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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쯤 읽어보는 부산 지명의 유래

작성자(주)대한환경ENG|작성시간08.07.06|조회수942 목록 댓글 0

 

무심코 지하철을 타다 지나치는 지역명의 유래가 궁금해지는 순간이 있습니다.

오래전부터 구전되어 왔을 한자어의 의미가 궁금하기도 하고 습관적으로 부르던 동네의 명칭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약간 조사해보았습니다.

 

먼저 부산의 유래를 살펴보면...

 

 

부산이란 이름이 언제부터 사용되었는지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부산(富山)이란 명칭이 기록에 처음 보인 것은 고려 공민왕 17년(1368)에 강구사(講究使) 이하생(李夏生)을 대마도에 보낼 때 백미 천석(千石)을 부산포에서 반출하였다는 기록에서 보인다. 또『세종실록지리지』에는 "東萊富山浦"라 하였고, 신숙주의『해동제국기』에도 "東萊之富山浦"라 하였으며, 또 같은 책「三浦倭館圖」에도 "동래현부산포(東萊縣富山浦)"라고 기록해 놓고 있다. 이때의 부산포는 '富'자를 사용하고 있다.


1481년(성종 12)에 편찬되고 그후 여러번 증보된『동국여지승람(1481)』산천조에 보면, "부산은 동평현(오늘날 당감동 근처)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같이 이름하였는데 그 밑이 곧 부산포이다. 항거왜호가 있는데 북쪽 현에서 거리가 21리이다."라고 하여 산 모양이 가마꼴과 같아 부산(釜山)이라고 하였다는 부산이라는 이름이 나오고, 그후 이를 그대로 인용하여 부산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즉,『동래부지(1740)』산천조에도 "부산은 동평현에 있으며 산이 가마꼴과 같으므로 이 같이 이름하였는데 밑에 부산·개운포 양진이 있고 옛날 항거왜호(恒居倭戶)가 있었다"라고 하였고, 『동래부읍지(1832)』에도 같은 내용으로 나오고 있다. 이 같은 사실로 미루어 보아 『동국여지승람』편찬 이전에는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불리어 오다가 1442년(세종 25년) 계해약조가 체결되고 삼포왜관(부산포·제포·염포)이 설치된 후 그 어느 시기에 부산이라는 이름으로 바뀐 것으로 보인다. 이 가마꼴과 같이 생겼다는 산은 과연 어느 산을 말하는 것일까?


지금으로부터 357년 전인 1643년(인조 21년)에 통신사 종사관으로 일본에 건너간 신유의 『해사록』에 실려 있는「등부산시(登釜山詩)」에 "산 모양이 되도록 하여 가마와 같고 성문이 해수에 임하여 열려"라고 한 구절이 나온다. 이때 부산진성은 오늘날 동구 좌천동 북쪽의 증산을 둘러싸고 있는 정공단 자리에 성문이 있어 성문 바로 아래가 바다와 접해 있었으므로 이 시문에 나오는 산은 증산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또 18세기 중엽에 우리나라 사람이 그린「부산왜관도」를 보면 이 증산을 점초(点抄)하여「부산고기(釜山古基)」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외에도 동구 수정동으로부터 산을 넘어 가야동으로 통하는 고개를「가모령」이라하고 「부산호장소(釜山戶長所)」의 문서에는 "시령(枾嶺)"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이 가모(可牟)·감〔枾〕은 가마를 즉 「가마[釜]」를 뜻하는 것으로 가모령·감(枾, 嶺)은 우리 나라의 방언을 한자로 차용한 것으로 가마재·가마고개〔釜峙〕 즉 부산재(고개)를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古老들은 증산을 시루산이라고도 하는데 시루〔甑〕와 가마〔釜〕는 같은 취기(炊器)로 금속성의 가마가 나오기 전에는 동일한 구실을 하였던 것이다. 이상의 모든 사실들을 종합하여 볼 때 "산이 가마꼴〔釜形〕과 같다"라고 한 가마꼴의 산은 옛날부터 좌천동 뒤에 있는 증산(甑山)을 말하는 것으로 보인다.

