기록을 발굴 함. ‘대구의대생 150명은 시체를 앞세우고 대구사대를 거쳐 대구경찰서까지 행진했습니다. 시체의 위력은 대단했습니다. 대구의대, 사대, 농대, 중학생 등 수많은 시민이 합세했습니다. 오전 10시 30분 대구경찰서는 노조, 농민조합, 인민위원회, 부녀동맹, 조선민주청년동맹(조선공산당 전위조직) 등 수만 명의 군중에 포위됐다.’

 

권영석 경북경찰청장, “요구 조건을 검토할 테니 평화적으로 해산하라”라고 호소. 하지만 시위 군중은 이를 묵살함.

 

존 플레지어 대구 미군정청 경찰부장은 이성욱 대구 경찰서장에게 강제해산을 명령. 그러나 이성욱은 “학도들에게 어떻게 총을 쏘느냐, 수십 명 병력으로 수만 명을 어떻게 물리치느냐”며 거절. 이성욱은 대구 유지들이 친일 경찰이라며 서장 임명을 반대했던 인물. 분노한 플레지어 소령은 대구 주둔 미군 제1보병 연대장 러썰 포츠 대령에게 군동원을 요청했지만 계엄령이 안내려졌다며 거부당함. 미군정 경북지사 고든 헤론 대령의 요청으로 미군이 출동한 것은 대구경찰서가 시위대에 점령된 뒤였다.

 

필요할 경우 계엄령 없이도 군이 지원하게 돼 있는 규정을 위반한 포츠 대령과 상황을 헤론 지사에게 즉시 보고하지 않은 플레지어 소령은 이후 징계를 받았고 이성욱 대구서장은 파면조치됐다. (미군정기 주한미군사)

 

경찰과 학생 대표의 담판이 진행되던 중 돌연 신재석 경위가 경찰 제복 상위와 모자를 벗어던지고 “인민공화국 만세”를 삼창함. 군중들은 박수를 치며 열광함. 기세가 오르자 조공 경북도당 책임자 장적우는 “경찰이 먼저 무장해제하면 군중을 책임지고 해산하겠다”라고 제의. 오전 11시 30분 이성욱 대구서장이 이에 응해 경찰관들에게 “총을 무기고에 넣고 특경대도 무장 해제하라”라고 지시. 시위 주동자 몇 몇이 “경찰이 백기를 들었다, 안심하고 해산하라”고 외쳤지만 시체를 보고 격앙됐던 군중들은 흩어지지 않음. 군중들은 “무장이 해제됐는지 확인하자”, “정치범들을 풀어주자”라며 낯 12시 경찰서 안으로 난입. 경찰관들은 제복을 벗어던지고 필사적으로 도망. 시위대는 100여 명의 수감자들을 풀어주고 무기고에서 꺼넨 소총과 대검으로 무장해 시내로 몰려나감.

 

<1946년 10월 15일 동아일보>

폭도의 일부는 시내에 각각 떼를 지어 경찰관의 집을 습격하여 가족을 구타한 후 (중략) 곤봉을 들고 적기가 혹은 애국가를 부르며 시내 각처를 돌아다니며 시위를 했는데 대구경찰서 소사주임, 전 대구경찰서 공안과장과 대구 서원 6명, 달성 서원 6명이 폭도의 매에 즉사하고 전매국장, 철도 경찰 서원, 대구 서원 수백 명이 빈사의 중상을 입고(중략)

 

<4.7 언론인협회 1984>

숨진 경찰관의 시신을 파출소 앞에 걸어두고 상황판에 못을 박아 전시하기도 함. 잡범들은 상점과 주점을 약탈. 대구는 무법천지가 됨.

 

6.25 전쟁에 참전했고 준장으로 예편한 송효순 장군은 전쟁 전후 좌익의 학살극을 역사에 남기겠다는 사명감으로 20여 년에 걸쳐 증인들을 만나 기록으로 남긴다. 1979년 갑자문화사가 출간한 그의 취재 기록 “붉은 대학살”에 담긴 내용을 보면

 

