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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조 고려 중윤(中尹) 성공 휘 仁輔 신도비문

작성자평론|작성시간21.06.10|조회수940 목록 댓글 0

시조 고려 중윤(中尹) 성공 휘 仁輔 신도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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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자(子思子)註3)는 말하기를󰡒중후(重厚)한 땅에는 태산(泰山)이 실려 있고, 깊은 바다에는 교룡(蛟龍)이 살고 있으니, 이는 수없이 쌓이고 쌓인 뒤에야 큰 것을 이룬 것이다󰡓하였다.

 

우리 시조 중윤 호장공은 고려 말엽4)에 일어나서, 높은 덕행(德行)과 쌓인 인공(仁功)이 마치 지구(地球)처럼 중후(重厚)하고, 바다처럼 깊었는데도, 세상에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 하늘은 묵묵히 우리 성씨(成氏)가 처음 일어날 때를 도우사, 이 해좌(亥坐)의 명당(明堂)을 내려주시어 성대하게 길러 내사, 이처럼 수많은 도덕가(道德家)와 경대부(卿大夫)가 배출되었으니, 자사(子思)의 말씀이야말로 백세(百世)를 지나도 의심할 것이 없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공(公)의 아들 휘(諱) 송국(松國)은 벼슬이 정승5)이며, 사행(事行)이 효행록(孝行錄)에 자세히 기록되었고, 물계서원(勿溪書院)의 주향(主享)註6)이며, 현손(玄孫)에 휘(諱) 여완(汝完)은 호(號)가 이헌(怡軒)이고, 벼슬은 첨서밀직(僉書密直)註7) 정당문학상의(政堂文學商議,)註8)이며, 조선조에 검교문하시중(檢校門下侍中)에 임명되었으나 취임하지 않고 포천 향리로 돌아와 절의(節義)를 지켰고, 시호(諡號)는 문정(文靖)이며, 물계서원에 배향(配享)되었다.

 

휘(諱) 준득(準得)은 호(號)가 동고(東皐)이며, 벼슬은 총부상서(摠部尙書 : 兵部尙書)인데 상소(上疏)하여 불교를 배척하였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으며, 휘(諱) 유득(有得)은 벼슬이 영의정(領議政)註9)이며, 오랜 동안 한림원(翰林院)에 있었으나 사행(事行)과 혜전(惠典)은 모두 문헌이 없어 증거 할 수 없다.註10)

 

2>----

5대손(五代孫)에 휘(諱) () 선생은 호(號)가 죽곡(竹谷)이며, 벼슬은 판서(判書)이다. 공의 후손에 망학정(望鶴亭)이 있으니 휘(諱)는 덕룡(德龍)이며, 의로운 일을 행하여 유명하였고, 참의(參議)의 증직(贈職)을 받았다. 휘(諱) 석린(石璘)은 호(號)가 독곡(獨谷)註11)이며, 학식이 고금(古今)을 통달하였고, 벼슬은 좌의정註12)을 역임했으며, 태종묘(太宗廟)에 배향註13)으로 시호(諡號)는 문경(文景)이다.

 

휘(諱) 석용(石瑢)註14)은 호(號)가 회곡(檜谷)이며, 벼슬은 개성유후(開城留後) 보문각대제학(寶文閣大提學)으로 충성을 다해 국사(國事)를 돌보았고, 시호(諡號)는 문숙(文肅)이며,

 

휘(諱) 사제(思齊) 선생은 직제학(直提學)이고, 고려가 망하게 되자 부인으로 하여금 아들을 데리고 창녕으로 돌아가게 한 다음 동지(同志)들과 함께 두문동(杜門洞)에 들어가 세상을 마치니 조정에서는 그의 절개를 가상히 여겨 제단을 설치하고 순조 때 사제(賜祭)했으며, 1812년(순조12, 壬申)에 시호(諡號)를 정절(貞節)이라 하였고, 물계서원(勿溪書院)에 배향되었으며, 공의 아들은 휘(諱) ()인데 부친의 유훈(遺訓)을 받들어 국가에서 수차 벼슬을 내리고 불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그 이름을 ()라 한 것은 문을 닫고(杜門) 절의를 지킨다는 뜻을 표한 것이다. 휘(諱) 갑신(甲臣) 선생은 벼슬이 평리(評理)이며, 공의 후손에 모암(慕菴)이 있으니 휘(諱)는 ()으로 임진란에 의병(義兵)을 일으켰다.

 

6대손(六代孫)에 휘(諱) 사달(士達)은 호(號)가 역암(易菴)이며, 호종공신(扈從功臣)註15)에 참여하였고, 벼슬은 삼중대광(정1품계) 대제학(大提學)註16)이며, 시호는 문효(文孝)이다.

