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자유게시판

[스크랩] 시(侍)에 대하여 [장일순]

작성자천봉|작성시간08.05.27|조회수16 목록 댓글 0
 

시(侍)에 대하여


  한살림 공부모임에서 여러번 제 차례가 왔는데도 말씀드릴 건데기가 없어 미루다 보니 마지막 차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가만히 생각해보니 정말 할 이야기가 없어요. 그래서 어려서 지내던 이야기 몇마디 하는 것으로 대신할까 합니다.

 

  아마 서너살 때인 것 같은데 명절이 되면 별식이 많잖아요. 이것저것 먹다 보면 배탈이 나지요. 요즘에야 뒷간이 집안에 다 있지만 그때는30-40미터 떨어진 곳에나 대개 있었습니다. 볼일은 낮이나 아침에 훤할 때 보는 법인데 밤에 배탈이 났으니 뒷간엔 가야겠고 뒷간엔 불도 없는데다 너댓살의 아이들은 가랭이를 쭉 벌려야만 널판지에 오를 수 있거든요. 그래서 자꾸 칭얼거리면 어른들이 등불을 켜서 변소 앞까지 데려다주면서 "저기 닭장 앞에 가서 구부렁 구부렁 큰절을 세번 해라. 밤똥은 닭이나 누지 사람도 밤똥을 누느냐"고 말씀하셨어요. 그러면 "밤똥은 닭이나 누지 사람도 밤똥을 누느냐" 하면서 세번 큰절을 하고 후련하게 방으로 들어와 잠을 잔단 말이에요. 그런 생활을 어려서 했지요. 그러니까 동심의 세계에서는 "내가 인간인데!" 하고 잘났다는 생각이 없었다고요. 이 점에 있어서는 닭이 나보다 낫구나 하고 생각했지요.

 

  그리고 학교를 다닐 때였는데 집에 일찍 돌아오면 어머니는 개울가에 가셔서 빨래를 하시고 빨래가 많아서 늦게 돌아오시면 배가 고프니까 울타리 밑에 가서 살구를 따먹지요. 그러면 수염이 이만한 할아버지가 "일순아 뭐해, 이리와" 하신단 말씀이야. 그래서 "예" 하고 가면 "너 뭐하는 거냐" 하시지요. 그래 내가 "배가 고파서 살구 좀 따먹어요"라고 하면 "그 살구는 익어야 따먹는 거야. 살구는 니 아범이 심은 거지 니가 심은 거 아니잖아, 그러니까 따먹으면 안돼. 살구가 익으면 그걸 다 따서 할머니 할아버지 너희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그리고 같이 일 봐주시는 분들과 나눠먹어야지 그것을 지금 따먹으면 되는가, 알았지" 하셨어요. 그럼 "예" 할 수밖에요. 어떤 분 말씀이라고 안들을 수 있어요.

 

  어려서 학교를 가기 전에는 글방에 다녔고, 예닐곱살 때에는 놀지도 못하게 하시면서 집에서 자꾸 글씨를 쓰라고 하셨는데 나보다 서너살 많은 사람들이 놀러와 같이 붓글씨를 썼거든요. 그런데 붓글씨만 쓰면 심심하고 재미가 없단 말이에요. 그래서 울타리 밑에다 1평이나 2평씩 2패로 조를 짜서 밭을 조금 일구어 완두콩이나 강낭콩을 심고 어느 쪽이 먼저 나나 보자구 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나도 어느 편에 소속되었고 우리집 울타리 안이니까 어느 쪽이 먼저 나나 맨날 지켜보는데 다른 패 쪽에서 먼저 완두콩싹이 나더란 말이야. 그래서 슬그머니 가서 완두콩 대가리를 딱 잘라버렸지. 이것은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고백을 못한 하나의 사실인데 엄청난 거란 말이에요.

 

  또 사다리를 놓고 알을 끄집어내거나 새를 끄집어내는데, 그러다 보니 서툰 솜씨에 알도 깨뜨리고, 새를 서로 주무르다 보니 할딱거리고, 새가 할딱거리니까 죽을 것 같아서 살라고 똥구멍에 바람을 넣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새가 팔딱거려서 살 것 같은데 죽는단 말이야. 이런 짓을 꽤 했어요.

  일상생활속에 대단치도 않은 것 같던 일들이 그 안에 엄청난 이야기들이 다 있더란 말이에요.

