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제서야 알았도다(대하33:10-13)

작성자자료창고|작성시간21.04.12|조회수193 목록 댓글 2

2021.04.11.(대민:주일낮)

 

그제서야 알았도다(대하33:10-13) 대민성결교회

 

[10]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11]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13]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사람이 무엇을 안다는 것은 배움을 통해서만이 아닙니다. 경험을 통해서 배울 수도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의 연륜을 무시할 수 없습니다.

 

연륜이란 “여러 해 동안 쌓은 경험에 의하여 이루어진 숙련의 정도”라 정의합니다.

 

삶의 지혜는 배움으로 익힐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흔히 나이가 들수록 연륜이 묻어난다는 말을 자주 듣게 되는데 그만큼 경험하고 쌓아온 삶을 느낄 수 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몸소 배운 '진짜 경험'에서 나오는 삶의 지혜는 쉽게 따라잡을 수 없습니다.

 

인생은 경험 해 보아야 알 수 있는 것들이 많습니다. 그것은 때로는 시간이 필요하고 환경적인 요소도 필요합니다.

 

본문에는 상상을 초월한 큰 죄로 비참하게 되었다가 참회의 기도로 축복을 회복한 한 인물이 나옵니다. 바로 므낫세 왕입니다.

 

므낫세는 히스기야왕의 아들로서 왕위에 올라 55년을 치리하였습니다. 하나님 덕분에 그동안 평안 했습니다. 그의 아버지 히스기야는 독실한 신앙인이었습니다. 그러나 므낫세는 이방인들보다 더욱 우상을 섬겼습니다. 유다와 예루살렘 거민이 므낫세의 꾀임을 받고 악을 행한 것이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멸하신 열방보다 더욱 심하였습니다.

 

하나님은 그에게 참을 만큼 참았습니다. 그는 하나님의 참으심에 재미를 붙였습니다. 결국 그는 바벨론왕의 침략을 받고 포로가 되어 끌려갔습니다. 그제서야 비로서 환란이 우연한 것이 아니 줄을 깨닫고 그 환란을 인하여 하나님을 찾고 간절히 기도하는 동시에 겸손해 졌습니다.

 

우리에게 하나님의 심판과 징계를 받도록 원인을 제공한 죄가 있습니다. 그 죄를 찾아서 해결하는 것이 회개입니다.

 

성경 전체를 통해서 보면 회개는 몇 단계가 있습니다. 첫째, 죄의 자각입니다. 둘째. 죄의 고백입니다. 셋째, 행동의 변화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의 이 회개를 받으시고 문제를 해결해주셨습니다.

 

므낫세는 환난을 경험해보고서야 즉 그제서야 깨달았습니다.

 

므낫세를 통해 우리는 교훈을 받아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징계가 있기 전에 정신을 차리고 다른 것에 마음을 빼앗기지 말고 하나님만을 경외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1,하나님이 치게 하셨습니다.(10-11)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그들이 므낫세를 사로잡고 쇠사슬로 결박하여 바벨론으로 끌고 간지라.”

 

성도 된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전능하셔서 인류의 역사를 주관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성도와 불신자는 역사를 보는 눈이 다릅니다. 불신자의 눈으로 볼 때 역사는 사람에 의해서 이루어지지만, 성도의 눈으로 볼 때 역사의 주관자는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라고 하더라도 하나님께서 작정하시면 역사에서 사라지지만, 아무리 약한 나라라도 하나님께서 세우시면 역사의 주도국이 됩니다.

 

성경의 역사도 마찬가지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하나님은 그들을 치셨습니다.

 

신명기6장15절에 “너희 중에 계신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신즉 너희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진노하사 너를 지면에서 멸절시키실까 두려워하노라”

 

여호와 하나님은 다른 종교든지 유명인사든지, 문화이든지 오락이든지 간에 하여튼 당신의 백성에게 당신 자신보다 더 사랑하는 것이 생기면 절대로 대충 그냥 넘기실 분이 아니시기 때문입니다.

 

실로 이 현대사회 속에는 온갖 종류의 우상들이 우리의 마음에서 '하나님 사랑'을 빼앗아가려고 유혹하고 있음을 깨닫고, "너희 하나님 여호와는 질투하시는 하나님이시니 오직 그 분만 섬기라"는 경고의 말씀을 더욱 철저히 명심하는 성도들이 되어야 합니다.

 

민수기11장1절에 “여호와께서 들으시기에 백성이 악한 말로 원망하매 여호와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사 여호와의 불을 그들 중에 붙여서 진영 끝을 사르게 하시매”

 

인생을 살아가면서 원망은 가장 보편적인 삶의 경험이라 할 수 있습니다.

