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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신단권보 서문의 按趙氏之先無汪氏四疑一異之辨 관련 의문에 대하여

작성자조 호형|작성시간26.06.17|조회수23 목록 댓글 2

안녕하세요? 양경공파 조호형입니다.

 

개인적으로 오래동안 무슨 의미일지, 어떤 의도였을지 궁금했던 사항에 대하여 최근 나름대로 답을

찾은 것 같아 공유드립니다. 논리적이고 근거에 기반한 건전한 조언 기대합니다.

 

1.배 경

    갑신단권보 서문에 나오는 "按趙氏之先無汪氏四疑一異之辨" 의 의미에 대하여 과거에도 의문을

    가지셨던 종인 분들이 계셨던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해석은 " 살펴보건데 조씨(趙氏)의 선대와 관련하여서 汪氏四疑一異之辨과 같은 것은 없으며" 로

    난해한 것은 없지만 <汪氏四疑一異之辨> 이 무슨 말인지 궁금한 분도 계셨고, 그 중에는 汪氏 즉

    고려王氏를 의미하는 것으로 우리 한양조씨가 고려왕씨라는 주장까지 등장했던 것으로 기억합니다.

 

2.자료 수집 경과

   저도 이와 관련하여 나름대로 자료를 찾던 중 그 동안 어디에도 등장하지 않더니 중국 汪氏 사이트에

   "汪氏家乘序" 라는 제목의 글에서 발견했습니다. 

    명나라의 대학자 이동양(李東陽)이 쓴 왕씨 족보의 서문(〈왕씨가승서 汪氏家乘序〉)에는 왕씨 성씨

    의 유래와 고증을 다루면서 매우 중요한 개념인 육시(六始), 사의(四疑), 일이(一異)를 언급합니다.

 

    그중 ‘사의일이(四疑一異)’는 왕씨 가문의 계보를 고증하는 과정에서 발생한 네 가지 의문점(四疑)과

    한 가지 다른 점(一異)을 학술적으로 분석하고 바로 잡은 내용을 의미합니다.

    < 사의(四疑): 네 가지 의문점 >

 

  •  왕(汪)씨는 고대 부족 국가였던 '왕망(汪芒)씨'에서 유래한 성씨가 아니라는 의문과 분변입니다. 왕씨는 주나라
     시기 노(魯)나라 성공(成公)의 아들 '공자 왕(汪)'의 이름에서 유래한 姬姓(희성) 계열인데, 전혀 계통이 다른
      방풍씨(防風氏)의 후예인 왕망씨와 혼동되던 점을 바로잡았습니다.
  • 왕씨는 '왕야(汪野)'라는 나라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는 분변입니다. '왕야'는 고대 지명(춘추좌씨전에 나오는
    노나라 지명)일 뿐, 왕씨가 어떤 독립된 국가 이름에서 성씨를 딴 것이 아님을 명확히 했습니다.
  • 왕씨의 초기 정착지이자 번성지 중 하나인 '평양(平陽)'은 춘추시대 진(晉)나라의 평양(오늘날의 산서성 일대)
    이 아니라, 노(魯)나라 영토 내에 있던 평양을 의미한다는 분변입니다.
  • 왕씨 족보에 등장하는 '영천(潁川)' 역시 한나라 때 군현으로 유명했던 예주(豫州)의 영천(오늘날의 하남성 일대)
    이 아니라, 노(魯)나라 영토 내에 존재했던 영천을 가리킨다는 고증입니다.

 

     <일이(一異): 한 가지 다른 점제왕비국국지족 (諸汪非國國之族) 또는 구제왕비국국지족 (口諸汪非國國之族)

        이동양은 서문에서 "일이(一異)라는 것은 여러 왕(汪)씨들이 나라마다 모두 왕족이나 제후국의 족속에서 직접 유래한
        평범한 가문들과는 결을 달리한다(혹은 나라 안의 모든 왕씨가 다 같은 계통에서 무조건 직계로 이어졌다고 볼 수 없다)"

        는 점을 지적합니다.

 

3.타 집안 족보 사례 및 아래 "4"에서 언급한 중국의 족보 서문,선례를 참고했다는 증거

  

    연안 이씨(延安 李氏) 족보 서문 및 대동보 발문

    연안 이씨 가문은 조선의 대표적인 문형(대제학)을 많이 배출한 집안입니다. 이들은 족보를 고증할 때 이동양의

    문집인 《회록당집(懷麓堂集)》에 나오는 서문 형식을 자주 참고했습니다.

 

     실제 문맥: "성씨의 원류를 상고함에 있어 억측을 배제하고 사실만을 기록하는 것은 명나라 이동양(李東陽)이

     족보의 서문에서 경계한 바와 같다. 전해지는 의심스러운 부분은 비워두고(闕疑), 명백한 것만 기록하노라."   
     -이동양이 강조한 '의심스러운 것은 억지로 잇지 않는다'는 고증 원칙을 가문의 수보(修譜) 원칙으로 삼았음을

      대외적으로 천명한 것입니다.

