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영원한 나그네의 화두(1)
글을 쓰기로 처음 마음을 먹었을 때, 우리글과 말이라는 도구를 필생의 무기로 써먹겠다고 생각했을 때, 당시 습관처럼 펴보던 국어사전의 많은 단어 중 난 순수한 우리말인 이 ‘길’이라는 단어를 선택했고 무슨 오래된 가보처럼 틈만 나면 그 의미의 철학적, 종교적, 문학적 갈래의 진중한 싶이를 가늠해보곤 했다.
길을 주제로 그 어원과 생겨난 배경, 갈라져 나온 파생어들, 그리고 시의 적용을 놓고 작가 최인훈이 쓴 산문집을 난 애독하고 지금도 잊지 않고 늘 마음에 새겨두고 있는데, 작가는 시인의 자질을 갖춘 사람은 항상 길에 있어야 한다는 이야기를 펼쳤다. 그래서 난 그 이후로 일이 있건 없건 어디든 다니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다니는 길에서 많은 생각과 작품 구상을 한다. 언젠가 길이라는 제목으로 장편소설이든 단편소설이든 혹은 시든 작품으로 남기게 될 것이다. 작가가 심어준 생각 외에 나대로의 삶의 체험이 깃든 작품을 어떻게든 쓰고 말겠다는 의지는 쉽게 잊혀지지 않는 기억처럼 늘 머릿속에 간직하고 있고 지금은 생활화되다시피 되었다.
완독을 하지는 못했지만 성경의 길을 놓고 해석해 놓은 내용도 좋아한다. 인생이라는 것은 누구나 걸어가게 되는 긴 노정과 같다. 마라톤과 같은 것이다. 마라톤은 빨리 달려나간다고 해서 항상 우승을 자신할 수 없다. 간혹 출발부터 앞서나가 줄곧 선두자리를 내주지 않고 완주하여 우승의 영광을 거머쥐는 사람도 있기는 하다. 그러나 그것은 극히 예외적인 일로 어쩌면 사건으로, 사건은 인간의 보편적인 삶속에서 누구나 수긍하고 쉽게 동의하는 법칙이 될 수 없다. 마라톤은, 인생에 있어서의 마라톤은 또한 그렇게 빠르게 달리고, 앞서 나가고 우승하는 것만이 목표가 사실은 될 수가 없기 때문이리라. 한 번 우승했다고 영원한 인생의 우승자는 아니며, 항상 우승을 도맡아 할 수는 적어도 인간이라면 수긍하기 어려운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보다는 완주를 권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왜냐하면 완주는 삶의 숙명지자 의무인 것으로 결승선은 곧 이 세상과 이별을 하는 것을 의미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대개 앞서서 빨리 달리는 사람은 뒤쫓아 오는 주자를 늘 의식해야 하기 때문에 달리는 노정 곳곳에 펼쳐질-대개 마라톤 코스는 비경(秘境)이 많다-아름다운 정경이나 풍광을 감상할 틈이 없게 된다. 오로지 달리는 일, 달리고 또 달리는 일 외에는 아무 것도 없는데, 우승이라는 명예 외에는 실속이 없다고 생각한다. 사람은 태어나서 누구든 한 번은 죽게 되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완주를 피할 수 없는, 선택은 애초 불가능한 필수이자, 운명이기도 한데, 조금 늦으면 어떤가. 달리면서 혹은 외따로 뒤쳐져도 좋으리라, 시야에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진 곳에서는 속도를 늦추어 지는 해를 어렴풋하게 감상하기도 하고, 시원한 그늘이 아름드리 큰 나무 아래 펼쳐져 있을 때 가슴을 적셔주는 샘물을 마시며 땀을 식히기도 하고, 가다가 마음 맞는 사람을 만나면 같이 달려가는 동일한 입장에서 마음을 열어젖히고 대화도 나누는 것이 인생의 참맛이 아닐까.
그래서 주저앉는 것은 허용되지 않는 것이 인생의 참 의미이고, 모두는 실제로 한 방향으로 같이 가고 있는 셈인데, 조금의 여유를 가진다면 아웅다웅 인간의 기본 정서인 오욕칠정을 슬기롭게 다스리며 그 완급을 조절할 수 있지 않을까. 철학이든 종교든 예술이든 문학이든 이런 단순하고 보편적인 진리, 진리라기보다는 상식에 가까운 사실을 깨닫게 함으로서 한 번 살아가는 인생을 제발, 편애없이 편견없이 제대로 보기를 간곡히, 같은 길을 달려가는 동일한 입장에서 권하는 것이다.
그 길에서는 참 다양한 사람과 다채로운 정경과 이채로운 사건, 상황을 만나게 된다. 그러나 사소한 어떤 것도 무시할 사람은 없으며, 없어야 하며 대신 따스한 마음 한 조각 갖게 되기를, 품게 되기를 알만한 사람은 권유해 보는 것인데, 그러나 자칫 길에 막히다보면 엉뚱한 오해와 불필요한 몰입으로 길을 쉽게 잃게 되는 곳도 바로 이 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