 

원망해보지 않고 인생을 살아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원망할 때 악한 언어를 사용하며 하나님을 공격하는 것만은 조심하고 또 조심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 길을 걷다가 이런 악한 말로 하나님을 원망하다가 하나님의 징계를 경험한 사건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원망하면 하나님은 그 원망을 들으시고 진노 하십니다.

 

우리는 기도할 때만 들으시리라 기대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 입에서 나오는 모든 말을 다 들으십니다. 우리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들으시고 그 말에 따라 우리를 심판하시기도 하시고 복주시기도 하십니다.

 

우리는 우리가 말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듣고 계신다는 것을 자주 잊고 삽니다. 그래서 악한 말도 함부로 말합니다. 하나님께서 들으시고 진노하실 만한 말들을 거침없이 내뱉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택한 백성들이 악한 말로 원망하는 것을 아주 싫어하십니다.

 

신명기29장27절에 “이러므로 여호와께서 이 땅에 진노하사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시고”

 

하나님께서 진노 하시면 이 책에 기록된 모든 저주대로 재앙을 내리십니다.

 

“이스라엘이 하나님과 맺은 언약을 버리고 우상승배의 죄를 범할 때 그들이 질병과 파멸, 열방의 조소를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즉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징벌을 받게 되는 것은 그분의 언약을 지키지 않기 때문입니다.

 

실제로 이스라엘은 후일 바벨론에 의해 완전히 멸망당하여 가나안은 훼멸(毁滅)되고 백성들은 사로 잡혀갔으며 열방의 웃음거리가 되었으니 이는 곧 그들이 여호와의 언약을 지키지 않고 우상을 섬기며 타락했기 때문입니다.“[QA시스템 성경연구]

 

여호수아7장1절에 “이스라엘 자손들이 온전히 바친 물건으로 말미암아 범죄하였으니 이는 유다 지파 세라의 증손 삽디의 손자 갈미의 아들 아간이 온전히 바친 물건을 가졌음이라 여호와께서 이스라엘 자손들에게 진노하시니라.”

 

열왕기하15장37절에 “그 때에 여호와께서 비로소 아람 왕 르신과 르말랴의 아들 베가를 보내어 유다를 치게 하셨더라.”

 

이처럼 하나님께서는 백성들의 죄를 지나치지 아니하시고 이방 민족을 통하여 치게 하시며 진노하신다는 사실을 알려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도 “여호와께서 므낫세와 그의 백성에게 이르셨으나 그들이 듣지 아니하므로 여호와께서 앗수르 왕의 군대 지휘관들이 와서 치게 하시매” 하였습니다.

 

“구약의 신학에서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것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이것은 단순히 귀로 소리를 듣는 것이 아니라 듣고 그것에 반응하여 순종한다는 의미를 내포하기 때문입니다. 이는 신명기에서 드러나는 언약적 순종의 핵심적인 부분이며(신 6:3,4), 동시에 구약 전체에 걸쳐서 백성들에게 계속적으로 요구되는 부분이었습니다(사 28:23; 렘 6:19; 슥 1:4). 하지만 역대기 기자는 선지자들을 통해 전달된 경고를 므낫세와 유다 백성들이 듣지 않았고 불순종했다고 말합니다. 말씀에 순종하는 것은 성도들의 가장 기본적인 자세입니다.“[카리스마 주석]

 

하나님이 진노하시고 치는 것은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성도 된 우리가 하나님 앞에 죄를 지었는데도 치지 않고 내버려 둔다면 그는 마치 사생자와 같습니다.

 

히브리서12장8절에 “징계는 다 받는 것이거늘 너희에게 없으면 사생자요 친아들이 아니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나서 그제서야 깨닫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힘을 쓸 뿐 아니라 매 맞기 전에 하나님 앞에 나와 죄를 회개하시기를 바랍니다.

 

2.환난을 당하자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12)

 

“그가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사람이 죄를 짓고도 반성이 없고 깨달음이 없다면 징계가 반드시 옵니다. 하지만 죄를 짓고 징계를 받아 하나님께 나아가 용서를 간구하면 징계가 멈춥니다.

 

오늘 본문의 므낫세는 “환난을 당하여 그의 하나님 여호와께 간구하고 그의 조상들의 하나님 앞에 크게 겸손하여” 라 하였습니다.

 

비록 하나님앞에 불순종의 죄를 지어 환난을 당했으나 그는 하나님께 간구하고 겸손하였습니다.

 

우리에게도 죄를 지어 환난을 당할 수 있고 죄를 짓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환난을 당할 때가 있습니다.

 

그럴 때 우리가 할 일이 있습니다.

