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료실

가부장제 혈연가족에 대한 비판과 대안 가족공동체 모색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10.10.19|조회수42 목록 댓글 0

가부장제 혈연가족에 대한 비판과 대안 가족공동체 모색



이 문 숙(교회협 여성부장)


비릿한 운명의 끈


나는 가족에게서 자유롭지 않다.


나의 가족사(핏줄)는 아직도


나의 기쁨과 슬픔의 원천이 되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 진저리를 친다.


생물학적 맹목성이라니!


가족이기 때문에


불합리에도 불구하고


조건없이 받아들이는가 하면


가족이기 때문에


지극히 작은 것도 용서하지 못한다.



가족이 풀 수 없는 매듭이 아니기를


나는 바란다.



가족을 사랑함에도 불구하고, 아니


가족을 사랑하기 때문에 더욱


난 가족에게서 벗어나려고 한다.



핏줄의 가족은 과거이므로


과거는 대면하고 마침내 초월해야 하므로.


생물학적인 가족 관계 안에서 나는


우주적 그리스도의 충만함에 이를 수 없는 어린 아이이므로.



이문숙, '가족을 넘어'



1. 가족문제에 대한 논의들



오랫동안 가족연구는, 가족사적 접근과 구조기능론적 접근이 주를 이루었다. 가족사적 접근은 가족구조, 친족유형, 호적제도, 혼인제도, 상속제도 등에 관심을 가지며, 구조 기능론적 접근은 사회상황에 따른 가족구조의 변화 또는 가족내 부부의 역할분담이나 권력관계를 파악하는 데 집중한다. 1980년대 들어서면서부터는 사회 각 계층 계급의 가족생활의 차이에 대해, 그리고 그 차이가 가족 밖의 정치 경제 등과 어떻게 관련돼 있고 그 속에서 여성들은 무엇을 경험하는가에 대해 비판적 논의가 일어났다. 이러한 논의를 위해서는 마르크스주의적 비판이론과 여성해방론이 큰 몫을 하였다.


특히 여성시각에서 가족을 보는 이들은 여성이 가족 속에서 겪는 긴장과 갈등에 주목하고 가부장제 가족과 사회구조, 그리고 자본주의 경제구조가 어떻게 여성을 억압하며, 노예화하는지를 드러내 왔다. 이것들은 사회의 깊은 지층에 뿌리내린 가부장제 이데올로기와 진리처럼 보이는 가족신화를 건드려, 안정을 좋아하는 사람들의 심기를 불편하게 하고 있으며, 때론 그들에게 심한 반발을 사기도 한다.


이 발제에서는 그간의 여성시각에서 해온 가족 논의들을 기초로 한국의 부계가족 구조의 현황을 검토하고(역사적 배경, 가족법 포함) 포스트모던적 가족해체가 논의되는 마당에 가족을 지킨다는 것은 무엇인지, 진정으로 해체해야 할 것은 무엇인지, 가족은 어디로 가야 하는지 묻고 대답해 보려고 한다.



2. 가족에 대한 위기감의 정체


가족을 염려하는 소리가 높다. 많은 이야기들이 있지만, 그 중 여성시각에서 짚고 넘어가지 않을 수 없는 몇 가지는 이런 것들이다. ‘아버지의 권위가 사라진다.’, ‘이 시대 모성은 어디로 갔나’, ‘주부들이 윤락을 하다니!', ‘부탄가스를 마시고 혼숙한 중학생들 대부분은 결손가정 자녀',‘ 우리 사회의 그늘, 미혼모가정, 이혼가정’이 늘어 간다.’ 신문 방송보도에서 심심찮게 오르내리는 것들이다


이러한 염려와 문제의식에서 가족에 대한 일반적인 태도와 시각을 엿볼 수 있다. 그것은 첫째, 가족은 지켜야 할 무엇이며, 둘째 지켜야 할 가족은 구체적으로 가부장적 부부-자녀가족이라는 것이다.


새시대 아버지의 위치나 역할은 요즘 꽤 자주 등장하는 저널리즘의 메뉴인데, 대체로 전통적이고 권위적인 아버지와 친구같은 아버지, 두 가지로 요약된다. 그러나 무엇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을 끈 것은 소설[아버지]가 던져주는 메시지일 것이다.


