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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연구

왜 오셨을까

작성자진리수호|작성시간10.04.20|조회수79 목록 댓글 0

“왜 오셨을까?”

□ 요 1:1-18 □


김영봉 목사(협성대, 신약학교수)



I. 본문 소개


이 본문은 요한복음 전체에 대한 서문이다. 이 서문의 성격과 기원에 대해서는 논란이 많이 있다. 이 논란에 대해서는 “본문 해설”에서 자세히 다루겠다. 그 기원이 어찌되었든, 이 서문은 그 용어와 내용으로 볼 때, 요한복음 전체 안에서 말하려고 하는 내용을 미리 요약해서 전해 주는 역할을 한다. 몇 구절을 제외하고는 시(詩)로 되어 있으며, 한 구절 한 구절 안에 매우 함축적인 의미를 품고 있다. 히브리인들의 시가 대개 그렇듯이, 이 서문도 역시 대구적 병행법(chiastic parallelism)으로 되어 있다.

 

   a. 1-5절: 로고스와 하나님, 창조, 인류

      b. 6-8절: 세례 요한의 증거

         c. 9-11절: 로고스의 여행

            d. 12-13절: 선물로 준 권세

         c'. 14절: 로고스의 여행

      b'. 15절: 세례 요한의 증거

   a'. 16-18절: 로고스와 인류, 재창조, 하나님


이러한 대구적 병행법에서는 가장 중심에 있는 구절이 중심 주제로서 역할을 하곤 한다. 그렇다면 이 서문에서 가장 강조하려는 점은 “말씀을 믿는 자는 하나님의 자녀가 된다”는 선언에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이것으로만 이 서문의 주제를 국한시키는 것은 옳지 않다. 이 서문은 구구절절이 다양한 주제와 깊은 사상을 담고 있기 때문에, 어느 한 구절도 소홀히 해서는 안 될 것이다. 따라서 독자는 이 서문을 시적 정서를 가지고 수 차례 정독할 필요가 있다. 먼저 수 차례 정독을 한 다음, “본문 읽기”의 해설을 꼼꼼히 보고, 그 이해의 배경에서 다사 몇 번을 읽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이렇게 할 때, 본문이 가지고 있는 여러 차원들이 드러날 수 있을 것이다.


II. 본문 읽기


1절: 1절의 그리스어 원문은 소위 “계단식 병행법”(step parallelism)으로 되어 있다. 번역상 이 병행법이 잘 드러나지는 않지만, 이 병행법에 따라서 다시 번역하여 도식화하면 이렇게 된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하나님이 곧 이 말씀이었다.

이렇게 보면, 저자는 이 서문에서 단순히 심오한 내용만을 전하려고 한 것이 아니라, 수사적 기법에 대해서도 꽤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저자의 수사적 기법에 의해서 1절은 완전한 한 문장이 되었다. 처음과 나중에 “말씀”이라는 단어로 테두리를 치고, 한 단어 한 단어를 고리처럼 엮어 나갔다. 이렇게 함으로써 독자들은 듣는 즉시 외울 수 있었고, 그 시적 감상에 빠져 들 수 있었다.

“태초에”: 이것은 독자로 하여금 창세기의 “베레쉿트”를 생각나게 한다. 하지만 알고 보면, 창세기의 태초와 이 서문의 태초가 정확히 동일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창세기의 태초는 창조의 활동이 시작되던 때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니라”고 되어 있다. 논리적으로 보면 하나님은 태초 이전에 계셨다. 여기서 말하는 “태초”는 하나님께서 창조의 사역을 시작하실 때였다. 반면, 요한복음의 “태초”는 창조의 활동이 시작되기 이전이다. 그 이전의 상황 중에서 한 가지를 저자는 여기에서 밝히고 있는 것이다. 창조에 대한 언급은 3절에서나 언급된다. 이렇게 본다면, 요한복음은 창세기보다도 더 앞선 시기로 거슬러 올라가고 있는 것이다.

“말씀이”: 그리스어로는 “로고스”(ο λογος)이다. 요한복음 저자가 “로고스”를 쓸 때 의미한 것이 정확히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서 학자들은 이 단어가 요한복음 이외에서 어떻게 사용되었는지를 조사하였다. 이러한 조사에서 가장 두드러지게 관심을 끈 것이 스토아 학파에서의 사용이었다. 스토아 철학에서 로고스는 “우주의 이성적 원리”였다. 이성적 원리로서의 이 로고스가 이 철학에서는 신의 역할을 하였다. 이 로고스의 원리에 따라서 살아가는 것이 인간으로서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의무였다. 이렇듯,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이론은 요한복음 서문의 로고스 사상과 거리가 있다. 로고스라는 용어를 중요하게 사용한 또 다른 사람은 알렉산드리아에서 활동했던 유대인 철학자 필로(Philo)였다. 필로는 스토아 학파의 로고스 이론을 구약성경의 지혜 사상에 접목시켰다. 이렇게 함으로써 필로의 로고스 사상은 요한복음의 서문의 사상과 상당히 닮은 모습을 보여 준다. 하지만 문제는 요한복음의 저자가 필로의 저작을 읽고 영향을 받았다는 증거를 찾을 수 없다는 데 있다. 따라서 필로의 로고스 사상을 그대로 이 서문에 적용하여 이해하는 것도 한계가 있다.

이렇게, 한 동안, 로고스의 배경에 대한 연구가 그리스-로마 문화권을 중심으로 이루어졌다. 이러한 연구가 결국 한계를 드러내자, 학자들은 유대적인 배경에 대하여 연구하기 시작하였다. 더구나, 요한복음의 사상적 배경이 헬레니즘이 아니라 유대교 사상이라는 것이 정설이 되어 버리자, 구약성경과 유대적인 사상의 빛에서 로고스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을 하였다. 특히 관심을 집중시킨 것이 창세기에서 창조의 사역자로 활동하는 하나님의 말씀(창 1:3), 예언자들에게 임했던 “하나님의 말씀”(“다바르 야훼”; 사 40:8; 55:1), 그리고 창조의 사역자요 인격적인 존재로 그려지고 있는 “지혜”(잠 8장) 등이다. 유대인이었을 것이 분명한 저자는 이러한 배경들에서 착안을 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로고스로 표현을 하기로 결정했을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본다면, 로고스는 인격적인 기능을 가지고 있는 “하나님의 뜻”을 가리킨다고 보아야 한다. 저자는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에 하나님의 생각 즉 로고스가 독립된 인격체로 존재하고 있었으며, 이 로고스가 천지 창조의 사역을 대행했다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14절) 우리 가운데 거하게 되었다. 그렇다면 예수 그리스도는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의 계시(revelation of God)이며 동시에 하나님의 계시자(revealer)이다. 예수는 하나님의 생각이 육신을 입고 오신 분이다. 따라서 하나님의 모든 생각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다. 과거에는 율법을 계시라고 생각하였고, 모세를 가장 위대한 계시자라고 생각을 하였으나, 이제는 아니다. 하나님의 생각 자체가 육신을 입고 오셨기 때문에 이제 모세의 시대는 갔다. 이제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시대가 시작되었다. 예수는 참된 계시자이다--이것은 요한복음 전체의 중심 주제 중 하나이다.

“계시니라”: 문법적으로는 미완료(엔, ην)이다. 미완료는 과거의 어떤 상태가 지속되는 경우를 표현할 때 사용된다. 즉 하나님이 존재하실 때부터 천지가 창조되던 “태초”까지, 그리고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오실 때까지, 말씀은 언제나 계셨다. 명멸(明滅)하는 존재가 아니라, 항존(恒存)하는 존재라는 것이다.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시제는 여전히 미완료이다. 원래부터 있었던 그 말씀은, 스토아 철학에서 말하는 것과 같이, 홀로 신(神)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그 말씀은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이렇게 부연하고 있는 것이다. “함께”라고 번역된 단어의 그리스어는 “프로스”(προς)이다. “함께”라는 번역은 정지의 의미를 전해 주지만, “프로스”는 운동을 의미한다. 즉, 말씀이 부단히 하나님께 접근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왜 이런 표현을 사용했을까? 저자는 말씀과 하나님 사이에 존재했던 역동적인 인격적 사귐을 생각하고 있었을 것이다. 똑 같은 생각을, 저자는 18절에서 “아버지 품속에 있다”는 말로 표현한다.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이 구절은 번역의 한계를 느끼게 해 주는 구절이다. 원문에는 정관사 없이 그냥 “데오스”(Θεος)라고만 쓰고 있다. 이런 경우, “하나님”이라고 번역하면 안 된다. 정확한 뜻을 찾자면, “신적 존재”가 될 것이다.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말씀이 신적 존재라는 뜻이다. 저자는 “데오스” 앞에서 정관사를 제거함으로써, 독자들이 혹시나 갖게 될 오해를 제거하고 있는 것이다. 정관사를 쓰면, 스토아 학파의 사상과 같아진다. 말씀이 곧 성부 하나님이 되기 때문이다. 저자에 의하면, 말씀은 신적인 존재일 뿐, 성부 하나님과 같은 존재는 아니다. 이러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정관사를 떼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공동번역 성서에서는 “하나님과 똑같은 분이셨다”고 의역하고 있다. 개역성경의 경우, “하나님이시니라”의 시제도 틀렸다. 여기에서도 저자는 여전히 미완료를 사용하고 있다. 따라서 “하나님이셨느니라”가 되어야 한다.


2절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이 절은 1절을 다시 요약하여 강조한다. 여기에서도 역시 “함께”는 “프로스”가 쓰였다. 즉, 하나님과 말씀 사이에 활발한 인격적 교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3절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니”: 여기서의 시제는 단순과거이다. 즉 일회적인 사건을 말한다. 천지창조는 일회적인 사건이기 때문에 단순과거를 사용한 것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천지창조에 개입했다는 사실은 구약성경에서 확인된다. 창세기 1장 3절 이하에 보면, 천지창조는 하나님의 말씀으로 이루어졌다. 잠언에는 “여호와께서는 지혜로 땅을 세우셨으며 명철로 하늘을 굳게 펴셨고”(3:19)라고 말하고 있고, 또한


   그가 하늘을 지으시며 궁창으로 해면에 두루실 때에

   내(지혜)가 거기 있었고

   그가 위로 구름 하늘을 견고하게 하시며

   바다의 샘들을 힘있게 하시며

   바다의 한계를 정하여 물로 명령을 거스르지 못하게 하시며

   또 땅의 기초를 정하실 때에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었느니라”(8:27-31)


고 말하고 있다. 따라서 저자의 로고스 사상은 구약성경에 든든히 뿌리를 내리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이것은 히브리인들이 자주 사용하던 반어적 병행구이다. 즉, 앞에서 한 내용을 반대로 다시 표현함으로써 독자들에게 분명하게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수사법이다.

