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AFE

이평우 박사

킬리만자로의 혼(魂) 5/7

작성자이평우|작성시간26.06.10|조회수32 목록 댓글 0

제5일 : 수요일 - 1997년 10월 15일

이른 새벽에 일어나 아침 산책 겸, 어제 비가 와서 미처 찍지 못한 이 지역의 풍경과 꽃들을 촬영하기 위해 카메라를 들고 오던 길을 되짚어 나섰다.

오늘 아침 맑은 날씨에 보니, 엊그제 쉬라에서 달밤에 바라보며 신비스럽기까지 했던 키보(Kibo) 봉우리 바로 아래에서 야영한 것이 아닌가!
맞은편으로 한참 더 나아가 지근거리에서 그 장쾌한 벼랑과 눈 덮인 키보 봉의 모습을 사진에 담았다. 또 새로운 꽃들도 몇 장 찍었다.

그렇게 한 시간 반가량을 쏘다니다 돌아오니 르므레가 따뜻한 세숫물을 떠다 놓고 기다리고 있다. 이 상냥하고 붙임성 있는 청년은 지금까지 줄곧 텐트 설치와 세숫물 준비, 그리고 식후 차를 챙겨 주던 스물네 살의 오토의 막내아들이다.
문득 전방부대 소대장 시절, 아침마다 세숫물을 떠다 놓고 내가 기상할 때까지 서서 기다리던 충실한 당번병의 모습이 떠올랐다.

두통과 구토 증세는 많이 좋아졌다. 몸이 어느 정도 고도에 적응한 것이다. 그러나 식욕부진은 여전해서 오토가 가져다주는 음식이 영 입에 당기지 않는다. 토스트에서는 연기 그을음 냄새가 난다. 포터들이 주위의 마른 나뭇가지를 주워 불을 피워 요리를 하기 때문에 음식에 재가 날아들기도 하지만, 고산에서의 자연식이라 생각하니 이것 또한 나쁘지 않다.

평소 같으면 매일 아침 면도를 해도 하루만 지나면 수염이 꺼칠꺼칠 올라오는데, 등반을 시작한 뒤 며칠째 면도를 하지 않았음에도 턱수염이 별로 자란 것 같지 않다. 고지에서는 수염도 잘 자라지 않는 것일까.

오늘 아침에는 내가 조금 꾸물거린 탓에 출발이 늦어졌다. 그러나 가이드는 결코 서두르거나 재촉하지 않는다. 그저 "폴리 폴리(Poli Poli)"다.
동작이 굼뜬 등반객에게는 이런 식의 산행이 제격일 것이다. 하기야 킬리만자로 최고봉에 오르는 일이 어디 서두른다고 될 일이랴. 성공적으로 정상을 밟기 위해서는 여유 있게 천천히 움직이는 것이 오히려 성공의 첩경일 것이다. 경험 많은 가이드는 그것을 잘 알고 있다.
우리 인생도 그러할 터. 무조건 빠른 것만이 능사는 아니다.

포터들이 부지런히 텐트를 걷고 있다. 아마 8시 반쯤이면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산들바람이 불고 계곡의 물소리는 청아하다. 멀리 아래 바랑코(Barranco) 분화구 쪽에는 깊은 운해가 깔려 있다. 길은 바로 앞 절벽을 향해 가파르게 이어진다. 오늘은 바랑코 절벽을 넘어야 한다.
가파른 용암 절벽을 아슬아슬 타고 오른다. 어떤 곳은 거의 70~80도에 가까운 위험한 경사였다. 그러나 다행히 필요한 곳마다 발 디딜 자리와 손잡을 곳이 있어 조심조심 오를 수 있었다. 고도의 기술을 요구하는 암벽등반은 아니었다.

한 시간 남짓 힘겹게 오르니 마침내 절벽 정상에 다다랐고, 그곳부터는 완만한 내리막이다. 이젠 「나그네 설움」을 흥얼거릴 여유도 되찾았다.
길가 풀숲에서 무엇인가 움직인다. 자세히 보니 노루처럼 생긴 짐승이 인기척에 놀라 산등성이 쪽으로 펄쩍펄쩍 달아난다. 이곳에서는 디크디크(Dik-dik)라 부르는 작은 영양 종류로, 킬리만자로 지역에서는 처음 보는 짐승이다. 몸 색깔이 완벽한 보호색이라 가만히 서 있으면 쉽게 눈에 띄지 않는다.