 

요한복음 16장33절에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

 

우리가 살아가는 삶은 어찌 보면 환난의 연속입니다. 하나의 문제가 해결되면 또 다른 문제가 나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좀 평안을 누려보려면 그 다음에는 또 다른 골치 아픈 문제가 생기게 되어있습니다. 세상 삶은 다 그렇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눈에 보이는 것만을 보면 안 됩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 그 뒤에 따라오는 하나님의 은총까지 바라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당장 눈앞의 십자가만을 바라보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그렇습니다. 환난 없는 성도는 없습니다. 문제는 그 환난 바라보지 말고 환난 속에 숨어 있는 하나님의 뜻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또 환난을 이용하셔서 우리를 연단시키시고 성숙 시켜서 더 크고 더 중요한 일에 사용하실 하나님을 바라보시기 바랍니다.

 

환난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께서 세상을 통치하시는 분이라는 것을 배우게 됩니다. 환난 속에서 나를 통치하시는 하나님을 발견해야 합니다.

 

이삭이 아브라함의 사망 후 블레셋 땅에 머물 때가 있었습니다. 그는 블레셋 사람들이 버린 황량한 광야에서 농사를 지었고, 100배의 이익을 얻을 수 있었습니다. 블레셋 사람들은 그가 사용하는 우물을 모두 막아 버렸습니다. 쓰레기와 돌멩이를 집어넣어 못쓰게 했습니다. 그는 그 환난 속에서 다시 우물을 팠습니다. 그들은 또다시 그 우물을 못 쓰게 했습니다. 그는 결국 그 우물을 포기하고 또 다른 우물을 구해 이동했고, 결국은 르호봇에 이르게 되었습니다. 르호봇이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하여 넓게 하셨으니 이 땅에서 우리가 번성하리로다”는 뜻입니다.

 

이삭은 환난을 통해 더 넓은 장소를 얻게 되었습니다. 욥은 환난을 통해 처음 자신이 가졌던 모든 것의 두 배나 더 소유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은 환난을 통해 애굽의 총리가 되었고, 모세는 미디안 광야의 환난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고 온유한 자가 되었습니다. 초대 교회는 환난을 통해 예루살렘에서 로마와 안디옥으로 흩어졌고, 안디옥과 로마를 통해 세계적인 교회로 성장하였습니다.

 

환난을 만났을 때 어려움에 빠지지 말고 담대하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기도하시기를 바랍니다.

 

시편50편15절에 “환난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로다.”

 

환란 때 하나님을 찾는 것은 아주 자연스런 모습입니다. 그래서 성경은 그런 때 나를 부르라고 하십니다. 그러면 내가 너희를 건지리니 너희가 내가 하나님인줄 알게 될 것이라고 합니다.

 

성경을 보면 이스라엘 백성들이 환란 때마다 하나님께 눈물로 기도하였습니다. 그러면 하나님은 그들을 건지셨고 그 백성들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였습니다. 그런 내용들이 오늘 본문을 포함하여 구약성경에 많이 나와 있습니다.

 

환난을 이기는 방법은 부르짖는 것입니다. 기도의 종류가 많지만 환난을 이기는 기도는 부르짖는 기도입니다. 평생 예수님을 믿지만 부르짖고 기도 한 번 못해봤다면 한 번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신앙은 개성이 아닙니다. 부르짖을 때는 부르짖으시기 바랍니다. 시46:1에 “하나님은 우리의 피난처시요 힘이시니 환난 중에 만날 큰 도움이시라.”했습니다. 작은 도움이 아닙니다. 큰 도움이십니다.

 

역대하 20장을 보면 유다의 여호사밧 왕이 다스릴 때 모압과 암몬과 마온 족속의 연합군이 쳐들어왔는데 막을 힘이 없습니다. 그래서 온 국민은 혼비백산할 때 여호사밧은 다른 데 가지 않고 신하들을 거느리고 베옷을 입고 성전에 가서 하나님 앞에 결사적으로 기도를 했습니다. 자기도 금식을 하고 온 국민에게 금식령을 선포하고 부르짖었습니다.

 

그러자 선지자 아하시엘이 “이 큰 무리로 인하여 두려워하거나 놀라지 말라 이 전쟁이 너희에게 속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께 속한 것이니라” 하면서 찬송하며 마주 나아가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 결과 여호와께서 연합군들로 분쟁하게 만들어 서로 물고 뜯고 베고 죽여서 패망하고 말았습니다.

 

환난의 때에 간구하면 므낫세 처럼 겸손해집니다.

 

우리도 어려움과 고통을 당하면 문제를 당하면 기도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교만한 사람은 끝을 좋지 않게 끝맺으려고 작심한 사람들은 어려움 당해도 기도하지 않습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은 기도해야 합니다. 내 힘으로 하려고 자꾸 고집불이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이름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그것을 하나님은 원하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나서 그제서야 깨닫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힘을 쓸 뿐 아니라 매 맞기 전에 하나님 앞에 간구하시기를 바랍니다.

