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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악기의 추억" 장편소설 소개(자음과 모음 출판사에서 발췌...)

작성자코고무신|작성시간10.05.19|조회수28 목록 댓글 0

백악기의 추억 - 박희섭 장편소설

 
 

 

 

인간이 세상에 나와 제일 먼저 느끼는 감정이 슬픔이라고 한다. 모체로부터 이탈한 태아는 가장 먼저 울음을 터트린다.

그것은 헐벗은 자신의 몸을 에워싼 ‘세계’를 느끼며 한 개체로서 가지는 최초의 경험에 대한 ‘이해’이다.

그리고 그 경험은 타인과 같은 감정을 소유할 수 없을 것이라는 선험에 대한 단말마적 비명이기도 하다.

어쩌면 인간은 출생과 함께 죽음을 감지한다.

 

죽음의 대상이 되는 이들은 젊은이들이다. 그들은 인생에 있어 가장 생동적이어야 할 시절에 죽음을 꿈꾼다.

하지만 겉으로 드러나는 동기는 없다. 죽고, 죽어갈 따름이다.

이 끊임없는 죽음의 뒤를 쫓던 우형근 경위는 어떤 명확한 계기나 정황이 포착되지 않는 죽음들 앞에 고민한다.

그는 몇 년 전만 해도 수도권에서 꽤나 이름이 알려진 민완형사였다. 그러나 그는 삶에 회의를 느끼고 지방 전근을 자처한다.

아내와는 오래전부터 별거 중이다. 그런 우 경위의 상관으로 젊고 패기 넘치는 강영준이라는 사내가 나타난다.

우 경위는 경찰대학 출신 엘리트인 젊은 강 계장의 출현이 어딘가 귀찮으면서 마뜩치 않다.

 

 

자살하려는 사람의 대부분은 삶과 죽음에 대해 결정을 내리지 못한 상태에서 죽음을 담보로 도박을 벌인다.

그들은 타인이 자신을 구할 여지를 남겨둠으로써 그들이 자기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알게 된다.

소설 속에서 자살자들은 모두 지극히 평범한 인물들이다.

그들은 바로 어제처럼 별일 없이 지내다가도 어느 새벽, 혹은 홀로 남겨진 시간에 건물 높은 곳에서 자신의 몸을 던진다.

젊은이들이 ‘지옥의 여신’이라는 게임을 하고 난 후 갑자기 건물 옥상에서 몸을 던지는 것을 이상하게 여긴 강 계장은

몸소 그 게임을 하게 되는데, 머지않아 그 또한 투신을 하게 된다.

혼자라는 것, 누구도 자신을 위로해주고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는 느낌이 들 때면 사람들은 자살을 꿈꾼다.

그런 면에서 고독이라는 것은 유사 이래 인류가 지닌 오랜 질병이 아닐까.

높고 건조한 회색 빌딩 숲에서 어느 날 모든 인류가 순차적으로 죽어간다면,

그리고 만약 우리의 후세나 외계 생물체가 그 흔적을 발견하게 된다면 지금 우리 인류는 어떤 이름으로 명명될 수 있을까.

고독이라는 진화하지 않는 감정의 측면에서 우리는 아직 백악기를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다른 어떤 시대보다 개인의 삶과 권리가 존중받는 시대에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개인이 소외되고 고독을 체감하게 되는 것이 현대이다.

자살은 가장 개인적인 죽음이며, 그 어떤 삶도 이러한 개인적인 죽음에 침범할 수 없다.

이 시대는 어쩌면 ‘사랑’이 불가능한 시대이다. 사랑은 이해를 필요로 하고 이해는 오랜 시간이 담보되어야 한다.

하지만 지금처럼 빠르고, 기억할 수 없을 정도로 순식간에 변해가는 세상에서 사랑이란,

철없고 낭만적인 감정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런 면에서 이 소설은 철모르는 인간들에 대한 고요한 성찰이기도 하다.

 

 

어느 봄날, 한 청년의 투신자살 사건이 일어난다.

연락을 받고 사건 현장에 나간 사람은 우형근 경위. 마흔여섯 살로 몇 년 전만 해도 수도권에서 유명한 민완형사였지만

어느 날 갑자기 삶에 대한 회의에 빠지게 되고, 자진해서 성장기에 자신의 추억이 깃든 지방의 경찰서로 전근을 해온 처지다.

 

매사에 적당주의로 나날을 보내던 그의 앞에 새롭게 강영준이란 경찰대 출신의 젊은 엘리트 계장이 부임해온다.

강 계장은 관내에 부쩍 늘어난 투신자살 사건에 의문을 품는다.

매사에 의욕적인 강 계장은 젊은 상관의 출현을 마뜩치 않게 여기던 우 형사에게 투신자살 사건을 조사해볼 것을 요구한다.

이에 수사에 나섰던 우 형사는 투신자살자의 대부분이 어린 청소년이며, 투신을 하기 직전에 PC방에서 ‘악마의 게임’이란

신종 게임을 했다는 기묘한 공통점을 밝혀내고 그 사실에 주목한다.

하지만 그게 투신자살 사건과 연관되었다는 어떠한 증거도 발견하지 못한다.