  

4절: 3절로부터 4절로 넘어오는 사이에 마침표를 어디에 찍어야 하는가의 문제가 심각한 논란을 불러 일으켰다. 개역성경은 “호 게곤넨”(ο γεγονεν) 뒤에 마침표를 찍어야 한다고 생각하고 번역을 하였다. 그래서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 생명이 있으니”가 되었다. 하지만 많은 사본들을 보면, “호 게곤넨” 앞에 마침표를 찍고 있다. 그렇게 되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그 안에서 지어진 것이 생명이었으니”라고 번역을 해야 한다. 오늘날의 신학적 상황에서는 두 경우가 큰 차이를 가지는 것 같지 않지만, 이단자들과 싸움을 하고 있던 초대 교부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문제였다. 다수의 학자들이 “호 게곤넨”을 4절에 붙어야 한다고 본다. 하지만 큰 차이는 없다고 보아야 한다.

4절부터 5절은 1절처럼 “계단식 병행법”을 사용하고 있다. 이 병행법은 우리의 번역 안에 그대로 반영되어 있다. 이것을 도식화하면 다음과 같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이라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생명”은 “조에”(ζωη)의 번역인데, 이 단어는 신약성경 안에서 대부분의 경우에 영원한 생명을 의미한다. 요한복음 안에서의 쓰임새를 볼 때, 이 생명은 “영생”과 같은 것이라고 볼 수 있다. 실제로 요한복음 안에서 “생명”은 “영생”과 동의어로 사용된다. 말씀은 그 자체로서 영원한 생명이다. 영원하신 생명이기 때문에 창조의 사역을 행할 수 있었다. 따라서 한계적인 생명을 가지고 있는 인간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연합되어야 한다. 그래서 17장 3절에서는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라고 하였다. 히브리어의 “알다”(“야다”)는 단순한 지식적인 앎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인격적인 교제를 말한다. 즉,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에게 인격적으로 연결될 때, 영생을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 안에 영생이 있기 때문이다.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사람들의 빛”이라는 말은 “사람들을 비추는 빛”이라는 뜻이다. 생명은 말씀을 가리킨다. 말씀은 하나님의 뜻을 계시해 주는 존재이므로, 그를 만나면 인간은 개명(開明)하게 된다.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된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요 14:6)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에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것이 있다. 앞에서 우리는, 저자가 말하고 있는 “태초”가 창세기의 태초를 앞선 것이라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이와 마찬가지로, 4절에서 저자는 새로운 창조, 진정한 창조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말씀에 의해서 태초에 빛이 창조되고 생명이 창조되었다. 하지만 그 빛과 생명은 한계적인 것이었다. 진정한 빛과 진정한 생명이 필요하다. 그 참된 빛이 말씀 안에서 이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그 참된 생명, 영원한 생명이 말씀을 통하여 이제 믿는 자들에게 주어진다. 천지가 창조될 때 주어졌던 빛과 생명보다 더 중요한 빛과 생명이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주어지게 되었다. 이런 점에서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은 새로운 창조인 셈이다.


5절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여기에서 비로소 말씀의 현재적인 활동이 묘사된다. 1절, 2절, 4절은 말씀의 존재 상태에 대한 묘사이다. 3절에서는 과거의 창조 사역에 대한 묘사이다. 말씀은 과거의 활동을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활동하고 있다. 그 활동에 대하여 5절이 설명하기 시작한다. 그 빛이 어두움에 비추었다. 여기서의 “어두움”은 창세기 1장 2절을 생각나게 한다: “땅이 혼돈하고 공허하며 흑암이 깊음 위에 있고 하나님의 신은 수면에 운행하시니라.” 첫 번째 창조 때에도 흑암에 빛이 비추임으로써 시작되었듯이, 새로운 창조도 역시 어두움 안에 참된 빛이 비추임으로써 시작되었다. 그렇다면 “어두움”은 무엇인가? 이것은 죄에 물들어 있는, 영적인 눈이 멀어 있는 인간 세상을 가리킨다. 참된 빛이신 예수께서 이 어두운 세상에 들어오심으로써 새로운 창조가 시작되었다. 빛과 어두움의 대조는 요한복음 안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대조법이다.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예수의 오심에 대한 이 세상의 반응이 상징적으로 묘사되어 있다. “깨닫다”로 번역된 “카타람바노”(καταλαμβανω)는 두 가지의 의미로 번역될 수 있다. 하나는 우리의 번역에서처럼 “깨닫다”이며, 다른 하나는 “이기다”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는 자주 두 가지로 번역될 수 있는 단어를 선택하여 사용하곤 한다. 이러한 사용을 통하여 저자는 독자로 하여금 두 가지 의미를 모두 생각해 보도록 요청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우리는 둘 중의 하나를 택하려 하지 말고, 두 가지의 의미를 함께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그렇다면 눈이 멀어 있는 이 세상은, 마치 장님이 아침의 햇빛을 알 수 없듯이, 빛의 오심을 알지 못했다. 또한 어두움은 빛을 이기지 못하였다. 오히려 빛이 어두움을 몰아내기 시작하였다. 이 세상을 덮고 있는 어두움이 빛의 오심으로 인하여 벗겨지기 시작하였다.


6절 “하나님께로서 보내심을 받은 사람이 났으니 이름은 요한이라”: 5절까지의 시적이며 장중한 맛이 갑자기 사라지고, 산문조의 문장이 나온다. 주제도 역시 “말씀”에서 “요한”으로 전환된다. 이런 까닭에 많은 학자들이 6절부터 8절까지를 후대의 첨가부분이라고 간주한다. 또 어떤 학자들(예컨대, Barnabas Lindars)은 이것이 원래의 복음서 첫 문장이며, 로고스 찬가가 후에 첨가된 것이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 진상이 어떻든지, 주석자의 임무는 우리에게 남겨진 최종 형태의 본문을 존중하고, 있는 그대로 해석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요한이 언급되고, 이어서 예수와 요한이 비교되고 있는 것을 보면, 저자의 주된 관심사 중 하나가 여기에 반영되어 있다고 볼 수 있다. 우리는 여러 가지 증거에 의해서, 초대 교회 시대에 세례 요한을 추종하는 종파가 있었으며, 이 종파에서는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생각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추정할 수 있다. 따라서 초대 교회 지도자들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세례 요한이 아니라 예수가 메시야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일이다. 요한복음의 저자도 이 서문에서 그러한 과제를 해결하려 하고 있다고 보아야 한다.

   

7절 “저가 증거하러 왔으니 곧 빛에 대하여 증거하고”: 세례 요한은 증거하러 온 사람이었다. “증거”는 요한복음에서 매우 중요한 주제이다. “증거” 혹은 “증거하다”라는 단어가 요한복음 안에서 모두 46회나 사용되고 있다. 3장 27-36에서 세례 요한은 스스로 자신이 예수에 대하여 증거하는 자라고 규정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는 이 세상에 참된 생명과 빛을 줌으로써 새로운 창조를 하기 위해서 왔다. 반면, 요한은 그 예수가 참으로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증거하는 사명을 가지고 파견을 받았다.

“모든 사람으로 자기를 인하여 믿게 하려 함이라”: 이 말처럼, 세례 요한은 자신의 제자들에게 예수에 대하여 증거함으로써 예수의 제자가 되게 하였다. 그 뿐 아니라, 그의 증언이 복음서에 기록됨으로써 읽는 모든 사람들에게 증언자가 되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말하는 “모든 사람”은 세례 요한의 증언을 듣고 읽은 모든 사람을 가리킨다.

 

8절 “그는 이 빛이 아니요 이 빛에 대하여 증거하러 온 자라”: 마치 1절에서 말한 내용을 2절에서 다시 요약하고 강조하였듯이, 여기에서도 6-7절에서 말한 내용을 8절이 요약하여 다시 한번 강조하고 있다. 앞절에서 암시한 메시지를 명료하게 표현하고 있다. 요한이 빛에 대한 증언자라는 말은 그가 빛이 아니라는 메시지를 포함하고 있다. 그러나 저자는 그 사실을 좀 더 명료하게 하기 위해서 확실하게 표현한다. 결국, 6-8절의 내용은 참빛이신 예수와 증언자인 요한의 차이를 분명하게 천명하고 있다.


9절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이 있었으니”: “참빛”(“토 포스 토 알레티논”, το φως το αληθινον)은 “거짓 빛”에 반대되는 개념이다. “빛다운 빛”, “진짜 빛”이라는 뜻이다. 육안으로 볼 수 있는 빛은 빛다운 빛이 아니다. 참된 빛은 예수께서 비추어 주시는 영적인 빛이다. 이 빛이 세상 안으로 들어 왔다. 요한복음 안에서 “세상”(“코스모스”, κοσμος)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인다. 중립적인 의미로서 인간 세상을 가리키기도 하고, 부정적인 의미에서 죄악된 세상을 의미하기도 한다. 여기에서는 중립적인 의미로 쓰였다. 이 빛은 믿는 사람들에게만 비추지 않는다. “각 사람” 즉 “모든 사람”(“판타 안트로폰”, παντα ανθρωπον)에게 비춘다.


10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계셨으며”는 미완료 동사 “엔”(ην)의 번역이다. 즉, 그 빛이 한 동안 이 세상에 거하고 있었다는 뜻이다. 다시 말하면, 사람들이 그 빛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충분한 시간동안 이 세상에 머물러 있었다. 문제는, 빛이 이 세상에 너무 짧은 동안 머물러 있었다는 데 있지 않았다. 오히려 문제는 이 세상이 그 빛을 알아보기를 원하기 않았다는 데 있다. 참으로 아이러니칼한 것은 예수를 알지 못한 그 세상이 바로 예수에 의해서 지어진 피조물이라는 데 있다. 자신을 지은 분을 알아보지 못하는 이 어리석은 세상이여! 앞에서도 말했듯이, “세상”은 두 가지 의미로 쓰이고 있는데, “세상에 계셨으며”와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에서 세상은 중립적인 의미이다. 그러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에서의 세상은 부정적인 의미이다. 이 세상은 “죄에 물든 인간들”을 가리킨다. “알다”는 히브리어적인 의미로 쓰였을 것이다. 히브리어의 “알다”는 “야다”인데, 이것은 인격적인 교제를 가리키는 말이다. 따라서 이 세상은 참빛이신 예수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기를 거부하였다는 뜻이다.


11절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으나”: “자기 땅에”는 “타 이디아”(τα ιδια)의 번역으로서, 이 표현은 “자기 소유” 혹은 “자기 집”을 의미한다. 이것을 개역성경은 “자기 땅에”라고 번역을 했는데, 괜찮은 의역이다. 왜, 이 세상이 예수의 것인가? 이미 3절과 10절에서 언급하였듯이, 이 세상은 예수에 의하여 창조되었다. 따라서 이 세상은 예수의 소유이다. “자기 백성”을 유대인으로만 국한해 보려는 학자들이 있는데, 타당하지 않다. 왜냐하면 “자기 백성”은 앞의 “자기 땅”과 같은 표현으로 보아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땅”이 이 세상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라면, “자기 백성”은 이 세상의 사람들에 대한 일반적인 표현이라고 볼 수 있다. 이 세상의 백성들이 예수를 영접하지 않았다는 주제는 요한복음에서 매우 자주 반복되어 강조된다. “영접하는 것”이 바로 “믿는 것”이라는 사실은 다음 절에서 분명해진다.


