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주 여행16 - 양저우에서 수서호공원 만화원을 가로지르며 꽃구경을 하다.
10월 26일 양저우 扬州(양주) 에 도착해 거위안 정원 을 보고 수서호 공원 (瘦西湖公园) 에
입장해서는 아치형 석조 교각 위에 5개의 정자 가 서있는 五亭桥 (오정교) 를 구경합니다.
오정교 는 나중에 다시 볼것이니 먼발치로 바라만 보고 연화교(蓮花橋) 를
거쳐 라마교 사원 에서 바이타(白塔 백탑) 을 구경하고는.... 청나라
건륭제가 모친 생신 을 치렀다는 희춘대(熙春臺) 를 거쳐 24교 에 도착합니다.
수양제가 지은 아치형 다리 는 24개의 기둥 이 있으니 24절기 를 상징 한다는데
아치형 예쁜 다리 二十四橋(이십사교) 를 걸어 운하 를 건너 가니......
望春樓(망춘루) 인데 일대는 북대문 까지 이어지는 "만화원(萬花園)" 이라 합니다.
"만화원(萬花園)" 은 송나라 제치사 조쿠이가 촉강에 지은 것으로 예로부터 문인, 묵객
들이 즐기던 곳이라고 하는데 그럼 望春樓(망춘루) 는 봄을 기다리는 정자 일러나?
양저우 扬州(양주) 를 두고 “곳곳마다 한 폭의 아름다운 그림” 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양저우는 한폭의 그림" 이라는 말은 바로 이곳 수서호 만화원(萬花園) 에서
나왔다고 하는데..... 온갖 꽃이 핀다는 만화원 망춘루 에서 오른쪽으로
운하 를 끼고 걸으니 강 건너편에는 " 五亭桥 (오정교)" 다리가 바라다 보입니다.
다시 왼쪽으로 발길을 돌려 북쪽으로 올라가니 여긴 전체가 꽃밭
이고 정원 인데...... 벤치 가 있어 잠시 앉아 휴식을 취합니다.
만화원(萬花園) 은 꽃동산 이라지만 우리 부부가 방문한 오늘은 10월 26일로
늦가을 이니 꽃이 별로 없기로 이곳은 봄철 에 와야 한다는 생각 이 드네요?
봄철 이라면 한 폭의 그림 같은 만화원의 아름다운 풍경 에 취한다는데 계절을 잘못 골라
왔기로 아쉬운 마음에....... 조선윤 님의 “배롱나무 꽃에서” 란 시를 떠올려 봅니다.
“뜨거운 뙤약볕 이글거리는 태양 아래 꽃봉오리 터지던 날
진분홍 주름치마 나풀거리며 살랑이는 바람결에
살포시 미끈한 속살 내비치는 한여름의 청순한 화신이여!
제 안에 소리없이 시들어가는걸 알면서도
온몸 다해 다시 피워내어 폭죽처럼 터져 선혈처럼 낭자하다.
반들반들 수피에 붉는 간질나무여 화려한 꽃그늘 밟으며
꽃폭죽 맞으며 여름 가고 꽃카펫 밟으며 가을 온다."
꽃동산 을 걸어 白塔晴云(백탑청운) 을 지나니 왼쪽에 기와 건물이 보이는데
수많은 사람들 이 무슨 회의를 마쳤는지........ 쏟아져 나오는걸 봅니다.
화장실 도 갈겸 안으로 들어가니 여긴 万花园餐飮服务中心(만화원찬음복무중심)
으로 Catering Service Center of All-Flower Garden 이라....
그럼 출장연회 서비스 라는 뜻이니 방금 여기서 무슨 행사 를 치르고
점심 까지 먹었나 본데...... 건물은 정원 까지 달린게 참 화려합니다.
여기 기와 건물에 딸린 정원 은 그리 크지는 않지만 홍예교 다리 도 있고....
연못 에 낙차가 져서 물이 흐르고 잉어등 물고기도 있어 구경할만 합니다.
그러고는 나무와 꽃들이 심어져 있는 동산 을 구경하는데 낯익은 꽃나무
가 보이길래 다가갔더니.... 아니나 다를까 "木槿花(목근화)" 이네요?
"木槿花(목근화)" 는 7월부터 10월까지 꽃이 백일동안이나 오래토록 핀다고 해서 무궁화 로
불리는데 우리나라에서 보다 일본 가정집에서 더 자주 보았으니, 오늘 중국 에서도 봅니다?