좌익세력은 북성로 2가 우석환 경위의 집에서 부인과 두 딸을 몽둥이로 때려 즉사시킨 뒤 시신을 대구경찰서로 가져감. 삼덕동 민 모 순경의 집에서는 트럭으로 집을 들이받은 뒤 끌러나온 부인의 배를 찌르고 쇠파이프로 세 자녀의 머리를 내리쳐 살해. 60대인 어머니는 몽둥이로 때려 살해한 후 시신을 짓밟음. 수성천 변에서 큰 방직공장을 하던 명륜동 서 모씨의 집에서는 인방에 불을 질러 놓은 뒤 운전사 집에 숨어 있던 가족 7명을 찾아내 죽임. 서 씨의 부인과 큰 딸의 시신은 구식 일제 토요타 승용차의 뒤 쪽 범퍼에 새끼줄로 매달아 대구 시내를 한 시간 반 가량 끌고 다님. 봉덕동에서는 출근길에 붙잡힌 임 모 경사를 부인과 5살 짜리 아들과 함께 집에 집어넣고 불을 지름. 임경사가 아들을 안고 집 밖으로 나오자 몽둥이로 때리고 죽창으로 찌름. 옆집 사람들은 반동을 편들었다는 소리를 들을까 봐 숨죽이고 지켜봄. 대구 교외 고모에서 사과 농장을 하며 지역 일이라면 발 벗고 나서던 유지 61세 배홍수 씨는 “농민을 착취해 재산을 모았다”며 낫으로 배 씨의 얼굴을 치고 가족 11명은 모두 처참하게 살해. 시위대는 닭을 잡아 배불리 먹고 돼지기름을 낫과 도끼, 곡갱이에 바름. 시위대는 살아있는 사람의 몸에 큰 돌을 달아 물에 던져 수장하기도 했고 부녀자의 옷을 벗겨 사지를 찢거나 잘라 살해하기도 함. 살려 달라고 애원하는 어린이를 총검과 죽창으로 찌르기도 함. 시신의 얼굴에 석유를 뿌린 후 불을 질러 신원을 알아볼 수 없게 하기도 함.

 

<진실화해위원회 ‘대구10월사건 관련 민간인 희생 사건>

달성경찰서는 대구시의 변두리 지역을 관할하기 위해 한 달 전 신설된 지역. 대구사대 길 건너여서 10월 2일 대구의대, 사대, 농대 등 3개 대학 학생들의 대규모 집회가 코앞에서 벌어짐. 미군 순찰대가 나중에 달성공원에서 경찰관 시신 7구를 발견했는데 발견 당시 2명은 숨은 붙어 있었지만, 사지가 제대로 붙어 있지 않고 거세를 당한 경우까지 있었음.

 

<당시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10월 사건을 취재했던 정영진 저서 ’폭풍의 10월‘>

경찰관의 얼굴과 몸을 칼과 도끼로 난자하고 큰 돌을 머리에 떨어뜨려 짓이기기까지 함.

 

이것이 좌익들이 ’10월 항쟁이라고 주장하는 대구 10월 사건의 기록임.

 

일부 경찰관들이 과거 친일 행각과 1946년 미곡수집령으로 인한 곡물공출 과정에서 비난받을 일을 했다 해도 민간인인 우익 주민들과 경찰관 가족들을 학살한 것은 또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자발적 항쟁이라는 주장과 달리 당시 미군정은 이렇게 결론을 내림.

 

폭동은 공산주의자들이 사주하고 지시한 것이며, 자발적인 것이 아니었다. 명백하게 계획은 면밀히 준비됐고 오직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공산주의자들이 이 소요 사태를 일으킨 근본 목적은 군정을 곤경에 빠뜨리는 것이었다. 이것은 북한에서 직접 조성한 것이다. 실제로 1년 후 쯤 공산당 문건을 압수했는데, 이 문건에는 자신들의 잘못이나 약점, 그러한 문제들을 시정하기 위한 향후 계획이 들어 있었다. (주한미군 G-2정보보고 및 존 하지 미군정청사령관 대담기록)

 

10월 2일 오후 6시. 비상계엄이 선포되어 미군 장갑차까지 출동한 뒤 대구는 안정을 찾기 시작했지만 좌익 세력은 이미 경북 22개 군청 소재지로 진격한 뒤였다.

 

대구의사회는 부상당한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해 큰 파장을 불러 일으킨다.

 

<1946년 10월 15일 동아알보>

10월 2일 대구경찰 서원 수백 명이 빈사의 중상을 입고 입원하려 했으나 시내 각 병원에서는 의사와 간호부들의 공동성명에 의한 ’발포를 중지하지 않는 이상 경관의 치료 진찰은 거부한다‘는 것으로 입원 불능의 상태에 빠짐.