12절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 “영접하다”(“람바노”, λαμβανω)는 “믿는다”(“피스튜오”, πιστευω)와 같은 의미로 쓰였다. “이름”은, 구약성경의 배경에서 볼 때, 그 사람 자신을 대표하는 기능을 가진다. 그래서 “여호와의 이름을 찬양하라”(시 113:1)고 했을 때, 그것은 여호와 자신을 찬양하는 것과 다르지 않다. 그래서 예수께서도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라고 기도하였다.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는다는 말은 하나님 자신이 거룩히 존경된다는 뜻이다. 따라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는다는 것은 예수 그리스도 자신을 믿는다는 히브리적 표현법이다. “권세”(“엑쑤시아”, εξουσια)는 “특권”을 말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특권이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인간적인 어떤 노력이나 행위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허락해 주시는 특권이다. 마치, 대통령이 죄인에게 특별 사면을 통하여 시민으로서의 권한을 부여해 주는 것처럼,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에 근거하여 그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부여해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은 특권이다. 왜냐하면 이것은 하나님과의 새로운 계약 안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 된다는 것은 크나큰 특권이다. 요한복음 저자는 “아들”(“휘오스”, υιος)이라는 단어를 예수에게만 사용하고, 다른 믿는 자들에게는 “자녀들”(“텍크나”, τεκνα)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13절 “이는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니라”: “혈통으로나”는 “엑쓰 하이마톤”(εξ αιματων)의 번역이다. 직역하면 “피들로부터”이다. 랍비 문서에 보면, 인간의 씨앗이 남자의 피 속에 있으며, 이 피가 여자의 피와 섞일 때 아기가 태어난다고 되어 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의 생리적인 현상에 의해서 생기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육정으로나”는 인간의 성적인 욕망을 가리킨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인간의 성적인 욕망에 의해서 생겨나는 것도 아니라는 뜻이다. “사람의 뜻으로”를 직역하면 “남자의 뜻으로”이다. 여기서 저자는 의도적으로 “남자”(“아네르”, ανηρ)라는 말을 썼는데, 당시에는 성적인 활동이 주로 남자의 주도하에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 세 가지의 표현은 모두 인간의 성적인 결합과 생리적인 현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당시에는 인간이 태어나기 위해서는 남자(혹은 남편)의 의지가 있어야 했고, 성적인 욕망이 있어야 했으며, 남자와 여자의 피가 섞여야 했다. 그러나 인간이 하나님의 자녀로서 새로 태어나는 것은 이런 육신적인 탄생과 전혀 다른 과정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하나님의 자녀들은 “하나님께로서 난 자들이다.” “하나님께로서 나는 것”을 3장 3절에서는 “위로부터 나는 것”으로, 3장 5절에서는 “물과 성령으로 나는 것”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하나님의 계약 백성이 되는 것이 새로운 탄생이다. 그것은 인간적인 노력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부여해주시는 특권이다.


14절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저자는 여기에서 “인간”(“안트로포스”, ανθρωπος)이라는 말을 사용하지 않고, “육신”(“싸륵크스”, σαρξ)이라는 말을 사용한다. “육신”이라는 말은 여기에서 “인간”이라는 말과 거의 같은 의미로 쓰였다. 하지만 저자가 굳이 “싸륵크스”를 사용한 이유가 따로 있었다. 그것은 당시에 많은 사람들에게 영향을 끼치고 있던 가현설(Docetism)을 반박하기 위해서였다. 가현설은 그리스도의 영이 예수라는 사람 위에 잠간 동안 머물다가 떠났다고 믿는다. 영이 육신과 같을 수 없다는 그들의 입장 때문이었다. 이러한 입장에 대하여 반박하기 위해서, 가현설을 추종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싫어하던 “육신”이라는 단어를 일부러 사용한 것이다. 이로써 “성육신 기독론”(Incarnation Christology)이 강조되고 있다. 예수는 말씀 즉 하나님의 생각이 육화(肉化)된 분이라는 것이 성육신 기독론이다. 이로써 육신 혹은 물질은 악하다는 가현설의 입장이 배격되었다.

여기에서 갑자기 “우리”라는 인칭대명사가 등장한다. 이로써 저자는 이야기의 시점을 먼 과거에서 현재로 돌려놓는다. 문학적으로는, “우리”라는 인칭대명사가 독자를 저자와 같은 상황 속에서 생각하도록 유도하는 역할을 한다. 이로써 독자는 이 우주적인 드라마의 일원으로서 참여하게 된다.

“거하시매”는 단순 과거형인데, “에스케노쎈”(εσκηνωσεν)의 번역이다. 이 동사는 명사 “스케네”(σκηνη)와 연결되어 있으며, 따라서 그 의미는 “잠시 동안 장막을 치다”는 뜻이다. “스케네”는 구약성경과 유대교 문헌 속에서 여러 가지의 의미로 쓰였다. “하나님의 장막”이라는 뜻으로 쓰이기도 했고(Sir. 24:8), 예루살렘의 성전이 “스케네”로 불리기도 했다(Sir. 24:10). 뿐만 아니라, “스케눈”이라는 동사의 음은 “거하다”는 뜻을 가진 히브리어 “샤칸”(shakan)을 연상시키며, 여기에서 파생된 “쉐키나”(shekinah)라는 단어도 연상시킨다. “쉐키나”는 하나님의 현존을 의미한다. 따라서 “말씀이 우리 가운데 스케눈했다”는 이 표현은 “예수를 통하여 하나님께서 우리 가운데 임하셨다”는 뜻이다. 예수는 새로운 성전으로서 우리 가운데 임하셨다는 의미를 가지고 있는 것이다. 구약에서 이미 잘 표현되었듯이, 성전은 하나님의 현존의 장소이다. 이제 하나님은 성전에 현존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현존하신다. 이것이 2장 21절(“그러나 예수는 성전된 자기 육체를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에서 말하고자 하는 뜻이다. 

“우리가 그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영광”(“독싸”, δοξα)은 히브리어 “카봇”의 번역이다. “카봇”은 창조주 하나님의 본질에 속한다. 이 영광은 하나님이 나타나실 때 눈에 보이게 드러난다. 그 놀랍고 찬란한 영광은 인간의 형용을 뛰어 넘는다. 저자와 믿는 자들(“우리”)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아버지의 독생자로서의 영광을 보았다. 요한복음에서는 “영광” 혹은 “영화롭게 하다”라는 용어가 매우 많이 사용되고 있다. 13장부터 21장까지를 “영광의 책”이라고 부를 정도로, 영광은 중요한 개념이다. 예수의 영광은 죽음을 통하여 원래 있던 하나님의 우편으로 들려 올려짐을 통하여 가장 결정적으로 드러났다. 요한복음의 저자에 의하면, 예수께서 지상 사역 동안에 행한 기적들은 진정으로 예수의 영광을 대변하지 못한다. 그것들은 다만 표적에 불과하다. 예수의 영광은 원래의 그의 위치로 돌아가는 것을 통하여 드러난다. “우리”는 이미 그 사건을 목격한 사람들이다.

“아버지의 독생자”(“모노게네스 파라 파트로스”, μονογενης παρα πατρος)는 18절에서도 사용된 말이다. 이것은 아들로서의 예수의 특별한 지위를 의미하지, 혈연 관계를 의미하지 않는다. 예컨대, 칠십인역에 보면 이삭이 아브라함의 “모노게네스”라고 되어 있다(창 22:2,12,16). 잘 알다시피, 아브라함에게는 이스마엘이라는 아들도 있었다. 따라서 “모노게네스”는 “특별한 아들”이라는 뜻을 더 많이 가지고 있다. 12절과 13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하나님께서는 많은 자녀들을 두었다. 하지만 예수는 그 자녀들 가운데 한 사람이 아니다. 그는 특별한 아들이다. 이러한 사상을 표현하기 위해서 “모노게네스”가 사용되었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은혜와 진리”는 구약성경에서 쓰인 “헤세드와 에멧트”(hesed we emet)를 생각나게 한다(출 34:6). “헤세드와 에멧트”는 하나님의 성품을 나타내는 중요한 말이다. 하나님은 계약 백성에 대한 사랑을 영원히 지속하시며(헤세드), 그들에게 대한 약속에 대하여 성실하고 진실하시다(에멧트). 이러한 하나님의 성품이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그에게는 은혜 즉 계약 백성에 대한 사랑이 충만하고, 진리의 계시자로서 가장 믿을만한 분이다. 그분은 하나님처럼 은혜로 충만하신 분이며, 진리 그 자체이시다.


15절 “요한이 그에 대하여 증거하여 외쳐 가로되”: 6절에서 세례 요한이 언급되면서 산문체가 나오는 것처럼, 15절에서도 다시 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이 나오면서, 문체도 산문체로 변화한다. 결국, 서문의 시적 흐름과 내용적인 흐름을 세례 요한에 대한 보도가 끊어 놓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근거에서 1절부터 18절 전체가 한 자리에서 쓰여진 것이 아니라는 추측이 제기되어 왔다. 여기에서 저자는 “증거하다”와 “외치다”를 현재형으로 쓴다. 이것은 독자를 위한 고안이다. 즉, 요한의 증거가 지금도 계속되고 있다고 생각하라는 암묵적 요청이다.

“내가 전에 말하기를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니라 한 것이 이 사람을 가리킴이라 하니라”: 문맥상, “내 뒤에 오시는 이가 나보다 앞선 것은 나보다 먼저 계심이라”는 말이 14절 이전에 나와 있어야 한다. “내가 말했다”는 과거형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말이 나와 있지 않다. 아마도 저자는 원독자들이 이미 그런 증언이 있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이런 표현을 쓴 것 같다.

앞에서 우리는 세례 요한 종파와 초대 교회 사이에 어느 정도의 경쟁 관계가 만들어져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하였다. 이 구절도 역시 그런 배경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누가복음의 탄생 이야기가 말하고 있듯이,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 먼저 태어났다. 공적인 사역을 시작한 것도 세례 요한이 먼저였다. 세례 요한 종파에서는 이러한 점을 근거로 하여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하고 있었을 것이다. 저자는, 세례 요한 자신의 말을 인용함으로써 이 주장을 일축한다. 세례 요한은 분명히 자기 자신을, 메시야의 오심을 준비하기 위해서 온 존재로 규정했다. 따라서 “내 뒤에 오시는 이”는 메시야를 가리킨다. “나보다 늦게 태어난 이”라는 뜻이 아니라, “내가 먼저 와서 준비를 한 그분”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저자는 이 말을 이 부분에 인용함으로써, “내 뒤에 오시는 이”를 “나보다 늦게 태어난 이”라는 뜻으로 해석한다. 예수는, 세례 요한 종파가 주장하듯이, 요한보다 늦게 태어났고 늦게 공적 활동을 시작하였다. 따라서 예수는 “세례 요한 뒤에” 왔다. 하지만 그것은 결코 세례 요한이 예수보다 크다는 뜻이 아니다. 육신적인 탄생은 비록 늦었을지 몰라도, 실제로는 세례 요한이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예수는 존재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미 앞에서 말씀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과 함께 영원전부터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언급한 바 있다. 그러므로 육신적인 탄생만을 두고 요한이 더 크다고 말하는 것은 잘못이다. 실제로는 예수 그리스도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더 크신 분이다. 이것이 15절의 요점이다.


