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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명숙] ■ 初期佛敎의 自我觀에 대한 심신가치론적 고찰

작성자혜명|작성시간15.01.22|조회수54 목록 댓글 0

初期佛敎의 自我觀에 대한 심신가치론적 고찰

- 몸과 마음의 성격 및 지위에 대한 논의 -


한 명숙(가산불교문화연구원 수석연구원)



목 차


Ⅰ. 문제의 제기 및 연구방향 설정
Ⅱ. 無記說과 心身價値論의 모순가능성에 대한 화해의 모색
     -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가능한 근거 -
Ⅲ. 붓다의 자아관의 실존적 의미
     - 몸과 마음에 대한 논의는 어떤 관점에서 이루어지는가 -
Ⅳ. 초기불교의 자아관에 나타난 몸과 마음의 성격 및 지위
   1.蘊∙處∙界:경험적 자아의 구성요소
   2. 경험적 자아의 존재양태:몸과 마음의 성격
       1) 無常ㆍ無我:늘 변화하는 몸과 마음
       2)緣起:서로 의존하는 몸과 마음
   3. 몸과 마음의 가치론적 지위 해명
       1) 고통의 의미에 대한 분석
       2) 몸과 마음에 있어서 마음이 중점적으로 부각되는 이유
       3) 五蘊과 五取蘊:마음은 어떻게 몸과 마음을 장애하는가
Ⅴ. 맺음말



Ⅰ. 문제의 제기 및 연구방향 설정  ▲ 위로


불교 밖의 학자들은 붓다가 몸을 악한 것으로 규정하고 버려야 할 것으로 보았다고 주장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가령 이거룡은 기존 서구학자들의 견해에 근거하여 인도사상사를 크게 몸을 혐오하고 부정하는 불교적 전통과 긍정적 의미를 부정하지 않는 힌두교적 전통의 둘로 나누었다. 그리고 불교는 영원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無常한 몸과 이를 토대로 이루어지는 삶에 대해서도 부정적이어서, 몸은 악한 것 이외의 것을 담을 수 없다고 보고, 육체 또는 육체적 욕망으로부터의 해방을 가장 고귀한 목표로 삼으며, 이때문에 필연적으로 고행의 전통이 발달한 것이라고 하였다. 불교는 영원불변의 실체를 부정하기 때문에, 영원불변하지 않은 실체인 몸을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불변하지 않은 실체인 몸에 대해 실체성을 부여하는 태도를 부정한다. 또한 몸의 욕망 일체를 부정하는 것이 아니라, 몸의 과도한 욕망을 일으킨 주체인 마음을 조절하여 몸의 욕망이 몸과 마음을 해치지 않도록 할 뿐이다. 이것은 몸 또는 몸이 지닌 욕망에 대한 전적인 부정과 엄밀히 구별되어야 한다. 다음으로 無常이란 몸만이 아니라 마음에도 적용되는 것인데, 이런 맥락을 무시한 채 몸을 부정하고 마음에만 촛점을 둔 것처럼 주장하는 것은 문제가 있다. 또한 붓다는 成道 직전 극단적 고행주의를 포기하였고, 더 나아가 현재의 몸을 혐오하는 고행주의자를 비판하였다.


상식적인 수준에서는 󰡔般若心經󰡕의 “色卽是空”이라는 구절이 불교가 마음을 중시하고 몸을 비롯한 물리적 세계 일반에 대해 부정적 시각을 가진 것으로 판단하게 한다. 더 나아가서 몸이든 마음이든 모두 “허깨비와 같고, 꿈과 같다”고 하는 반야부 경전의 반복되는 선언을 대하면 불교는 몸만이 아니라 마음마저도 부정하는 허무주의론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그러나 󰡔반야심경󰡕에서의 色은 五蘊이라는 자아의 구성요소 중 하나로서의 색이고, 본경에서는 이 색의 空性을 주장하면서 동시에 자아의 구성요소 중 나머지 네 가지, 곧 受ㆍ想ㆍ行ㆍ識도 모두 空이라고 한다. 여기서 공이란 자성적 실체가 없음을 밝힌 것이지 비존재임을 말한 것은 아니다. 또한 오온을 꿈․허깨비에 비유한 것은 몸과 마음이라는 현상적 존재에 대한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에 대해 우리가 갖는 잘못된 견해에 대해, 그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임을 일깨우기 위한 것이다.


