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른 신앙의 3요소(신29:1-4)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09.03.22|조회수248 목록 댓글 4

2009.03.22대민(주일낮)

 

*바른 신앙의 3요소(신29:1-4) 

신앙생활은 사람에게 마음의 평안을 가져다 줍니다. 그래서 우리가 믿는 하나님은 하나님의 자녀된 우리들에게 평안을 주고 계십니다.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기 위해서 다니고 있는 교회라고 하는 기관은 특수한 곳입니다.

교회는 결코 사람에 의해 세워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세워지는 영적 기관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교회라는 기관을 통하여 말씀운동을 전개시키시고 수많은 죄인들을 교회로 불러 모았습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죄인을 의인으로 변화시키는 곳이요, 또한 하나님의 말씀으로 거듭난 성도를 양육하여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에까지 자라도록 하는 훈련장입니다.

다시 말하면 교회는 예수님의 사람으로 변화시키는 생명체입니다.

일반적으로 모든 삶의 과정에는 인간이면 반드시 거쳐야 할 어떤 원리가 있습니다. 이것은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무조건 믿습니다가 아니고 주일성수 등을 비롯한 기본적인 의무생활을 잘 해야 하는 원리가 있습니다.

예를 들어서 절기를 지킬 때에는 반드시 예물을 준비해야 합니다. 결코 공수로 하나님께 나아오면 안 됩니다. 그리고 예배를 드리는 사람은 신령과 진정으로 드려야 합니다. 아벨의 예배는 정성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가인의 예배는 그 정성과 진지함이 부족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배를 받지 않으시는 데는 다 이유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신앙생활에는 어떤 분명한 원리가 있음을 뜻합니다.

 

비젼 있는 인생은 교회생활을 잘하는 것부터 시작합니다. 하나님은 만물을 새롭게 하고 은혜로 충만케 하시는 그 일을 교회를 통해 하시고자 계획하셨습니다. 교회가 바르게 서지 못하면 이 세상도 소망이 없습니다.

구약시대에는 교회 중심적 생활이었습니다. 그래서 스데반이 순교하기 직전에 했던 설교를 보면 광야에 모여 생활했던 그 무리들을 ‘광야교회’ 라고 칭하였습니다. 그들은 신앙공동체였습니다. 즉 하나님을 중심으로 살았습니다. 이 땅에 살고 있었으나 그들은 하나님이 중심이었고 믿음을 따라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인도에 따라 걸었습니다. 하나님이 먹여주시면 먹고 안주시면 굶을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들에겐 하나님이 전부였으며 시작이요 끝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이 땅을 교회를 통해 변화시키기를 원하시며 정화하기를 원하십니다. 교회를 통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려면 교회가 살아있어야 합니다. 교회가 깨어 있어야 합니다. 우리의 비젼은 교회에서 나와야 합니다.

교회를 가족이라고 하는 이유는 그리스도의 피로 하나가 되었기 때문이며 한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기 때문이며 한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며 한 성령으로 인도함을 받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살아있는 교회로 만들려면 교회의 구성원인 성도가 바른 신앙생활을 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날 교회가 세상으로부터 인정을 받지 못하고 지탄의 대상이 되는 것은 바로 성도가 바른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모습을 보시고 바른 신앙을 찾기 어렵다고 예수님도 탄식하고 계십니다.

어쩌면 이 땅에 잘못된 신앙으로 한국교회가 사회로부터 외면 당할까 무섭습니다. 인간의 탐욕이 자리잡은 신앙, 이웃 사랑이 없는 이기적 신앙, 하나님의 말씀에서 떠난 신앙과 기도 없는 신앙을 경계하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바른 신앙의 소유자들이 되어야 하겠습니다. 성도는 하나님께 내 삶을 드리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입니다. 나의 생명도, 나의 시간도, 내가 가진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부터 왔음을 알고 그것을 가지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기 위해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이 바로 우리들입니다. 이것이 바른 신앙의 자세입니다.