“산해경 山海經” 은 기원전 8∼3세기 춘추전국 시대에 저술된 지리서(地理書) 라고
전해 내려오는 책으로....... 동진(東晉) 때 곽박 이 종합, 정리 했다고 합니다.
이 산해경 책에 “군자의 나라에 훈화초 가 있는데, 아침에 피었다가 저녁에 진다
(君子之國 有薰花草朝生暮死).” 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만약에
군자국이 우리 나라 를 가리키는 것이라면 저 훈화초는 무궁화 의 옛 이름 입니다.
897년 발해가 당나라에 장(狀) 을 올리자 신라 효공왕 이 최치원(崔致遠) 에게 작성시켜서 당나라에
보낸 국서(國書) 가운데.... “근화향(槿花鄕: 무궁화의 나라 신라) 은 겸양하고 자중 하지만
호시국(楛矢國 발해) 은 강폭함이 날로 더해간다.” 고 한 것이 있으니 발해를 일러바치는 내용입니다.
국서는 서두에서 발해는 앙갈(鞅鞨) 족속 으로 고구려 유민을 따라 강제로 내지(內地)로 옮겨졌는데 수령
걸사우(乞四羽) ⋅ 대조영(大祚榮) 은 영주(營州)에서 반란이 일어나자 도주해 황구(荒丘)를 점거하고
진국(振國) 이라 칭했습니다. 고구려 유신(遺燼)과 물길(勿吉) 잡류(雜流) 가 있었는데, 백산(白山)에서
악명을 떨치며 강도짓 을 하는가 하면 흑수(黑水) 에서 사납게 굴다가 중국에 항복하는 깃발 을 들었습니다.
발해 하정사(賀正使) 왕자 대봉예(大封裔) 가 발해를 신라보다 더 높이 대우해 달라는 장계에 반발해 보낸
국서에서 근화향(槿花鄕) 을 자칭한 것인데, 이 보다 160년전인 “구당서 舊唐書” 신라전(新羅傳) 737년
기사에도 “신라가 보낸 국서에 그 나라를 일컬어 근화향, 곧 무궁화의 나라 라고 하였다.”고 한게 있습니다.
이러한 기록들은 오래전인 신라 시대 에 이미 우리 나라를 근화향(槿花鄕)
곧 "무궁화의 나라" 라고 불렀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습니다.
조선 세종 때 강희안(姜希顔) 이 저술한 한국 최고의 화목
에 관한 책 인 “양화소록 養花小錄” 을 보면.....
“우리 나라에는 단군(檀君) 이 개국 할 때 무궁화(木槿花) 가 비로소 나왔기 때문에......
중국에서 우리 나라를 일컫되 ”무궁화의 나라(槿域)“ 라 말하였다는 기록이 있습니다.
일본의 “왜기 倭記” 에는 “무궁화는 조선의 대표적 꽃 으로서.... 운운" 에 보면......
무려 2,100여년 전 지나(支那 중국) 에서도 인정된 문헌이 있으니 아래와 같습니다.
왜기에는 "고려시대에는 전국민으로부터 열광적 사랑 을 받았으며 문학적· 의학적으로
진중한 대우 를 받았으니 일본의 벚꽃, 영국의 장미 와 같이 국화 로 되어 있다."
"하지만 조선조 에 들어와 왕실화 가 "배꽃(梨花 이화)" 으로 정해지니...
무궁화 는 점차로 세력을 잃고 조선 민족으로 부터 소원해 졌다."
"20세기에 서구문명이 조선에 들어옴에 민족사상의 고취 와 국민정신의 통일진작에 노력 하여
무궁화강산 운운은 자존된 조선의 별칭 인데…”라고 “왜기 倭記” 는 적고 있습니다.
“왜기 倭記” 의 조선 무궁화에 대한 서술이 너무 길고 소상 해서 많이 줄인 것인데
일본인들이 외국인 조선의 꽃 무궁화 에 대해서....... 이토록 자세한
기록을 남긴 것은 저들 일본인 "국민성이 그만큼 세심하고 치밀" 하기 때문이라?
"백제 동성왕과 무령왕" 은 모두 일본에서 태어나 성장 하다가.... 백제의 왕이 시해 되니 왜병을 거느리고
귀국해 백제 왕위 에 올랐는데 두 사람의 아버지는 "곤지왕자" 이니, 고구려 장수왕의 침입이 우려되던
461년 개로왕은 동생(아들?) 곤지에게 아이(훗날 무령왕)를 밴 후궁을 딸려 왜국에 보내 후일을 도모합니다.