16절 “우리가 다 그의 충만한 데서 받으니 은혜 위에 은혜러라”: 먼저 해결해야 하는 문제는 이 말의 화자(話者)가 누구인가의 문제이다. 다수의 학자들은 문맥을 따라서 세례 요한의 증언이 계속되는 것으로 파악한다. 즉, 15절부터 18절까지의 세례 요한의 증언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그렇게 보아서는 안 되는 이유가 있다. 16절부터 다시금 시적 문장이 시작된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이며, 내용상 16절은 14절과 연결된다는 것이 또 다른 이유이다. 그렇다면 15절은 일종의 삽입구로 보아야 하며, 따라서 16절의 화자는 세례 요한이 아니라, 저자 자신이 된다. 이렇게 보면, “우리”는 14절의 “우리”와 같은 의미를 가진다.

“충만한 데서”는 “충만으로부터”(“엑크 투 플레로마토스”, εκ του πληρωματος)라고 번역을 해야 하는데, “플레로마”는 영지주의자들이 즐겨 사용하던 용어였다. 이 “충만”은 14절의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는 말과 연결된다. 믿는 자들은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충만한 은혜와 진리를 부여받는다.

“은혜 위에 은혜러라”라는 말은 예수를 믿는 자들이 얻게 되는 계속적인 은혜를 말한다. 예수 안에는 은혜가 충만하기 때문에, 우리는 그로부터 계속적이고도 더욱 커지는 은혜를 입게 된다.


17절 “율법은 모세로 말미암아 주신 것이요 은혜와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온 것이라”: 여기에서 저자는 예수와 모세, 복음과 율법을 대조시키면서, 예수와 복음의 우월성을 강조한다. 사실, 이 주제는 요한복음의 전반부를 지배하고 있는 중요한 주제이다. “주신”이라는 수동태 동사는 율법을 주신 분이 하나님이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다. 모세와 예수는 하나의 매개자라는 점에서 동일하다. 하지만 모세는 율법의 매개자였지만, 예수는 은혜와 진리의 매개자이다.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은 율법을 주심으로써 인간을 정죄에 이르게 했지만, 예수를 통하여 은혜와 진리를 보여 주심으로써 정죄의 짐을 벗겨 주시고 해방시켜 주셨다.


18절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 아버지 품속에 있는 독생하신 하나님이 나타나셨느니라”: 구약성경에 의하면, 하나님을 보는 것은 불가능하며, 설사 본다 하더라도, 보는 즉시 죽어 버린다(신 4:1; 시 97:2). 따라서 하나님을 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모세조차도 하나님을 뵙지는 못하였다: “네가 내 얼굴을 보지 못하리니 나를 보고 살 자가 없음이니라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보라 내 곁에 한 곳이 있으니 너는 그 반석 위에 섰으라 내 영광이 지날 때에 내가 너를 반석 틈에 두고 내가 지나도록 내 손으로 너를 덮었다가 손을 거두리니 네가 내 등을 볼 것이요 얼굴은 보지 못하리라”(출 33:20-23). 저자는 “본래 하나님을 본 사람이 없으되”라는 말을 하면서 모세를 생각하고 있었음에 틀림이 없다. 모세가 계시자라고는 하지만, 사실은 하나님을 뵙지도 못한 사람이다. 하지만 예수는 누구인가? 그는 하나님의 품속에서 교제를 나누고 있었던 존재이다.

“품속에”라고 번역된 원문은 “에이스 톤 콜폰”(εις τον κολπον)이다. 여기에서 저자가 정지의 의미를 가진 전치사 “엔”(εν)을 쓰지 않고 운동의 의미를 가진 “에이스”(εις)를 썼다는 것은 주목할 만한 일이다. 이것은 1절의 “하나님과 함께”(“프로스 톤 데온”, προς τον θεον)와 같은 맥락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즉,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 곁에 정지 상태로 있었던 것이 아니라, 역동적인 인격적 관계를 나누고 있었다는 뜻이다. “에이스 톤 콜폰”은 하나님의 품을 향해서 계속하여 움직이고 있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아버지의 품에 안겨 있다”는 이 묘사는 요한복음 13장 23절을 생각나게 한다. 예수께서 사랑하시던 제자가 마지막 만찬을 나누면서 예수의 품에 안겨 있었다. 이것은 두 사람 사이의 긴밀한 애정을 표현한다. 누가복음 16장 22절을 보면, 죽은 나사로가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겨 있다. 결국, 유대적인 관습에 의하면, “품속에서 움직이고 있었다”는 이 표현은 두 사람 사이에 존재할 수 있는 가장 긴밀하고 애정 깊은 관계를 의미한다.

“독생하신 하나님”을 정확히 번역하면 “독생자 하나님”이다. “독생자”라는 표현은 이미 14절에서 사용된 바 있다. 여기에서도 “하나님” 앞에 정관사가 없음을 주목하라. 이러한 표현법은 이미 1절에서 보았다. 따라서 저자는, 1절에서처럼, 독생자가 신적인 존재이기는 하지만 성부 하나님과 구별된다는 점에서 정관사 없이 “데오스”만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나타내셨느니라”는 “엑쎄게사토”(εξηγησατο)의 번역인데, 원형인 “엑쎄게오마이”는 그리스어 문헌 속에서 신적인 비밀을 전할 때 사용되는 전문 용어이다. 따라서 하나님을 친히 본 예수는 신적인 비밀을 전해 주는 계시자로서 충분한 자격을 갖추고 있다. 하나님을 뵙지도 못한 모세와는 근본적으로 차이가 있다. 여기서 저자는 암시적으로 예수의 새로운 계시가 모세의 율법보다 훨씬 큰 것이라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결국, 17절과 18절은 모세와 율법에 대한 변증적인 의도로 쓰였음을 알 수 있다.


III. 본문 해설


1. 서문의 성격과 기원

지금까지 읽은 요한복음의 서문은 그 동안 많은 논의를 불러 일으켰다. 첫째, 이 서문은 과연 본문과 어떤 관계를 가지고 있는가? 서문의 주된 문학적 형식은 시적 형식이다. 하지만 1장 19절 이하로부터는 그러한 시적 형식이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 또한 이 서문의 가장 중요한 용어인 “로고스”가 1장 19절 이하에서 홀연히 증발해 버린다. 이런 이유 때문에 그 동안 이 서문이 요한복음의 본문이 쓰여진 다음에 누군가가 덧붙인 것이라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하지만 최근의 경향은 이러한 주장을 반대하는 쪽으로 기울고 있다. 그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다. 서문에서 개괄하는 로고스의 활동이 요한복음에서 그리고 있는 예수의 생애와 일치하고 있으며, 서문의 신학적 주제들이 본문 안에 널려 있다는 것이 그 이유이다.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서문의 신학적 용어들이 본문에서 매우 자주 사용되는 중요한 용어들이라는 점에 있다. 두 개의 예외가 “로고스”와 “은혜”라는 단어이다. 이 두 단어만이 이 서문에서 특별하게 쓰이고 있는 것들이다. 나머지 단어들은 본문 안에서 중요하게 사용되고 있다. 또한, 어떤 책을 쓸 때, 시적인 형식의 아름다운 서문을 쓰는 예들이 다른 문서들을 통하여 발견되었다. 따라서 요한복음의 서문은 특별한 현상이 아니라, 당시의 흔한 문학적 기법이었다는 것이 확인된 셈이다.

이런 이유들 때문에 최근에는 서문의 빛에서 본문을 조명하고, 본문의 빛에서 서문을 재조명하는 활동들이 활발하게 이루어져 왔다. 그래서 학자들마다 이 서문을 “복음서 전체에 대한 전주곡”(Cl. R. Bown)이라고, 혹은 “복음서 전체에 대한 요약”(Hoskins)이라고, 혹은 “복음서 전체의 축소판”(S. Smalley)이라고 규정을 하고 있다. 필자는 이 서문과 복음서의 관계를 현관과 집 안채로 비유한다. 현관은 집 안채로 들어가기 위한 통로이다. 이 현관에 들어서면서 사람들은 그 집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서문은 요한복음이라는 집안으로 들어서기 위해서 안내를 해 주는 현관과 같은 역할을 한다. 이 서문을 읽으면서 독자는 요한복음서라는 집안의 분위기를 느낄 수 있다. 그런 분위기를 몸에 배게 한 후, 집안으로 들어가 본격적인 감상을 시작할 수 있는 것이다.

둘째로 많이 논란이 되어 온 문제는 이 서문의 기원과 배경의 문제이다. 이 논란은 특별히 루돌프 불트만(Rudolf Bultmann)의 주장으로 촉발되었다. 그에 의하면, 이 찬양시는 원래 영지주의자들이 만들어 썼던 “구세주 신화”(the Redeemer Myth)에서 나왔다는 것이다. 이것을 요한복음 저자가 개작하여 그리스도 찬가로 만들었다는 주장이다. 한 동안 이러한 주장이 상당히 폭 넓게 받아들여지는 듯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거의 받아들여지지 않고 있다. 특히, 이 서문의 원래 형태였을 것으로 추정되는 9절과 14절이 영지주의적인 사고와 결정적으로 차이를 보이고 있기 때문이다. 9절에서는 “참빛 곧 세상에 와서 각 사람에게 비취는 빛”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14절에서는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이 두 표현은 모두 영지주의적인 사고에서는 상상할 수도 없는 표현이다.

그렇다면 이 서문은 어디에서 왔을까? 최근의 경향은 유대적인 지혜문학을 그 배경으로 보고 있다. “로고스”의 개념도 역시 그런 배경에서 이해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이 강하고, 따라서 이 서문 전체가 유대교적인 배경 속에서 만들어지고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물론, 요한복음의 저자가 이 서문을 직접 작성했는지, 아니면 이미 어떤 공동체 내에서 사용되고 있던 것을 빌어다 쓴 것인지는 확정지을 수 없는 문제이다. 다만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설사 기존의 찬양시를 사용했다고 하더라도, 이미 이 서문은 요한복음의 일부분으로 완전히 개작되었다는 점이다. 이 서문이 여러 가지 점에서 요한복음의 본문과 얼마나 잘 어울리는지에 대해서는 앞에서 이미 언급한 바 있다. 따라서 배경과 기원에 대한 의문이 아직도 잠재울 수 없는 학문적 관심사이기는 하지만, 주석자에게 있어서 그 문제가 그리 중요하지는 않다. 이 서문이 요한복음이라는 집의 현관으로서의 역할을 완벽하게 하고 있기 때문에, 굳이 배경에 대한 탐색이 없더라도, 이 서문을 있는 그대로 이해하는 데 별 어려움이 없기 때문이다.

