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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

작성자旻谷 서천종|작성시간26.06.20|조회수0 목록 댓글 0

한국전쟁과 대전 방어 전투

 달문 ・ 2025. 7. 17. 1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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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인 대.세.남. 35(KBS1 라디오 94.7)

 

6.25 전쟁 중 용두동 판자촌

1. 오늘은 어떤 이야기를 가지고 오셨나요?

<한국전쟁과 대전> 입니다.

1950년 6월 25일, 전쟁 발발 3일 뒤에 서울이 함락되고,

대전이 임시수도가 됩니다. 전국에서 몰려든 피난민으로 인구 13만의 대전이 일주일도 안 되어 100만 명 이상의 도시로 북적이게 되죠.

 

2. 1950년 한국전쟁이 일어나기 전의 대전은?

1948년 이승만 정부가 시작되고, 북쪽에서는 1949년 9월 9일 조선민주주의 인민공화국이라는 김일성 정부가 수립되었습니다. 이후, 38선 인근에서 소규모 총격전으로 국군은 비상경계령에 들어가 있었는데, 6월 23일 0시를 기해 비상경계령이 해제되었습니다. 같은 날 신탄진 수영장이 개장을 했고, 유성의 복숭아가 한창이었습니다. 그런데 6월 25일 오전 11시 40분, 대전방송은 ‘외출 중인 장병들의 귀대하라’며 긴급 뉴스를 내보냅니다. 휴일을 맞아 각처에 흩어져 있던 장병들이 오후 늦게 허둥지둥 부대에 도착하기 시작합니다.

....

4. 한국전쟁 속의 금강방어 전투

한국전쟁에서 맥아더 다음으로 전설적인 인물이 된 미국의 장군이 있습니다. 바로 월리암 딘 소장입니다. 그는 2차세계대전 이후 일본 오키나와에 주둔 중이던 미 제24보병 사단장으로서 6.25 전쟁이 일어나자 한국에 급파되었습니다. 딘 소장은 7월 3일, 대전 둔산동 비행장에 내려 주한미국대사 무쵸와 워커 중장을 만납니다. 무쵸 대사는 SOFA의 전신인 大田협정을 체결했고, 워커 중장은 중부지역 방어 사령관으로 딘 소장에게 7월 16일까지 북한군의 남침에 대한 대전 방어를 지시합니다.

한국전쟁의 핵심은 속도전이었습니다. 미군측에서는 유엔군 주력부대가 도착할 때까지 금강을 끼고 있어 지리적으로 방어에 유리한 대전에서 시간을 벌어야만 했습니다. 반대로 북한군은 교통의 도시 대전을 함락하여 한걸음에 부산과 전라도로 내려가 전쟁을 끝내야만 했습니다.

 

둔산비행장에 도착한 미군 지도자 3인(좌), 대전 시내에 진입하는 북한군 탱크(우)

 

7월 12일, 끝내 조치원도 북한군의 수중에 떨어지자, 딘 장군은 대전

폭파된 금강대교1

폭파된 금강대교2

사수를 위해 금강 방어라인을 설정하고, 북쪽에서 대전으로 들어오는 주요 도로 및 다리를 폭파하고, 탱크 장애물을 매설하고, 유리한 지점에 진지를 구축하였습니다. 이때 공주 공산성 앞에 있는 금강교의 일부도 폭파되었습니다. 전쟁 후 금강교의 끊어진 부분을 복구하였고, 현재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7월 18일, 북한군은 공주, 조치원, 세종 일대의 금강을 건너왔고, 임시수도였던 대전은 대구로 이동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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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군의 갑천 방어 전투

6. 대전 시가지가 불타고 대전이 함락되었는데, 딘 장군은 무사히 탈출했나요?

7월 20일 오후, 장군의 지프차는 옥천 입구인 증약터널로 갈 수가 없었습니다. 이미 북한군이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이죠. 그래서 금산 방향으로 차를 돌렸고 산내면 가까이에 이르렀을 때 북한군의 공격을 받아 짚차는 논두렁에 전복되었습니다. ....

7. 대전 전투 이후에 영동 노근리 사건

영동 노근리 쌍굴다리

 

7월 26일, 미군이 대전전투에서 퇴각한지 일주일이 지난 시간입니다. 충북 영동 노근리 인근 사람들은 북한군이 마을에 들어온다는 소식을 듣고 피난길에 나섭니다. 도로 사정과 교통이 불편하던 시절 부산으로 피난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무엇일까요? 철길입니다. 경부선 열차의 철도길을 따라 노근리 마을과 주변 사람들 300여명은 남쪽으로 이동을 합니다. 그런데 중간에 미군들을 만나고 미군들은 마을사람들을 철길 위에서 대기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30여 분 후에 갑자기 전투기 2대가 나타나 무차별 사격을 가합니다. 철길 위는 아비귀환으로 바뀌고 살아남은 마을 사람들은 철길 아래 굴다리로 피합니다. 전투기는 사라지고, 미군들은 일정한 거리에서 감시하며 7월 29일까지 굴다리를 빠져나오는 사람들을 향해 기관총을 난사합니다. 지금도 노근리 쌍굴다리에 가보면 전투기에서 발사했던 포탄 자국과 미군의 기관총 자국들이 굴다리에 박혀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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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동 노근리 철길

9. 그럼, 대전은 언제 다시 수복?

1950년 9월 15일, 인천상륙작전이 성공하여 9월 28일 수도 서울을 탈환합니다. 대전은 서울보다 하루 늦은 9월 29일 국군이 들어오고, 피난갔던 사람들이 되돌아오기 시작하죠. 그러나 10월 초순까지도 ‘빨치산’이 보문산에서 봉화를 올리며 대전지역에 위협을 주었으며 안영동 일대에도 잔당들이 출몰하여 물건과 양곡을 약탈해 가곤 했습니다. 북으로 올라가지 못한 충남 좌익 유격대는 대둔산을 중심으로 빨치산 활동을 했습니다. 논산 연산역을 습격하는가 하면 계룡산을 타고 동학사에 이르러서는 반포 지서를 습격하기도 했습니다. 이에 대전에서는 반공학생들로 조직된 학도 의용대와 경찰이 논산 가야곡까지 가서 빨치산들과 전투를 하였습니다. 대둔산 수락계곡 입구에는 이때 희생된 경찰과 군인들을 위한 대둔산 승전탑이 세워져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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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으로 파괴된 대전 도심. 멀리 보이는 산은 식장산.

전쟁 중 대전역(1951)

[출처] 한국전쟁과 대전 방어 전투|작성자 달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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