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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해방구 - 글쓰기와 상상

작성자정병철|작성시간04.03.02|조회수16 목록 댓글 0

 삶의 해방구 - 글쓰기와 상상

 

 

 

 

 살아가는 일은 때로 자신도 모르게 무언가에 급하게 쫓기는 것이다. 그것이 무엇이라고 딱히 꼬집어서 말하기보다는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서 그 모색안을 찾는다. 모든 일상과 삶의 요소들은 보이든 보이지 않던 팽팽하게 조여진 그물망과 같아서 때로 편안한 안식을 허락하기도 하지만 더 오랜 시간 숨을 답답하게 가로막는 늪과 같이 불편한 것도, 위험하기 짝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꿈이 없는 세대는 쉽게 지치게 된다. 허락되지 않는 욕망, 불순한 생각들, 삶을 짜증나게 하는 불안들을 쉴새없이 몰아세우는 속도감으로 그 공백을 메우려 든다. 길거리에 생활 필수품으로 등장했던 차들은 그 기능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고 나자 그 숨겨 놓았던 마각을 드러낸다. 자동차의 악세레이더를 힘껏 밟아버림으로서 우리를 불안하게 인식시키려 드는 감각을 마비시킨다. 순간순간 어렵게 충족된 욕망은 점차 더 큰 충족을 요구하게 되고 결국에는 브레이크를 뽑아 버림으로서 현실에 설 자리를 어느 순간 놓치고 만다.
 현실이라는 굳건한 대지 위에 뿌리를 내리지 못한 사람의 결말은 항상 불행한 죽음으로서 그 막을 내렸다. 끔찍한 삶의 그물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인간의 근원적 욕구와 살고자 어떤 방법도 가리지 않는 불합리하고 부조리한 삶의 조건에서 자신을 지켜내고 떳떳한 삶을 쟁취하는 방법은 과연 없는가.
 그것은 자기 기만으로서만 가능한 사실임을 오랜 시간 인생이라는 역경을 통과한 사람만이 터득하는 아이러니다. 감각을 통한 몰입, 정신의 함몰, 무의미함에 대한 도취, 결국 그것은 문학과 예술이라는 이름하에 허용되는 정신의 착란이었다. 자신의 끔찍한 몰골을 들여다본 사람은 끝내 본래적 이기주의에 의해 자신을 부정해야 한다. 받아들일 수 없으며 거꾸로 자신의 정신의 집을 아무렇게나 헤집어서 영혼이 찾아들지 못하게 한다. 결코 맨 정신으로는 이 세계를 받아들일 수 없으며, 모든 싸움이 치열하게 끝나고 살아남은 영웅은 어느 따스한 봄볕이 양지바른 마당에 쏟아질 때 갑자기 미쳐서 자살하고 만다. 이것은 현대판 오디세우스의 비극적 결말로 예정된 연주의 한 부분이 아니라, 인간의 삶에 제시된 보편적인 조건에 불과할 뿐으로, 영웅이 없는 평등한 사회 속에서 대부분의 인간은 미친 연기를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실제 미쳐버리거나 그리하여 문명이 나날이 고속으로 발전해가는 터전의 한 구석에 초라하게 지어진 채 금방이라도 귀신이 나올 것 같은 음침한 방에 갇힌 채 평생을 살아야 하며, 기껏해야 어린애 같은 핏기없는 헬쓱한 얼굴로 미소를 지어보이는 것이 전부가 되고 말 것이다.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모든 인간에게 적용된다.
 잠을 잘 것인가, 아니면 계속 걸을 것인가. 죽어서 편안히 묻힐 안식처는 진실로 이 땅 어디에도 없다. 잠을 자다가 일어나지 못하면 그곳이 바로 무덤이 된다는 사실, 조금의 근기라도 있는 자는 눈앞에 펼쳐진 길을 계속 걸어야만 한다. 움직임이 멈추면 맹수들의 표적이 되고 만다. 죽는 것보다는 좀 낫겠지. '차라리 죽음을' 이라는 말도 꺼낼 기회를 삶은 어느 순간부터 용인하지 않았다. 미치거나 깊은 잠을 택하거나 밤을 새워서라도 잠시 휴식을 허락하는 곳을 찾아 걸어야 한다. 걸으면서 우리는 이제 생각을 하고, 상상을 한다. 그건 지금보다 나은 조건을 찾는 모색이고 연구이며 성찰이다. 반성이고 후회며 계속 걷기 위해서는 곧 잊어야 하는 독소다. 이젠 글을 쓸 차례다. 생각과 반성과 후회의 찌꺼기들은 손톱 밑에 새까맣게 끼인 때처럼 좀처럼 빠져나가지 않고 눈만 돌리면 기분 상하게 보이는 곳에서 끊임없이 우리를 좀먹는다. 글을 써야 한다. 그런 생각을 글이라는 쏘시개로 깨끗이 닦아내어 아무도 모르게 버려야 한다. 저 저주같은 책속으로 다시 던져넣어야 한다. 글쓰기는 그래서 달콤한 비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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