근래에 소설 [아버지]가 베스트셀러가 된 것은, 이 책이 오늘날의 불안정한 가족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염려와 위기감을 해소시키는 절절한 가족사랑 이야기를 들려주고 있기 때문이다. 산업시대 돈버는 기계로서 주로 집바깥에서 지내면서 가족에게 소외된 아버지가 암으로 죽어가면서도 가족에게는 자신이 암이라는 것을 알리지 않고 남은 가족이 경제적인 곤란을 당하지 않고 살아가도록 눈물겹게 준비하고 배려하는 모습은 독자들의 감정선을 건드리고도 남는다. 독자들은 아버지의 권위가 땅에 떨어졌다고 생각했는데, 이렇게 가족을 위해 자신의 약함을 감추고 의연히 죽어가는구나 하며, 일종의 카타르시스를 느끼고 전통적 가부장의 건재에 안도했을 것이다. 또한 독자들은 가족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작가의 소박하고 감동적인 대답에 만족하며 마지막 책장을 넘겼을 것이다. [아버지]의 인기는 아버지가 가정을 '지키는' 방식에 대한 많은 사람들의 공감을 증명한다. 가족에 대한 믿음과 낙관적 전망이기도 한, 애틋한 가족사랑의 결말도 이 책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데 한 몫 했을 수 있다.(어머니 또는 아내가 가족을 지키는 방식에 대한 일반의 관념은 언젠가 ‘주부 윤락’사건을 놓고 주부가 윤락행위를 하니 이제 가족은 갈 데까지 다 간 것 아닌가 하며 매스컴이 떠들어 댄 일에 잘 나타난다)


아버지 또는 남편이 가장으로서 버젓이 버텨주고 어머니 또는 아내가 ‘바깥에서’ ‘정조를 팔지 않고’ 가정을 지키며, 거기다 속썩이는 일 없는 아이가 있을 때, 우리는 비로소 이 가족은 유복하다고 말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가족의 행복을 재는 첫째 척도이다. 어쩌면, 가족을 염려하는 많은 이야기들은, 가족을 지켜야 한다는 주장은, 현대 가부장제 부부-자녀 핵가족에 대한 무의식적인 옹호와 이것이 흔들리는 데 대한 보수적 과민 반응인지도 모른다. 아버지의 권위의 흔들림에 대한 위기감은 한 동안 유행했던 '간 큰 남자 시리즈'에서 반동적으로 표현되었거니와, 모성을 저버리고 바깥으로 나대는 여성(어머니)에 대한 공격은 소설 [아버지]에 이어 최근, 희생하고 기다리는 어머니를 묘사하는 책광고 카피가 신문광고난에 올라오고 있는 데서도 느낄 수 있다. 급격한 사회변동과 페미니즘의 확산에 대한 거부감으로, 사람들은 권위적인 아버지와 희생하는 모성을 우리가 복구해야 할 가족의 미덕으로 새삼스럽게 노래한다.


가족사학자들은 오늘의 가족을 ‘애정적 개인주의’(affective individualism)라는 말로 요약한다. 현대가족은 확대가족‧친족과의 유대가 약화하고 지역공동체와 가족간의 유대가 약화한 위에서 사생활이 이루어지는 공간이요, 부부와 그들의 자녀로 구성되며 가족구성원들의 정서적이고 감정적인 유대가 발달하는 장이라고 보는 것은 정설이 되었다. ([가족과 한국사회] 51) 현대가족에 대한 다분히 규범적인 이 같은 규정은 한국가족에 대해 꼭 들어맞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애정적 개인주의'라는 말의 양면성을 숙고해보면 이 말은 한국가족의 부정적 특징으로 부각되는 가족이기주의의 중립적 또는 긍정적 표현으로도 보인다. 그렇다면 한국가족의 경우는 조금 단순화하면, 앞서 언급한 가부장적 특성에다 애정적 개인주의를 겸한, '가부장적 애정적개인주의(patriarchal affective individualism)'라는 단어로 일축할 수 있을 것이다. '가부장제'와 '애정적 개인주의'는 오늘 우리 사회의 '가정지키기' 이데올로기의 근간을 이룬다.