셋째, 이 서문의 형성 단계에 대한 논란이 있어 왔다. 우리가 이미 “본문 읽기”에서 언급한 바 있지만, 6-8절과 15절은 두 가지 점에서 다른 구절들과 성격을 달리 한다. 이 두 군데에서 갑자기 흐름이 끊어지면서 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는 점이다. 또한 시적 형식이 이곳에서 갑자기 멈추고 산문 형식이 등장한다는 점이다. 이런 점에서 많은 사람들이 이 구절들에 대하여 의혹을 가져 왔고, 그렇게 의혹을 가지는 것은 마땅하다고 판단된다.     그렇다면, 이 서문은 어떻게, 어떤 단계를 거쳐 만들어진 것일까? 여기에 대해서는 두 가지 입장이 있다. 다수적인 입장은 시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부분(1-5, 9-14, 16-18)이 먼저 지어졌을 것이고, 산문 형식으로 되어 있는 부분(6-8, 15)이 나중에 첨가되었을 것이라는 입장이다. 하지만 그 반대의 생각도 있다. 즉, 요한복음도 다른 복음서처럼 산문으로 시작되었을 것이며, 나중에 시적인 부분들이 첨가되었을 것이라는 주장이다(J. A. T. Robinson; Barnabas Lindars 등). 19절에서 세례 요한에 대한 보도가 나오는 것을 보면 두 번째의 주장에도 나름대로의 근거가 있는 듯하다. 하지만 전체적으로 볼 때, 다수 입장이 더 옳다고 판단된다. 산문을 제외하면 시적인 부분이 통일적인 모습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만일에 산문 부분이 먼저 쓰여지고 시 부분이 첨가되었다면, 이러한 문학적, 사상적 통일성은 만들어지기가 어려웠을 것이다. 시적인 형식으로 되어 있는 부분을 먼저 쓴 다음에 문학적인 구조에 맞추어 세례 요한에 대한 구절을 둘로 나누어 병행구가 되도록 삽입하였다고 보는 것이 가장 그럴듯하다.


2. 로고스 기독론(Logos Christology)

이 서문에서 가장 두드러지는 것은 예수를 말씀 즉 로고스로 묘사하고 있다는 점이다. 앞에서도 언급하였지만, 한 동안 로고스의 의미를 풀기 위해서 학자들은 헬레니즘 문헌들을 뒤적였다. 그래서 가장 많이 연구된 것이 스토아 철학에서의 로고스 개념과 필로의 글에서의 로고스 개념이다. 하지만 이것들과 요한복음이 직접적인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이 점점 확실해지면서, 학자들은 유대적인 배경에 대한 연구를 진행하였다. 결국, 서문의 로고스 개념의 배경은 창세기의 하나님의 말씀, 예언서의 하나님의 말씀 그리고 지혜문학의 지혜 개념이라는 것이 확인되었다. 요한복음의 저자(혹은 이 서문을 맨 처음 작성한 사람)는 기독교 전승 속에서 예수가 참된 지혜의 화신이라는 믿음이 있음을 발견하고, 그것을 구약 전승과 결합시켜, 로고스 기독론을 만들어 낸 것이다. 사실, 예수에게 하나님의 모든 지혜가 주어졌다는 것은 초기 예수 전승 속에서 흔히 발견할 수 있는 내용이다.


   지혜는 그 행한 일로 인하여 옳다 함을 얻느니라(마 11:19//눅 7:35).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5-27//눅 10:21-22).


이 두 본문을 보면, 초기 예수 전승 속에서 예수를 지혜의 화신으로 생각하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비록 그것이 강조되지는 않았지만, “소피아 기독론”(Sophia Christology)이 예수 전승 속에 잠재하고 있었다. 아마도 이것이 표출되지 않은 까닭은 초기 그리스도인들이 지나치게 카리스마적이고 묵시적인 경향에 기울어져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이렇게 잠재해 있던 “소피아 기독론”이 요한복음 저자에 와서 “로고스 기독론”으로 표현되었다. 저자는 구약의 창세기와 예언 전승과 지혜 전승으로부터 영감을 받아, 아름답고 심오한 로고스 찬가를 만들어 놓았다. 로고스 기독론의 핵심은 예수가 참다운 계시자라는 점에 있다. 로고스는 하나님의 생각이다. 하지만 그 생각은 신비롭게도 하나의 인격체로서 따로 존재한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과 특별한 관계를 가진다. 로고스는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의 품안에서 긴밀한 인격적 교제를 나누고 있다. 따라서 이 로고스는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이 로고스로써 이 세상을 창조하기도 하셨다. “하나님이 말씀으로 천지를 창조하셨다”는 말은 로고스가 창조의 사역자로서 활동했다는 뜻이다. 창조의 사역자로서 활동했다는 말은 로고스 안에 생명의 씨앗이 있다는 말이다. 또한 로고스는 참된 진리를 계시해 줄 수 있는 존재이다. 그래서 로고스는 인간의 생명이며 빛이다.

그런데 이 로고스가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왔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예수 그리스도는, 위에서 인용한 예수 자신의 말씀 속에서 표현되었다시피, 지혜 자체이시며, 말씀 자체이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모든 계시를 보여 주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예수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본 것이나 다름이 없다(14:9).

로고스 기독론은 결국 17-18절에서 표면화되는 “모세와 율법에 대한 변증”을 위해서 아주 치밀하게 마련된 도구이다. 17-18절에서 밝히고 있듯이, 모세는 하나님을 뵌 적이 없는 사람이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그를 가장 위대한 계시자로서 믿어 왔다. 모세가 가장 위대한 계시자이므로, 율법은 인간에게 주어진 가장 중요한 계시의 수단이다. 하지만 저자는 로고스 기독론을 수단으로 하여 새로운 계시의 사건을 말하고 있다. 로고스가 예수에게서 화육(化肉)하기 이전까지는 유대인들의 믿음이 옳았다. 하지만 이제는 신적인 존재로서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었던 로고스가 예수 안에서 화육하였다. 예수는 로고스이시다. 따라서 이제는 모세의 시대가 아니라 예수의 시대이다. 이제는 율법의 시대가 아니라 복음의 시대이다.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게 주어지는 시대가 되었다. 더 이상 모세의 율법을 붙들고 있는 것은 하나님의 구원 행동을 무시하는 일이 되어 버린다. 예수만이 참된 계시자이시다!

3. 선재 기독론(Pre-existent Christology)

로고스 기독론과 더불어 이 서문에서 발견되는 기독론이 바로 선재 기독론이다. 저자는 1절에서 이미 창조 이전에 말씀이 있었음을 밝히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한 바 있지만, 여기에서 말한 “태초”는 창세기 1장 1절의 “태초”와는 다르다. 창세기의 “태초”는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기로 결심했던 그 시간을 말하는 것이고, 요한복음 서문의 “태초”는 창조의 시간 훨씬 이전을 가리킨다. 하나님이 계시면서부터 로고스는 함께 존재했다. 천지가 창조되기 이전부터 로고스는 하나의 인격체로서 따로 존재하면서, 하나님과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18절에서 저자는 이 로고스와 하나님과의 관계를 애정 깊은 부자 관계에 비유한다. 마치 어린아이가 아버지의 따뜻한 품속에 안겨 있으면서, 더 깊은 관계를 위하여 품속을 파고드는 것처럼, 하나님과 로고스도 이러한 긴밀한 인격적 관계 안에 있었다. 천지와 인간의 창조 이전에도 하나님은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인격적 사귐의 파트너가 있었다.

사실, 선재 기독론은 로고스 기독론을 펴다보니 따라나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이 주제를 염두에 두고 있었다. 그 증거가 15절에 나온다. 당시에 세례 요한의 추종자들이, 예수가 요한보다 늦게 태어났고 공적 활동도 늦게 시작했으니, 당연히 열등하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던 듯하다. 유대인들의 사고에서는 시간적으로 앞선다는 것이 매우 중요한 것이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하여 저자는 선재 기독론으로 맞선다. 시간적으로 앞선 사람이 더 크다는 요한의 추종자들의 말은 맞는다. 하지만 그들은 진실을 모르고 있다. 육신적인 탄생으로 볼 때는 요한이 앞선 사람이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는 로고스로서 하나님과 함께 처음부터 계셨다. 그러므로 예수가 앞선다. 역설적이지만, 예수는 (육신적으로) “내 뒤에 오시는 이”였지만, (실제로는) “나보다 앞선 이”였다.

요한복음에 선재 기독론이 나오는 것을 근거로 하여, 많은 사람들이, 요한복음이 상당히 늦게 쓰여진 것이라고 생각을 한다. 즉, 선재 기독론이 상당히 발전된 형태의 기독론이라는 주장이다. 하지만 이것은 옳은 추측이 아니다. 선재 기독론은 이미 빌립보서 2장 6-11절에 나오는 그리스도 찬가 안에 반영되어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빌 2:6-8a).


예수가 처음부터 하나님과 같은 분이었으나, 스스로 자기를 비어 사람으로 오셨다는 이 찬가는 요한복음의 서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찬가는 빌립보서가 쓰여지기 이전에 이미 바울 계열의 교회들 안에서 불려지고 있었다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아무리 늦어도 50년대 초반에는 이런 기독론이 존재하고 있었다는 말이 성립한다. 따라서 요한복음 서문의 선재 기독론은 신약성경 안에서 특별한 것도 아니고, 그 기독론이 후대의 발전의 형태라고 말할 수도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4. 성육신 기독론(Incarnation Christology)

서문의 기독론에 대하여 말하면서 또 달리 거론되는 이름이 “성육신 기독론”이다. 성육신 기독론도 역시 저자의 주된 관심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로고스 기독론을 펴다 보니 파생되어 나온 기독론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처음부터 있었던 로고스가 어떻게 이 세상으로 오게 되었는가? 예수라는 사람으로 화육함으로써 가능할 수 있었다. 이것은 영지주의에게 말하는 대로, 단순히 로고스의 영이 예수를 사로잡음으로써 이루어졌다고 할 수 없다. 예수가 로고스의 화신(化身)이 된 것이다. 예수가 로고스고, 로고스가 예수가 되었다. 둘은 영원히 분리할 수 없다. 영지주의는 이 둘이 분리될 수 있다고 믿었다.

선재 기독론의 경우와 마찬가지로, 저자는 성육신 기독론이 자신의 주요 주제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나중에 이 기독론적인 주제를 부각시킨다. 14절에서 그는 아주 분명한 표현을 사용한다. 말씀이 육신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기에서 “육신”(“싸륵크스”)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영지주의자들의 입장에서 볼 때, 인간의 구성 요소 중에서 육신은 가장 악한 것이다. 육신의 영혼의 감옥이다. 이 육신으로부터 탈출하는 것이 구원이었다. 이들이 주장한 가현설(docetism)에 따르면, 그리스도의 영은 육신을 단순히 사용했을 뿐이다. 참으로 육신이 된 것은 아니었다. 따라서 저자는 여기에서 영지주의자들의 가현설을 공박하고 있는 것이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었다. 로고스와 육신은 분리할 수 없게 되었다. 나사렛 예수는 단순히 도구로 쓰임을 받다가 용도 폐기된 것이 아니다. 그의 삶 자체가 로고스의 구원 활동이었다.