 

  해월 선생님의 말씀에 보니까 '천지만물 막비시천주야(天地萬物 莫非侍天主也)'라. 하늘과 땅과 세상의 돌이나 풀이나 벌레나 모두가 한울님을 모시지 않은 것이 없다. 그래서 제비알이나 새알을 깨뜨리지 말아야 하고 풀잎이나 곡식에 이삭이 났을 때 꺾지 말아야 되거든요. "새알이나 제비알을 깨뜨리지 않으면 봉황이 날아 깃들 것이고, 풀의 싹이나 나무의 싹을 자르지 않으면 숲을 이룰 것이고, 그렇게 처세를 하면 그 덕이 만물에 이른다. 미물까지도 생명이 함께 하신다고 모시게 되면 그렇게 된다"고 말씀하셨더란 말이에요. 그러니까 새알을 깨고, 팀을 나눠 경쟁해서 남이 안 보니까 남의 밭에 나는 콩싹을 잘라버리는 것들이 제국주의보다 나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제국주의란 것이 바로 이런 데 있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모신다는 기본적인 이야기는 아주 자연스러운 작은 것부터 이야기가 되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시(侍)'자를 들여다보니까 엄청나요. '시'자 안에는 '시양(侍養)한다'거나 '시봉(侍奉)한다'(봉양해서 먹여 모신다)거나 '사양(飼養)한다'(아랫사람을 먹여 잘 키운다)는 일체에 대한 이야기가 들어있어요.

 

  "산에 가봤느냐. 산이 어떻더냐." 산에 가면 산이 둥그렇고 위는 뾰족하고 밑은 넓지. "산에는 뭐가 있더냐." 바위도 있고 나무도 있고 풀도 있고 헤아릴 수 없이 많이 있단 말이에요. 산이 되는 조건은 여러가지지요. 바위도 있어야 하고 나무도 있어야 하고 나무도 한가지가 아니라 수만가지여야 하고 풀도 있어야 하고 여러가지가 다 있어야 산이 된단 말이거든요. 그 각자는 산이 되는 조건으로 빠질 수가 없으면서도 서로를 무시하지 않아요. 그러니까 옛날에 착한 분들이 써놓은 책들을 보면, 특히 우리나라의 성인이라 할 수 있는 수운(水雲) 최제우(崔濟愚) 선생이나 해월(海月) 최시형(崔時亨) 선생의 말씀을 보면 그 많은 말씀이 전부 시(侍)에 관한 말씀이라. 그러니까 이 구석을 들여다봐도 시(侍)고 저 구석을 들여다 봐도 시(侍)고 시(侍) 아닌 것이 없어요. 그래서 어느 구석에 가서도 그거 하나만 보고 앉아있으면 편안한 거라.

 

  사람이 일상생활에 있어서 만가지를 다 헤아리고 갈 수는 없는 거지요. 그러나 자기가 타고난 성품대로 물가에 피는 꽃이면 물가에 피는 꽃대로, 돌이 놓여있을 자리면 돌이 놓여있을 만큼의 자리에서 자기 몫을 다 하고 가면 모시는 것을 다 하는 것이라고 저는 생각해요. 그렇다고 해서 딴 사람이 모시고 가는 것을 잘못 됐다고 할 수도 없지요. 있음으로써 즐거운 거니까. 동고동락(同苦同樂) 관계거든요. 요샌 공생(共生)이라고도 하는데 본능적으로 감각적으로 편하고 즐거운 것만 동락(同樂)하려고 든단 말이에요. 그런데 고(苦)가 없이는 낙(樂)이 없는 거지요. 한살림속에서도 고(苦)와 낙(樂)이 함께 있어야 된다고 생각해요. 더불어 함께 하는 것이지요. 즉 공생하는 건데, 공생관계는 각자를 긍정해주는 것이란 말이에요. 각자를 긍정해줘야 모시는 것이 되는 거잖아요?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겠어요. 제 주머니에 넣으려고 하지를 않겠지요. 상대방이 있게끔 노력하는 거니까. 그것이 제가 생각하기에는 시(侍)의 극치가 아니겠나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동고동락한다는 것 자체가 생활이지 동락만 한다면 생활이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해월 선생은 "시(侍)는 무위이화(無爲而化)다",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공자는 또 이런 말을 했습니다. "하늘이 뭔 얘기가 있더냐. 그래도 사철은 돌아가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만물이 나지 않느냐." 그러면 '무위이화'속에서 사람은 어떻게 해야 하나. 그 조화속이란 것이 '무위이화'란 이야긴데, 그 '무위이화'속에서 사람은 그 이치를 알고 참여하는 것, 그러니까 일컫자면 창조적인 참여라고나 할까요. 사욕을 차리기 위해서 하는 것이 아니라 온 우주가 본원적으로 가지고 있는 그 이치를 깨달아 자기도 거기에 동참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시천주조화정(侍天主造化定)'의 핵심이지요. '조화정(造化定)'은 시(侍)가 움직거리는 것, 즉 모시는 근원에 있어서의 하나의 태도이지요. 그러니까 아까 이야기한 새알이라든가 나무의 싹을 잘라서는 안된다거나 하는 이치가 살아있는 것에 대한 존경 그것을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지요.

