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0.01.10대민(주일낮)
*능력을 구합시다(대상16:8-12)
인간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이 땅을 어떻게 살고 어떤 마음을 갖고 사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가를 알고 사는 것입니다.
성도된 우리의 입장에서 인간은 너무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인정해야 합니다.
【서울의 어느 뒷골목에서 아주 웃기는 일이 벌어지고 있었습니다. 이제 초등학교 1학년생쯤 되어 보이는 어린아이가 자기 보다 두 배나 더 커 보이는 6학년 아이를 쥐 잡듯이 잡아 패고 있었습니다.
참으로 별 일도 다 있다 싶어서 가까이 가보았다고 합니다. 그 어린아이 뒤에는 깡패 두목같이 생긴 사람이 서 있었습니다. 알고 보니, 그 어린아이의 아버지였습니다. 그 전날에 그 6학년 학생한테 깡패자식이라고 놀림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그 꼬마아이는 모든 면에서 그 6학년 학생의 적수 가 될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그 뒤에 떡 버티고 서 있는 아버지를 믿고서 그처럼 호기를 부릴 수가 있었습니다. 물론, 그 6학년 학생은 힘으로는 얼마든지 1학년 꼬마아이를 제압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아이의 아버지가 무서워서 어쩔 수 없이 그냥 당하고만 있었던 것이라는 것입니다. 】
우리 힘만으로는 마귀의 세력을 당해낼 수 없습니다. 예수님을 진실하게 믿는 사람이라면 하나님의 뜻대로 바르게 살고자 하는 간절한 마음이 있습니다. 하지만, 사탄이 아주 간교한 방법으로 유혹할 경우, 그 유혹의 손길을 뿌리치기가 참 어렵고 힘든 일입니다. ‘이게 아니지, 이러면 안 되는데…’하면서도, 그 악한 사탄에게 끌려가고 마는 것이 연약한 우리 인간입니다.
한편 이 세상에 완전한 사람은 없습니다. 누구에게나 약점이 있고 부족한 점이 있습니다. 더구나 어느 누구도 완전한 사람이 될 수도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종종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말하고 완전한 사람인 것처럼 행동하는 사람을 보게 됩니다. 이런 사람은 어찌하든지 자신의 약점은 감추려 하고 자신의 부족은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다. 이런 사람은 진실하지 못하고, 겸손하지 못한 사람입니다. 어디서나 완전한 척 하려다 보니 자연히 불안하고 초조하여 마음이 편할 날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참으로 어리석고 불행한 사람으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습니다. 그러나 자신의 약점과 부족을 늘 인정하고 겸손한 마음으로 진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이 지혜롭고 쓸모있는 사람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이런 사람을 기뻐하시고 사랑하시며 하나님은 이런 사람을 들어 쓰십니다.
그런데 자기 자신이 너무나 부족하고 약점이 많기 때문에 하나님 앞에 쓰임 받을 수 없다고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냐하면 이 세상에 약점이 없고 완전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완전한 사람을 찾지도 않으십니다. 다만 자기 자신의 연약함을 알고 인정하는 사람을 찾으십니다. 그리고 이런 사람을 사용하기를 기뻐하십니다.
교만한 사람은 영안이 어두워 자신의 부족을 모르고 잘난 척합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자기 힘으로 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절대주권이 하나님께 있음을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 존재에 대하여 분명하게 알아야 할 것은 “나는 아무 것도 아니다”라는 사실이어야 합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의 능력과 은총과 지혜가 필요합니다. 그래서 겸손하게 하나님께 나아가 기도하면서 그의 능력과 은총을 구하게 됩니다. 공부를 하는 일도, 가정을 이루는 일도, 사업을 하는 일도 다 마찬가지입니다. 나는 아무 것도 아니기 때문에 나 스스로 무엇을 할 수 없습니다. 나는 빈 장갑일 뿐입니다. 그 장갑 안에 하나님의 손이 들어오실 때 비로소 나는 능력 있는 자가 되고 무엇이든지 할 수 있는 하나님의 일군이 됩니다. 씨를 심는 사람이나 물주는 사람은 아무 것도 아닙니다. 오직 자라게 하시는 하나님이 주인공이십니다. 그만이 이 역사의 주관자가 되실 수 있습니다. 이것을 깨닫고 인정하며 받아드리는 것이 바로 신앙입니다.
