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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SH☆-자유 게시판-

일본프로야구 역대포스트 시즌 명경기 10선

작성자로켓트단|작성시간10.10.08|조회수222 목록 댓글 0

2009년 일본시리즈 우승을 차지하고 기뻐하는 요미우리 (사진 : 연합뉴스)

일본 최초의 일본시리즈가 개최된 때는 지금으로부터 60년 전인 1950년.

그 이전까진 단일리그제였다. 1950년 이후 프로야구가 ‘센트럴리그’, 퍼시픽이라는 현재의 양대리그로 분리됨으로써

필연적으로 일본시리즈가 필요했다.

 

최초 대전 팀은 센트럴리그에서는 쇼치쿠 로빈스(요코하마의 전신)라는 영화회사를 모회사로 둔 팀과

퍼시픽리그에서는 마이니치 오리온스(지바롯데의 전신)간의 일전이었다.

당시부터 7전4선승제를 도입했으며 그 역사적인 첫 우승팀은 4승2패를 기록한 마이니치 오리온스였다.

 

참고로 요미우리의 우승은 이듬해인 1951년이 최초다. 그 이후 1965년부터 9년 연속 우승이라는

현재까지도 (그리고 아마도 그 이후로도) 깨지지 않고 있는 연속우승 일본최고기록을 수립하였다.

 

케이블TV가 보급되지 않았던 1980년대 이전의 퍼시픽리그는 센트럴리그에 비해 압도적으로 그 인기가 낮아

흥행 면에서도 상당한 고전을 면치 못했었다. 그 때문에 1973년부터 1982년까지 10년 동안

퍼시픽리그 단독으로 전·후기제도를 채택하게 됐다.

 

전·후기제는 한 시즌에 2개 팀이 우승을 하는 것으로, 자연스럽게 플레이오프가 경기가 열려

포스트 시즌 경기수를 늘릴 수가 있었다. 그런데 이 같은 시도 또한 대폭적인 인기상승으로는 이어지지 못하고

오히려 순위는 결정됐으나 일정상 치러야 하는 경기만 늘리게 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 때문에 다시 1시즌제로 되돌아가고 말았다. 


 

 

 

 

오랫동안 양대리그, 1시즌제를 도입하면서 ‘포스트시즌=일본시리즈’였던 일본프로야구가

2004년부터 그 도식이 크게 바뀌었다.

 

이해부터 퍼시픽리그가 또다시 플레이오프제도를 도입했기 때문이다.

퍼시픽리그 단독 플레이오프는 2006년까지 계속 됐고, 2007년에는 센트럴리그가 동참했다.

 

방식은 기본적으로 시즌 상위 세 개 팀이 맞붙는 형태이다.

시즌 3위와 2위가 겨뤄 그 승자가 1위와 맞붙는다. 명칭은 공모를 통해 클라이맥스시리즈로 정했으며

 

 3위와 2위 간의 경기는 ‘퍼스트 스테이지’, 여기서 이긴 승자와 시즌1위 간의 싸움이

‘세컨드 스테이지’가 되는 형태다.

 

그러나 올 시즌부터는 ‘퍼스트 스테이지’와 ‘파이널 스테이지’로 명칭이 일부 변경됐다.
 
다만 현재에도 일본야구계에선 플레이오프제도에 대한 거부감이 적지 않다.

프로야구라는 것은 1시즌을 싸워 우승팀을 결정짓는다는 선입견이 뿌리 깊게 박혀 있기 때문이다.

 

모순도 만만치 않다. 만약 시즌2위, 3위 팀이 클라이맥스시리즈에서 승리하고

일본시리즈에서 우승하면 동일 리그에서 ‘리그우승팀’과 ‘일본최고 팀’ 두 개가 동시에 존재하게 되기 때문이다.

이 때문에 나온 조치가 ‘1승 어드밴티지’다.

 

 

포스트시즌이라는 단기전을 통해 시즌 순위가 뒤바뀌는 것에 대한 거부감 및 의구심으로 인해

리그에서 우승한 팀에게는 클라이맥스시리즈에서 1승의 어드밴티지를 부여하게 됐다.

 

즉 7경기를 싸워서 4승을 하는 게 아니라 이미 1승을 한 상태로 시작해 6경기만 치르도록 한 것이다.

즉 리그우승한 팀은 3승만 하면 된다.

 

하지만, ‘싸우지 않고 1승이라는 규정이 과연 프로야구와 어울리는 것일까’라는 논의는 남게 된다.