 

 

음, 그렇군요... 그렇다면 제가 사는 동래구의 여러 동명의 유래에 관해서도 찾아보았습니다.

 

 

◎ 동래구


<낙민동>

낙민동(樂民洞)은 옛 동래구의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평남(平南)·안민(安民)· 장남(壯南)·안국(安國)·서호(西豪)동을 합하여 수안동이, 신락(新樂)· 회룡(回龍)을 합하여 낙민동이라 불렀다. 낙민동의 명칭에 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낙민동은 조선시대 남문동변동(南門東邊洞)이라 부르던 지역이다. 이곳은 동래부 수령이 민정을 살피러 나가는 지역인데, 수령이 백성을 즐겁게 해준다는 뜻에서 낙민동 이라는 명칭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지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지대로 미나리꽝이거나 연밭(蓮田)이었으며, 그 이후 매축되어 집단아파트가 조성되어 주택가로 변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낙민동은 법정동으로서 1957년 1월 수안동과 낙민동을 합하여 행정동인 수민동이 탄생하였다.


<명장동>

명장동(鳴藏洞)이라는 명칭은『동래부지(1740)』에 동래부 동면 명장리(鳴壯里)로 표기되었다가 조선후기에는 동상면 명장리(鳴藏里)로 되었다. 1957년 이전까지만 해도 미나리꽝과 야산으로 이루어진 시골의 어느 한적한 마을에 불과하였던 변두리였으나, 1975년 안락북지구 구획정리사업 이후 도시형태를 갖추게 되었다.

명장동의 유래에 대해 살펴볼 수 있는 자료는 없고 다만 인근의 염창리(廉倉里)와 같이 명편(鳴鞭)을 간수했던 곳에서 붙여진 이름이라는 설이 있다. 명편은 옛날 의장(儀仗) 때 쓰는 기구의 하나로 이를 흔들어 소리를 내어서 사람들로 하여금 정숙하게 하는 물건으로 일명 정편(靜鞭)이라고도 한다. 동래부사는 동래 독진을 지휘하여 동래뿐만 아니라 인근의 양산·기장의 군사까지 지휘하였는데, 이때 사용하던 명편을 이곳에 간수케 하였다 하여 명장(鳴藏)이라 전한다. 명장동은 1910년 동래부 동래읍에 속했다가, 1959년 부산시 동래구 명장동이라 부르게 되었다. 1980년에 들어서기 시작한 아파트와 학교의 설립으로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1990년 1월 명장1,2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명륜동>

명륜동(明倫洞)은『동래부지(1740)』의 방리조에 보면, 신향교동(新鄕校洞)이라 하였다. 조선시대는 고을마다 향교가 있어 그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校洞) 또는 교리(校里)라 하는 경우가 많았다. 동래도 조선초기 향교가 있는 마을을 교동이라 했는데 향교가 여러차례 자리를 옮겨앉게 되자 구교동, 신교동이란 이름이 생겨나게 되었다. 한편, 이 일대는 옛부터 대낫들이라 불렀는데, 이는 옛 명륜동에서 온천장으로 가는 길이다.

옛날에 동래부사가 부임해 올 때나 전임되어 갈 때에 이곳에서 이속, 군졸과 육방관속들이 환송 및 환영식을 거행하였는데, 기지창검의 늠름한 행렬이 자못 장엄하여 '큰 나들이'라 한 것에서 '큰' 이 '대'로 바뀌어 '대낫들이'로 불린 명칭이다. 이를 일명 개복장이라고도 했다고 한다. 지금의 명륜동은 신향교동이라 하다가 1906년 교동이 되었다. 그 교동이 구교동과 엇갈려 향교의 중심인 명륜당을 따서 1942년 명륜동이라 이름을 고쳤다. 1978년8월 명륜1,2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복천동>

복천동(福泉洞)의 유래는『동래부지』성곽조에 의하면, 동래읍성 안에는 우물이 6개가 된다고 하였고, 각면각리원근정도(各面各里遠近程道)조에는 읍내면에 옥미정동(玉未井洞)·대정동(大井洞)·야정동(野井洞) 등의 우물과 관련된 이름이 있다. 이로 보아 복천동을 동래성안의 우물에 비유하는 뜻에서 파생되었다고 볼 수 있다. 전근대사회의 우물은 양반댁에서나 볼 수 있으므로 우물이 있다는 것은 복이 넘치는 샘이라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러한 뜻에서 옥샘(玉井)은 물의 맛이 좋기로 소문난 우물이었으므로 복천동은 이러한 것에서 붙여져 전해 내려왔을 것이다.