 

전쟁 중 죽어가는 적군도 치료해 주는 게 본연의 임무인 이들은 왜 경관들의 치료를 거부했을까. 그것은 좌익 의료진은 의사로서의 존재감이 아니라 투쟁대열에 참가한 시위대였기 때문이다. 이들은 의사로서의 본연의 임무보다는 의술을 투쟁의 도구로 사용한 것이다.

 

<코오롱 창업주 이원만의 자서전 ’나의 정경(政經) 50년‘에 전하는 목격담>

어떤 부상당한 경찰관이 살려달라고 병원의 계단을 올라가는데 폭도들이 그 사람을 끄집어내리려고 했다. 그 경관은 계단의 모서리를 쥐고 안 내려오려고 하는데 위에서 그 병원의 의사가 떠밀었다. 참으로 비인간적인 일이었다. 아래로 굴러떨어진 경관의 머리를 폭도들이 돌을 번쩍 들어 내리쳤다. 머리는 박살이 나고 흰 것이 튀어나왔다.

 

경찰관 치료가 거부되자 병원은 오히려 좌익세력이 경관들을 살해하는 길목이 됨.

 

<당시 대구매일신문 기자로 10월 사건을 취재했던 정영진의 저서 ’폭풍의 10월‘>

도립병원 정문 앞 원형 화단 둘레에서 끔찍한 살인극이 벌어지고 있었다. 어디서 호송해 왔는지 빈사 상태의 경관들이 늘어져 있었는데 그중 몇 사람이 고통으로 몸부림치거나 죽음 직전의 경련으로 몸을 떨자 “저놈들 아직 덜 죽었다”고 소리치며 둘레의 청년 7~8명이 몽둥이로 확인 타살하는 것이었다. 아무리 원한이 깊다고 해도 반송장이 되어 병원에 실려 온 중환자에게까지 저를 수 있을까

 

<10월 사건을 현장에서 목격한 대구 출신 교사 석정길의 저서 ’새벽을 달리는 동지들‘>

도립병원 안에 폭도가 끼어 있어 입원한 경찰관들을 죽이기도 했다.

 

의료진의 경관 치료 거부는 이후 진압 과정에서 경찰이 의사들에게 보복을 저지르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이런 와중에 좌익세력은 경북 각 지역으로 진출

 

조선공산당, 전국노동조합전국평의회, 인민위원회, 부녀총동맹, 조선민주청년동맹 등 좌익학생들은 20~100명씩 조를 짠 뒤 조장을 뽑고 환이화물의 화물차, 대구시청의 시영버스, 그리고 개인 자동차를 탈취해 경북 22개 군청 소재지로 진격함.

 

<대구치안 총사령관 한종건 담화 발표, ’경북민요(慶北民擾)의 전모‘>

목봉, 철편 등으로 타살함에 그치지 아니하고 살해된 시신의 머리를 자르고 얼굴 가죽을 벗기며 사지를 절단하는 등 마치 야만인들이 사람을 잡아먹는 것과 비슷한 수준에까지 이르렀다.

 

10월 3일 새벽 5시 50분쯤 왜관경찰서가 습격당함. 시위대는 서장 장석한 경감의 눈을 파내고 혀를 자른 뒤 몽둥이로 타살하고 다른 네 명의 경찰관도 도끼로 참혹하게 살해함.

 

영천군 화산지서에서는 경찰관이 산으로 도망가자 쫓아가서 낫으로 두 눈을 뽑아 죽인 뒤 집에 불을 지르고 가족 5명을 불 속에 집어넣어 살해함.

 

영천군 자양지서 경찰관과 가족들은 한 팔, 한 다리에 서너 명씩 달라붙어 있는 힘을 다해 찢어 죽임. 한 경찰관의 부인은 옷을 모두 벗긴 채 이런 만행을 당함.

 

상주에서는 경찰서를 습격해 경찰관 5명을 생매장해 죽임. 상주에서 이런 일을 저지른 주동자들은 10월 25일 마산에서 체포됨.

 

칠곡 시위대는 파면된 상태였던 35세의 서장 윤상탕 경감을 집 앞에서 붙잡아 죽창, 낫, 곤봉 등으로 살해함.

 

성주에서는 10월 4일 새벽 3시 서장 등 경찰관 22명을 경찰서에 감금한 후 불을 질러 태워 죽이러 다가 방화 직전 충남에서 기동경찰대가 도착해 미수에 그침.