 

바른 신앙은

 

1.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4)

 

“그러나 깨닫는 마음과 보는 눈과 듣는 귀는 오늘날까지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주지 아니하셨느니라”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이 출애굽 하던 해에 시내 산에서 이스라엘 백성과 언약을 맺었습니다. 이것이 1절 앞에 나오는 호렙산 언약입니다. 시내 산은 성경에 종종 호렙이라는 이름으로 등장합니다. 출애굽기, 레위기, 민수기에 이 호렙산 언약의 내용이 자세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이제 가나안 가까운 곳, 모압 땅까지 왔습니다.

모압에서 조금 더 가 요단 강을 건너면 가나안입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다시 한 번 언약을 맺을 필요를 느꼈습니다.

이것이 오늘 본문이 시작되는 신명기 29장과 30장에 기록되어 있는 모압 땅 언약입니다.

 

오늘 본문이 들어있는 신명기는 모세의 마지막 설교인데 신명기는 ‘명령의 반복’이라는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 ‘요약’이라는 뜻도 있습니다.

신명기 29장과 30장은 모세의 세 번째 설교, 마지막 설교인데 이것은 요약 가운데에서도 압축된 요약입니다.

2절에 나오는 “여호와께서 애굽 땅에서 너희의 목전에 바로와 그의 모든 신하와 그의 온 땅에 행하신 모든 일”은 애굽 땅에 내린 열 가지 재앙, 홍해가 갈라진 일, 이런 것들을 모두 말합니다. 출애굽기 전반부가 모두 이 말씀에 압축되어 있습니다.

즉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어떻게 광야 길을 인도 하셨는가를 말씀해 주고 있습니다. 다시 말하면 출애굽 하여 광야의 과정을 통하여 주시고자 하는 교훈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솝우화에 나오는 내용입니다. 사자와 당나귀, 여우 셋이서 힘을 합해 사냥을 했습니다. 그리고 사냥한 것을 나누는데, 사자가 당나귀에게 공평하게 나누어 보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당나귀는 똑같이 셋으로 나누었습니다.

그랬더니 사자는 공평하지 못하다 하면서 당나귀를 잡아먹어 버렸습니다. 그러고 나서 이번에는 여우한테 나누어 보라고 합니다. 그러자 여우는 대부분을 사자 몫으로 돌리고 자기는 쥐꼬리만큼 가졌습니다. 그때서야 사자는 흡족해 이제야 공평하게 되었구나! 말합니다.

사자가 여우에게 묻습니다. "너는 어떻게 해서 이런 지혜를 생각해 냈느냐" 그러자 여우가 대답하기를, "어떻게는 뭘요, 당나귀 죽는 것보고 생각해 냈지요.". 】

 

남에게 일어난 일을 보고 내게 일어날 일을 생각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어떤 일들이 일어나는가를 보고 우리 자신에게 일어날 일을 미리 깨달아야 합니다. 그리고 준비하여야합니다.

다른 사람이 병에 들었습니까? 그것을 보면서 우리도 병들 날이 있다는 것을 알고 준비해야 합니다. 다른 사람이 죽었습니까? 우리에게도 언젠가는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을 알고 준비하셔야 합니다.

깨달아 알았음에도 불구하고 준비하지 못하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그런데 깨닫는 마음도 우리 마음대로 되지 않습니다.

 

사실 이스라엘이 10가지 재앙과 홍해바다를 건너는 역사에 없는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그래서 이제 하나님을 믿고 모세를 믿었다고 하였습니다. 이제는 변함없이 하나님을 신뢰할 수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며칠이 못되어서 물이 없는 사막을 지나면서 그들은 다시 원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을 원망하고 모세를 원망합니다. 하나님께서 또 이적으로 반석을 쳐서 물을 냅니다. 이런 이적이 세상에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들이 감사한지 얼마되지 않아서 종노릇하면서 제대로 먹지도 못했을 것인데, 먹을 것이 없고 고기가 없다고 원망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만나와 메추라기를 내려 먹이십니다. 이스라엘이 광야를 지나면서 얼마나 하나님을 노엽게 했습니까?

그 원인이 무엇입니까?