3. 가부장적 애정적 개인주의



한국 가족이 오늘의 가부장적 애정적 개인주의로 흘러온 데에는 사회 변동의 영향도 있지만, 문화적 이데올로기적 요인도 중요하게 작용하였다. 거기다 급속한 자본주의적 산업화와도 연결돼 있다.



3-1. 가부장제 가족의 조화



한국 가족제도는 조선조 초기까지 비교적 평등했으나, 조선조 중기 이후 부계적 남녀차별적으로 변했다. 임진왜란, 병자호란 이후 농토의 유실 등으로 경제적으로 궁핍해지자, 이에 대처하는 과정에서 자녀의 균등상속보다 장자 단독상속이 필요해졌다. 전쟁의 와중에 가문의 단결이 절실해져, 이것을 위해 부계친족집단을 중심으로 친족(제사공동체)제도를 공고히 하게 되었다.


가족중심의 윤리에 기초한 유교의 확산은 이러한 부계 친족제도를 강화하였다. 초기 유가에서는 가족간의 도덕이 쌍무적이었다. 즉 아버지에 대한 자식의 효도는 반드시 아버지의 자애를 전제로 하며, 남편에 대한 부인의 공경은 부인에 대한 남편의 공경을 전제로 한 것이었다. 이 유가사상이 유교로 새롭게 태어나 국가 정통이념이 되면서, 효의 확대가 충으로 연결된다는 전제 아래 부인은 가장인 남편에게 예속된 존재임을 도덕론을 통해 규정하였다.


조선시대를 지배한 유교는, 음양이론을 바탕으로 조화를 강조하였다. 땅인 부인이 하늘인 남편을 섬기고 남편에게 복종하며 백성은 군주에게 충성하는 것을 순리요 조화라고 믿었다. 그러나 이 가부장적 조화의 논리는 이중규범 속에서 여성이 당하는 성적 차별과 불이익을 은폐하고 지배계층의 권익을 옹호하는 도구가 되었다. 조화의 논리는 여성과 아이는, 남성과 어른의 지배를 받으면서도 자기권리를 내세우지 않도록 요구한다. 순종하고 의존하는 존재방식이 여성의 가장 자연스런 모습이다. 오늘날 도처에서 행해지는 가정 관련 세미나가 표방하는 ‘행복한 가정’ ‘화목한 가정’도 따지고 보면 아내가 남편에게 순종함으로써 갈등을 무마하고 이로써 사랑하는 남편과 사랑받는 아내가 음양의 한쌍으로 탈없이 살아가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오늘날에도 찬미되는 부부의 조화와 상호보완성은 지배와 복종, 주체와 객체가 무사히 짝을 이루는 상태를 가리킨다.



3-2. 호적제도와 가부장제 혈통주의



최근 발간된 [고려시대 사람들]은 고려 건국 때부터 호적작성이 본격화했고, 그 목적은 호구 파악을 위한 것이었다고 적고 있다. 이 호적에는 부계뿐 아니라 모계 쪽 친족도 동등한 비중으로 실었다고 한다. 이 책에 따르면, 고려시대에는 여성들의 권익이 확실히 보장됐고, 페미니즘이 힘을 얻고 있는 지금보다 더욱 여성권익에 대해 진보적이기까지 하다. 처가살이는 일반적인 형태였고 유산 또한 균등하게 분배되었다. 재산균분에 따라 딸들도 제사를 맡았고 남아선호 사상도 존재하지 않았다. 가문의 대를 이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없었기 때문이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서 논란이 되는 동성동본 결혼금지도, 왕실이 필요에 따라 근친혼을 허용했기 때문에 의미가 없었다.