 

<1946년 10월 13일 대구시보가 전하는 가장 참혹했던 영천 현장 모습>

10월 3일 오전 1시경 군내에 일제히 봉기한 수만의 폭도들은 “38선은 이제 철폐되었다”, “북조선인민위원회의 우리 동포들은 굶주린 우리를 구하기 위하여 남조선으로 들어왔다. 자!, 굶주린 동포들은 일어나라!” 이렇게 외치며 읍내를 포위했다. 이들은 경찰서를 습격, 방화한 뒤 군수 이태수를 사택에서 끌어내어 잔혹한 방법으로 죽인 다음, 몸에 석유를 뿌려 불타는 군 청사 내에 던져 생화장에 처하였다. 폭도들은 방화, 학살, 약탈과 파괴를 거듭하여 우편국, 재판소, 등기소, 신한공사 출장소 등을 방화, 전소케 했다. 또 부잣집을 습격해 역시 방화, 가산을 약탈했다. 이때 임고면의 이인석, 정도영 두 사람도 피해를 입었고, 특히 이인석 씨는 네 살 먹은 외동 손자까지 참살당하였다. 군내 각 면사무소, 각 경찰지서는 물론 신령면 같은 곳에서는 성당, 교회, 소학교까지 불태워졌고 전도사까지 학살당했다. 10월 8일 현재 군내 피해 상황은 전파 가옥 200호, 반파 가옥 약 1천호, 경관을 포함한 관공리 사망자 16명, 중상자 19명, 일반인 사망자 약 24명, 피해액 약 10억 원, 본서와 지서에 보관된 무기 전부가 탈취당했다고 한다.

 

10월 3일 구미경찰서를 점령하고 경찰관들을 감금했던 선산군 민전(민주주의민족전선) 사무국장 박상희는 이틀 뒤 진압군에 사살됨. 박상희는 남로당 군사부 총책 이재복과 가까운 사이였다. 경북 안동 태생으로 목사 출신인 이재복은 박헌영의 지령을 받고 9월 총파업과 10월 사건을 실행한 주동자. 이재복은 박상희의 장례비용을 모두 대주고 유족들을 물심양면으로 돌봐주며 조선경비사관학교에서 교육받던 박상희의 동생 박정희에게 남로당 가입을 권유. 박정희 소령은 1948년 11월 남로당 숙군 때 적발돼 사형선고를 받았지만, 실질적인 활동을 한 바 없고 숙군 수사에 협조한 점이 감안돼 사면받음.

 

대구 10월 사건은 전국에서 급파된 경찰 4500명, 김두한이 이끄는 우익 청년 3000명, 대전 2연대 1개 중대, 미군 2연대가 총출동해 겨우 진압됨.

 

계엄령은 10월 21일에야 해제됐고 완전한 사태 수습은 연말이 돼서야 이뤄짐.

 

대구 시내에서 경찰관 38명, 공무원 163명, 민간인 73명이 사망했고, 경북 지역에서 경찰관 80명, 공무원과 민간인 24명이 사망했으며 행방불명, 납치가 145명 달했음.

 

경찰이 사건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피의 보복을 벌이는 사태가 벌어짐. 과잉진압으로 억울하게 목숨을 잃은 양민들도 많이 생김. 이들에 대해서는 명예회복과 보상이 이뤄져야 됨이 마땅하다.

 

박헌영은 소요의 불길을 전국으로 퍼뜨리려고 함.

 

10월 3일 서울에서는 1만 명이 미군정청 앞에서 ’정권을 인민위원회로 넘기라‘며 대규모 시위를 벌임.

 

3일 오후 경남 통영 읍에서는 식량 소동이 일어나 5천여 군중이 경찰서를 포위하고 무기를 빼앗아 가는 등 경찰과 시위대 간에 일대 충돌이 생겨 (중략)

 

10월 5일 부산, 인천, 군산, 목포, 여수, 마산, 통영 등에서 부두 노동자 1만5천 명이 ’동정파업(동족파업)‘에 돌입.

 

10월 20일 경기도 개성, 봉동, 임한, 연안, 백천, 대성, 장단, 광주 등에서 경찰지서가 습격당함.

 

10월 30일 전남 화순에서 탄광노동자 5000명 파업했고 목포에서는 1500여 명이 목포경찰서를 습격.

 

11월 전남 장성 지서, 보성 득량 지서 습격되고, 우익단체인 대한독립촉성국민회 청년 2명 학살됨. 전남 해남에서는 지서와 면사무소가 방화됨.

 

11월 11일 오후 2시 전주형무소 죄수 842명 중 417명이 간수들의 무기를 빼앗아 탈옥했고 22일 광주에서는 900여 명이 탈옥하려다가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져 죄수 4명 죽고 10여 명이 중상을 입음.