특히 복천동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고분은 삼국시대 때 이 지역의 수장급 무덤으로 그 문화의 번성을 엿볼 수 있는 곳으로 옛부터 생활근거지였음을 알 수 있다. 법정동인 복천동과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하여 행정동인 복산동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수행하고 있다.


<수안동>

수안동(壽安洞)은 옛 동래구의 읍내면 지역인데, 1914년 평남(平南)·안민(安民)· 장남(壯南)·안국(安國)·서호(西豪)동을 합하여 수안동이 되고, 신락(新樂)· 회룡(回龍)을 합하여 낙민동이라 불렀다. 이 지역은 옛부터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있었던 곳으로 사실상 동래의 중심지이다. 수안동의 명칭에 대한 유래는 문헌상으로 알려져 있지 않고 다만 구전으로 전해져 내려오고 있다. 수안동은 동래 토박이들에 의해 수안(首安)·수안(水安)으로 쓰여지고 있다. 수안동을 수안(首安) 이라고 한 것은 동래부의 수장이던 동래부사가 집무하던 동헌이 이곳에 자리잡고 있어 가장 으뜸되는 관아안이라는 뜻에서 불리어지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 수안(水安)동으로 불렀다는 설도 있는데, 그것은 지금도 그렇지만 당시는 땅밑을 조금만 파내려가면 물이 나오는 등 물이 흔해 칭해진 이름인 것으로 풀이된다. 또한 이곳에 동래읍성의 수문이 있었고 수문안의 동네라고 풀이하는 사람도 있다. 이 지역은 1960년대만 하더라도 농사를 지을 수 없는 늪지대인 미나리꽝이었으나 지금은 매축되어 주택가로 변하였고, 동래지역 행정관서가 밀집되어 있다. 법정동인 수안동과 낙민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병합되어 행정동인 수민동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사직동>

사직동(社稷洞)에는 17세기부터 동래부의 사직단이 있었던 곳이다. 사직의 사(社)는 토신이고, 직(稷)은 곡물을 다스리는 신으로 임금을 비롯한 지방 수령이 토지의 신과 곡식의 신에 제사를 올려 나라와 지방의 풍요와 안녕을 빌었다. 조선시대에는 서면 여고리·석사리의 2개의 자연마을로 형성되어 있었는데, 일제시대 석사리(石寺里)라는 이름은 석사(石社)로 바뀌었다.

1916년 이곳에 있는 사직단의 이름을 따서 사직동으로 불리었으며, 갯밭(현 신정시장 일대), 딧밭(현 동래정보여자고등학교 부근으로 논과 밭이 있어 농사를 짓던 옛 마을의 이름) 등 신촌·칠층대 등의 자연마을도 있었다. 이 사직단은 일제 강점시대 일제가 민족혼을 일깨운다 하여 일체의 제사를 금했다. 1960년대 이전에는 논밭과 미나리꽝이었던 것이 1967년 구획정리사업으로 아파트가 들어섬에 따라 1979년 시 조례에 의해 분동되고, 같은해 8월 사직3동이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안락동>

안락동(安樂洞)은『동래부지(1740)』방리조에 보면, 동래부 읍내면 동부에 속했던 효현리(狐峴里)·충렬사리(忠烈祠里)·안락리(安樂里)·염창리(廉倉里)·

구향교동(舊鄕校洞) 등을 포함하는 민가가 밀집한 지역이었다. 조선후기에 들어 염창(廉倉)은 염창(鹽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 염창은 현 충렬사와 동래고등학교 사이에 있었던 조그만 마을로, 옛 수영이나 명장지역은 염전이 있어서 여기서 나는 소금을 보관한 창고가 많아서 불렀다. 충렬사리와 안락리는 서원마을로 바뀌어 호현(狐峴)·화현(華峴) 등의 4개 마을을 합하여 원리(院里)라 하였다.