조선조에서 가(家)는 남계를 통해서만 이어졌으므로 아들선호 사상이 지배했고, 가족관계에서는 부부관계보다 부자관계가 중심이 되었다. 근대 이후 가족관계는 부부 중심으로 옮겨 지고 있지만, 아들을 낳아 가의 대를 잇는다는 생각의 뿌리는 아직도 완고해서, 성감별 후 여아를 낙태하는 사례가 줄지 않고 있다. 1990년 현재 0~4세 여아 100명에 대해 남아 111명으로 집계되어 우리사회가 아직도 전통적 남아선호 사상을 고수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해방후 세 차례 있었던 가족법 개정은 여성지위 회복을 위한 과정이며, 가부장적 사고를 대표하는 유교집단과 여성권익을 대변하는 여성단체의 갈등과 조정의 결과라 할 수 있다.


수차에 걸친 개정작업으로 현행 가족법은 아버지 위주의 친권제도, 친족관계(남편과 처가의 관계를 아내와 시가의 관계가 똑같이 다룬다) 등에서는 바람직한 방향으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남계 중심의 가부장제를 지키려는 흔적이 남아 있다.


대표적으로 문제가 되는 것이 호주제도다. 한국의 가족법에서는, 한 집안의 장으로서 가족구성원의 우두머리이며 가족을 통솔하는 호주는,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가장으로 인정되는 남자만 될 수 있다. 또 여성에게 결혼이란, 아버지의 호적에서 남편의 호적에 들어가는 것을 의미한다. 또 아이들은 아버지의 성과 본을 따르고 부가에 입적하는 것이 원칙이다. 아버지를 알 수 없는 아이만 어머니의 성을 따르고 모가에 입적한다. 바로 이 같은 호주제도가 남아 선호사상을 부채질한다. 이 호주제도가 존재하는 한 태어나기 전에 살해되는 생명은 끝없이 늘어갈 것이다.


한국의 호주제도는 일본민법의 영향을 크게 받았다. 일본은 1947년 호주제도를 폐지, 그 후 가족의 성을 아버지 성이나 어머니 성 중 자유롭게 선택하고 있는데, 우리는 1989년의 가족법 개정 운동에서조차 이에 대해 논의하지 못하였다.


우리나라의 호적 제도의 불합리성은, 최근 늘어나는 외국인노동자들의 국적법과도 연계된다. 즉 외국인여성노동자가 한국남자와 결혼한 경우에는 남편의 호적에 오르면 되지만, 외국인남성의 경우는 아내의 호적에 들어가지 못하므로 한국적을 얻지 못하고 따라서 불이익을 당한다.


최근 여성계 일각에서 일고 있는 부모성쓰기 운동은 여남 불평등을 심화하는 호주제도에 대한 도전이다.(성을 이어간다는 것은 인간 삶의 역사성을 고려할 때 마땅한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어느 성을 쓰든, 배타적 혈연중심적 발상에서 오는 것이므로, '부모성쓰기'도 다시 생각할 점이 있긴 하다).



3-3. 핵가족 안의 애정적 개인주의는 가족이기주의의 다른 이름



한편 가족의 형태를 보면, 오늘의 상식과 달리, 조선시대에는 소규모 가족이 지배적이었으며 가족유형도 부부중심의 핵가족이 보편적이었다. 일반화하기는 어려우나 조선조 후기 몇몇 지역의 호적자료에 의하면, 가구원수는 농촌 상민 가족의 경우 5인 이하의 가족이 다수인 것으로 나타난다. 도시 가족도 양반가족은 평균 3.7~4인, 상민 가족은 3.4인에 불과하였고 경제적 이유로 결혼하지 못한 1인 가구를 이루는 경우가 많은 천민의 경우 더욱 낮은 3명을 기록하고 있다. 직계가족은 조선중기까지 10%가 안되었고 핵가족은 65%를 차지했으며,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이 강화하는 조선조 후기에도 전체의 1/4을 약간 넘었다. ([한국제도사 연구] 6장, [여성학 강의] 83) 그럼에도 결혼한 장남이 부모를 모시고 사는 부계 직계가족은 이념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했다. 이러한 성격은 핵가족화가 심화한 오늘날까지도 이어지고 있다.