5. 새 창조 그리고 영생과 진리

4절에서 저자는 매우 중요한 발언을 하고 있다. 로고스 안에 있던 것이 바로 생명이며, 이 생명은 또한 사람들의 빛이었다. 3절에서 말하였듯이, 로고스는 창조의 사역자였다. 모든 생명이 그를 통하여 만들어졌다. 따라서 로고스 안에는 생명의 씨앗이 있었다. 그러나 로고스 안에 있는 생명은 그가 창조한 이 세상의 생명과는 질적으로 다르다. 그가 창조한 이 세상의 생명은 한계적이다. 그것은 로고스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으로부터 유출되어 나온 “모조품”이기 때문이다. 로고스는 그 자체로서 영원한 존재이기 때문에, 그 안에 있는 생명도 역시 영원하다. 이 로고스는 이미 “태초”에 지어놓은 이 세상 안에 들어옴으로써 “사람들의 생명”이 되었다. 이것이 무슨 말인가? 이미 생명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에게 로고스는 어떤 의미에서 또한 생명이라는 말인가? 여기에서 저자의 의도가 드러난다. 로고스가 이 세상 안으로 오심으로써, 그는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행하고 있는 것이다. 첫 번째 창조를 통하여 한계적인 생명이 주어졌다면, 이제 새로운 창조를 통하여 로고스는 영원한 생명을 준다. 로고스이신 예수 그리스도와 인격적인 관계를 맺으면, 그 안에 있는 영원한 생명이 믿는 자에게 전달된다.

로고스는 또한 빛으로 오셨다. 5절을 보면, “빛이 어두움에 비취었다”고 되어 있다. 독자들은 흑암 위에 하나님께서 빛을 창조하심으로써 첫 번째 창조가 시작되었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렇다면, 빛이신 로고스가 다시금 어두움에 빠진 인간 세상을 비추었다면, 이것은 새로운 창조의 역사를 말하는 것이 아닐 수 없다. 인간들은 죄에 빠짐으로써 어둠의 권세에 눌려 버렸다. 이들로 하여금 광명한 세상 안에서 살도록 해 주는 것이 로고스가 할 일이다. 그래서 빛으로 오셨다. 여기에서 로고스가 비추는 빛은 그러나 천지창조 때에 비췬 빛과 다른 것이다. 그 빛은 육안으로 볼 수 있고, 언젠가는 꺼지고 말 빛이지만, 로고스가 비추어주는 빛은 참된 진리를 보게 해 주는, 영원히 꺼지지 않는 진리의 빛이다. 이 빛을 받으면 참된 진리가 무엇인지를 알고 살 수 있게 된다.

로고스가 오심으로써 새로운 창조가 이루어진다는 사실은 12-13절에서 다시 한 번 강조되고 있다. 로고스를 영접하는 사람들을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자녀로 삼아 주신다. 새로 태어나는 것이다. 이 태어남은 남녀가 결합하여 이루어지는 생리적인 탄생이 아니라, 하나님에 의해서 이루어지는, 위로부터의 창조이다. 구원이란 바로 이것을 말한다. 이 세상에 새로운 창조자로서 오신 로고스를 받아들임으로써 하나님의 자녀로 인정받고, 영생과 진리를 알게 되는 것이 바로 구원이다. 그런데 어쩌랴! 눈이 멀어있는 이 세상의 죄인들은 참된 빛이 환하게 비추고 있음을 깨닫지 못하고 있으니!


6. 세례 요한 종파에 대한 변증

이 서문에서 발견되는 또 다른 주제는 세례 요한 종파에 대한 변증이다. 세례 요한의 종파가 초대 교회 시대에 존재하고 있었다는 사실은 사도행전을 통해서도 확인된다(행 18:24-28). 아마도 세례 요한의 종파에서는 요한을 메시야로 믿고 있었던 것 같다. 이 추종자들은 예수가 요한에게 세례를 받았으며, 요한보다 늦게 태어난 것을 이유로 하여, 요한이 예수보다 우월하다고 주장을 하였을 것이다.

서문, 특히 나중에 삽입된 것으로 추정되는 6-8절과 15절을 보면, 요한복음 저자가 이러한 문제에 직면해 있었다는 사실을 감지할 수 있다. 아마도 시형식으로 되어 있는 서문을 쓴 후에, 저자는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언급해야 할 필요성을 느꼈던 것 같다. 그래서 대구적 병행법에 따라서 둘로 나누어 세례 요한에 대한 언급을 삽입해 넣었던 것 같다. 6-8절에서는 세례 요한이 빛에 대한 증인일 뿐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세 절 안에 “증인” 혹은 “증언하다”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쓰면서, 세례 요한은 단지 증언자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설명하고 있다. 15절에서는 예수의 선재성을 강조함으로써, 예수가 요한보다 우월하신 분이라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이렇게 함으로써 저자는 세례 요한 공동체의 주장에 의하여 독자들이 혼란 되지 않도록 사전에 장치를 마련해 둔 것이다.

1장 35절 이하에 보면, 세례 요한의 제자들 중 두 사람이 요한의 증언을 듣고 예수의 제자가 되었다는 보도가 나온다. 이 이야기는 당시에 요한복음의 공동체가 세례 요한의 공동체와 긴밀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음을 암시하는 단서이다. 세례 요한의 공동체에 속했던 사람들 몇이 요한복음의 공동체로 전향했을 수도 있다. 이런 상황을 염두에 둔 저자는, 이들이 흔들리지 않게 하기 위해서 세례 요한과 예수의 관계를 분명히 해 둘 필요가 있었다. 그래서 서문의 흐름을 끊어 가면서까지 6-8절과 15절을 삽입해 넣었던 것이다.


7. 모세가 아니라 예수, 율법이 아니라 복음!

17-18절은 이 서문이 결론적으로 의도하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혀주고 있다. 사실, 그 이전의 모든 이야기는 이 마지막 결론을 강화시키기 위해서 고안되었다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요한복음의 공동체는 얼마 전에 분리되어 나온 유대교 회당 공동체와 심각한 알력 관계에 있었다. 이미 요한 공동체 안으로 들어온 사람들조차 회당으로부터의 박해에 의해서 흔들리고 있던 터였다. 이런 상황에서 저자는 참된 희망이 예수에게 있음을 확인해 주어야 했다. 사실, 앞으로 보겠지만, 소위 “표적의 책”이라고 불리는 전반부(1:19-12:50)에서 저자가 계속되는 이야기를 통하여 독자들에게 주입시키려는 메시지가 바로 이것이다: 모세가 아니라 예수다! 율법 신앙이 아니라 예수 신앙이다! 이러한 주제를 서문에서 미리 확실하게 천명해 두자는 것이 저자의 의도였다.

그러한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 저자는 여러 가지의 비교를 한다. 가장 치밀하게 고안한 대조는 계시자로서의 모세와 예수의 자격 문제이다. 로고스 기독론의 요점은 바로 예수가 참된 계시자라는 데 있다. 그는 태초부터 하나님과 함께 있었고, 하나님과 긴밀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으며, 그래서 하나님의 모든 생각을 알고 있다. 이러한 로고스가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왔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다. 그는 곧 로고스요, 로고스가 곧 예수이다. 분리할 수 없다. 반면, 모세는 누구인가? 그는 기껏해야 하나님의 뒷모습만 보았을 뿐이다. 따라서 그가 전해준 계시는 불완전한 것이다. 물론, 참된 계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기 전까지는 모세가 가장 위대한 계시자였다. 그러나 이제 모세의 계시는 빛을 잃고 말았다. 더 큰 빛이 나타났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참빛으로 오셨다. 이 빛을 받으면 인류는 참된 진리를 깨닫게 된다. 태양빛 아래에서 촛불이 무의미해 지듯이, 예수 그리스도라는 참빛 아래에서 모세라는 빛은 그 가치를 잃고 만다.

저자는 예수와 모세의 대조를 위해서 그들이 인류에게 준 선물을 비교한다. 모세는 인류에게 무엇을 주었는가? 율법을 주었다. 물론, 율법은 하나님이 주신 것이다. 그러나 모세가 중개인이 되었다. 그러니 모세가 율법을 주었다고 말할 수 있다. 처음에 율법은 이스라엘을 지켜주는 보호막이 되어 주었다. 그 율법을 지킴으로써 하나님께서는 이스라엘에게 은혜와 축복을 내리셨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그 율법은 이스라엘에게 짐이 되었다. 율법을 지키지 못하게 되자, 이스라엘은 하나님으로부터 정죄를 받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법은 사람을 보호하기 위해서 만들지만, 결국은 사람을 짓누르게 되어 있다. 율법도 결국 이렇게 짐이 되고 말았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 아니다. 율법은 원래 주어질 때나 지금이나 똑 같다. 다만 사람들이 변한 것이다. 죄에 물든 사람들에게 있어서 율법은 저주나 다름이 없었다. 율법 아래에서는 아무런 희망도 찾을 수 없었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는 무엇을 주었는가? 은혜와 진리를 주었다. “은혜와 진리”는 히브리어로 “헤세드와 에멧트”라고 했다. “헤세드”는 상대방의 상황에 관계없이 끝까지 지속되는 영원한 사랑을 의미한다. “에멧트”는 자신의 약속에 대하여 끝까지 책임을 지는 신뢰성을 말한다. 구약성경에서는 이 두 단어로써 하나님의 성품을 요약한다. 따라서 예수 안에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였다는 말은 그분 안에 하나님의 성품이 충만했다는 뜻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마음으로 인간을 대했다는 뜻이다.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우리는 은혜와 진리를 알게 된다. 하나님께서는 믿는 자들을 영원히 사랑하신다는 사실과 그분의 약속을 끝내 지키실 것이라는 사실을, 예수 그리스도는 인류에게 보여 주셨다. 따라서 예수의 복음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하게 하고 희망에 부풀게 한다. 모세의 율법은 인간을 정죄하였지만, 예수의 복음은 인간을 해방시키고 자유케 해 주었다.

이러므로 예수와 모세, 둘 중에서 누구를 택해야 하는지가 분명해졌다. 계시자로서의 자격으로 보나, 그가 가져다 준 선물의 성격으로 보나, 예수를 선택해야 한다. 더 이상 모세를 붙들고 있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모세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하는 것은 참빛에 대하여 스스로 눈을 감는 일이요, 해방자 앞에서 스스로 정죄하는 어리석은 일이 되어 버린다. 따라서 해답은 예수이다. 더 이상, 망설일 이유가 없다. 정답은 분명하다. 선택만이 남았다.

이 메시지는 당시에 회당과 요한복음의 공동체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던 많은 사람들에게 강력한 도전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어떤 희생을 무릅쓰고라도 분명히 결단하고, 참된 자유와 은혜와 진리 안으로 들어오라는 요청을, 이 서문은 독자들에게 던지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본문 소개”에서 이 서문의 문학적 구조에 대하여 소개한 바 있다. 이 대구적 병행법에 의하면, 서문의 메시지의 핵심은 12절과 13절에 있다. 즉,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하나님의 참된 자녀가 되라는 요청이 이 서문의 핵심이라는 것이다. 이 요청은 세례 요한을 메시야로 믿던 사람들에게 그리고 모세를 가장 위대한 계시자로 믿던 유대인들에게 매우 중요한 요청이다. 그들은 지금 잘못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받고 참된 구원을 얻으려면,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길밖에는 없다.   