 

3>------

7대(七代孫)에 휘(諱) () 장군은 벼슬이 도총관(都摠管)이었는데, 병자사화(丙子士禍)에 아들 4명과 손자4명이 함께 죽었다. 이름이 6신전(六臣傳)에 실려 있으며, 병조판서에 증직(贈職)되고, 시호(諡號)는 충숙(忠肅)이며,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 선생은 호(號)가 인재(仁齋)인데 병자사화(丙子士禍)에 여러 번 엄한 국문(鞠問)을 받았으며,

 

감형(減刑)되어 달전에 숨어살았으나 마침내 충분(忠憤)을 못 이겨 세상을 떠나니 예조판서에 증직(贈職)되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봉조(奉祖)은 벼슬이 좌의정註17)이었고, 좌리공신(佐理功臣)이며, 시호(號)는 양정(襄靖)이다.

 

8대손(八代孫)에 휘 삼문(三門)은 호(號)가 매죽헌(梅竹軒)이며, 벼슬이 승지였는데, 세조(世祖)가 선위註18)를 하자 박공(朴公) 팽년(彭年) 등 5명과 함께 단종의 복위를 꾀하다가 발각되어 화(禍)를 당했는데 사실이 육신전에 나타났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고, 시호는 충문(忠文)이며, 단종묘에 배식註19)되었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담수(聃壽)은 호(號)가 문두(文斗)이며, 침랑(寢郞 : 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병자사화(丙子士禍)에 김시습(金時習) 등 5명과 함께 충절을 지켜 행동은 달라도 마음이 같으니 세상에서 생육신(生六臣)이라 칭하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시호는 정숙(靖肅)이며,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은 호가 안재(安齋)인데 문장이 뛰어나고 경세제민(經世濟民)의 재주가 풍부하였고, 벼슬은 이조판서이며, 송설체(松雪體)의 대가로 해서(楷書)·행서(行書)를 잘 썼고, 문형註20)을 받았고, 시호는 문안(文安)이다. 휘(諱) ()은 호(號)가 허백당(虛白堂)이며, 벼슬은 예조판서였고, 문형(文衡)을 맡았는데 뒤에 갑자사화(甲子士禍)로 부관참시(剖棺斬屍)를 당했다가 중종 때에 복관(復官)되어 사제(賜祭)하였으며, 시호는 문대(文戴)이다.

 

4>-------

휘(諱) () 선생은 벼슬이 영의정에 올랐으나 갑자사화(甲子士禍)로 처형되었는데, 죽을 때에도 태연하였다고 하며, 중종 때에 공의 충직을 포창(襃彰)하여 복관(復官)시킨 후 예장(禮葬)하였고, 시호는 명숙(明肅)있는데, 벼슬은 左參贊註21)이며, 시호는 문혜(文惠)이다.

 

9대손(九代孫)에 휘(諱) 세창(世昌)은 호(號)가 돈재(遯齋)인데, 한훤당(寒暄堂) 김굉필(金宏弼)에게 수업(受業)하여 학식이 뛰어났으며, 벼슬이 좌의정(左議政)이었는데, 을사사화(乙巳士禍)로 황해도 장연의 유배지(流配地)에서 세상을 마쳤고, 선조(宣祖) 때에 복관(復官)되었으며, 시호는 문장(文莊)이다.

 

10대손(十代孫)에 휘(諱) 제원(悌元)은 호(號)가 동주(東洲)인데, 15세에 성인(聖人)의 학문에 뜻을 두어 성리학(性理學)을 깊이 연구하고 항상 역행(力行 : 實踐)을 주장하였다. 벼슬은 현감(縣監)이었는데, 별세하자 많은 선비들이 재물을 갹출(醵出)하여 장례를 모셨으며,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은 호(號)가 대곡(大谷)인데, 성리학에 조예가 깊었고, 학문이 풍부했으나 형님 () 선생이 을사사화(乙巳士禍)를 당하자 출세할 뜻이 없었으며, 벼슬은 사재감 정(司宰監 正)이었는데, 별세하자 조정에서는 부의(賻儀)를 내리고 사제(賜祭)하였고, 관(官)에서 장례를 맡았으며,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수침(守琛)은 호(號)가 청송(聽松)으로 퇴계(退溪) 이황(李 滉)은 공의 묘갈명(墓碣銘)에서󰡒학문은 넓고도 요약하였으며, 지조는 깊고도 곧았다.󰡓하였다. 부모상에 당하여 효성을 극진히 하였으며, 현감에 제수하였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우의정註22)에 증직되었으며, 시호(諡號)는 문정(文貞)이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수종(守琮)은 인품이 매우 높았으며, 정암(靜菴) 조광조(趙光祖)은 한 번 보고 교의를 맺었고, 선비를 논할 적에는 공을 첫 번째로 꼽았으며, 시호(諡號)는 절효(節孝)이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희안(希顔)은 연산군의 난정(亂政)을 바로잡아 정국공신(靖國功臣)이 되었으며, 벼슬은 영의정(領議政)이었고, 시호(諡號)는 충정(忠定)이며, 중종 묘정(中宗廟廷)에 배향되었다.