불교학자들에게 있어서 거의 일관되게 나타나는 몸과 마음에 대한 불교의 입장은, “몸을 배제하는 것은 아니지만, 양자의 관계에 있어서 무엇보다 마음을 중시한다”라고 정의할 수 있다. 그러나 불교의 人間論 내지는 心理論을 다루는 많은 연구서적에서조차 이것에 대해서 대체로 언급만 할 뿐 몸과의 관계성 속에서 마음이 왜 더 중시되는지에 대한 해명은 없다. A가 B보다 중요하다는 것과 A가 B보다 중심이 된다는 것은 분명히 차이가 있다. 붓다가 몸보다 마음을 중점적으로 설명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바로 마음을 몸보다 중시했다고 하는 가치판단으로 이어지는 것은 곤란하다고 본다.


불교에서의 몸과 마음의 가치론적 지위에 대한 논의는 아직 선명하게 연구되지 않았고, 이미 살펴본 바와 같이 일반인의 상식적인 판단 또는 선행연구 없이 단정적으로 던져지는 학자들의 판단 또한 석연치 않은 점이 있는 것이 현실이다. 본연구는 초기불교의 자아관을 고찰함으로써, 오랜동안 철학계에서 논쟁의 주제가 되고 있는 몸과 마음의 가치론적 지위에 대한 불교의 입장을 밝혀 보고자 한다.


초기불교를 연구대상으로 삼은 것은 몸과 마음에 대한 범주적 분석의 큰 틀은 이미 초기불교에 완성이 되었고, 후대의 논의도 그 개념에 있어서는 이 틀을 보충하기는 해도 크게 벗어나지는 않았다는 판단 때문이다. 불교의 자아관은 통상적으로 無我論이라고 일컬어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필자가 불교에 있어서 부정의 대상인 아트만과 동일한 개념으로 여겨질 수도 있는 자아를 중심개념으로 삼은 것에 대해 반론이 제기될 수도 있을 것이다. 뒤에서 설명이 되겠지만 여기에서의 자아란 영구적이고 실체적인 의미에서의 자아가 아니라, 경험적 자아를 가리킨다. 오해의 위험성에도 불구하고 자아라는 제목을 붙인 것은 초기불교의 몸과 마음에 대한 논의가 바로 자아에 대한 논의에서 출발하고 있고, 이 자아는 언제나 몸과 마음을 내포한 개념으로 이해되고 있기 때문이고, 자아라는 용어의 역동적 성격을 이해하는 것이 불교의 목표인 해탈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는 생각때문이기도 하다.

 


Ⅱ. 無記說과 心身價値論의 모순가능성에 대한 화해의 모색 ▲ 위로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가 가능한 근거-


붓다는 거의 모든 질문에 대답하였지만 일부 주제와 관련된 질문에 대해서는 침묵을 지켰던 것으로 전해진다. 이 질문은 열 가지로 집약되어 十無記라고 하는데, 이 중 두 가지는 “정신과 육체는 동일한가? 정신과 육체는 다른가?”하는 것으로, 필자가 다루려는 심신론의 문제와 관련된다.


붓다가 침묵한 이유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는 크게 세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질문한 내용과 같은 주제에 대한 논의는 고통으로부터의 해탈이라는 불교의 이상을 실천하는데 전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판단때문이다. 둘째 질문의 주제는 형이상학적 문제로서 인식이나 경험의 영역을 벗어난 것이고, 따라서 어떤 논의를 통해서도 정답을 얻을 수 없다는 판단 때문이다. 셋째 實在는 이성적 사유를 넘어선 것이라는 판단에 기초하여, 이성의 독단적 진행을 폐기하는 비판주의적 입장을 드러내려고 하였기 때문이다.