깨닫는 마음이 없어서 그렇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들에게 주시지 않아서 없었다고 하였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많은 것들을 경험하게 하십니다. 그러면서 깨닫게 해 주십니다. 하지만 많은 성도들이 깨닫지 못하고 어리석게 행동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우리의 신앙생활이 바른 신앙이 되려면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내가 지금 무엇을 어떻게 깨닫느냐는 것은 아주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깨달음에 따라 지금까지 살아온 것과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을 살아갈 수 있고, 우리의 삶이 더욱 바르고 온전하며 가치 있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시편기자는 119편73절에 “주의 손이 나를 만들고 세우셨사오니 내가 깨달아 주의 계명들을 배우게 하소서”라고 기도 하였습니다. 성경에서는 이 깨달음 때문에 고난까지도 가치 있는 것으로 보았습니다. 왜냐하면 고난은 우리 인간에게 살아있는 큰 깨달음을 주기 때문입니다.

깨달음에는 세 가지가 있습니다. 그 하나는 ‘일찍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아야 할 때 깨닫는 것입니다. 깨달음의 가치를 놓치지 않는 깨달음입니다. 다른 하나는 ‘늦게 깨닫는 것’입니다. 깨닫되 늦게 깨닫기에 깨달음의 가치를 놓치고 마는 것입니다. 가룟사람 유다는 예수님을 은 30에 팔아넘기고 예수님이 십자가에 달리시자 그 때에서야 깨닫고 후회했습니다. 결국 늦게 깨달은 유다는 자살하고 말았습니다. 깨닫되 이미 늦었기에 아쉬워하는 깨달음입니다. 또 다른 하나는 ‘죽어서 깨닫는 것’입니다.

나사로와 부자의 이야기 중 부자와 같은 깨달음입니다. 부자는 죽어서야 깨달았습니다. 이 부자는 살아서 좋은 옷을 입고 날마다 호화로이 연락했습니다. 그러나 죽은 후에 지옥에 떨어져 뜨거운 불꽃 가운데서 깨달았습니다. 그러나 그 깨달음은 아무 소용이 없는 깨달음이었습니다.

사실 깨달음도 사람에 따라 수준이 다 다릅니다. 우선 보기만 해도 깨닫는 사람이 있고, 듣고 깨닫는 사람이 있고, 매를 맞고 난 다음에야 깨닫는 사람도 있고, 그리고 무엇을 잃어버리고 난 다음에 깨닫는 사람이 있습니다. 재산이 날라가고, 몸에 병이 나야 깨닫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정말 마음이 둔하고 굳은 사람도 있습니다.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같은 것이 아닙니다. 많은 사람들이 아는 것은 많습니다만 깨닫는 바가 적어서 어리석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게 많은 시간을 공부했고, 그렇게 많은 지식을 얻었다고 해도 깨달아야 할 것을 깨닫지 못함으로 해서 어리석고, 미련한 자로 인생을 끝내는 것을 보게 됩니다.

우리 모두는 깨달음이 없거나 깨달음이 늦어서 후회하는 일이 없도록 모든 환경을 통해서 깨닫는 마음이 있어서 지혜롭게 준비하는 신앙생활을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깨닫는 마음이 바른 신앙의 첫요소입니다.

 

2.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눈이 보배라는 말이 있습니다. 잘 보면 큰 유익을 얻지만 잘못 보고 가까이 하다가 큰 손해를 많이 보는 경우도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10만 명의 시각 장애자가 있습니다. 앞을 못보니 참 불쌍합니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욱 불쌍한 사람은 건강한 눈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바로 보지 못하는 사람입니다.

깨닫는 마음이 있는 사람이 인생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무엇을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인생이 완전히 달라집니다. '무엇을 보느냐?' '얼마나 보느냐?' '어떻게 보느냐?' 하는 사람의 관점이 그 사람의 가치와 인격과 미래를 결정하는 요인이 되는 것입니다. 우리 인간에게 들어오는 정보의 80%는 눈을 통해 인지됩니다. 지금도 대부분 활자화된 언어에서 우리는 정보를 얻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주어진 시간들을 어떻게 살 것이냐의 문제는 우리의 눈이 새로워져야 새로운 창조의 삶을 살게 된다는 결론인 것입니다.