 

5>------

11대손(十一代孫)에 윤해(允諧)은 호(號)가 판곡(板谷)인데, 어릴 때에도 말이 적고 침착하여 노성(老成)한 사람 같았고, 자신을 속이지 않는다는 것으로 학업의 근본으로 삼았으며, 현감에 제수되었으나 취임하지 않았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은 호(號)가 우계(牛溪)인데, 가정의 학문을 이어받아 일찍 도를 깨달았으니, 정암 조광조(趙光祖)의 적전(嫡傳 : 正統 繼承)이며, 고정(考亭 : 朱子)을 본받았고, 벼슬은 좌참찬이며, 좌의정이 증직되었고, 시호는 문간(文簡)이며, 문묘(文廟)에 종사(從祀)되었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수경(守慶)은 벼슬이 판관(判官)으로 젊어서부터 충용(忠勇)이 뛰어났었는데, 임진왜란에 진양성(晉陽城)이 함락되자 김시민(金時敏) 등과 함께 순절(殉節)하였고, 병조판서에 증직되었으며,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2대손(十二代孫)에 휘(諱) 문준(文濬)은 호(號)가 창랑(滄浪)인데 어려서부터 가정교훈을 받아 학문에 조예(造詣)가 깊었고, 벼슬은 현감(縣監)이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휘(諱) ()은 호(號)가 청죽(廳竹)인데, 우계(牛溪율곡(栗谷)에게 수업(授業)하여 학문이 번잡하지 않았고, 행동이 침착(沈着)하였으며, 벼슬은 현감이었는데 별세할 때 유훈(遺訓)을 남겼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14대손(十四代孫)에 휘(諱) 여신(汝信)은 호(號)가 부사(浮査)인데, 진사에 합격하였다. 남명 조식(南冥 曺植)이 경의(敬義)에 대한 말씀을 해주시니, 평생토록 명심하여 지켰으며, 불상(佛像)을 부수고, 불경(佛經)의 판본을 불살라 유통을 매우 엄정(嚴正)하게 수호했으며, 물계서원에 배향했다.

 

휘(諱) 안의(安義)는 호(號)가 부용당(芙蓉堂)인데, 벼슬은 우부승지였다. 한강(寒岡) 정구(鄭 逑)은 공을 수제자로 삼아 배우는 생도들을 권장하게 하였다. 난리를 만나 공을 세우고註23) ()을 잘 다스린註24) 공적이 있었으며, 이조판서에 증직되었고, 물계서원에 배향되었다.

 

아! 13파(十三派)의 문중이 매우 번성하여 기록하기 어렵기에 오직 물계서원에 배향된 19분(十九名)과 고려(高麗)와 李朝註25)의 정승(政丞)이나 문학(文學) 또는 충절(忠節)이 뛰어난 15분(十五名)을 선정(選定)하여 간결하고 정직하게 순서(順序)에 따라 상하의 8개 종파(八個 宗派)를 기록했으니, 이는 격식(格式) 밖의 일이며, 묻혀 있는 선행(善行)과 나타나지 않은 미덕(美德)을 모두 기록(記錄)하지 못했으니, 이것은 참으로 영원한 한(恨)이 된다. 그러나 이것은 사세(事勢)가 어쩔 수 없다.

 

6>------

돌아보건 데, 불초(不肖)한 내가 벼슬길에 오래 얽매었고, 또한 거리가 멀어 맥산(麥山)과 우항(牛項) 두 산소를 한 번도 찾아뵙지 못하여 항상 성심(誠心)이 적은 한(恨)이 간절했었다. 그런데 다행히 지난 해 임금에게 선발(選拔)되어 영남의 관찰사(觀察使)가 되니, 창녕(昌寧)은 바로 소속된 고을이었다. 이에 공무(公務)의 여가에 산소(山所)를 찾아뵈니, 평생소원이 이뤄지게 되었다.

 

우리 성씨가 대대로 번성하였으니, 이는 중윤(中尹) 호장공註26)으로 부터 배태되었으나, 사공(事功)을 나타낸 것이 없으니, 크나큰 결례였다. 이 때문에 신도비(神道碑)를 건립하자는 의논(議論)이 나오자, 제종(諸宗)들은 모두󰡒아직까지 못했던 일을 이제 해야 한다.󰡓하니, 참으로 여러 의견과 합했다. 즉시 일을 착수한 다음, 마음을 다하여 공사를 감독해서 1년이 채 못 되어 끝마쳤다.

今上(高宗) 四十二年(1905년) 4월 일

二十一代孫 본도 관찰사 기운(岐運)註27) 삼가지음

후학(後學) 포산(苞山) 곽전(郭沺)은 삼가 원문(原文)과 두전(頭篆)을 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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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사자(子思子)는 공자의 손자로 이름은 급(伋)이며 자(字)는 자사(子思)이다. 사서(四書)의 하나인 중용(中庸)의 저자로 전(傳)한다. 자사(子思) 아래 자(子)는 스승을 존칭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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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 성범모/ 경제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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