원리란 서원이 있는 마을이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부산지방을 지키다 순절한 송상현 부사, 정발 장군 등을 모신 안락서원(安樂書院)이 이 마을의 중심에 위치해 있었기 때문이다. 서원(書院)이란 선현에 제사드리는 사당과 선현의 뜻을 이어받아 가리키는 서재가의 기능을 합한 곳이다. 충렬사는 본래 사당만이 지어져 사액을 받은 것인데 뒤에 송상현 공, 정발장군 등 학덕을 본 받을 만하다 하여 강당인 소줄당(昭줄堂)과 동·서재(東·西齋)를 지음으로 서원으로 발전하였다. 즉 충렬사란 사당에 학교기능을 가진 소줄당이 더해짐으로서 서원이되자 마을 이름도 원리로 바뀌었다. 1942년 서원의 명칭인 안락을 따서 안락정(安樂町)이 되었다가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칭으로 안락동이 되었다. 1982년 인구의 급격한 증가에 따라 안락1,2동으로 분동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온천동>

온천동(溫泉洞)의 유래가 된 동래온천장에서 온천이 자연용출 한 시기는 신라시대부터로 본다. 그러나 산저리(속칭 차밭골)와 장전리 일부를 합하여 행정구역상의 온천동(溫泉洞)으로 독립시킨 것은 1910년 일제강점 이후가 된다. 그 이전은 금산마을(또는 금정마을)과 온정리 등 자연마을의 이름으로 불려졌다.

온정원(溫井院)이라 하여 공용으로 여행하는 관원을 위한 공영의 여관이 있었을 뿐 집단적인 취락은 형성되지 않았다. 지금은 온천이 나면 위락시설을 갖추어 손님을 받아 돈을 벌어들일 궁리를 할 테지만 그때로서는 고관대작과 병자들이 오가서 민폐만 생길 뿐이었다.

그래서 조선 말기에는 지금의 온천동 일부가 서면의 산저리에 속하고 일부는 북면의 장전리에 속했다. 조선시대 동래부에서 온천시설을 갖춘 바도 있었지만 대중성이나 영리성을 띄지 못했다. 동래온천이 본격적으로 개발된 것은 일제강점 이후 일본인들이 밀려들어 영리를 목적으로 한 위락시설을 갖추고부터다. 1942년 부산부 동래출장소 설치로 온정리라 하고, 1947년 일제식 동명 개정 때 미남·산저정의 두 마을을 합하여 온천2동으로 개정하였다. 1979년 온천2동을 온천2,3동으로 분동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칠산동>

칠산동(漆山洞)은 삼국시대 동래지역에 거칠산국(居漆山國)이 존재하여 있었는데, 이를 신라가 병합하여 거칠산군(居漆山郡)이라 하였다가 통일신라 이후 경덕왕 때 행정구역 개편에 따라 동래군(東萊郡)으로 바뀌었다. 거칠산은 '거칠다'의 우리말에서 유래한 것으로 '거침 뫼' 즉 황령산(荒嶺山)을 지칭하는 것으로 풀이되어진다. 삼한시대 소국의 치소(治所)가 동래지역으로 옮겨질 때 주산(主山)의 이름을 칠산(漆山)이라 불렀을 것이다. 이러한 내력과 지금의 동래읍성의 뒷산을 칠산이라 부른데서 연유한 것으로 그 이름이 유래된 것으로 보인다.

이곳은 복천동고분군으로 널리 알려져 삼한시대의 가야문화가 발생하였던 곳임을 알 수 있다. 칠산동은 1957년 시 조례에 의해 법정동인 복천동과 합하여 하나의 행정동인 복산동(福山洞)으로 개칭하여 모든 행정업무를 담당하고 있다.


 

 

무심코 지나치는 동네의 이름들이 오래전부터 나름의 기원과 의미를 가지고 지금까지 유래된다는 사실에

약간의 경이로움이 교차되었습니다. 

한번쯤은 이렇듯 별 대수롭게 보이지 않은 우리 주변의 일상들과 그 유래에 관해서도 관심을 기울일줄 아는

여유가 필요하다고 생각해보는 오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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