 

3. 그제서야 하나님을 알았습니다.(13)

 

“기도하였으므로 하나님이 그의 기도를 받으시며 그의 간구를 들으시사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지식으로만 아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은 하나님과 별로 친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이 필요할 때는 자기의 이익이나 문제 해결을 위해서입니다. 자기 필요를 위해 하나님을 찾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의 마음은 하나님을 떠나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아는 것이 머리에서 마음까지 내려온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들은 하나님에게 관심을 가지고 예배드리고 찬송합니다. 진심으로 예물도 바칩니다. 성경 묵상도 하고 기도도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순종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이 삶으로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 경험에 의해서 아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바로 오늘 본문의 므낫세입니다.

 

“그가 예루살렘에 돌아와서 다시 왕위에 앉게 하시매 므낫세가 그제서야 여호와께서 하나님이신 줄을 알았더라.”

 

이러한 표현을 통해 므낫세가 그전에는 바알이나 아세라 둥의 모든 우상들을 진정한 신(神)으로 알고 섬겼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여호와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행하신 무서운 징계의 심판과 용서를 직접 체험하고 나서,이제 그는 ‘여호와만이 진정한 신이시다’ 라는 사실을 비로소 깨달았다는 것입니다.

 

곧 여호와 하나님을 조상과 자신의 하나님으로 믿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므낫세의 이러한 깨달음은 어떤 면에서 욥의 깨달음과 연관시킬 수 있습니다. 욥은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삽더니 이제는 눈으로 주를 봐옵나다"(욥42:5)라고 고백한 적이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므낫세는 여호와를 이방 신들과 동일하게 여겼다가 그제서야 여호와만이 참 하나님이심을 깨달은 것입니다.

 

욥과 비교해 볼 때 그 신앙의 차원은 다르지만 이것을 계기로 하여 므낫세는 지금까지의 정책을 바꾸어 일대 개혁을 단행하게 된 것입니다. 이처럼 모든 사람은 여호와를 참 하나님으로 깨달을 때만이 진정한 신앙을 소유할 수 있습니다. [카리스마 주석]

 

사람들은 대개 어려움을 겪고서야 하나님을 알아 갑니다.

사람은 심한 고생을 한 번 겪고 나면 참 많은 변화를 경험하게 됩니다. 또 자라나는 아이들도 심하게 병치레를 하고 나면 그만큼 정신적으로 성숙해 진 모습을 보게 됩니다.

 

오늘날처럼 배부르고 등이 따듯하면 하나님을 알아가는 일에 관심이 없습니다. 어쩌다가 아이쿠 할 때가 이르러야만 하나님을 찾습니다.

 

사실 사람은 완악하여 고난이 없다면 아무도 하나님 앞에 나오지 않을 것입니다. 나와도 절실하게 신앙생활하지 않을 것입니다. 순순히 말로는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시편119편71절에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인하여 내가 주의 율례를 배우게 되었나이다.” 했고, 욥기23장10절에 욥도 “나의 가는 길을 그가 아시나니 그가 나를 단련하신 후에는 내가 정금 같이 나오리라” 하였습니다.

 

위대한 인물 치고 고난을 겪지 않았던 사람이 없습니다. 위대한 소설도 고난 가운데 쓰여 졌고, 베토벤의 “운명”이라든지 헨델의 “메시야” 등도 다 고난을 통해서 만들어졌습니다. 성경 다음으로 많이 읽혀진 베스트셀러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고난 속에서 쓰여 졌습니다.

 

야곱도 천사와 씨름하다가 환도 뼈가 위골 될 때 비로소 하나님을 의지하지요. 진주도 조개 속에 이물질이 들어갔을 때 그 이물질로 인해 쓰리고 상처 날 때 만들어진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하나님 나라의 귀한 백성이 되도록 인도하시는 데에는 특별한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시련과 환난입니다. 사람이 볼 때 환난이란 힘든 일이지만.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환난을 허락하시고, 그 환난을 통하여 하나님의 백성이 되게 하시며 영원한 복을 누리게 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도에게 고통을 주어 우리로 불행한 삶을 살게 하심이 아니라 고난을 통해 우리의 죄악의 불순물을 빼기 위함입니다. 나를 의지함이 아니요 하나만을 의지 하게 하려함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께 죄를 지어 하나님의 진노를 받고 나서 그제서야 깨닫는 것보다 하나님 앞에 죄를 짓지 않으려고 힘을 쓸 뿐 아니라 하나님만 의지하는 믿음의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하나님이 치게 하셨습니다.(10-11)

2.환난을 당하자 하나님께 간구하였습니다.(12)

3.그제서야 하나님을 알았습니다.(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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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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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작성자RKKYU | 작성시간 21.04.16 하나님께 회개하며 간구함을 통해 하나님을 의지하는 사람이 되도록 힘쓰겠습니다!
  • 답댓글 작성자자료창고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1.05.26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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