 

  오늘날 우리가 시(侍)의 문화가 되지 못하고 있는 이유는 무엇이냐. 생산활동도 돈을 벌기만 하면 되게 되어있단 말이에요. 돈벌기 위한 생산만을 하고 있다는 말이거든요. 그렇게 되니까 공업이 중점적으로 되는 생산이 되어버렸단 말이에요. 농업은 경제활동 자체에서 사장이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농민회에서 쌀값 보장해달라고 해도 그것이 인정이 안되는 거라. 그런데 공업이라는 것은 원료 자체가 살아있지 않아도 되지요. 그렇게 해서 계산만 맞추면 돼. 그런데 농업이란 것은 어떻게 되어있나. 씨알 자체에서부터 살아있어야 돼. 사람의 입에 들어갈 때까지도 그것은 살아있는 것이어야 돼요. 그러니까 오늘날의 경제는 협의의 경제라고요. 생명을 모시는 경제가 아니라고요. 바로 썩지 않도록 방부제를 치고 한 것 가지고 돈만 벌면 된다구요. 그러니까 "시장경제라고 하는 것은 돈을 모시는 경제지 생명을 모시는 경제가 아니다" 이 말씀이야. 그러니까 문제는 농민들이 스스로 오늘날의 공산품 틀속에 들어가서 문제를 해결하려 하니까 본원적인 문제가 해결이 안되는 거라.

 

  지금 제가 이 자리에서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천지자연의 원칙대로 그 돌아감을 깨닫고 이해하면서 그것에 맞춰서 생활에 동참하는 것, 그 속에서 일을 처리해 나갈 때 어떻게 되느냐, 그때 자기의 본의든 본의가 아니든 시(侍)의 틀속에서 자기도 생활하고 나아간단 말이지요.

 

  오늘 이렇게 같이 모인 여러분들은 그것을 정성들여 해결하려고 더욱 이해하시면서 갈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여러분이 깊이 이해를 하고 가시면서 생활의 틀을 그렇게 하니까 더욱 좋더라 하게 되면 나중에 오는 분들로 하여금 더욱 쉽게 하게 해줄 수가 있겠지요.


天地自然의 平易하고 簡單한 法則에 따라 易則易知하고 簡則易從하고 易知則有親하고 易從則有功 ― 易簡而天下之理得矣니라.《易經》


  모든 일상생활에서는 모든 것을 이렇게 처리해야 된다는 것인데, "쉬우면 쉽게 알 수 있고 간단하면 쉽게 따를 수 있고 쉽게 알 수 있으면 친할 수 있고 쉽게 따를 수 있으면 공을 이루리라 ― 쉽고 간단함속에 천하의 이치를 얻을 수 있나니라" 하는 말씀이에요.

 

  그러니까 여기서의 시(侍)라는 것이 어렵게 이야기가 되는 방향보다는, 생명운동이란 어차피 모든 문제가 생명속에 하나 둘 살아나는 것인데 그것을 쉽게 따라갈 수 있게 처리가 되어야 되지 않겠나, 그런 것이 뭐냐 하면 원래가 전체를 모시고 갈 수 있는 하나의 생활태도가 아닌가, 저는 그렇게 생각해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구석을 봐도 시(侍)고 저 구석을 봐도 시(侍)고 시(侍) 아닌 게 없는데 그것을 모신다고 하고, 함께 사는 관계를 키워간다는 자세를 가지고 있다면 시(侍) 아닌 것이 없지요. 전부가 시(侍)지요. 그렇게 됐을 때는 쉽게 알 수 있고 쉽게 행동할 수 있고 쉽게 따를 수 있고, 그렇게 처리가 되었을 때에 그 일은 비로소 제자리에 크게 돌아갈 수 있지 않나 하는 생각을 좀 해봤어요.

 

  오늘 여러분을 모시고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한살림운동, 생명운동, 이 모임 이것이 어렵게 이야기가 되지 않고 쉽게 이야기가 되고 또 서로 모시는 입장으로 되고 일체를 모시는 입장으로 되고 해서 결국 그렇게 되어야 되지 않겠나 하는 거예요. 참 쉬우면서도 어려운 이야기지요. 더구나 이것을 정반대의 문명, 문화속에서 처리를 해가자면 많은 어려움도 있을 거예요. 그래도 쉬운 가운데서 처리해 나갈 수 있는 그런 슬기를 가지고 모든 것에 고개를 숙이고 모시는 자리에 있게 되면 결국은 깃들지 않겠나, 저는 그렇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여러분이 하시는 일에 복이 함께 하기를 빌면서 저의 이야기를 끝내겠습니다.


  한살림모임 창립기념강연 (1989년 10월)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