백제는 서울 위례성이 함락되고 웅진으로 천도후 해씨인 해구 세력과 경쟁하던 진씨 세력들이 479년
삼근왕을 살해 하고는 "일본에서 태어나 살던 곤지의 아들 모대" 를 세우니 바로 동성왕 인데....
형인 무령왕 이 오래전에 귀국해 백제에 있었는데도 마다하고 궂이 멀리 왜국까지 사람을 보냈네요?
일본에서 태어나 살던 모대 는 왜국 왕의 배려 로 쓰쿠시(후쿠오카) 에서 500명의
왜병 을 거느리고 바다를 건너 백제로 나와 동성왕 이 되었는데..... 501년에
신하에게 또 시해당하자 왜국에서 태어났던 형이 왕위 를 이으니 바로 무령왕 입니다.
왜 진씨 들은 형이 아닌 그것도 왜국에서 태어나 왜국에서 사는 동생을 왕 으로
세웠는가? 조선말에 조대비와 대원군이 18살로 형인 재면 을 마다하고...
그보다 한참 어린 11살짜리 철부지에 불과한 "고종" 을 왕으로 세운 것과 같습니다.
안동 김씨 들이 순조가 죽자 역적의 자식으로 농사꾼인 강화도령을 철종 으로 세우고
1908년에 서태후가 3살짜리 어린애 푸이(부의)를 황제 로 세운 것과 같은
이치니 위정자들은 어린아이를 왕으로 세워야 자기들 마음대로 권력을 독점 할수 있지요!
고려시대 1145년에 김부식 이 쓴 삼국사기 는 "곤지는 개로왕의 아들" 이며 또 "무령왕은
동성왕의 아들" 이라고 적었는데 720년에 편찬된 일본서기 는 "곤지는 개로왕의 동생"
이며 "무령왕은 동성왕의 이복형" 으로 기록했으니 한국과 일본, 어느 사서가 더 정확한가?
1971년 충남 공주시에서 세상을 뒤흔든 발견이 있었으니 무령왕릉 인데 지석에는 글자들이
새겨져 있었으니 “영동대장군 백제 사마왕 (寧東大將軍 百濟 斯麻王)” 이라!!!
무덤 지석 에 보면 무령왕은 462년에 태어나서 40세가 되던 해인 501년에 왕위 에
올랐으며 523년 5월에 62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니 "일본서기의 기록과 일치" 합니다!
백제 성왕 이 신라를 치다가 관산성에서 전사한 내용을 두 역사서에서 비교해 보면...
한국 : 1145년 김부식이 지은 삼국사기의 백제본기 :
가을 7월에 왕은 신라를 습격하고자 보병과 기병 50명을 거느리고 밤에 구천에 이르렀다.
신라의 복병이 일어나자 싸웠으나 복병에게 해침당하여 죽었다. 시호를 성(聖)이라고 하였다
일본 : 720년 도네리친왕이 편찬한 일본서기의 신라본기 진흥왕 15년(554) 조 :
가을 7월 명활성을 수리했다. 백제왕 명농(성왕)이 가량과 함께 관산성(옥천)을 공격해 왔다.
군주 각간 우덕과 이찬 탐지 등이 맞서 싸웠으나 전세가 불리하였다.
신주의 군주 김무력이 군사를 이끌고 나아가 교전함에 비장 삼년산군의 고우도도 라는
사람이 급히 쳐서 백제왕을 죽였다. 이에 모든 군사가 승세를 타고
크게 이겨 좌평 네명과 군사 2만 9천6백명 의 목을 베니 한 마리 말도 돌아가지 못했다.
어째서 일본서기 가 김부식의 삼국사기 보다 내용이 아주 세세하고 정확 한가? 사건이 일어난 해가
554년 이니 일본서기(日本書紀) 는 불과 166년후인 720년의 기록 이지만.... 한국의 삼국사기는
591년 후인 1145년 의 기록 이라 고려시대 김부식 당시에는 예전사료가 이미 없어졌기 때문 입니다.
우리나라는 고대의 역사책 이 단 하나도 전해지지 않는게 너무 아쉽네요? 백제의 서기나 고구려의
유기와 신집, 신라의 국사는 전해지지 않는데... 일본서기는 720년 이지만, 고려 중기인 1145년
에 편찬된 삼국사기가 우리나라 최초의 역사서 라니? 우리나라 역사는 중국 역사서를 보아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