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쓰기의 형식(5) - 수필
수필이라고 하면 내가 학교 다닐 무렵 중학교 국어 교과서에 실렸던 피천득 선생의 ‘아사꼬’라는 글이 지금도 머리와 마음속에 남아 있는데, 그 맛을 기리며 얼마 전 참으로 오랜만에 피천득 선생의 수필집을, 다른 수필집 중 제일 먼저 꺼내 읽었다. 그 작품집에 역시 ‘아사꼬’라는 작품이 실려 있었는데 역시 고전이라는 것은 시공간을 뛰어넘는 것으로 벌써 삼십 년 가까운 문턱을 넘어선 지금에도 그 여운은 여전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하는 것으로서 작가로서 욕심도 욕심이려니와 그 애틋한 사랑을 나도 하나쯤은 가질 수 없을까 싶은 뒤늦은 노망 가까운 발심이 일게 했다.
감정 표현에 있어 그야말로 피선생다운, 혹은 그가 정의하는 수필의 개념다운 곱게 빗은 백자처럼 은은하고 그윽한 향취가 우러나는 것으로 조금도 군더더기가 없는 것이 배웠건 못배웠건 간에 글을 읽을 줄 아는 이라면 누구나 빙그레 흡족한 마음을 가지게 할 훌륭한 글이었다.
맹자의 성선설을 확신하는 것도 인정하는 것도 아니지만 나이가 들수록 삶이라는 것이 녹녹치 않은 현실이고 때로는 지치고 힘들게 하며 그 사이 얻는 쾌락에 가까운 기쁨이나 즐거움은 잠시라 한없이 허전하게 하는 것이지만, 그러한 삶을(피선생이 지금 내가 이 글을 쓰고 있는 동안에 현존해 계심으로 해서 동시대인이라고 감히 표현할 수 있다면 그것은 나에게 있어 더할 나위없는 영광이다) 같은 시대에 살아가는 어느 작가가 그토록 아름답게 작품을 만들어 모두를 위로한다고, 위안을 준다고 생각하면 저절로 숙연해지는 것이다. 즉, 대충 살아놓고 엄살을 부릴 일이 아니라는 경종을 울려준다는 것이다.
문학과 예술을 지향하는 모든 사람은 위에 언급한 바와 같이 진흙과 뻘을 받아들여 은색의 영롱한 진주를 세상에 뱉어내어 사람들을 즐겁고 기쁘게 하는 사람들이다. 좋은 글과 작품을 제작함으로서 가깝게는 스스로를 끝없이 정화시키고, 넓게는 세상과 사람들 모두를 정화시키며 숙연케 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고 그들이 스스로를 그 외에 종사하는 사람들과 차별화함으로서 무시하려 들거나 그들의 신성한 영역을 탐하려고 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모두가 아는 사실. 물론 재능은 천부적인 것이긴 하지만, 만약 많은 것이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가진다면, 그런 예술과 문학을 하는 사람, 혹은 천재에 대하여, 그렇지만 그들의 불철주야 쉬지 않는 열정으로 온 몸을 활활 희생양처럼 태워가며 정진한다는 것은 속인들이 배워야 하고 작품은 작품으로 평을 받겠지만 일반인들은 결국 그런 노력을 해내지 못하고, 할려들지 않기 때문에 그들에 대해서 엄숙해지는 것이 아니겠는가.
글쓰기 형식중 수필은 시(함축), 소설(이야기), 산문(생각의 조각 맞추기) 등과는 달리 신경을 바짝 써서 만들어 내는 진주의 영롱함에 가까운 글의 백미라 하겠다. 어떤 장르도 소중하지 않은 것은 없다는 것은 인간들 하나하나의 개성과 취향이 천차만별이듯 장르를 고르는 독자들의 요구에 따라 형식이 여러 가지로 분파되어 있는 것일뿐, 인간의 생활을 바탕으로 정서를 표출해 냄으로서 인간다움, 인간적인 아름다움을 전하려는 정성과 노력은 모두 대동소이한 것이다.
형식적인 까다로움이나 창작의 어려운 과정을 거치지 않고 모두들 선망하는, 그러나 또한 쉽게 좌절케하는 글쓰기의 접근에 가장 쉬운 분야는 단연 수필이다. 글쓰기란 무엇인가, 왜 작가는 글을 쓰는가. 그 많은 질문에 대한 많은 답중의 하나가 더욱 많은 사람들이 글쓰기에 편입케 해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갈수록 복잡해지고 어려워지며 혼란스러운 세상을 같이 노력해서 스스로로부터 정화시켜 나간다면, 노력하지도 않고 쉽게 살려는, 갈수록 허악해지는 세상을 보다 밝고 살맛나는 한집안처럼 가꾸어 나갈 수 있을 것이며 그것도 아니면 멸망해가는 속도를 최소한 늦추거나 붙들 수는 있지 않겠는가. 수필은 만인에게 접근하기가 가장 용이한 글쓰기의 한 방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