몽골 체류기 (제3화)
변화하는 초원의 검사실, 그리고 반가운 얼굴들
2012년 9월 4일 화요일
오늘은 처음으로 그 누구의 도움도 받지 않고 혼자서 출근길에 올랐다. 활기차고 번화한 울란바토르 거리를 온전히 내 두 발로 걸어가는 기분이 묘했다. 어제 찍어둔 사진들을 떠올리며 이정표를 꼼꼼히 살핀 덕분에 길을 잃지 않고 무사히 센터에 도착했다. 나이가 들어 서툴까 걱정했는데, 다행히 길치는 아닌 모양이다. 스스로 길을 찾아왔다는 소소한 성취감이 출근길 아침을 기분 좋게 열어주었다.
내가 봉사하게 될 센터 건물은 여전히 내부 수리가 한창이라 어수선한 분위기였다. 하지만 감사하게도 내가 기거하며 연구할 사무실은 인테리어가 가장 먼저 마무리되어 번듯한 '내 방'이 생겼다. 방 안에는 컴퓨터 스크린과 연동되는 고성능 모니터링 현미경과 새 책상, 그리고 컴퓨터가 깔끔하게 배치되어 있었다. 낯선 타국 땅에서 나만의 온전한 연구 공간을 마주하니 감회가 새로웠다.
방마다 수리가 끝나면서 장비와 가구를 다시 배치하느라 센터 전체가 분주한 난장판이었지만, 내 시선은 자연스럽게 조직병리 검사실로 향했다. 검사실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 나는 그만 신선한 충격에 빠지고 말았다. 4년 전 내가 이곳을 방문했을 때만 해도 낙후되어 있던 병리실 장비들이, 이제는 서울의 대학병원 검사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을 만큼 전부 최신식 장비로 교체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아, 이곳도 변화하고 있구나.' 몽골의 의료 환경이 이렇게나 빠른 속도로 발전하고 있을 줄은 정말 예상하지 못했다. 장비의 발전을 보니 내 가슴도 함께 뛰기 시작했다.
오후에 있을 첫 강의를 완벽하게 해내기 위해, 먼저 현지 검사실의 상황을 더 정확하게 파악해야 했다. 검사실 구석구석을 세밀하게 점검했고, 현지 병리사들이 그동안 작업해 둔 슬라이드 표본들을 하나하나 현미경으로 살폈다. 표본 속에서 그들의 숙련도와 개선점을 읽어낸 뒤, 이를 오늘 강의할 내용들과 유기적으로 연계시켰다. 그리고 내 입이 되어줄 통역관 엥히와 함께 슬라이드를 최종 점검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쳤다.
금강산도 식후경이라 했던가. 점심시간에는 한국인이 세운 울란바토르 송도병원의 6층 라운지 식당을 찾았다. 그곳에서 몽골의 대중적인 전통 음식인 '꼴리야시(Kulyash)'를 아주 오랜만에 맛보았다. 큼직하게 썬 소고기를 소스와 함께 밥에 얹어 먹는 덮밥과 유사한 요리인데, 다행히 내 입맛에 아주 잘 맞아 든든하게 배를 채울 수 있었다.
마침내 약속된 오후, 긴장된 마음으로 강의실 문을 열었다. 그 순간 눈앞에 믿기지 않는 반가운 얼굴들이 보였다. 지난 2010년, 라파엘인터내셔널의 초청을 받아 한국 서울대학교 분당병원에서 3개월 동안 나와 함께 수련을 받았던 제자, 바이르마와 아마라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먼 이국땅에서 다시 만난 스승을 환한 미소로 반겨주는 제자들을 보니 코끝이 찡해졌다.
강의실에 모인 현지 병리사는 총 12명이었는데, 흥미롭게도 모두 여성이었다. 오늘 첫 강의의 핵심 주제는 "어떻게 해야 환자의 질병을 정확히 진단할 수 있는 가장 질 좋은 병리 표본을 만들 수 있는가"였다. 장비는 최신식으로 바뀌었지만, 그것을 다루는 사람의 정성과 기술이 받쳐주지 않으면 좋은 표본은 나올 수 없다. 현지 병리사들은 나의 한마디, 엥히의 통역 한 구절도 놓치지 않으려는 듯 무서운 집중력으로 강의에 몰입했다. 그들의 뜨거운 눈빛 속에서 몽골 의료의 밝은 미래를 보았다.
성공적으로 첫 강의를 마치고 숙소로 돌아와 컴퓨터를 켰다. 한국에 있는 가족과 친지, 그리고 선후배 의사들에게서 여러 통의 이메일이 와 있었다. 백발이 성성한 이 '노구(老軀)'를 이끌고 낯설고 추운 타국 땅에 홀로 가 있는 것을 다들 한마음으로 걱정하고 있었다.
화면 가득 적힌 걱정 어린 안부와 격려, 그리고 나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따뜻한 편지들을 하나씩 읽어 내려갔다. 편지를 모두 읽고 나니,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더욱 단단하고 굳은 각오가 샘솟았다. 나를 믿고 응원해 주는 소중한 이들을 위해서라도, 이곳 몽골에서 내가 가진 모든 지식과 온기를 아낌없이 쏟아붓고 가리라 다짐한다. 멀리서 마음을 보내준 그들에게 깊은 감사를 전하며, 보람찬 몽골에서의 세 번째 밤을 접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