  

IV. 설교 가이드


1. 이 본문은 강림절에 자주 읽히는 본문이다. 강림절은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을 기념하면서, 동시에 다시 오실 예수 그리스도를 대망하는 절기이다. 이 절기에,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의미를 밝히고 있는 본문은 매우 좋은 선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왜 오셨을까?”라는 제목의 설교는 강림절이나 성탄절에 매우 적절한 설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예수께서는 왜 오셨을까? 많은 사람들이 교리적인 가르침에 근거하여 “예수는 죽으러 오셨다”고 대답을 할 것이다. 우리의 죄를 대속하기 위해서 오셨다는 뜻이다. 물론, 이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하지만 예수께서 죽으러 오셨다고 말하면, 이 지상에서의 예수의 삶은 무의미해진다. 대속적인 죽음이 목적이었다면, 그는 왜 공생애를 시작하자마자 죽지 않고 그 고생스러운 사역을 행하셨는가? 그가 삼년가량의 공생애의 사역을 행하신 이유는 그의 죽음만이 아니라 그의 삶에도 의미가 있기 때문이다. 그는 결국 죽으심으로써 대속적인 구원을 완성하셨지만, 그의 지상 사역도 우리의 구원에 충분한 의미를 가지고 있다.

 그렇다면 그분은 왜 오셨을까?

 첫째, 그분은 참된 계시자로서 오셨다. 본문은 예수 그리스도가 성육하신 말씀 즉 로고스라고 증언한다. 로고스는 어떤 존재인가? 하나님의 뜻을 완전하게 실현한 인격체를 말한다. 이 로고스는 하나님이 계시는 그 순간부터 존재해 왔다. 이것을 “태초”라고 해도 좋고 “영원전”이라고 해도 좋다. 로고스는 이 세상이 창조되기 이전부터 이미 하나님과 인격적인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 이것을 18절에서는 “아버지의 품속에 움직이고 있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 로고스가 인간의 육신을 입고 인간 세상 안으로 들어오셨다. 그가 바로 예수 그리스도이시다.

 그렇다면 로고스는 왜 인간이 되어 우리 세상으로 들어오셨을까? 말할 것도 없이, 참된 진리를 계시하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래서 4절과 5절에서 저자는 세상에 들어오신 로고스를 일컬어 “빛”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 세상에는 하나님께서 창조한 빛이 존재하고 있다. 이 빛으로 인하여 모든 존재가 살아가고 있다. 그런데 예수가 빛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예수빛”은 천지 창조 때에 만들어진 빛과는 다른 빛을 말한다. 즉, 진리의 빛이다. 이 빛을 받으면, 비진리의 어둠 속에서 살아가던 인간들이 참된 진리를 발견하게 된다. 진리의 광명한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우리는 누가 참된 계시자라고 믿고 있는가? 무엇을 참된 계시라고 믿고 있는가? 이 복음서가 쓰여질 당시의 유대인들은 모세가 참된 계시자이며, 율법이 참된 계시라고 믿고 있었다. 예수 그리스도가 오시기 이전까지는 이 말이 옳았을지 모른다. 하지만 참된 계시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오고 나서 모세는 빛을 잃었다. 아직도 모세를 붙들고 있다면, 그는 마치 광명한 대낮에 촛불을 붙들고 있는 사람과 같은 어리석음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가 참된 계시자이심을 알아야 한다. 당시의 유대인들처럼, 오늘의 우리도 참다운 계시를 위해서 예수가 아닌 다른 사람을 좇아 다니는 잘못을 범해서는 안 될 것이다. 참된 계시자는 예수이시다. 그분 안에 참된 진리가 있다. 그래서 예수께서는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가 내 말에 거하면 참 내 제자가 되고 진리를 알찌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케 하리라”(요 8:31-32). 우리는 과연 참된 진리를 알고 있으며, 참으로 자유한가? 우리는 참으로 진리의 빛 안에서 광명한 삶을 누리고 있는가? 우리가 아직도 어둠 속에 있고 억눌림 속에 있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제대로 믿고 있지 못하다는 뜻이다. 참된 계시자이신 예수께서 주시는 이 귀한 선물을 받아 안음으로써, 다가오는 성탄을 의미 있게 만들어야 하겠다.

 둘째, 그분은 새로운 창조를 위해서 오셨다. 3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화육하기 이전의 로고스는 하나님과 함께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세상에 있는 것들 가운데 그로부터 말미암지 않은 것이라고는 하나도 없다. 모든 생명체의 뿌리는 로고스이다. 따라서 로고스 안에는 참된 생명이 있다. 로고스가 영원하듯이 그 생명도 역시 영원하다. 하지만 그 생명을 본떠서 만들어진 만물의 생명은 영원하지 않다. 모조품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로고스에 의해서 지어진 것 가운데 죽음이 없는 것이 없다. 모두 다 죽음으로써 한계적인 생명을 마친다.

 이러한 한계적 생명의 세상에 영원한 생명의 로고스가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셨다. 마치 태초에 흑암 위에 빛이 비취어 천지가 창조되었듯이, 한계적인 생명과 비진리에 의해서 어둠 속을 헤매던 인류에게 새로운 창조의 빛이 비취었다. 영원한 생명의 로고스가 예수 그리스도가 되어 오셨기 때문이다. 이로써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창조를 행하신다. 그를 믿는 사람을 새로운 사람으로 지어 주신다. 인간 아무개의 자식을 “하나님의 자녀”로 삼아 주신다. 단순히 이름만을 부여해 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답게 살 수 있게 해 주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나면서, 그는 영원한 생명을 가지게 된다. 인간 아무개의 자식으로 있을 때에는 언젠가 죽고 말 운명이었지만, 이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으므로 진정한 죽음이란 없다. 물론, 육신적인 죽음은 피할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우리의 삶의 끝이 아니다. 마치 예수께서 죽음을 통하여 영원한 그의 위치로 돌아갔듯이, 죽음은 우리에게 있어서 새로운 차원으로 들어가는 하나의 과정일 뿐이다.

 예수께서 오신 이유는 이렇게, 우리를 새로 지으셔서, 영원하고 참된 삶을 살 수 있게 해 주시려는 데 있다. 그래서 저자는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요 3:16)고 증언하고 있다. 로고스가 육신이 되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이 세상에 대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의 표시이며, 이 사랑을 받아들이는 사람들에게는 영원한 생명이 주어진다는 뜻이다. 우리는 이 영원한 생명을 누리고 있는가? 우리가 영원한 삶의 차원에 들어온 존재들이라는 사실을 우리는 얼마나 인식하고 사는가? 그것을 인식할 때, 우리의 삶은 전혀 다른 삶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셋째, 그분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을 보여 주시기 위해서 오셨다. 모세의 율법은 우리를 죄인으로 규정하고 심판을 선언한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은혜를 선포한다. 그리스어 “카리스”(χαρις)의 배후에는 히브리어 “헤세드”(hesed)가 있다. “헤세드”는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불굴의 사랑을 가리킨다. 저자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이 은혜가 넘쳐 났으며, 우리는 그 넘치는 은혜를 거듭하여 받게 된다고 설명한다. 다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 안에는 사랑이 넘쳐 났으며, 우리는 갈수록 커지는 그 사랑 안에서 살게 된다는 뜻이다.

 사실,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의 사건 자체가 인간에 대한 하나님의 사랑의 증거이다. 그런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예수께서는 이 땅에 오셔서 인류에 대한 사랑을 실천하셨다. 그의 복음은 모세의 율법처럼 인간을 옭아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을 해방시키고, 기쁨이 충만한 가운데 살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이 안에서 우리는 참다운 자유를 누리며, 기쁨으로 인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된다. 요한복음 저자는 예수의 죽음을 말하면서 “예수께서 세상에 있는 자기 사람들을 사랑하시되 끝까지 사랑하시니라”(13:1)고 묘사하였다. 그는 십자가 위에서 죽음으로써 딱 한번 사랑을 실천한 것이 아니라, 그의 생애 처음부터 사랑의 삶을 사셨다. 그 사랑이 지속되어 십자가에까지 이른 것이지, 십자가 위에서 갑자기 그 사랑이 나타난 것이 아니다. 우리는 이 은혜를 아는가? 예수를 알아가면서, 우리에게는 “은혜 위에 은혜러라”는 고백이 넘치는가? 이 사랑을 깨닫고 있는가?

 예수께서는 이러한 목적을 위해서 이 세상에 오신 것이다. 죽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인간으로 하여금 참 진리 안에서 자유케 하고, 영원한 차원에서 삶을 살게 하고, 하나님의 사랑에 겨워 살게 하기 위해서 오신 것이다. 이런 삶을 살기 위해서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해야 한다. 그분을 믿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분과 영적인 교제 안에 들어가야 한다. 이러한 교제가 성숙될수록 우리는 더 높은 차원의 삶을 살 수 있게 될 것이다.


 2. 역시, 강림절에 맞추어 “세 번의 창조”라는 제목의 설교를 구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서문은 두 번의 창조를 말하고 있지만, 신약성경 전체를 보면, 세 번째의 창조 사역에 대해서도 예견되어 있다. 물론, 이것을 “세 번째”의 창조라고 해야 할 것인가의 문제는 논란의 여지를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된 새 창조의 완성이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라면 우리는 두 번의 창조밖에는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된 새 창조와 앞으로 올 새 하늘과 새 땅은 그 내용과 범위 면에서 큰 차이가 나기 때문에 분리해서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될 듯하다.

 첫째, 하나님께서는 태초에 천지를 창조하셨다. 이 창조로 인하여 삼라만상이 존재하게 되었다. 이렇게 창조된 이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웠던지 하나님께서는 “좋다, 좋아!”라는 탄성을 연속하셨다. 하나님의 눈에도 아름다웠다면, 인간의 눈으로 볼 때는 얼마나 더 아름다울지!

 그런데 이렇게 아름다운 피조 세계가 파괴되어 버렸다. 가장 먼저 파괴된 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아 지어진 인간이었다. 인간은 하나님으로부터의 독립을 선언하면서, 하나님께서 창조해 주신 아름다운 원형을 잃어 갔다. 하나님과 분리됨으로써 인간은 스스로 분열되는 아픔을 겪었으며, 다른 사람과 분열되는 아픔도 겪었다. 자연과도 서로 싸우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으로 전락하였다. 이 결과,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어졌던 인간성은 타락하여 본래의 아름다움을 잃고 말았다. 이렇게 인간성이 타락하자, 인간들은 하나님의 피조 세계를 파괴하기 시작하였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이 엄청난 재앙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로마서 8장에서 바울이 탄식하고 있는 것처럼, 인간도 이 참담한 현실에서 구원되기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으며, 모든 피조물도 인간과 함께 탄식하고 있다. 인간의 잘못으로 인하여 하나님의 아름다운 피조 세계가 병들어 신음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모든 피조물은 우주적인 구원자를 기다리고 있다.

 둘째, 이러한 상황에서 구원자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타나셨다. 그분은 태초에 우주를 창조하실 때 일하셨던 분이다. 그분은 구원자로서 이 땅에 오셔서, 새로운 창조의 사역을 행하신다. 이 새로운 창조의 첫 번째 대상은 인간이다. 첫 번째 창조를 망가뜨린 근본적인 원인이 인간에게 있었기 때문에, 가장 먼저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했다. 그래서 예수의 사역의 초점이 인간이 되었다.