이제 겸손하게 나 자신은 아무 것도 아니라는 분명한 깨달음을 갖고 하나님을 바라보며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러면 그 순간에 하나님의 능력이 여러분 속에 들어오게 되면서 여러분을 능력 있는 일꾼으로 삼아주실 줄 믿으시기를 바랍니다.
1.그 이름을 불러 아뢸 때 능력이 임합니다.(8)
“너희는 여호와께 감사하며 그 이름을 불러 아뢰며 그 행사를 만민 중에 알게 할지어다”
사람들은 자신의 이름을 소중하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자신의 이름이 잘못 불려지면 섭섭하게 생각하거나 기분 나빠합니다. 고로 다른 사람의 이름을 놀리면서 부르지 말아야 합니다. 어른이 지을때의 마음을 생각하며 진실한 마음으로 불러주는 것이 인간관계의 기초입니다.
성도여러분! 여러분은 하나님의 이름을 옳게 알고 부르십니까?
사람의 이름을 부를 때와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이름을 옳게 알고 부르는 것은 믿음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하나님의 성호(聖號:거룩한 이름)들은 인간의 언어로 표현하였으나 사람의 창안(創案)이 아닌 신적 기원(神的起源)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명칭들의 참된 의미를 깨닫게 될 때 하나님의 본체와 속성과 사역(事役)을 바르게 이해하는데 크게 도움이 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자신을 계시하셨기 때문입니다.
즉 하나님의 이름에는 하나님의 성품, 하나님의 존재, 하나님의 일을 알 수 있습니다. 필립 얀시는 그의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하나님은 그 분의 웅장한 계획을 나타내지 않으신다. 그분은 자신을 드러내신다". 하나님의 이름은 하나님 자신을 드러내신 일입니다.
성경에서 당신의 이름을 여호와라, 하나님이라. 자존자라, 홀로 계신 분이라, 전능자라, 예수라, 그리스도라, 말씀이라, 성령이라...... 하나님은 이렇게 우리에게 여러 가지 이름으로 나타내셨다. 여러 가지로 나타내신 것은 그 하시는 일에 따라서 이 일을 하실 때는 이런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타내셨고, 저런 역사로 일하실 때는 저 이름으로 나타내셔서, 우리들로 하여금 구별해서 알게 하신 것입니다.
오늘은 하나님의 성호 가운데 “여호와”라는 이름을 살펴보도록 합니다.
‘여호와’라는 이름은 오직 하나님께만 사용되어진 고유명사임을 알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또 다른 이름인 ‘엘’이라든지, ‘엘로힘’이라는 말은 천사들이나 사람에게도 사용되었지만, ‘여호와’라는 이름은 오직 하나님 한 분께만 사용되어진 이름입니다. 그래서 호세아 12장5절에 “저는 만군의 하나님 여호와시라. 여호와는 그의 기념칭호니라”고 하였습니다. 이 ‘여호와’라는 이름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 뜻이 들어 있습니다.
첫째로 영원자존자라는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장14절에 “하나님이 모세에게 이르시되 나는 스스로 있는 자니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친히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하면, 여호와란 ‘나는 스스로 있는 자란’뜻입니다. 여호와란 곧 나는 영원히 나대로 있다는 뜻입니다. 모든 원인중에 원인이시며, 그 원인을 존재케 하신 스스로 자존하시는 하나님, 이 하나님을 가리켜 이스라엘 백성들은 ‘야훼’라고 불렀습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여호와란 이름을 부르는 순간, 우리는 시간에서 영원으로 들어가며, 그리고 영원부터 영원까지 계신 그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하루살이 같은 인간은 영원자존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을 통해서만 그 유한성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둘째로. 한 번 약속하신 것은 반드시 이루신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출애굽기6장2-5절에 보면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여 가라사대 나는 여호와로라. 내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전능의 하나님으로 나타났으나, 나의 이름을 여호와로는 그들에게 알리지 아니하였고, 가나안 땅 곧 그들의 우거하는 땅을 주기로 그들과 언약하였더니, 이제 애굽 사람이 종을 삼은 이스라엘 자손의 신음을 듣고,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고 하습니다. 이 말씀은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이 여호와라는 이름을 몰랐다는 말도 아니요, 또 지금에야 모세에게 그 이름을 알려 주셨다는 말씀도 아닙니다. 이 말씀은 곧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약속하신 언약을 이제 비로소 모세 시대 와서 이루어 주시겠다는 뜻입니다.