산업화 과정 자체가 핵가족화 현상을 가져온 것은 아니다. 산업화 이전부터 가족은 적어도 형태적으로는 핵가족이었다. 단 산업화는 가족기능이나 가족가치관, 가족 발달단계 등에 많은 영향을 미쳤다. 특히 사회의 전문화와 더불어 가족기능의 전문화가 진행되면서 가족은 소비의 기능과 출산 그리고 자녀양육의 기능을 주로 담당하게 되었다. 가족기능의 전문화와 가족규모의 축소는 결과적으로 지역공동체와의 유대와 사회관계를 희생하고 핵가족만의 친밀한 관계, 자녀중심의 가족을 지향해 가는 방향으로 변화해 갔다고 볼 수 있다. 그 결과 핵가족은 사회변화에 대한 적응력이 떨어지고 다양한 역할 모델을 가지고 성장할 수 있는 가능성이 떨어진 셈이다. ([가족과 한국사회] 50)



아직은 한국가족의 대다수인 부부-자녀핵가족 규범은, 가부장제와 이것을 바탕으로 해서 틀 지어진 가족중심주의, 자녀중심주의, 기능적이고 사적이고 애정적인 가족관계 등에 힘입어 지켜지고 있다. 아니 지켜야 한다고 여겨지고 있다. 가부장제에서 부부의 이중적 성규범과 이분법적 성역할로 상호보완성과 조화의 미덕을 보여준다고 여겼던 가족은, 바로 이점 때문에 평등하고 자유로운 인간관계의 장이 되지 못하였다. 여성이 사회와 분리된 채 집안에서 행하는 자식 양육과 교육은 내 자식지키기로 고착되고 여기다 자본주의의 생존논리인 경쟁적 삶의 논리가 가세하여 가족이기주의를 양산하였다. 우리시대의 대표적인 병리현상인 지나친 교육열과 입시경쟁도 다 가족이기주의의 산물이다. 사적인 가족영역과 공적인 이웃 혹은 사회 영역을 구별짓는 가시적인 경계가 담(울타리)이지만, 이것보다 더 완고한 불가시적인 울타리는 바로 이 가족이기주의이다.



4. 울타리를 넘어(경계에 대한 숙고): 해체해야 할 가부장제 가족



가족이 사적인 영역으로만 남아있을 때, 가족 안과 밖을 가르는 경계는 가족이기주의를 조장하고, 이 흐르지 않는 가족사랑 즉 애착은 이웃과 사회는 물론 내 가족에게도 악영향을 끼친다는 것은 설명할 필요조차 없을 것이다. 똑같이 중요한 것은 가족 안과 밖의 경계로 가족이 사적영역으로 지켜질 때 가족 안에서 일어나는 부조리 불평등한 관계 억압, 폭력 등이 그저 '그 집안 일'로써 방치된다는 것이다. 울타리 안팎의 삶이 서로 소통하지 않을 때, 가부장적 권위주의와 모성의 일방적 희생, 불평등한 부부관계, 남계중심의 호적과 호주제도 등의 모순을 안고도, 가족은 가족 바깥의 도움을 받지 못하고 ‘기가막힌 채'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 동안 부부와 미혼자녀로 구성된 가족이 핵가족형 가족의 이상으로 불려 왔고, 여기서 벗어난 가족은 일단 문제가족, 비정상적 가족, 치료가 필요한 가족으로 치부되었다. 그러나 부부 또는 부모-자녀가 상호보완적으로 톱니처럼 맞물려 돌아가는 가족일지라도 그것이 불평등하고 지배-억압적인 관계를 강화하고 있다면, 이 관계를 지속하는 것이 여기서 벗어나는 것보다 더 낫다고 말할 수 있을까? 평등한 관계와 해방적인 삶이라는 전망에 비춰볼 때 가족이기주의로 지켜지는 소위 '화목한' 전형적 핵가족의 규범에는 앞서 이야기한 대로 수많은 혐의가 있다. 아니, 부모 자녀 단위를 다른 단위 사람들과 구별하는 단어가 없는 사회도 많고, 공간적 경계가 없는 ‘가족’도 있다([여성학 강의] 42)는 사실에 비쳐볼 때, 혈연중심의 가족조차 결코 보편적 규범이 될 수 없다.