 예수 그리스도는 새로운 인간을 창조하신다. 이미 태어난 인간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한 탄생은 인간의 성적인 결합의 결과로서 이루어지는 그런 탄생이 아니다. 참된 진리의 빛을 얻음으로써 진리를 알게 되고, 영원한 생명의 근원과 만남으로써 영원한 차원으로 들려 올려지는 것이 새로운 탄생이다. 이렇게 살아가는 존재들이 바로 하나님의 자녀들이다. 이렇게 사는 사람들에게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신다.

 이렇게 하여 인간이 새로워지면, 이 세상의 문제가 해결될 수 있는 매듭이 풀릴 수 있다. 이 피조 세계가 이토록 형편없이 파괴된 원인이 인간의 문제에 있었기 때문에, 인간의 내면이 새로워지면 피조 세계의 문제도 함께 풀릴 수 있다.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으로 새로워진 인간은 이제 더 이상 환경을 파괴하지 않게 되고, 에덴에서 아담과 하와가 자연과 누리던 교제를 다시금 누릴 수 있게 되기 때문이다. 오늘날 모든 사람들이 환경 파괴에 대하여 걱정하고 있다. 그러면서 여러 가지의 처방을 내어놓는다. 하지만 진정한 처방은 인간의 내면이 변화하는 데 있다. 인간의 이기적인 욕심이 있는 한, 이 피조 세계가 새로워질 가능성은 없다.

 바로 이런 까닭에 예수께서는 인간의 구원자만이 아니라 온 피조 세계의 구원자이다. 예수의 사역이 먼저 인간에게 집중되기는 하였지만, 그것은 인간에게만 관심이 있다는 뜻은 아니다. 인간의 문제를 해결해야 피조 세계의 문제가 해결되기 때문이었다.

 우리는 첫 번째의 창조의 차원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 많은 사람들이 이 차원에서 산다. 이 차원에서 사는 인생은 참된 진리를 알지 못하고, 그 인생도 역시 한계적일 수밖에 없다. 어머니의 배에서 태어나는 것에 만족해서는 안되며, 한 번 더 태어나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새로이 태어나야 한다. 인간 아무개의 자식으로서 만족하지 말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야 한다.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참된 진리를 알게 되고, 영원한 생명을 얻어야 한다. 이렇게 하여 우리가 변화될 때, 이 피조 세계가 함께 변화할 수 있다. 성탄절기는 바로 이 새로운 창조가 시작된 것을 기념하고 축하하는 절기이다.

 셋째,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시작된 이 새 창조는 그가 재림하실 때, 새 하늘과 새 땅으로서 완성될 것이다. 우리에게는 그러한 소망이 있다.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경험하는 새 창조의 현실은 부분적이다. 우리가 새로 지어졌다고는 하지만 완전한 새 사람이 아니고, 이미 파괴된 이 세상은 우리의 노력으로 새로워지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새로워진 우리를 완전하게 하고, “새 하늘과 새 땅”의 시대가 시작되는 것은 인간의 힘에 달려 있지 않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재림하시는 날, 그 모든 일이 하나님의 능력에 의해서 일어날 것이다.

 우리는 이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산다. 강림절은 바로 이 소망을 새롭게 하고, 그 소망을 가지고 오늘을 힘있게 살아가도록 요청한다. 이 영광의 때가 속히 임하도록 “마라나타!”라고 기도하며, 오늘을 책임 있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되어야 할 것이다. 


 3. 1장 18절과 13장 23절을 바탕으로 하여, “하나님의 품”이라는 설교를 구성할 수 있을 것이다.

우리가 본능적으로 가장 그리는 것은 무엇일까? 여러 가지를 생각할 수 있겠지만, 그 중 하나가 어머니의 품이 아닌가 싶다.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어머니의 안온한 품에 안겨 젖을 빨면서 생애를 시작한다. 이 품에 안겨 우리는 어머니의 숨결을 느끼고, 어머니의 정서를 느끼면서, 무언의 교제를 나눈다. 아무런 말도 오가지 않았지만, 이 때에 어머니와 자식 사이에 주고받은 수많은 무언의 대화는 그의 삶의 큰 밑거름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일상사에서 오는 피곤에 지칠 때마다 어머니의 품을 그린다. 그곳에서 편히 쉬고 싶기 때문이다. 외로움이 뒤척일 때에도 어머니의 품을 그린다. 그곳에서 누군가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비록 육신은 성장하여 더 이상 그렇게 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정신적으로는 늘 어머니의 품안을 파고들고 있는 셈이다. 그 품에서 느끼는 사랑이 우리의 삶을 지탱하게 만들어 준다.

오늘 본문을 보니, 하나님의 품에 대하여 이야기를 하고 있다. 육신을 입고 태어나기 전에 예수께서는 어떻게 사셨는가?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안에 안겨서 서로 무언의 교제를 주고받듯이, 예수님도 하나님의 품안에서 이러한 교제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다분히 상징적인 표현이다. 어디 하나님께 품이 있겠나? 하나님의 품안에 있었다는 말은 예수께서, 마치 어린아이가 어머니의 품에 안겨서 애정의 교제를 주고받듯이, 하나님과 그런 교제를 주고받았다는 사실을 표현하기 위한 수사법일 뿐이다. “품안에서 논다”는 표현만큼, 사랑스럽고 친밀한 교제를 잘 표현할 수 있는 말이 어디 있는가? 그래서 저자는 이 표현을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 성자 예수님은 하나님이 계실 때부터 계셨던 분이다. 그는 영원히 하나님과 함께 동거하는 분이다. 심지어 육신을 입고 이 세상에 있을 때조차, “아버지는 내 안에, 나는 아버지 안에 있다”고 누누이 말씀할 정도로, 두분은 함께 있었다. 그랬기 때문에 아버지가 생각하는 것이 아들의 생각이 되고, 아버지의 관심이 아들이 관심이 되었다. 그런 교제가 있었기 때문에 하나님의 성품인 “은혜와 진리”(“헤세드와 에멧트”)가 예수님의 성품이 되었다. 이러한 애정 깊고 밀접한 교제가 있었기에 인격적인 동화 작용이 일어났던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교제를 통하여 하나님의 사랑을 확인하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십자가 위에서조차 외롭지 않을 수 있었다. 하나님의 사랑이 있는 한, 모든 사람이 그에게 등을 돌려도 상관이 없었다. 하나님 한 분이 그의 편으로 계신 것으로 족했다.

하나님과 이러한 교제를 나누셨던 예수께서는 그를 따르던 제자들에게도 이러한 교제를 요구하셨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 복음서를 쓴 요한이다. 예수께서는 특히 요한을 사랑하셨는데, 요한도 역시 예수님을 끔찍하게 사랑하고 있었다. 그래서 마지막 만찬 자리에서 요한은 예수의 품에 기대어 있었다. 둘 사이에 얼마나 사랑 깊고 긴밀한 인격적 교제가 있었는지를 보여주는 대목이다.

그랬기 때문에 요한은 예수의 성품을 닮을 수 있었다. 그는 원래 “보아너게”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다. “우뢰의 아들들”이라고 불리울만큼, 성격이 급하고 다혈질적이었다. 그런데 그런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이렇게 친밀한 교제를 나누면서 변화되었다. 그가 쓴 이 복음서를 읽어보더라도, 그의 온유하고 사랑 깊은 인품이 느껴진다. 뿐만 아니라, 예수의 품속에서 느꼈던 그 사랑은 요한의 삶을 지탱해주는 힘이 되었다. 그 어떤 외로움도 고난도 그는 이겨낼 수 있었다. 예수께서 그에게 주셨던 그 사랑의 기억 때문이다. 마치, 어머니의 품에서 느꼈던 그 사랑의 기억이 자식의 삶의 힘이 되듯이, 예수의 품에서 느꼈던 그 사랑은 요한의 삶의 힘이 되어 주었다.

예수께서 하나님과 나누셨던 이 교제, 그리고 요한이 예수님과 나누었던 이 교제는 우리에게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우리도 요한처럼 예수님의 품에 안겨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우리도 예수님처럼 하나님의 품에 안겨 살아야 한다는 뜻이다. 사실, 믿음이라는 것은 이러한 교제를 의미한다.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만을 인정하는 것이 믿음이 아니다. 예수가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는 것만으로 충분한 믿음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온전한 믿음은 그 하나님, 그 예수님과 깊은 교제를 나누며 살아가는 것을 가리킨다. 이렇게 살아가게 되면,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는 하나님의 성품을 닮아가게 된다. 그분의 사랑을 닮고, 그분의 진실성을 닮게 된다. 이렇게 살면, 그분과 우리는 하나가 된다. 하나님 안에 우리가 살게 되고, 우리가 하나님 안에 살게 된다. 그래서 하나님의 생각이 우리의 생각이 되고, 우리의 생각이 하나님의 생각이 된다. 이렇게 되면, 굳이 “하나님의 뜻은 무엇일까?”라고 묻지 않아도 된다. 우리가 생각하는 것이 곧 하나님의 생각이 되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모름지기 여기까지 올라가야 한다.

어디 그 뿐인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과 이런 교제를 나누고 살면, 우리는 하나님의 깊은 사랑을 경험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사랑이라는 것은 얼마나 한계적인가? 영원한 사랑도 없고, 무조건적이 사랑도 없다. 하지만 이 깊은 교제를 통하여 우리가 느낄 수 있는 하나님의 사랑은 영원한 사랑이요 무조건적인 사랑이다. 이 사랑을 마음 깊이 체험을 하고 나면 세상이 달라 보인다. 세상에 무서울 것이 하나도 없다. 그 어떤 고난도, 그 어떤 외로움도 이겨낼 수 있다. 이 사랑을 경험한 바울이 어떤 고백을 했는가?


   그런즉 이 일에 대하여 우리가 무슨 말하리요

   만일 하나님이 우리를 위하시면

   누가 우리를 대적하리요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

   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

   죽으실 뿐 아니라 다시 살아나신 이는 그리스도 예수시니

   그는 하나님 우편에 계신 자요

   우리를 위하여 간구하시는 자시니라

   누가 우리를 그리스도의 사랑에서 끊으리요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기록된 바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케 되며

   도살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

   함과 같으니라

   그러나 이 모든 일에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넉넉히 이기느니라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나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롬 8:31-39).


하나님의 품에 기대어 사랑의 교제를 나누어보지 않은 사람은 이런 고백을 할 수 없다. 이런 고백은 머리로 되는 것이 아니다. 가슴으로 느낄 때 이런 고백이 나오는 것이다. 이런 고백이 있는 사람에게 그 무엇이 두렵겠는가? 이런 고백을 가슴에 품고 사는 사람은 얼마나 행복하겠는가?

그러므로 기왕 믿을 바에는 이렇게 믿자.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그분과 깊은 교제에 들어가, 그분의 성품을 배우고, 그분의 생각을 배우고, 그분의 진리를 배우자. 하나님의 품에 안기어, 우리를 향한 그 깊고 뜨거운 사랑을 느껴보자. 이러한 사랑의 교제는 우리의 삶을 온통 새롭게 만들어 줄 것이다. 예수의 삶의 비결이 바로 이 교제에 있었으며, 바울과 요한의 삶의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었다. 하나님의 품에 기대어 사는 듯한 깊은 교제--바로 이것이 복된 삶의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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