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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억 - 사색의 또 다른 힘 혹은 이름

작성자정병철|작성시간04.02.29|조회수6 목록 댓글 0

 기억 - 사색의 또 다른 힘 혹은 이름

 

 

 

 

 나의 기억은 좁은 골목에 허물어진 담장이 보이고 아이 셋이 조그만 세 발 자전거로 어른 머리만한 큰 돌을 옮기는 놀이에서 대개 시작된다. 반쯤 허물어진 담장 위로 올라가 있던 여자애가 조심성 없이 돌을 밑으로 내리고, 난 아마 그 돌에 머리를 찧었을 것이다. 어머니는 그 때쯤, 동네의 너른 공터로 할머니가 이끄는 연탄 리어카를 뒤에서 열심히 밀고 계셨고, 어린 난 피를 흘리며 그 쪽으로 달려간다. 어머니 놀라신다. 얼른 나를 데리고 집으로 가고, 조금 후 내 머리에는 된장이 발라져 있다. 정확하지는 않을 지도 모르겠는데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었던 초기에 혹시나 싶어 머릿속에 재삼 각인시켜 놓았던 것이다. 기억이란 것의 속성은 잘 잊어버린다는 것이다. 그런 속성이라는 것이 쉽게 자신을 망각시키는 수도 있다는 것에 이를 때에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한 아찔한 느낌마저 들게 한다.
 살다보면 내가 누구인가 라는 철학적, 근원적인 질문에 한 번쯤 부딪치는 스스로를, 그리고 곧 당황하는 자신을 발견하고는 아연실색해 한다. 그 질문에 가장 쉽고 편안하게 접근하는 것은 바로 기억이다. 그런데 이 기억이라는 것도 급할 때 찾는 애인처럼 한 두번 가볍게 떠올리고는 아무렇게나 생각이라는 창고 속에 방치한다면 곧 무게가 가벼워지면서 뇌리에서 금방 사라지고 만다. 즉 잊혀지는 것이다. 긴가민가 나중에 필요에 의해서 희미하게 떠올려 보지만 그때는 정확성의 신뢰도가 급격하게 추락한 나머지 고개를 좌우로 절레절레 흔들고 만다.
 기억은 가끔 생활에 지친 사람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제공한다. 과민하게 적응해야 생존하게끔 되어 있는 삶의 원칙들 속에서 흘러간 과거의 기억들로의 편린은 잠시 우리를 향수에 젖게 하며 눈앞의 시름을 잊게 해준다.
 또 다시 어린 시절 가난한 동네의 골목이다. 여름의 더위 속에서 시커먼 응달이 골목을 가득 채우고 있는데 잠시 무더운 더위를 삭히지만 어둠이 주는 야릇함은 살짝 겁을 먹게도 하고, 안방에 몰래 들어가 동전, 꽤 쓸만한 백원짜리 동전이 가득 들어있는 복주머니 저금통을 흔들어 돈을 꺼내어 써 볼까라는 충동도 들게 한다. 늘 보이던 애들은 그 날 따라 통 보이지 않았다. 쪼그려 앉아 있었는가는 잘 기억이 나지 않지만 한참동안 그러고 있었다. 이 기억은 잘 지치는 마음이 곧잘 이끌어 내는 기억 중 하나다.
 기억은 어쩌면 인간이 떠올리기 가장 싫어하고 두려워하는 죽음의 세계와 벽 하나를 두고 맞닿아 있는 지도 모른다. 열심히 산다는 자부하는 사람일수록 가장 죽음을 지척에 두고 있으되, 당사자는 까맣게 잊고 있을 것이라는 설정은 문학 소설 속에서 그렇게 흥미 없어 하는 테마거나 도저히 상정하기 어려운 불합리한 설정은 아닐 것이다.
 갑자기 어느 날 소리 없이 찾아드는 권태나 죽음과 공포는 모든 인간들에게 가장 공통된 위험인자로 그 수위가 저마다 조금씩 다를 뿐, 결코 벗어나 있을 수만은 없는데, 남달리 뛰어나지 못하거나 불가항력적인 상황에서 본능처럼 떠오르는 저 편 언덕 위의 새까만 기억, 곧 그것은 자연의 본능이라는 법칙에서 저주스럽게 떨어져 나간 유일한 종, 인간이 스스로에게 위안을 주며 살아가게끔 만드는 유일하고도 가장 큰 희망인자였다.
 우리가 서로 이웃간에 혹은 생판 모르는 사람임에도 지나가면서 말을 걸거나 친하게 지내려고 치근덕거리는 모든 행위들은 기억의 소중함을 인생의 어느 후미진 골목에서 처절하게 느낀 사람들만이 그 기억의 힘을 빌려 더 살아내고자 하는 애틋한 제스처이고 몸부림이다. 기억은 생명의 끈인 것이다. 글은 그런 기억을 아름다운 동화상처럼 표현해 내어 영구히 자신의 소중한 자산으로 삼길 주저하지 말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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