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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노원 박사

해외봉사는 나의 팔자에 있었다 2/25

작성자달스탄|작성시간26.06.14|조회수27 목록 댓글 3

몽골 체류기 (제2화)

 

안개 속에서 맞춰가는 첫 호흡

 

2012년 9월 3일 월요일

 

코끝이 쨍한 쌀쌀한 아침이 밝았다. 드디어 몽골에서의 첫 출근길이다. 든든한 동반자인 닥터 툴(Dr. Tuul)과 함께 앞으로 봉사하게 될 병리학 센터(Pathology Center)로 향했다. 오늘 아침 가장 중요한 미션은 혼자서도 다닐 수 있도록 출근길을 완벽하게 익히는 것이었다.

 

조금은 복잡한 시내 거리를 지나며 미국 대사관, 몽골 대학교, 인도 대사관, 음악대학, 그리고 중국 대사관을 차례로 거쳤다. 예전에 종종 들락거렸던 낯익은 동네라 반가운 마음이 먼저 들었지만, 4년 전의 기억과 비교해 보니 몽골은 몰라보게 달라져 있었다. 익숙했던 풍경 사이로 아주 거대하고 현대적인 건물 두 채가 새로 솟아올라 있었기 때문이다. 혹여나 나중에 혼자 걷다 길을 잃을까 염려되어, 이정표가 될 만한 곳들을 카메라로 부지런히 찍어가며 발걸음을 옮겼다.

 

오늘의 주 일정은 앞으로 진행할 교육 스케줄을 확정하고, 센터의 모든 직원과 인사를 나누는 것이었다. 설레는 마음으로 센터 현관문에 들어서려는 찰나, 이번 일정 동안 나의 입과 귀가 되어줄 통역관 닥터 엥히(Dr. Enkhee)와 첫 인사를 나누었다. 그녀는 현직 병리의사이면서 동시에 통역대학원에 재학 중인 재원이었다. 의학 전문 용어가 난무할 병리학 강의에 이보다 더 훌륭한 적임자는 없을 터였다.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현관문을 열자마자 알싸한 페인트 냄새가 코를 찔렀다. 센터 전체가 내부 수리 중이었던 것이다. 다행히 오늘 오후면 모든 공사가 끝난다고 하니, 내일부터는 깨끗하게 단장된 사무실에서 쾌적하게 일할 수 있겠다는 생각에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하지만 가벼워진 마음도 잠시, 무거운 걱정거리가 나를 짓눌렀다. 지난 7월 12일, 한국에서 선편으로 미리 보냈던 현미경과 시약, 그리고 전문 서적들이 아직도 센터에 도착하지 않은 것이다. 이번 워크숍의 가장 핵심 장비는 5명이 동시에 같은 화면을 볼 수 있는 '다안(多眼) 현미경'이다. 말하자면 주인공이 빠진 채 축제를 열어야 하는 심각한 상황에 봉착한 셈이다. 물류 사정상 9월 10일쯤에나 도착할 것 같다는 청천벽력 같은 예상을 듣고, 우리는 급히 머리를 맞댔다. 다행히 현지 기획자들과 얼굴을 마주하고 치열하게 논의한 끝에, 장비가 필요한 실습은 뒤로 미루고 이론 강의를 앞으로 당기는 효율적인 대체 스케줄을 도출해 낼 수 있었다.

 

회의가 끝날 무렵, 환영 리셉션이 준비되었다는 전갈이 왔다. 보건부 직속 기관인 이 센터의 핵심 멤버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실험실 책임자인 닥터 나란투야(Dr. Narantuya), 센터 매니저인 닥터 오윤엘덴(Dr. Oyunelden), 그리고 센터장인 출룬바타르(Chuluunbaatar) 소장과 통역관 엥히, 그리고 내가 둥글게 앉아 한 시간가량 깊은 대화를 나누었다. 아직은 서투른 나의 영어 표현과 의도를 통역관 엥히가 찰떡같이 알아듣고 현지 의료진에게 매끄럽게 전달해 주어 무척 다행스러웠다.