 어찌됐건 간에 해마다 수정이 가해지는 규칙. 교류전의 영향으로 인해 일본시리즈에서

다른 리그 팀끼리 맞붙게 된다는 신선미가 떨어지게 되는 등 앞으로도 일본의 포스트시즌에는

여러 가지 영향 및 변경이 생겨날 것으로 전망된다.

 

 

이 시간엔 세월이 흘러도 변하지 않을 추억의 명경기를 소개하려 한다. '

일본프로야구 역대포스트 시즌 명경기 10선'이다.

일본프로야구가 어떻게 흘러왔는가 알 수 있는 좋은 계기가 되리라 본다.

 

 

 

 

 

 

○ 1987년 세이부 VS 요미우리, 일본시리즈 7차전 '기요하라가 흘린 복수의 눈물'

 

 

 

 

 

 

1987년, 세이부 대 요미우리의 일본시리즈 최종전.

세이부가 요미우리로부터 아웃카운트 하나만 잡으면 일본최고의 자리에 등극하는 그 순간,

1루를 지키고 있던 기요하라 가즈히로는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로부터 일년 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프로에 입단할 뜻을 밝힌 기요하라는 그 당시,

10년에 한 명, 20년에 한 명 나올까 말까 할 정도의 타고난 소질을 가진 타자라 일컬어졌었다.

 기요하라는 요미우리 입단을 희망하였고 요미우리 또한 기요하라를 영입할 것으로 예상되었었다.

 

그러나 드래프트회의에서 요미우리가 지명한 선수는 기요하라가 아니라

그의 팀동료이자 라이벌이기도 했던 구와타 마스미였다.

배신당한 심정이던 기요하라는 지명 받은 세이부에 입단하게 된다.

‘언젠가 요미우리에게 복수하고 말테다.’ 이 같은 결심이 바로 그 이듬해에 실현된 것이다.

 그러한 감정들이 북받친 데에 대한 눈물이었다.

 

 

 

 

○ 1979년 긴테쓰 VS 히로시마, 일본시리즈 7차전 '에나쓰의 21구'

 

 

 

 

 

1979년, 긴테쓰(현 오릭스와 합병) 대 히로시마 간의 7차전 경기.

4대 3 상황에서 맞게 된 마지막 이닝. 긴테쓰의 무사만루 절호의 기회,

반면 히로시마에게는 절체절명의 위기의 순간을 당대 야구계를 대표하는 베테랑 구원투수였던

에나쓰 유타카가 막아냈던 1이닝이 기나 긴 일본시리즈 역사 가운데에서도 손꼽히는 명장면으로 회자되고 있다.

 

21구란 에나쓰가 이 1이닝 동안 던진 투구수를 말한다.

이 1이닝 동안 던진 21개 공에 착안하여 투수와 타자, 양팀 벤치 감독 등의 심리를 취재하여

그려낸 논픽션은 이후 스포츠매스컴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명작이 되기도 했다.
 

 

○ 1978년 야쿠르트 VS 한큐, 일본시리즈 7차전 '1시간 30분의 거센 항의'

 

 

 

 


1978년, 야쿠르트 대 한큐(후에 오릭스가 됨) 간의 7차전 경기.

야쿠르트 타자가 쏘아 올린 좌측 폴대 거의 끝으로 날아간 홈런을 둘러싸고 열혈남으로

알려진 한큐의 우에다 도시하루 감독이 파울이 아니냐며 거칠게 항의하였다.

항의로 인해 중단된 시간은 무려 1시간 19분.

 

결국, 판정은 번복되지 않았고 4승3패로 야쿠르트가 일본최고의 자리에 등극하게 되었으며

우에다 감독은 이날 밤, 패배와 장시간 항의에 대한 책임을 진다는 뜻에서

감독직을 사임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하였다. 올드 팬들의 기억 속에 강렬히 각인되어 남아 있는 경기이다.

 

 

○ 1995년 오릭스 VS 야쿠르트, 일본시리즈 4차전 '고바야시 VS 오말리 외야수' 

 

 

 

 

 

1995년, 간사이지구를 광범위하게 강타한 대지진이 발생한 (한신아와지대지진)

그 해의 일본시리즈. 지진피해를 입은 시민들의 상처를 달래주기라도 하듯 리그우승을 차지한 오릭스였지만

노무라 가쓰야 감독이 이끄는 야쿠르트에게는 당해내지 못하였다.

 

하지만 4차전 때 동점 상황에서 맞이한 연장11회 말, 1사, 1-2루 상황에서

야쿠르트의 타자 오말리 외야수에게 맞선 오릭스의 고바야시 히로시 투수의 투구는

말 그대로 일대일 승부로 감동 그 자체였던 것이다.