이중표는 T.R.V. Murti로 대표되는 세 번째 입장이 비교적 수용할만하다고 하면서, 한걸음 더 나아가 무기설은 中道라는 철학적 입장을 통해 緣起法이라는 진리를 설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영혼과 육체의 동일성과 차이성이라는 문제에 대한 붓다의 침묵에는 모든 것은 연기적 존재이기 때문에, 존재의 실상을 바르게 인식하기 위해서는 양극단을 넘어서는 중도적 인식체계가 요구된다는 것을 보여주려는 보다 적극적인 의도가 숨어 있다고 보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만약 붓다가 이성의 이율배반적 성격을 보여주려고 했거나 중도를 드러내고자 했다면, 침묵하지 않고 龍樹가 한 것처럼 不一不二라고 하는 부정의 방식으로라도 답변을 할 수 있었을 것이다. 실제로 붓다 자신이 실재에 대한 사유의 이율배반적 성격에 대한 자각을 기반으로, 용수와 같은 부정의 방식을 설법의 형식으로 사용하기도 하였다. 그렇다면 이중표의 해석이 붓다 사상의 전체맥락에서 볼 때 매우 타당한 사유임에도 불구하고 붓다는 왜 중도의 체계를 드러내는 이러한 접근방식을 이 문제에 있어서만은 사용하지 않았을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무기설에 대한 입장이 어떠하든 간에, 무기설에 대한 학자들의 논의는 붓다가 정신과 육체의 동일성과 차이성이라는 주제에 대한 논의를 거부한 것으로 본다는 점에는 다름이 없고, 이러한 붓다의 입장은 불교인들에게 있어서 이 주제에 대한 논의 자체를 붓다의 기르침에 대한 이반인 것처럼 생각하도록 하는 경향이 생겨나게 하였다. 그렇다면 필자가 붓다의 교설에 기대어 살펴보고자 하는 몸과 마음에 대한 논의 자체는 그 근원에서부터 설 자리를 잃는 것인가? 필자는 무기설의 의미를 다시 한번 검토함으로써 이 문제를 해결해 보고자 한다.


무기는 지금까지 특정 주제에 대한 붓다의 대응방식에 초점을 맞추어 해석되어져 왔다. 그러나 필자는 무기설의 진의를 보다 명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질문자의 질문의도 내지는 주제에 대한 접근방식에 대한 분석에 초점을 맞추어서 고찰해야 한다고 본다. 붓다는 주제 자체의 문제 때문에 침묵한 것이 아니라, 주제에 대한 잘못된 접근방식, 곧 양자택일적 답변을 요구하는 질문자의 태도 때문에, 하나를 선택함으로써만 요구에 부응할 수 있는 답변을 포기하고 침묵한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십무기 논란의 발현자인 鬘童子(摩羅迦)는 붓다에게 이렇게 묻는다.


“만일 세존께서 ‘이 중의 하나가 진실이고, 다른 것은 모두 허망한 말이다’라고 알아 결정적으로 답변할 수 있다면, 세존이시여, 저를 위해 말씀해 주십시오. 만일 세존께서 ‘이 중의 하나는 진실이고, 다른 것은 다 허망한 말이다’라고 알아 결정적으로 답변할 수 없다면, ‘나는 모른다'고 정직하게 말씀해 주십시오”


그는 이들 문제에 대하여 하나의 입장을 분명하게 밝혀달라고 요구한다. 하나로 귀결되지 않는 지식은 참된 지식이라고 할 수 없기 때문에, 無知와 다를바 없다는 것이 그의 입장이다. 붓다는 만동자의 이러한 태도에 대해, 자신은 한결같은 답변을 약속한 적도 없고 만동자 자신도 그것을 전제로 하여 자신에게 배웠던 것은 아니라는 점을 상기시키고 이렇게 말한다.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결정적으로(一向) 답변하지 않는다. 무엇때문에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결정적인 설을 하지 않는가? 이것은 뜻에 상응하지 않고 법에 상응하지 않으며 범행의 근본이 아니고 지혜로 나아가지 않으며 깨달음에로 나아가지 않고 열반에로 나아가지 않는다. 그러므로 나는 이러한 질문에 대해 결정적인 답을 말하지 않는다.”