 

이번 나의 의료봉사는 '라파엘인터내셔널'의 전폭적인 후원 덕분에 성사되었다. 그동안 몽골 의료진 한두 분을 한국으로 초청해 단기 연수를 시키는 방식도 있었지만, 이렇게 한국의 교육관이 직접 몽골 현지로 파견되어 다수의 현지 인력을 한꺼번에 교육하는 것이 장기적으로 훨씬 더 큰 성과를 거둘 수 있다는 취지에서 결정된 프로젝트였다. 그런 막중한 책임감을 띠고 온 만큼, 현미경이 없다고 손 놓고 기다릴 수는 없었다.

 

변경된 스케줄에 따라 당장 내일(9월 4일)부터 현지 병리사들을 위한 강의를 강행해야 했다. 강의 준비를 서둘러야 했고, 무엇보다 통역관과 슬라이드를 보며 완벽하게 합을 맞춰야 했기에 서둘러 숙소로 돌아왔다.

 

집에 도착하니 마침 내가 간곡히 요청했던 인터넷 연결 공사가 한창이었다. 몽골의 아파트 인터넷 환경이 아직 열악한 탓인지 기사들이 꽤 오랜 시간 진땀을 흘린 끝에야 겨우 인터넷 선이 뚫렸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내일 진행할 강의인 “H&E 염색 가이드라인(Guideline for the H&E stain)”과 “최고의 슬라이드 질을 높이는 방법(How can you increase the best slide Quality)”의 강의록을 엥히와 함께 검토하기 시작했다.

 

처음 원고를 보았을 때 엥히는 의학 용어와 전문적인 테크닉들이 마치 안개 속에 숨어있는 것처럼 막연하고 어렵게 느껴졌다고 고백했다. 하지만 슬라이드 한 장 한 장을 넘기며 내가 배경과 원리를 차근차근 설명해 주자, 그녀의 눈빛이 반짝이기 시작했다. "교수님, 이제 안개가 걷히는 것 같아요. 내일 통역은 문제없습니다!"라며 자신 있게 웃어 보이는 닥터 엥히가 참 영리하고 대견해 보였다.

 

예상치 못한 장비 지연으로 시작부터 삐걱거리는 듯했지만, 훌륭한 파트너를 만나 안개를 걷어낸 첫날. 내일 마주할 몽골의 병리사들에게 전해줄 뜨거운 지식의 불꽃을 기대하며, 기분 좋은 긴장감 속에 몽골에서의 두 번째 밤을 맞이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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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댓글 리스트
  • 작성자박노원 | 작성시간 26.06.15 I hope you are doing well. We are all doing well here.
    It was a great pleasure to read your memories and reflections. Your message brought back many wonderful memories and reminded us once again of the tremendous contribution you have made to pathology in Mongolia.
    Many Mongolian pathologists were taught, guided, and inspired by you. We will always be grateful for the immense effort, dedication, and kindness you invested in educating and mentoring us. Your influence has helped shape generations of pathologists, and your legacy continues through the many professionals who are now serving patien
  • 작성자박노원 | 작성시간 26.06.15 Please know that we remember you with deep respect, appreciation, and affection. Your contributions to our professional and personal growth will never be forgotten.
    We sincerely wish you good health, happiness, and peace. May you enjoy many more years surrounded by the love of your family, friends, colleagues, and former students. Thank you for everything you have done for us and for Mongolia.
    With warmest regards and deepest gratitude,
    Sayamaa Lkhagvadorj
    Sayamaa Lkhagvadorj, MD., Ph.D.
    Associate Professor
  • 작성자달스탄 작성자 본인 여부 작성자 | 작성시간 26.06.15 세상이 좁네요. 그저 평범한 카페인데 몽골에서도 읽고 서로 얘기가 되니 좋은 세상입니다.
    박노원 박사 파이팅!!

    It's a small world. It's just an ordinary cafe, but it's a good world to read and talk to each other in Mongolia.
    Dr. Park Nowon, way to go!!

    Дэлхий ертөнц жижигхэн. Энэ бол зүгээр л энгийн кафе, гэхдээ бид үүнийг уншиж, Монголд ч гэсэн ярилцаж болох гайхалтай ертөнц юм.
    Явцгаая, Доктор Пак Но-во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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