 

고바야시가 오말리에게 던진 투구수는 14개. 소요된 시간은 타자 한 명임에도 불구하고

17분이나 되었다. 결과는 헛스윙 삼진. 우승은 비록 하지 못했지만 그 한 순간만큼은 빛났던 명승부였다

 

○ 1958년니시테쓰 VS 요미우리, 일본시리즈 4차전 '하느님, 부처님, 이나오님'

 

 

 

 

1958년, 니시테쓰 대 요미우리 간의 일본시리즈. 니시테쓰(현 세이부)의 에이스 이나오 가즈히사는

이 해에 33승을 하는 등 ‘철완투수’라는 별명을 지닌 슈퍼스타였다.

그런데 니시테쓰는 일본시리즈에서 요미우리를 상대로 3연패를 당한 상태.

벼랑 끝에 몰린 4차전에 벌써 두 번째로 선발에 등판한 이나오는 완투승을 거두며

이어지는 5차전에도 구원투수로 등판하여 승리를 따냈다.

그러더니 6차전에서도 선발로 등판해 완투하였고 7차전에도 선발로 나와 완투하는 등

경이적인 4연승을 거두면서 대역전 우승극을 펼쳤다.

 

‘가미사마(하느님), 호토케사마(부처님), 이나오사마’. 하느님과 부처님에게도 필적할만한 존재.

이후 니시테쓰 팬들을 주축으로 이 같은 말까지 탄생되었던 시리즈였다.

 

 

○ 2007년 주니치 VS 니혼햄, 일본시리즈 5차전 '환상으로 끝난 퍼펙트게임'

 

2007 일본시리즈 5차전에서 1대0으로 승리하며 챔피언에 오른 주니치.

 이병규가 동료들과 함께 우승을 축하하고 있다. (사진 : 연합뉴스)

 

2007년 주니치 대 니혼햄 간의 일본시리즈.

그 5차전에서 주니치의 야마이 다이스케 투수가 8회까지 퍼펙트 피칭을 연출하였다.

시즌은 차치하고서라도 일본시리즈에서의 퍼펙트게임은 지금까지도 나오고 있지 않고 있다.

 

그런데 1대0으로 앞선 상황에서 맞이한 9회, 마운드에 등판한 사람은 야마이가 아니라

마무리투수인 이와세 히토키였다.

 

야마이가 부상을 당한 것도 아닌데 오치아이 감독은 냉철하리만치 경기의 승리를 우선시하여

 ‘수호신’을 투입한 것이다. 그리고는 우승을 거머쥐었다. 하지만 이에 대해서는 현재까지도 논의가 분분하다.

 

‘아무리 일본최고자리가 중요하다고는 하지만 프로야구는 꿈을 파는 장사인데

계속 던지게 하지 않은 것은 실망’이라는 목소리도 있는가 하면 ‘공식전이면 또 모를까 일본시리즈는 별개다.

감독의 용병술은 정확했다’며 의견이 양분화되고 있다. 이 또한 잊을 수 없는 역대 포스트시즌 경기 중의 한 장면이다.

 

 

  

○ 2004년 니혼햄 VS 세이부 플레이오프 3차전 '충격적인 퍼시픽리그 플레이오프'

 

 

 

 


2004년에 도입된 퍼시픽리그 플레이오프.

그 우승을 결정짓는 최초의 대전은 시즌3위인 니혼햄과 2위인 세이부 간의 경기였다.

그 무대가 된 세이부 돔은 범상치 않은 분위기에 휩싸였다.

그 이전 해까지만 해도 있을 수조차 없었던 결전이 눈앞에서 펼쳐지게 된 것이다.

 그러한 것들이 가져다 주는 긴장감이 팬들 사이에 충만해 있었다. 마운드에 오른 투수는 마쓰자카 다이스케

.

결과는 난타전 끝에 10대7로 세이부가 승리하여 그 제1스테이지는 세이부가 2승1패를 하면서

제2스테이지로 진출하게 된다. 그리고 시즌1위인 다이에를 꺾고 일본시리즈 출전권을 따낸다.

시즌 1위를 한 팀이 패하여 일본시리즈에 출전하지 못하게 된 것이다.

세이부의 약진은, 동시에 새로운 규정 앞에 무릎을 꿇게 된 다이에라는 현실을 드러내 보여주는 순간이기도 했다.


 
○ 1973년 난카이 VS 한큐, 플레이오프 5차전 '전?후기 시절의 퍼시픽리그 플레이오프'

 

 

 

 

 

일본 내에서도 퍼시픽리그만 전후기제를 도입하던 시절. 그 최초의 플레이오프는

1973년, 전기우승팀인 난카이와 후기우승팀인 한큐의 싸움이었다.