길은 다시 높은 모래언덕을 넘어 해발 4,200m의 황량한 구릉지대로 이어진다. 그러다 카랑가(Karanga) 계곡에 가까워지자 지금까지의 삭막한 풍경이 일변한다. 킬리만자로는 다시 기암괴석과 푸른 초목들이 어우러진 아름다운 풍광을 펼쳐 보인다.
계곡에는 수량은 많지 않지만 물이 흐르고 있고, 포터들이 자리를 잡고 음식 준비에 한창이다. 사막에서 오아시스를 만난 기분이다.
"잠보(Jambo)!"
내가 외치자 그들도 "잠보!" 하고 답한다. 잠보는 스와힐리어로 “good morning" 이다. 다시 ”하바리(Habari?, How are you?)" 하고 인사하니 웃으며 “미쥬리(Mzuri!, Fine!)" 하고 대답한다.
가이드에게 배운 몇 마디 현지어가 산길에서 만나는 포터들과의 반가운 인사말이 되곤 했다.

길은 계곡을 지나면서 다시 가파른 고갯길로 올라섰다. 고갯마루에 다다르자 짙은 구름이 몰려와 순식간에 계곡 아래를 뒤덮고 굵은 빗방울까지 뿌리기 시작한다. 큰 바위 밑으로 들어가 황급히 우의를 꺼내 입었다.
아침에 출발하기 전, 혹시나 하고 가이드에게 오늘 비가 오겠느냐고 물으면 그의 대답은 늘 "Maybe."였다. 단언할 수는 없지만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나 나는 언제나 "Maybe not"이기를 기대하며 길을 나서곤 했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어김없이 정오 무렵이 되면 하늘이 흐려지고 비가 내렸다.
나중에야 알게 된 사실이지만, 5월부터 10월까지는 북동쪽에서 건조한 역무역풍이 불어와 킬리만자로 남서 사면에 비를 불러온다고 한다.

비도 피할 겸 점심도 먹을 겸, 쉴 만한 동굴이 없나 두리번거리며 걷는데 저만치 정말 멋진 동굴 하나가 눈에 들어온다. 천연 용암 동굴이었다. 나와 가이드 둘이 앉아 비를 피하기에는 충분한 넓이였다.
뜨거운 차와 샌드위치로 허기를 달래고 한동안 넉넉히 쉬었다. 그러나 시간이 꽤 흘렀는데도 사방에는 구름이 잔뜩 끼어 있고 비는 계속 내린다. 오늘의 목적지인 바라푸(Barafu)까지 가려면 결국 이 빗속을 뚫고 나아가야 한다.

점심 식사 후 한 시간쯤 걸었을까. 길은 다시 북쪽을 향해 길고 완만한 오르막으로 이어진다. 주변은 고산식물조차 드문 삭막한 자갈밭으로 변했다. 그러다 빗방울이 점차 잦아들더니 안개가 걷히고 비도 멎었다.
지형적 특성 때문인지 이 지역은 비가 잘 내리지 않는 곳처럼 보인다. 저 멀리 아래쪽으로 구름이 잠시 열린 틈 사이로 모쉬(Moshi) 시내가 아스라이 내려다보인다. 문득 사람 사는 세상이 그리워진다.

오르막길은 저 먼 바위산을 향해 뱀처럼 구불구불 이어지고 있다.
오토에게서 산행 둘째 날부터 배워, 심심할 때나 힘들 때마다 흥얼거리던 킬리만자로 민요에서도 바로 이 산길을 뱀에 비유하고 있다.
그 노래는 이렇게 시작된다.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킬리만자로, 거대한 돌산 킬리만자로.
나마왠지, 나마왠지, 나마왠지, 거대한 돌산 마웬지여.
애왜뇨까, 애왜뇨까, 애왜뇨까, 저기 저 뱀이여.
와니 중구카, 와니 중구카, 산을 한 바퀴 돌려면 무엇이 필요한가?
와타카 쿠닐라 냐마, 고기를 먹어야 하리."

오토가 서툰 영어로 어렵게 번역해 준 내용을 종합하면 대략 그런 뜻이었다.
고개를 들어 보면 정말 산길이 거대한 뱀처럼 산허리를 감고 있다.
나는 그 길을 반보(半步)씩, 폴리 폴리(Poli Poli), 천천히 오른다.
여기는 해발 4,500m 지대. 산소 부족으로 숨이 가빠 이런 오르막에서는 한 걸음을 떼는 일조차 쉽지 않다. 사막을 연상시키는 모랫길 불모지를 묵묵히 걸어 오른다.
경사는 완만하지만 가도 가도 제자리걸음인 것만 같다. 끝없이 이어지는 산등성이 하나를 타고 있는 것이다.