 

4. 汪氏四疑一異之辨 을 갑신단권보 서문 등에서 언급한 이유

    1. 문장의 맥락과 의도: "우리 가문은 계보가 명확하다"

         명나라 이동양이 밝힌 왕씨 가문의 고증(사의일이)은 성씨의 발상지가 노나라냐 진나라냐를 두고

         후대에 큰 혼선이 있어 이를 어렵게 바로잡은 내용이었습니다.

         한양 조씨 족보를 발간하면서 이 구절을 인용한 것은 우리 한양 조씨 가문의 순수성과 계보의 명확성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다른 집안(예: 왕씨)은 시조가 어디서 나왔는지, 지명이 어디인지 의견이 분분해 사의일이(四疑一異) 같

         은 복잡한 논쟁을 거쳐야 했지만, 우리 조씨 가문은 선대의 출처와 계보가 의심할 여지 없이 대단히 명백

         하고 깨끗하다"는 점을 강조하기 위해 타 성씨의 고사(典故)를 비교군으로 끌어다 사용한 것입니다.

 

     2. 족보 서문의 전형적인 '비교 문체'

         조선시대 지식인들은 족보 서문(譜序)을 쓸 때 중국의 유명한 문장가(동간 소씨, 족보의 대가였던 구양수,

         명나라의 이동양 등)가 쓴 서문을 교과서처럼 참고했다고 합니다.

         중국 문헌에 나오는 유명한 성씨 논쟁인 ‘왕씨의 사의일이’를 인용하면서 "(按趙氏之先 無汪氏四疑一異

         之辨)"이라고 쓰는 것은, 당대 대문장가들의 글을 깊이 이해하고 있는 찬술자의 학식(문풍)을 드러내는
         동
시에 본 가문의 격을 높이는 전형적인 서술 방식이라고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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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 처>
汪氏四疑一異之辨  표현이 직접적으로 등장하고 논해진 핵심 문헌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1.명나라 이동양(李東陽)의 汪氏家乘序 또는 亭汪氏譜序

    -왕씨 가문의 족보에 대해 서문을 쓰며 '사의(四疑)의 의문을 명쾌하게 풀었다 고 기록한 원형이

     되는 문헌

 

2.갑신단권보 서문

  按趙氏之先 無汪氏四疑一異之辨 而有摠管公....

 

3.조선 시대 문집 《야곡선생집(冶谷先生集)》 제4권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학자이신 문목공 야곡(冶谷) 조극선(趙克善, 1595~1658)의 문집에 이 표현

   이 직접적으로 등장
   -족보에 적힌 왕씨사의일이의변(汪氏四疑一異之辨) 이라는 말이 무슨 뜻이며 어떤 책에서 유래했는

    지는 자세히 알 수 없으나, 이것이 오늘날 우리 족보를 수정하는 데 가장 절박하고 긴요한 요점은 아니다.

 

 4.문목공이 보소에 보낸 편지 글

    문목공은 신묘보((辛卯譜,1651년)를 발간 실무 작업을 하시면서 보소(譜所)에 보낸 편지글에서 다음과

    같이 적으셨다고 합니다.

    汪氏四疑一異之辯云 又未詳何代本之何 書此 則皆非今日修譜之切要 而新序弁諸卷首 而舊序之文

    亦不可廢 恐起後人之惑 兼欲取質焉.

 

5.중국 신안(徽州) 지역의 왕씨 가문 족보들  
   명·청 시대에 발간된 《홍촌왕씨가보(弘村汪氏家譜)》, 《기문왕씨족보(祁門汪氏族譜)》, 《적계왕씨

   종보(績溪汪氏宗譜)》 등의 서문 및 가계 고증 분석 자료(世傳, 족보 총론)부에 이동양의 이 서문과 사의

   일이의 변론이 핵심 고증 기준으로 인용되어 실려 있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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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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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조병수 | 작성시간 26.06.17 new 위대하신 선조님 문목공께서도 당시에 밝히시지 못했던 귀중한 사료를 찾아 게재해 주신데 대하여 대단히 감사드립니다.
    양경공 공안공파 조호형님께서는 우리 시조의 관직인 첨의중서사가 고려때 실제로 있었던 관직임을 밝혀주신(한양조씨종보 제11호 2008년) 분이신데
    이번에 쾌거를 보여 주셨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조 호형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7 new 감사합니다.

    부족한 사람이 저런 자료들을 찾아 볼 수 있었던 것은
    모두 거인들의 어깨 위에 서 있었기 때문이겠지요.

    이전 세대에서 쌓아 올린 과학 기술의 발전이 있었기에 먼거리에 있는 자료도
    보는게 가능해졌기 때문일 것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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