 

'눈은 몸의 등불이라고' 하였습니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그 눈이 나쁘면 그 생활 전부가 어둡다는 말입니다. 시력이 좋은 사람들이 눈으로 무엇을 보면 그들의 몸은 세상으로부터 들어오는 정보의 빛으로 가득 차 그 보이는 것을 통해 세상을 감지하게 됩니다. 하지만 눈이 어두우면 빛도 볼 수 없고 아무것도 감지할 수 없게 됩니다. 그러므로 눈이 성해야 합니다. 성한 눈으로 밝히 보고 밝게 깨닫고 밝게 생각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흐린 눈이 있고 나쁜 눈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눈의 시력은 마음의 초점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입니다. 마음에 맺히는 상에 하나님이냐 물질이냐에 시각은 달라지는 것입니다. 심상이 하나님을 향해 있다면 영적인 존재가 그 생명과 빛을 받아 밝을 것이나, 마음이 물질적인 것이나 세상의 보물을 향해 있다면 영적인 지각이 어둠에 덮여 마땅히 보아야 할 것을 보지 못하고 흐리게 보인다는 것입니다. 눈은 창문과 같아서 창이 깨끼 하면 맑은 빛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오지만 창이 더러우면 그 빛이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는 말입니다.

욕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질투에 눈이 어두운 사람, 잘못된 경험에 집착된 사람, 바른 시각을 가지고 있지 못합니다. 특별히 걱정과 근심에 매여있는 사람들, 상황을 바르게 보지를 못합니다. 편견과 불신에 메여있는 사람, 미움과 시기에 매여있는 사람은 사람을 바로 볼 수 없고 사물을 바로 이해할 수 없고 세상을 바르게 살지 못합니다.

성경에서 눈은 마음의 창과 같다고 하였습니다. 눈이 밝으면 온몸이 밝아지고 눈이 어두우면 온몸이 어두어두진다는 것입니다. 이 말의 뜻은 내가 고상하고 아름답고 좋은 것을 보면 나의 삶이 그렇게 되지마는 나의 눈이 부정적이고 어둡고 나쁜 것만 보면 나의 삶도 어두워지고 나빠진다는 뜻입니다.

히브리 말로 눈은 아인인데 아인이라는 말은 샘, 원천이라는 뜻입니다. 다시 말하면 모든 인간의 삶이 보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잘봐야 됩니다. 성경에도 영적생활 중에 보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가르치고 있는데 신약성경에만 똑바로 봐라 잘봐라 이보란 말이 육백 팔십 번이나 나옵니다. 거기에 비해서 잘들어라 이 말은 사백 이십 오회가 나옵니다. 그러니까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눈을 달이주신 것은 단지 무엇을 보는 것 이상의 역할을 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중요성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역사를 바로 보는 눈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역사는 쓸모 없는 흘러간 이야기가 아닙니다. 역사를 돌이켜 보며 미래를 준비하라는 하나님의 교훈입니다.

출애굽기 17장14절에 이스라엘이 아말렉과 싸워 이겼을 때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것을 책에 기록하여 기념하게 하고 여호수아의 귀에 외워 들리라."하셨습니다. 이것은 이 사건을 기록하여 후손들에게 역사적인 기록을 보고 교훈을 얻을 수 있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역사의 주인은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역사의 교훈을 깨닫는 백성이 흥하게 됩니다. 이스라엘 백성은 영토, 정치체제도 없고 언어도 없는 백성으로 긴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의 선민이라는 사상을 언제나 가지고 다녔습니다. 그들은 2000년 간 방황하면서도 하나님께서 그 백성을 사랑하시고 지켜주시기 때문에 가나안 땅을 얻을 것이라는 사실을 믿고 살아갔습니다. 이러한 역사의식을 항상 가지고 있었기에 이스라엘 백성은 무서운 존재가 된 것입니다.

역사를 왜곡하면 안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를 거짓으로 꾸미는 것을 싫어하십니다. 오늘 우리의 역사를 바로 깨달아야 합니다. 꾸밀 수 없는 역사를 바로 기록하고 알아야 하는 것입니다.