비는 그쳤고, 저 멀리 산봉우리 구름 사이로 파란 하늘이 빼꼼히 얼굴을 내민다. 이미 우비를 벗었는데, 다시 아래쪽에서 구름 떼가 몰려 올라오더니 후드득 빗방울을 뿌리고 지나간다.
그러나 생각해 보면 이런 황량한 고산 사막길에서는 오히려 오늘 같은 날씨가 고맙다. 짙은 구름이 태양을 가려 주고, 아래쪽에서 에어컨 바람 같은 시원한 바람이 불어 올라오니 그나마 걷기가 한결 수월하다.

사실 나는 매일 아침 출발 전에 햇빛 차단 오일을 챙겨 다녔지만, 날씨가 이러하니 한 번도 바를 일이 없었다.
아프리카의 강렬한 태양이 얼마나 무서운지는 이미 나미비아(Namibia)의 "피시 리버 캐니언(Fish River Canyon)" 트레킹 때 충분히 경험한 바 있다. 만약 지금처럼 그늘 하나 없는 고산지대에 태양이 작열한다면 열기와 갈증만으로도 진작 녹초가 되었을 것이다.

바랑코를 출발해 바라푸까지 오르는 오늘의 여정은 7시간이 넘는다. 고산증에 더해 아침부터 오른쪽 무릎 아래 정강이 부위에 통증까지 생겨 숨이 몹시 가빴다. 산행을 시작한 이후 처음으로 진한 피로를 느꼈다.
이젠 노래를 부를 기운도 없다. 그저 기계적으로 발을 옮길 뿐이다.
문득 TV에서 보았던 허용호 일행의 극지 탐험이 떠오른다. 그들에 비하면 지금 내 처지는 훨씬 나은 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해 본다.

드디어 그렇게 멀게만 보이던 고개 정상에 도착했다.
용암지대의 바위 능선을 따라 올라서니 저 멀리 널빤지로 대충 지은 화장실 하나가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다. 캠프 사이트마다 하나씩 세워 놓은 간이 화장실이다.
저곳이 바로 바라푸 헛(Barafu Hut)이다.
그 볼품없는 화장실이 그렇게 반가울 줄이야.
조금 더 올라가니 아프리카 전통 초막 형태를 흉내 낸 함석지붕 헛이 보인다. 세월에 바래고 연기에 그을려 낡은 모습이다.
이곳의 헛은 이름만 헛일 뿐, 시설이 몹시 낡고 지저분하여 포터들이 잠을 자거나 취사를 준비하는 장소로만 사용된다. 등반객들은 모두 포터들이 운반해 온 텐트에서 잠을 잔다.

텐트촌에 도착하니 먼저 온 등반객들의 텐트가 여기저기 보인다. 며칠 전 마차메 헛에서 만났던, 키 크고 늘씬한 육상선수 출신 네덜란드 여인과 캐나다에서 온 미남 청년 토드(Todd)를 다시 만나 반갑게 악수를 나누었다.
먼저 도착한 포터들이 내 텐트를 열심히 설치하고 있다. 워낙 바람이 강한 지역이라 텐트 줄을 이리저리 단단히 묶어 꼼꼼하게 고정한다.
오늘의 고된 여정이 마침내 끝난 것이다.

이곳에서 초저녁에 잠시 눈을 붙인 뒤 자정에 일어나 곧바로 최고봉 우후루(Uhuru Peak)를 향해 출발한다. 정상에서 해돋이를 보고 다시 이곳으로 내려오게 되어 있다.
저녁 식사를 마치면 무조건 한잠이라도 자 두어야 한다.
빗방울이 가끔 흩뿌리고 바람은 거세게 분다. 기온도 크게 떨어져 텐트 안에서도 장갑을 끼고 두터운 방한복을 입어야 했다.

5시 반경, 저녁 식사가 들어왔다.
딱딱한 토스트는 내가 늘 먹지 않는 음식인데도 어김없이 따라온다. 오늘의 메인 디시는 닭튀김, 쌀밥, 감자튀김, 그리고 소고기 소스였다.
낮 동안 별로 먹은 것도 없이 줄곧 걸은 탓에 시장기는 몹시 느껴지는데도 입맛은 좀처럼 돌지 않는다. 쌀밥은 이곳 특유의 흐트러지는 쌀인데다 그마저 설익어 먹기가 쉽지 않다.
어디를 가든 웬만한 음식은 가리지 않고 잘 먹는 나지만, 이때만큼은 흰쌀밥에 잘 익은 김치와 된장찌개 생각이 간절했다.
이럴 때 뜨겁고 얼큰한 라면 국물이라도 한 그릇 마실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집을 나설 때는 짐을 줄일 생각만 했지, 정작 이런 순간을 대비해 라면 몇 봉지 챙겨 넣을 생각은 왜 하지 못했을까 하는 아쉬움이 든다.
결국 닭다리만 조금 뜯었을 뿐, 식사는 거의 그대로 남기고 말았다.
그러나 이런 음식을 제공한 가이드와 포터들을 탓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 해발 4,600m가 넘는 이 높은 곳까지 무거운 식재료를 지고 올라와 정성껏 마련한 음식이 아닌가.
오히려 이런 진수성찬을 맛있게 먹지 못하고 남기는 내가 미안할 따름이다.
고된 산행에서는 무엇보다 잘 먹어 두는 것이 중요하건만, 고도가 높아질수록 식욕이 점점 떨어지는 것이 큰 문제였다.