 

당시 좌익 폭력투쟁의 공통양상이 존재

 

<주한미군 G-2정보보고서. 1946. 12. 01>

이들은 어둠이 깔려 있는 이른 아침 시간에 공격하기를 선호했다. 그래서 많은 공격이 새벽 1시에서 5시 사이에 행해졌다. 경찰서를 공격할 때 어린아이들을 맨 앞에 세워 경찰이 군중들을 향해 사격하는 것을 막으려 했다. 도시의 주요 경찰서에서 미군 부대를 끌어내기 위해 외곽에 있는 경찰초소를 공격하는 것처럼 위장하는 경우도 있었다. 가능하면 공문서를 없애고, 특히 쌀이나 곡물 수집에 관한 기록을 없애버렸다. 농민들은 폭력을 동원한 협박에 원하지 않아도 참여해야 했다. 선동가들은 후방에 있었으며, 거의 체포당하지 않았다. 실제로 그들은 폭동 이후 체포를 피하기 위해 우익 완장을 차기도 했다.

 

이 모든 비극의 배후에는 소련이 있었다.

 

<스티코프 비망록>

대구에서 폭력사태가 시작된 10월 2일 북한 통치자였던 소련 중장 스티코프는 활동 자금으로 3백만 엔을 남한에 추가로 내려보내라고 지시를 내림. 12월 6일 39만 엔, 12월 7일에도 스티코프는 로마넨코(북한 주재 소련군 민정부사령관)의 계좌에 있는 122만 루블을 박헌영에게 전달. (1995년 스티코프 비망록이 공개되면서 밝혀진 내용)

 

대구 10월 사건은 미군정하에서 합법정당이었던 조선공산당과 공산주의가 짧은 기간 남한의 도시와 농촌까지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보여주는 충격적인 사건.

 

<이인화, ’인간의 길‘, 1997>

해방 직후 공산당은 건국준비위원회와 인민공화국 조직을 통해 접수한 일본인들의 적산 재원으로 불과 몇 달 사이에 6천만 원이라는 돈을 만들어 뿌려댔다. 사대문 안에 새로 지은 기와집이 2만 원 남짓하던 당시, 현재 시세로 2조 이상의 정치자금을 살포한 것이다. 이 돈을 다 쓰자 소련 군정당국이 적군 군표와 환전하게 한 북한의 조선은행권이 서울로 유입되었다. 다시 몇 달 뒤에 공산당은 위조지폐까지 찍기 시작했다. 46년 5월 15일 조선정판사 위조지폐 사건은 그 빙산의 일각이었다. 이런 돈들이 아사 직전의 농촌에 방대한 공산당의 외곽단체를 출현시켰다.

 

좌익의 잔인한 폭력성은 대구 시민들이 공산주의에 등을 돌리는 계기가 됨. 조선공산당(1946년 11월 23일 남로당으로 개칭)도 1500명이 구속되고 5명이 사형선고를 받으면서 큰 타격을 입음. 수배된 좌익 분자들은 월북하거나 빨치산의 원조가 됐고 사상과 신원 검증이 허술했던 대구 6연대를 도피처 삼아 대거 입대함. 이는 1948년 11월 일어난 대구 6연대 반란사건의 단초가 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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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폭동과 여순반란 사건의 경우 진행 과정이 비슷하다. 대구와 여수 시내를 장악한 좌익세력이 경북과 전라도 지역으로 확산되어 진출하는 패턴이다. 좌익들의 학살행위도 그 수준이 비슷하고 동일한 목표점을 가지고 있었다. 대한민국 정부와 미군정을 흔들어 몰아내고 인민공화국을 건설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반란이 실패한 이후 일부 세력이 지리산으로 들어가 빨치산이 되는 흐름도 비슷하다.

 

대구폭동, 제주4.3, 여순반란 사건이 모두 진압된 이후 살아남은 사람은 지역을 기반으로 세력을 형성했다. 이들은 80여 년을 버티며 이루지 못한 혁명의 완성을 위해 악착같이 살아간다. 이들에게는 혁명의 실패가 아니라 혁명의 미완성이다. 국사 교과서와 방송 등 모든 매체는 이 세 사건을 민주주의를 향한 항쟁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시민이 처참히 학살당했다고 이야기한다.

 

하지만, 포장된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자유민주주의라는 가치를 버리지 않는 한 폭동이 항쟁이 되고, 무장폭도가 민주의 전사가 된 현실은 반드시 바로잡아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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