복음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핵심적인 진리, 열쇠처럼 소중한 진리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약속 곧 언약이라는 개념입니다. 성경은 구약과 신약으로 나뉘어져 있는데, 구약은 하나님의 옛날 약속이라는 뜻이고, 신약은 새 약속이라는 뜻입니다. 구약은 이스라엘 백성을 택하여서 율법을 중심으로 하신 약속이고, 신약은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피를 흘리시고 그 피로 세우신 새 언약인 것입니다. 곧 누구든지 저를 믿으면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고, 누구든지 저를 영접하면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고 하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한 하나님의 약속이 신약인 것입니다. 학자들에 의하면 신 .구약 성경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3만 2천 번이나 기록되어 있다고 합니다. 그만큼 성경 전체는 약속으로 가득차 있다는 말입니다
이러한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을 잘 활용한 인물이 성경에 소개되고 있습니다. 즉 다윗입니다.
[다윗]의 경우를 보시기를 바랍니다.
소년 다윗은 집채만한 골리앗과 목숨을 건 싸움을 나서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 (삼상17:45절)
골리앗을 바라보는 총명한 다윗이 자신이 불리하다는 사실을 모를 리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모욕하는 골리앗을 넘어뜨리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의 사명이요, 사명이기에 목숨을 걸고 죽음의 길인 줄 알면서도 나온 것입니다. 그리고 이 불가능한 일은 자신의 힘으로는 되어질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이 일을 이루기 위해서는 하나님의 이름이 필요했던 것입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는 고백은 굉장한 믿음의 고백입니다. 내가 너와 싸우지만, 내가 싸우는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이름이 싸우신다는 것,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과 반드시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믿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고백이기 때문입니다.
결과는 다윗의 믿음대로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이길 장수는 어디에도 없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을 대적하여 이길 수 있는 강대국은 수두룩하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이길 나라는 없는 것이요, 다윗을 이길 장수는 얼마든지 있을 수 있지만, 하나님의 이름을 이길 천하의 인간이 있을 수 없습니다. 감히 골리앗이 하나님을 대적할 수 있다는 말입니까?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이름이 담겨진 다윗의 물매 돌 하나로 장대한 골리앗을 넘어뜨리신 것입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가노라]는 다윗의 이 고백이 우리 모두의 고백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는 백성을 대적할 나라는 없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걸고 살아가는 사명자를 굴복시킬 그 어떤 세력도 있을 수가 없습니다. 만군의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으로 나가는 자는 반드시 승리합니다.
여호와의 이름을 불러 능력을 구하고 그 능력을 힘입어 날마다 승리하시기를 바랍니다.
2.기사를 말할 때 능력이 임합니다.(9)
“그에게 노래하며 그를 찬양하며 그 모든 기사를 말할지어다”
성경에 나온 하나님의 역사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들을 통하여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구원하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특별히 사사기서를 읽어보면 이스라엘 백성이 하나님을 떠나서 악을 행하고 우상숭배하면 하나님의 진노가 나타나는데 이웃 나라 사람들로 하여금 이스라엘을 괴롭히도록 허락합니다. 그 때에 메소보다미아의 왕, 구산 리사다임이라는 왕이 8년동안 괴롭힐 때 하나님은 옷니엘이라고 하는 사사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니 그가 능력을 받고 나가 싸워서 이 메소보다미아의 군대를 물리치고 백성들로 하여금 평안히 살 수 있도록 조치합니다.