난카이의 당시 감독은 후에 야쿠르트에서 명성을 날리던 노무라 가쓰야.

일반적으로 흔히 볼 수 없는 경우이지만 노무라는 현역 말년 때부터 포수겸감독을 맡는 등

이색적인 이력을 지닌 감독이기도 했다. 한큐는 당시, 후쿠모토 유타카라는

 훗날 통산 도루세계기록 1065개를 보유할 만큼 뛰어난 준족선수가 있었다.

 

달리기만 하면 무조건 도루에 성공했다. 그러한 후쿠모토를 포수이기도 한 노무라는

완벽하게 막아내었다. 그 이유는 투수의 퀵모션에 있다.

통상적인 투구법이 아니라 주자의 타이밍을 잡기 어려운 민첩한 투구법.

 지금은 당연시되고 있는 투구법이 처음으로 시도된 것이 이 때의 플레이오프라고 일컬어지고 있다

 

그 결과, 3승2패로 난카이가 리그우승을 거머쥐게 된다.

그런데 신선함조차도 관중동원을 이끌기에는 역부족이어서

퍼시픽리그만으로 개최된 전후기제, 플레이오프는 결국 10년 만에 막을 내리게 된다.

 

 

 

 

○ 2005년 지바 VS 한신, 일본시리즈 1차전 '밤안개에 휩싸인 한신, 수수께끼의 4연패'

 

 

 

 

 

 2005년 지바롯데 대 한신의 일본시리즈. 수많은 명승부를 탄생시킨 일본시리즈이기는 하지만

 동시에 해프닝도 적지 않다. 그 1차전은 경기 중 갑작스럽게 내린 짙은 안개로 인해 7회 도중에

 콜드게임으로 끝나고 말았다. 경기결과는 10대1로 지바롯데의 승리.

 

 하지만 소위 말하는 ‘서스펜스’였던 점은 그러한 짙은 안개와 점수차로 상징되는

 지바롯데의 일방적인 경기전개내용이다. 이 시리즈에서 지바롯데는 4승0패로 완벽한 일본최고를 손에 넣게 된다.

 

 4승0패로 끝난 일방적인 시리즈는 과거에도 4번 있기는 하였다. 그렇다 하더라도 지바롯데가

그 정도로까지 뛰어남을 발휘했던 점과 동시에 4번이나 한신이 전혀 실력을 발휘하지 않은

 아니 못했던 경기는 그리 흔한 경우가 아니었다.

 

첫 번째 경기에서도 큰 점수차를 벌인 상황에서 등판시킨 투수는 시즌 내내 패전처리를 전담해 오던 투수였다.

‘단기전 경기와 정규시즌 경기는 별개’라는 것이 일본야구계에서 통용되는 상식인데

 당시의 오카다 감독은 이 같은 패전처리투수투입에서 보아 알 수 있듯이

시종일관 정규시즌 경기운용법 및 선수기용으로 일관하면서 패배하게 되었다.

 왜 그렇게까지 정규시즌 경기운용법을 고집하였던 것일까? 지금도 수수께기로 남아있는 일본시리즈다.

 

 

○ 2009년 라쿠텐 VS 니혼햄, 클라이막스시리즈 5차전 '창단 5년째 라쿠텐의 비약'

 

 

 

 

 

 

2004년에 불어 닥친 야구계재편으로 인해 신생팀으로 창단된 라쿠텐.

 그 라쿠텐이 노무라 감독이 맡게 되면서 처음으로 포스트시즌에 진출한 때가 2009년이다.

 

 창단 5년째 되던 해였다. 하지만 에이스 이와쿠마 히사시, 다나카 마사히로를 보유한 투수진은

 탄생된 지 얼마 안 된 팀이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로 막강했다. 그러면서 시즌을 2위로 마감하게 된다.

 

 클라이맥스시리즈 제1스테이지에서 소프트뱅크를 2연승으로 눌러, 제2스테이지에서

 시즌우승팀인 니혼햄에게 승리하기만 하면 일본시리즈에 진출하는 일도 꿈이 아니게 되는 순간이었다.

 

당시, 노무라 감독은 계약 마지막 해를 맞이하여 이미 내부적으로는 다음해 2010년에는

감독직에서 ‘해임’시키기로 결정된 상태였다. ‘일본최고가 될지도 모르는데 해임인가’.

매스컴까지도 그의 편이었으나 그래도 계속 승리할 수 밖에 없었던 노무라 감독.

하지만 두 번째 스테이지는 1승4패라는 싱거운 결과로 라쿠텐의,

그리고 노무라 감독의 포스트시즌은 막을 내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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