이혼으로 인한 편부모 가족, 재혼 가족, 맞벌이 가족, 노인부부 가족, 독신부부가족, 소년소녀가장가족, 동성애 가족은 때때로 드러나는 역기능에도 불구하고, 사회변화와 가족자체의 필연적 변화과정 속에서 생긴 또는 정의롭고 평등한 관계와 더 인간다운 삶을 추구하는 과정에서 생긴 가족 형태들이라는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우리 앞에 엄연히 존재하는 삶을 비인간적인 가부장제의 잣대나 구태의연한 가족이데올로기로 재단하려는 것은 넌센스이다. 특히 부모-자녀 가족 규범 때문에 남편 또는 자식이 없는 이혼녀나 미혼모, 미혼독신녀를 마치 비정상인 대하듯 하는 것은 여성들의 주체적인 삶의 가능성을 제한한다.



다원사회에서 가족은 기능적이고 생물학적인 측면이 아니라 올바른 관계 만들기라는 관점에서 이해해야 한다.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가부장적이고 생물학적인 가족이 아니라 평등과 사랑을 바탕으로 한 인간관계이다. 가부장적 성차별적 이중윤리가 혈연 중심의 가족 안에서 헐어야 할 담이라면, 가족이기주의는 혈연적 가족과 그 가족 바깥을 갈라놓는 울타리이다. 시급히 해결해야 할 한국가족의 과제는 대부분 이 두 울타리를 허는 일과 관계 있다.



가족 울타리 해체의 연장선에서, 혼인과 혈연을 기반한 기존의 가족 틀을 벗어나 개별가족이 더 이상 수행 못하는 공동체적 기능을 회복하고 핵가족의 문제점을 극복하려는 개인과 가족의 운동은 주목할 만하다. 공동체 가족으로는 생산과 소비를 공동으로 하는 대규모의 공동체와, 주로 도시의 핵가족의 문제나 한계를 극복하려는 2~3쌍의 부부와 자녀가 모인 공동체 등이 있다.


전자의 경우는 이스라엘의 기브츠가 전형적인 예이고, 한국에서는 후자의 예들이 간혹 나타나고 있다. 혼인관계나 혈연 중심의 가족관계를 떠난 공동체 운동도 있다.



<원희네와 민희네>


"원희네와 민희네는 농산물 직거래 일을 함께 하면서 공동생활을 시작했다. 원희네는 할머니와 엄마 아빠 원희 동생 등 다섯식구, 민희네는 엄마 아빠 삼촌 민희 동생 둘 등 여섯식구이다. 방이 네개인 아파트에 사는 이들은 부부가 각각 방 하나를 할머니와 여형제 둘이 한방, 삼촌과 남자 둘이 한 방을 쓴다. 가족간의 호칭도 민희네는 원희 아빠 엄마를 큰엄마 큰 아빠로 민희네 엄마 아빠는 작은 엄마 작은 아빠로 부른다.생활비는 식구수대로 6:4로 나누어 내고 지출을 전체 살림에 드는 비용만 공동부담하고 개별적으로 필요한 것은 각자 부담한다. 엄마 아빠가 외출할 때는 서로 아이들을 맡아주고 집안행사도 함께 치른다...." (여성동아 1994.3)


2차 자료를 통해 이 두 가족이 어떻게 가부장적 핵가족의 한계를 넘어서고 있는지는 알지 못하나, 혈연중심의 핵가족의 담을 헐고 오늘의 가족이 앓고 있는 공동체성을 회복하는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생활공동체 '맑음터'>


"맑음터는 정신지체장애인 자활교육을 위한 생활공동체다. 정신지체와 자폐 뇌성마비 등 중복장애를 가졌으면서도 부모가 경제력이 없고, 그렇다고 국가의 혜택을 받지도 못하는 장애인 4명과 권원장이 합정동에 살림을 꾸린 후 특수학교를 졸업했으나 자활책이 없는 장애인들이 하나들 모여 25명의 대가족을 이루었다. 옥상 가건물에 작업장이나 교육장 생활장 등으로 이용할 가건물을 만들고 카드 생활소품 등을 만들어 가톨릭 사회복지회를 통해 판다."