세월이 흐르니 또 우상을 숭배하고 죄악을 범합니다. 그때에 하나님께서 이번엔 미디안을 붙여서 또 이스라엘을 괴롭히게 합니다. 곡식을 추수해서 가져오면 미디안 사람들이 다 강탈해 갑니다. 그때에 하나님이 기드온이라고 하는 사사에게 하나님의 신을 부어주시니 그에게 지혜가 임하고 능력이 임하게 됩니다. 수십 만 명의 미디안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데 이 기드온은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지혜와 능력을 가지고 300명의 군사에게 항아리를 준비하게 하고, 그 항아리 속에 횃불과 나팔을 준비하게 합니다. 그리고 적군이 깊이 잠들고 있는 그 밤에 가서 횃불을 높이 치켜들고, 여호와를 위하여, 기드온을 위하여, 외치게 하고 항아리를 깨면서 나팔을 불 때 잠자던 미디안 군병들이 혼비백산하여 도망하게 되고 자기편끼리 싸워 서로 죽고 죽이는 일이 벌어져 결국 이스라엘이 승리한 일이 있습니다.
이처럼 모든 성경의 이야기는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역사를 전개해 갔는지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오늘날에도 교회에 수많은 사람이 다니고 있지만 하나님의 신이 임한 사람들, 그들이 어떻게 하나님의 교회를 이뤄가고 있는지에 대한 이야기가 바로 교회사입니다
성도된 우리는 위와같은 성경의 기사와 교회사에 나타난 수많은 기사들을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그러면 과연 누가 이러한 사실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체험의 확신을 가진 사람입니다.
사도행전4장12절 이하에 보면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의 이름을 말하지도 말고 전하지도 말라는 무리들에게 “우리가 보고들은 것을 말하지 아니할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이것은 체험 속에서 나온 확신입니다. 태어나서 사십여년 동안 앉은뱅이로 살아왔던 병자를 예수의 이름으로 일으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게 하는 놀라운 체험을 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사람이 된 것입니다.
용기는 어디서 나오는 것입니까? 용기는 세 가지에서 나온다고 합니다. 첫째로 무지할 때 나오는 용기가 있습니다. 하룻강아지 범 무서운 줄 모른다는 속담이 이에 가까운 것입니다. 이것은 때로는 용기가 아닌 만용이 될 수 있습니다. 둘째로 본성적으로 나오는 용기입니다. 이것은 성격에서 나오는 용기를 말합니다. 셋째는 참된 지식에서 나오는 용기입니다. 이런 모든 용기는 일시적이거나 곧 식어버리는 용기임을 보게 됩니다.
그러나 믿음의 체험을 통한 확신에서 나오는 용기는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것입니다. 기독교 역사 가운데 순교자들의 신앙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체험의 확신에서 나오는 용기였습니다. 오늘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는 나의 신앙의 체험은 무엇이고 그 체험을 통한 확신은 무엇인가를 점검해야 합니다.
베드로와 요한은 예수 이름의 생명과 능력의 체험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므로 사십여년 된 앉은뱅이를 일으켰습니다. 이 체험의 확신은 어느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용기 있는 사람이 되게 하였습니다. 그들은 오순절 성령강림의 사건 때에 그들의 심령에 임하시는 그리스도의 사건인 성령의 강림과 충만을 체험하였습니다.
복음의 역사는 체험의 역사입니다. 그러므로 요한은 “태초부터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의 손으로 만진 바라”(요일1:1)고 하였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을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으로 소개하며 귀로 듣고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졌다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이렇게 체험해야 하는 것입니다. 누구도 말릴 수 없는 예수님을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손으로 만지는 체험의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지식과 이론으로 아는 예수는 남에게 전하기에 부족합니다. 그러나 체험으로 만난 예수님 남에게 전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는 믿음을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는 우리가 보고 듣는 것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고 하였습니다. 요한은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 하여 너희에게 전한다(요일1:2)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을 잘 믿는 사람의 특징은 말을 잘한다는 것에 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무엇입니까? 하나님을 체험하는 생활입니다.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보는 생활입니다. 그리고 내가 보고 들은 하나님... 내가 체험한 하나님을 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태초부터 지금까지 수많은 기사와 표적을 나타내 보이셨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보고 듣고 체험된 것들을 말하여야 합니다. 아무리 좋은 것을 체험하였다 할지라도 말하지 않으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우리가 보고 듣고 체험된 것들에 대하여 침묵하면 그대로 이지만 말하면 말할수록 더 큰 용기가 생기며 더 큰 능력이 나타날 줄 믿습니다.