6시 반쯤 되었을까.
텐트 안에서 웅크리고 앉아 뜨거운 차를 마시고 있는데 밖에서 오토가 나를 부른다.
"닥터! 닥터!"
건너편 마웬지(Mawenzi) 산이 잘 보이니 나와 보라는 것이다.
급히 카메라를 챙겨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 나는 그 자리에서 한동안 말을 잊고 말았다.
도착할 때까지만 해도 구름에 가려 어디에 있는지조차 보이지 않던 마웬지가, 막 떠오른 보름달을 머리에 이고 건너편 하늘 아래 우뚝 서 있었던 것이다.
그 장엄하고도 신비로운 광경이라니.
어쩌면 이 모습을 보기 위해 그 힘든 길을 걸어 바라푸까지 올라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아름다운 장면이었다.
낮 동안 산을 오를 때는 구름 때문에 정상부는 물론이고 주변 풍경조차 제대로 볼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러다가 오후 늦게나 이른 새벽, 잠시 구름이 걷히는 순간 킬리만자로의 봉우리들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 모습을 드러낸다.
그 모습은 마치 베일을 쓴 미녀가 잠시 베일을 벗고 무대 앞으로 걸어 나왔다가, 이내 다시 사라져 버리는 것과도 같았다.
아마 킬리만자로의 풍경이 사람들에게 더욱 깊은 감동과 탄성을 안겨 주는 이유도 바로 거기에 있을 것이다.
늘 볼 수 없기에 더욱 아름답고, 잠시만 허락되기에 더욱 경이로운 것이다.
만일 마웬지를 낮 동안 계속 바라보며 올라왔다면 지금과 같은 놀라움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반대편 서쪽의 메루(Meru) 산 너머로는 석양이 붉게 물들고 있었다.
그 또한 평생 잊기 어려운 일몰 장면이었다.
그러는 사이 키보(Kibo)를 반쯤 가리고 있던 구름마저 서서히 걷혀 갔다.
문득 정신을 차려 둘러보니, 나는 한자리에서 킬리만자로의 세 산, 즉 키보와 마웬지, 그리고 메루를 동시에 바라보는 행운을 누리고 있었다.
아프리카의 대지와 하늘, 달빛과 석양, 그리고 만년설의 봉우리들이 한 화면 안에 펼쳐지는 순간이었다.
산은 때때로 이런 선물을 준다.
오랜 고생과 인내 끝에야 비로소 허락되는, 말로는 다 설명할 수 없는 선물 말이다.

이제 자야 한다.
오토는 자정 무렵 나를 깨우러 오겠다고 했다.
그리고 새벽 1시, 드디어 킬리만자로 최고봉 우후루(Uhuru Peak)를 향한 마지막 등정이 시작된다.
이곳까지 올라오며 고산증이 더 심해질 것으로 걱정했지만, 의외로 오늘 저녁에는 며칠 동안 나를 괴롭히던 두통도 거의 사라졌다.
오히려 몸이 한결 개운하게 느껴진다.
물론 그것이 진짜 회복인지, 아니면 정상을 눈앞에 둔 흥분 때문인지는 알 수 없다.
두꺼운 옷을 겹겹이 껴입고 침낭 속으로 들어갔다.
밖에서는 바람이 텐트를 흔들고, 멀리 어둠 속에서는 포터들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려온다.
눈을 감아 본다.
그러나 쉽게 잠이 오지 않는다.
몇 시간 뒤면 아프리카의 지붕이라 불리는 우후루 봉을 향해 출발한다는 생각 때문일까.
설렘과 긴장, 기대와 두려움이 뒤섞여 마음은 이미 정상 부근의 어둠 속 산길을 오르고 있었다.

다음검색
현재 게시글 추가 기능 열기

댓글

댓글 리스트
맨위로

카페 검색

카페 검색어 입력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