사회에서 소수 약자로서 소외된 이들이 가족을 이루고 있는 경우다. 혼인관계나 혈연 중심의 가족 개념을 떠난 이 같은 공동체운동은, 완전하지는 않지만, 나름대로 이 시대의 새로운 가족공동체의 한 시도라 할 수 있다.



이삭이네 가족은 앞의 두 예를 조화한 좋은 예이다.


"이삭이의 혈연가족은 사회단체에서 자원봉사를 하는 어머니와 목사인 아버지 그리고 형 이렇게 넷이다. 그러나 이삭이네 가족은 모두 13명. 어머니가 없고 아버지는 있어도 알콜중독이거나 폭력적이어서 집을 뛰쳐나온 9명의 청소년도 이삭이네 가족이기 때문이다. 목사인 아버지와 사회단체에서 자원봉사원으로 일하는 어버니는 각자 사회활동을 하며 가사와 아이들 돌보는 일을 서로 분담해서 한다. 어머니가 아이들 때문에 집을 떠나지 못하는 일은 없다. 아버지가 집안 일을 기꺼이 맡기 때문이다."


이삭이네는 전형적인 부부-자녀 핵가족이 혈연의 담을 허물고 동시에 남녀차별적 가부장제 가족의 한계를 넘어서 평등과 사랑의 가족 공동체를 일궈 가고 있다.



우리가 가족의 위기라고 부르는 것과 진정한 위기의 실체는 다른 것임을 알게 되었다. 우리에게 참으로 위협이 되는 것은 아버지 권위와 희생적 모성과 부계혈연으로 지켜온 가족의 흔들림이 아니다. 여성과 남성, 약자와 강자를 분리하고, 이들의 억압과 지배관계를 조장해 온 가부장제와 이 사회, 나아가 세계가 더불어 사는 생명공동체로 나아가는 것을 가로막는 혈연적 가족이기주의야말로 우리의 삶과 가족구성원을 위협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가부장적 애정적 가족은 지켜야 할 것이 아니라 해체해야 할 규범이다.


가부장제란 가족 안에서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 나아가 지구적으로, 강자가 약자를 억압하는 구조이다. 다수의 삶의 방식에 압도되어 기를 못펴는 다양한 가족집단들, '지구화'라는 구호 아래서 고통당하는 경제적 약자들은 모두 가부장적 삶의 피해자라 할 수 있다.



가족의 포스트모더니즘적 해체는, 가족제도와 가족 그 자체의 근본적인 변화를 통한 새로운 인간관계 정립이라는 점에서 가족의 문제나 가족으로 인한 문제에 대한 가장 분명한 대답이다. 그러나 가족과 인간 삶의 연속적인 측면과 다양성과 모호성을 그대로 두고 이상향을 향해 무작정 달려갈 수도 없는 것이 현실이다. 가족해체가 아무리 명백한 대답이라 하더라도, 온전한 사람은 많은 경우 따뜻한 사랑이 있는 건강한 가족에서 길러져 왔던 많은 예들도 부인할 수는 없다.


혈연을 넘어선 이웃공동체 또는 대안가족공동체 시도들은 주로 빈민, 장애인, 미혼모 등 계급적으로, 수적으로 약자인 주변부 사람들에게서 주로 나타난다. 가부장적, 이기적 혈연가족 해체와 더불어 사는 공동체 실현은 지켜야 할 것이 많은 기득권 자들에게는 거리가 있는 이야기로 보인다.



대안가족공동체운동, 자녀교육과 효의 사회화운동 그리고 갖가지 전위적인 동호인 가족의 시도 등은 모호하고 모순된 가족현실 속에 드문드문 켜진 등불이다. 사회경제적 약자이기 때문에 오히려 참 삶에 눈뜨게 된 사람들이 벌이는 이 모든 운동과 시도가 정의와 사랑의 관계를 기초로 하고 있다면, 그것을 가족이라 부르든 아니면 어떤 다른 이름으로 부르든 상관이 없을 것이다.


「교회와 세계」, 1998년 8월호.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