라합도 하나님의 역사를 깨달은 사람중의 한 사람이었습니다.

라합은 여리고 성이 든든하고 아무도 넘길 수 없는 철벽이지만 하나님 앞에는 하나님의 계획 앞에는 여리고 성을 아무것도 아닌 모래성임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그 정탐꾼에게 말합니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당신들과 함께 이곳까지 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우리의 간담이 녹았습니다. 우리 여리고성은 하나님의 약속대로 당신의 백성의 땅이 될 겁니다. 그러니 그대 나와 내 가족을 살려주시오. 그는 하나님의 역사를 분명히 알았습니다. 이걸 알아야 승리자가 됩니다. 이 세상은 하나님의 뜻대로 하나님의 계획대로 되는 것을 아셔야 됩니다. 이걸 모르고는 훗날 인생을 승리할 수 없습니다.

세상이 달라지길 원하십니까? 그렇다면 내 감각의 눈이, 내 영적인 눈이, 내 시각이 바로 되어야 합니다. 새로워지려면 바르게 보는 눈을 가져야 됩니다. 눈이 흐려지면 만사가 잘못됩니다. 아무리 힘써도 소용이 없습니다. 유명한 삼손도 눈이 빠지고 나니 그 힘이 소용이 없습니다. 눈이 어두우면 힘도 돈도 자유도 소용이 없게 됩니다. 우리는 심령의 눈이 밝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중요한 것은 우리의 영적인 눈이 열려야 한다는 것입니다. 영적인 세계가 보이고 경험되어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눈에 보이는 것, 인간적인 생각과 인간적인 판단에 머무를 수 밖에 없습니다. 제한된 인간의 지식으로는 부분적으로 알 수 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겸손히 지혜를 구할 수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관점과 하나님의 눈을 가지는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는 하나님과 친밀한 관계, 사랑의 관계가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나의 삶의 전영역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인정하고 고백해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 우리가 하나님 앞에 투명해야 합니다. 죄가 있으면 죄를 통해 마귀가 역사하고, 또 우리의 욕망이 우리를 사로잡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사랑하고, 하나님 앞에 절대 복종하고 순종해야 합니다. 그때 어떤 결과가 나타납니까? 참으로 하나님 앞에 거룩하고 투명하며 절대적으로 복종할 때, 우리속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경험하게 됩니다. 즉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참으로 경험한다는 것입니다.

눈은 모든 사물을 판단하는 첫 걸음입니다. 지나온 역사를 바로 보는 안목을 가져 복된 신앙생활을 하시기를 바랍니다.

바로 볼 수 있는 눈이 바른 신앙의 두 번째 요소입니다.

 

3.듣는 귀가 있어야 합니다.

 

사람의 귀는 여러 가지의 기능이 있는데, 그 중에 하나는 몸의 균형을 잡아주는 기능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것처럼 귀는 일반적으로 소리를 듣는 기능도 있지만,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기능도 있습니다. 몸의 균형을 잡아 주는 기능은 소리를 듣는 기능보다도 중요합니다. 어떤 분은 균형을 잡아 주는 기능을 상실해서 아무것도 하고 못하고 집에서 가만히 누워서 있는 분도 있습니다.

신앙생활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앙생활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말씀은 우리의 신앙생활이 한 쪽으로 치우치지 않게 하여서 건강하게 만들어 주는 역할을 합니다. 세상의 무엇이든지 한쪽으로 치우치는 것은 좋지가 않듯이 신앙생활도 한쪽으로만 치우치는 것은 좋지 않습니다.