그러나 강 계장은 우 형사의 분석을 믿고 그 부분에 대한 지속적인 수사를 당부하는 한편,

자신이 손수 대학 연구실에 증거를 의뢰하는 등 과학적인 검증에 나선다.

시간이 지날수록 청소년 투신자살 사건이 증가하고 범지역적으로 확산된다. 이

런 사실을 눈치챈 사회부 기자에 의해 지방 신문에 실리게 되고, 결국 커다란 이슈로 발전하기에 이른다.

 

의사는 느닷없이 그에게 근래 들어 잠에서 깨어나 운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뜬금없는 질문이었지만 그는 그렇다고 솔직하게 시인했다. 어른의 행위치고는 부끄럽지만

간혹 자다가 이유 모를 슬픔에 겨워서 깨어난 경우가 있었다. 그럴 때면 베갯잇이 눈물에 흠뻑 젖어 있곤 했다.

스스로의 울음소리에 놀라 깨어난 적도 있었다.

그게 다 슬픔이 기억의 지층에 오래도록 누적된 탓입니다. 보통 남자들은 슬픔을 표면적으로 잘 나타내지 않습니다.

외부적 상황이나 체면 때문에 슬픔을 안으로 억제하는 거죠. 하지만 그게 마음에 화석처럼 오래 남아 있게 되지요.

그게 후일에 잠이 들거나 하는 무의식의 상태에서 바깥으로 표출되는 것입니다.

마음에서 더 이상 슬픔을 눌러두지 못하고 바깥으로 흘러나오는 겁니다.

99쪽

사람이 희극보다는 비극을 보다 오래 기억하는 이유는

자신의 내면에 잠재된 원초적인 슬픔과의 동조현상이 일어나기 때문이라는 학설이 있습니다.

원초적인 슬픔?

 

일부 학자들의 의견으로는 태아가 자신이 열 달간 머물던 모체에서 이탈되어 나올 때 느끼는 최초의 감정이 바로 슬픔이란 것입니다.

즉 갓 탄생한 아기가 이 세상과의 만남에서 처음 맛보는 감정이 바로 이탈감이나 상실감 혹은

그와 유사한, 외로움이 복합적으로 뒤섞인 슬픔이라는 것이죠. 그렇게 보면 인간의 삶은 애초부터 근원적 슬픔을 내재하고 시작되는 셈입니다.

100쪽

“쟤가 도망치자고 할 때 도망이라도 쳤으면 이런 불상사는 없을 것인데, 아이고. 이를 어찌하면 좋을까.”

여자가 테이블에 엎드려 어깨를 들썩이며 흐느꼈다.

소년과 어머니가 대화를 나눌 수 있도록 잠시 조사실 바깥으로 나온 그는 두터운 안전유리창을 통해 여자가

소년을 품에 안고 흐느끼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자신의 일처럼 마음이 무겁고 우울했다.

…… 아비를 살해하고 이승에 남은 소년과 그의 어머니는 남은 생을 힘겹게 버티어나가야 할 것이다.

살았을 때는 현실적인 고통을 안겨주었던 남자가 죽어서는 두 사람의 영혼에 벗어버리기 힘든 가시면류관이 되어 있는 것이다.

217쪽

 

1987년 《매일신문》 신춘문예 단편소설 부문 당선,

1988년 《스포츠서울》 SF소설 부문 당선, 1988년 《매일신문》 장편소설 공모 당선.

1989년 장편소설 『검은 江』을 출간하였고, 이후 대하소설 『冬天』을 《대구일보》에 연재하였다.

1999년 《대구문학상》을 수상하였다.

 

작가 박희섭은 작품 활동 초기부터 역사와 개인, 자유와 인간 실존 등의 문제에 깊이 천착하여 다양한 작품을 발표해왔다.

그는 아프리카 내전을 배경으로 한 장편 소설 『검은 江』에서 혁명의 이상과 현실의 문제가 날카롭게 대립하는 모습을 통해

 이 세계가 처한 시대사적 문제들에 도전한 바 있고,

《대구일보》에 연재했던 장편소설 『冬天』에서는 근현대 3대에 걸친 안동 지방 양반가의 몰락과 상민 계급의 번영을 통해

전통 사회와 산업 사회의 교차, 급변하는 환경 속에 벌어지는 개개인의 갈등 등을 실감나게 그려냈다.

 

 

    (소설가 김원일)

 

『백악기의 추억』은 『검은 강』의 작가 박희섭이 두 번째 펴낸 장편소설로 현대인이 당면한 고독과 소외라는 문제를

추리소설 형식으로 담아낸다. 무한경쟁, 물질만능, 자본의 사회에 함몰된 현대라는 거대한 공룡 앞에서 왜소해진 개인이

타인과의 소통 단절을 PC 게임의 몰두에서 찾으려 한다. 결국에는 개인적 외로움을 극복하지 못한 채 자살 충동 끝에 생을

마감하는 오늘의 젊은이 생태를, 작가는 닿을 수 없는 먼 그곳, ‘백악기의 추억’에다 사유의 목표점을 설정하고 있다.

저변에 흐르는 오늘날 청춘의 내밀한 외로움과 슬픔이 마음에 닿는다.

소설가 김원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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