특별히 오늘을 사는 우리는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입술로 말하며 전해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지금까지 누린 그 크고 놀라운 은혜를 말해야 합니다. 교회밖에 머물고 있는 이들에게 말해해야 합니다. 돈을 구하는 일밖에는 모르는 이들에게 깨닫게 해주어야 합니다. 희망 없이 자포자기 속에 주저앉아 있는 이들을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일어나고 걷고 뛸 수 있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지 않을 수 없는 것입니다.
교회 다니며 수십 년간 들은 것을 한 마디도 전하지 않는 삶은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이라 할 수 없습니다. 나가서 사람들에게 우리가 보고 들은 것을 말하고 그들을 이곳으로 데려오는 일에 열심을 다하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3.성호를 자랑할 때 능력이 임합니다.(10)
“그 성호를 자랑하라 무릇 여호와를 구하는 자는 마음이 즐거울지로다”
성호(聖號)란 “거룩하신 이름”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명칭할 때 쓰이고 있습니다.
여기서 성(聖)은 신성(神性)의 본질이 되는 것으로, 불의와 오해를 증오하시고, 정의와 순결을 원하시며, 공평과 사랑으로서 모든 사람을 통치하시는 최고 절대의 권위를 나타냅니다. 한편 “이름”은 그 본질과 힘을 표현하는 것이므로, 신의 이름은 십계명 제3계명에 있어서 하나님 아닌 것을 하나님의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하나님을 망령되어 쓰는 것으로 되어 금하고 있습니다.
성도된 우리의 삶은 언제나 하나님의 영광과 하나님의 성호를 높이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모두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로 살아갈 뿐입니다. 그러므로 은혜를 은혜되게 하며 복을 복되게 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 앞에 언제나 복과 저주의 길을 보이시는데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그 말씀을 순종하면 복을 받게 됩니다. 우리 자신이 거룩한 산 제사(롬12:1)를 드리기 위해 성결한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을 믿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베푸신 사랑을 사람들에게 전하고, 하나님의 은혜를 자랑해야 합니다. 구원의 복과 은혜를 자랑하는 것입니다. 하나님 말씀대로 사는 삶과 천국의 소망을 전하고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전도입니다. 전도는 자랑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는 신앙생활을 하는 것에 대한 기쁨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성도는 이 세상을 살아가면서 하나님을 자랑하며 살아야 합니다.
수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랑을 일삼는 시대를 맞았습니다. 공주병이라든가, 왕자병이라는 말은 곧 자기 착각 속에서 살아가는 시대를 알리고 있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세상의 헛된 것을 자랑하며 살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건강을 자랑하기도 하고, 자신의 학벌을 자랑하기도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자식 자랑하기에 침이 마를 줄 모르고 있고, 어떤 이들은 자신이 누리는 부와 명예를 자랑하기도 합니다. 남편자랑, 아내자랑, 멋진 승용차 자랑, 수천만 원대의 고가 옷자랑에 미쳐있는 시대입니다.
이런 자기 자랑은 과시욕구에서 비롯되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위대한 신앙의 선배 사도 바울은 자기 자신을 위해 자랑거리가 많았지만(고후11:16-27) 그는 자기의 약함만을 자랑하였습니다(고후12:9-10).
왜냐하면 우리가 약할 때 하나님의 능력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성도에게 있어서 자랑은 오직 하나님 자랑밖에 없습니다.
시편 20편7절에도 “우리는 여호와 우리 하나님의 이름을 자랑하리로다'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그리고 본문에서도 ”그 성호를 자랑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지금까지 우리를 인도하시고 은혜를 베푸신 하나님의 성호를 자랑하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모든 축복을 온세계에 전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을 노래하고 찬양하고 그 이름을 진실되게 높이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 앞에서 즐거워 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능력을 계속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이 앞으로 주실 은총을 생각하면서 더욱 더 능력 안에 살겠다고, 더 충성하겠다고, 더 성실하게 살겠다고 다짐하시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얼굴을 끊임없이 구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분 앞에서 살아가는 기쁨을 한평생 그분의 나라에 이르러서도 누리시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감사가 넘치는 삶으로 승리하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