 

기독교를 한 마디로 말하라고 한다면 “말씀의 종교”라고 대답할 수 있습니다. 이 말은 기독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종교라는 뜻입니다.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하여 하나님의 뜻을 이루고 말씀의 증인이 되어서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들은 말씀을 가장 귀하게 여기고 하나님의 말씀을 잘 귀담아 들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으면서 받는 복 중의 하나는 하나님이 나에게 말씀하신다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다른 사람이 아닌 나를 향하여 하나님의 뜻을 말씀하신다는 사실은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세상에 이것보다 더 크고 귀한 복은 없습니다. 이 하나님의 말씀 안에는 세상의 모든 것들이 다 들어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만 잘 들으면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이룰 수가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하나님께서 인간을 창조하시면서 입은 한 개만 만드셨지만 귀는 둘로 만드셨습니다. 어떤 분이 설명했던 것처럼 두 개의 귀로 잘 듣고 말하는 것은 좀 천천히 하라는 뜻이 내포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만일 귀는 하나이고 입이 둘이라면 이 세상에는 수많은 말들로 인해 온통 정신이 없는 세상이 되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우리에게 귀를 주신 하나님은 우리가 잘 알아듣도록, 선별해서 듣도록 귀를 만들어 주셨습니다.

 

먼저 인간은 그 주어진 귀를 가지고 누구의 말을 듣느냐 하는 것이 아주 중요합니다.

누구의 말을 어떻게 듣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사람의 생각도 달라지고 말도 달라지고 행동도 달라지기 때문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처음에 그 귀를 가지고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습니다.

“에덴 동산의 모든 나무의 실과는 자유롭게 먹으라 그러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열매를 따먹지 말라 먹는 날에는 정녕 죽으리라.”는 말씀을 그 귀로 들었습니다.

그런데 뱀이 와서 꾀일 때 하와가 대답을 하는 것을 보면 그 하나님의 말씀을 제대로 듣지 못한 것 같습니다.

“동산 나무의 실과는 우리가 먹을 수 있으나 동산 중앙에 있는 나무의 실과는 하나님의 말씀에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설명합니다.

자유롭게 따먹도록 한 다른 나무의 실과에 대해 “먹을 수 있으나”라고 받아들이고, 따먹지 말라 한 것에 대해서는 “먹지도 말고 만지지도 말라”고 받아들이고, 정녕 죽으리라는 것에 대해서는 “너희가 죽을까 하노라”라고 받아들였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기 멋대로 받아들인 것입니다. 그리고 그 하와는 주어진 귀를 가지고 사탄의 말을 듣습니다.

자 우리가 이렇게 하나님이 주신 좋은 귀를 가지고, 누구의 말을 어떻게 듣느냐, 하는 것에 따라 그 생각도 말도 행동도 달라지고 인생의 길이 달라집니다.

언제나 쓸데없는 말에 귀를 기울이다 보면 그 인생이 쓸데없는 인생으로 끝나고 맙니다.

 

하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변함없이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아도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하나님께서 백성들에게 말씀을 하실 때가 있었고, 말씀을 그치실 때가 있었습니다. 성경을 가만히 살펴보면 하나님께서 친히 말씀을 하실 때에는 백성들이나 지도자가 영적으로 깨어 있을 시기였습니다. 이 시기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므로 개인이나 국가가 영적으로 육적으로 형통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지 않으시고 침묵하실 때에는 백성들이나 지도자가 영적으로 어둡고 무지했을 시기입니다. 이 시기에는 국가나 개인이나 할 것 없이 말씀이 없어서 영적으로도 그렇고 육적으로도 어둠의 시대가 되었습니다. 참으로 힘들고 어려운 시대였습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들에게 말씀하기를 좋아하십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사는 백성들이 되어서 하나님께서 원하시는 대로 살고 그렇게 살므로 하나님께서 주시는 복을 받게 하시기 위함입니다.

그런데 현대를 살아가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말씀을 들으려고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을 향한 귀를 쫑긋 세우고 듣기보다는, 세상의 음성을 듣는 것을 좋아하고 자지 주장에 하나님이 동조하시기를 은근히 원하고 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은 바른 신앙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자기 주장을 내 세움이 아닙니다. 바른 신앙은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순종하는 신앙을 말합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바른 신앙의 길을 가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바로 듣는 귀가 바른 신앙의 세 번째 요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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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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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선지자 | 작성시간 09.04.02 아멘.........감사드립니다.
  • 답댓글 작성자진리수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4.09 감사합니다.
  • 작성자별바다 | 작성시간 18.04.08 잘알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진리수호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18.04.09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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