一向記란 예컨대 모든 중생은 죽는가, 죽지 않는가라는 질문에 대해 모두 죽는다고 답변하는 것인데, 붓다의 입장에서 어떤 문제는 이런 형태의 답변이 불가능하고, 영혼과 육체의 동일성과 차이성 문제도 그 중의 하나이다. 그러나 이러한 질문의 제안자는 처음부터 양자택일적인 답변을 요구했다. 붓다가 이들 질문에 답하지 않은 것은 둘 중의 하나를 택하여 답하라는 요구에 대한 침묵이지, 이러한 논의 자체가 무의미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무기란 엄밀히 말하자면 둘 중의 하나를 선택하여 결정적으로 그것이 옳다고 설하는 것을 거부한 것이라고 풀어야 한다. 이렇게 이해할 때 만동자의 질문에 대한 붓다의 침묵과 동일한 주제에 대해 다른 곳에서 설해진 붓다의 무수한 가르침이 서로 모순되지 않을 수 있게 되고, 필자가 고찰하려는 몸과 마음의 관계에 대한 논의 또한 그 의미를 확보하게 된다. 그리고 양자택일적 답변을 거부하는 붓다의 행위 속에서 우리는 불교의 심신론이 二元論이나 一元論을 벗어나 있음을 짐작할 수 있게 된다.

 


Ⅲ. 붓다의 자아관의 실존적 의미 ▲ 위로
-몸과 마음에 대한 논의는 어떤 관점에서 이루어지는가-


논의의 의도는 필연적으로 논의의 진행이나 결론과 맞닿아 있다. 정신과 신체가 서로 다른 것이라고 하는 데카르트의 심신이원론이 목표로 삼았던 것은 신체에 대한 정신의 우월성을 확보하고, 이로써 인간 능력의 탁월성을 증명하여 자연에 대한 인간의 권리를 확보하는 것이었다.


몸과 마음에 대한 불교의 논의는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 혹은 상식적인 수준에서 시설된 영구적 실체로서의 자아에 대한 비판적 접근을 시발점으로 하고, 붓다의 자아관인 무아설은 이러한 논의의 귀결이라는 것이 일반적 사실로 여겨진다. 비판의 의도를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붓다의 자아관의 목표가 드러난다.


우파니샤드에서 정신과 몸을 포함한 물질계, 곧 현상세계는 Brahman의 세계전개의 결과 드러난 것이다. 따라서 진정한 실재는 브라흐만이며, 브라흐만이 인간에게 내재된 것이 Ātman이다. 아트만은 절대적 초월적 자아이고, 아트만에 의해 생겨난 것은 현상적 자아이다. 이러한 현상적 자아에 집착하는 것은 아트만을 구체적인 차별상으로 한정된 것으로 파악하는 것, 곧 아트만을 대상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다. 사람들은 이같은 자기 이외의 것에 집착하여 진정한 자기를 상실하고 있다. 아트만은 이러한 모든 자기 아닌 것을 부정함으로써 드러나는 어떤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러한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에 대한 붓다의 비판의 요지는 다음과 같다. 우리의 경험에 비추어 볼 때 자아라고 할 만한 것은 색ㆍ수ㆍ상ㆍ행ㆍ식이라는 다섯 가지요소의 결합체인데, 이들 다섯 가지 요소의 어느 것에도, 몸과 마음의 배후에 있으면서 언제나 모든 활동을 지배하는 실체적인 자아인 아트만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아트만의 본질로 여겨지는 불변성, 자재성, 환희성 등과 같은 것은 다섯 가지 요소의 어디에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색은 우리가 말하는 의미에서의 아트만(我)이 아니다. 만약 색이 아트만이라고 한다면 색은 병드는 일도 없고 고통이 생기는 일도 없어야 할 것이다. 또한 색에 대해서 「이와 같이 되도록 하였으면 한다」라거나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하였으면 한다」라고 하는 바램은 필요하지 않다. 그러나 색은 무아이기 때문에 색은 병도 들고 고통도 생겨난다. 또한 색에 대해 「이와 같이 되도록 하였으면 한다」라거나 「이와 같이 되지 않도록 하였으면 한다」라고 하는 바램이 생겨난다. 수∙상∙행∙식도 또한 다시 이와 같다.”


필자가 앞의 주18)에서 무아설을 우파니샤드적 사유에 대한 비판이라고 한 것은 바로 이 부분을 두고 한 말이다. 병, 고통, 바램이란 각각 아트만의 특성인 불변성, 환희성, 자재성의 부재를 의미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붓다의 비판은 일견 부당한 논리일 수도 있다. 이미 우파니샤드에서는 아트만이란 현상적 자아를 넘어선 것이라고 하였는데 현상적 자아의 분석을 통해 아트만의 부재를 끌어내기 때문이다. 논의의 타당성 여부를 떠나 여기에서 자아에 대한 붓다의 논의가 성립되는 하나의 지반을 찾아낼 수 있는데, 그것은 자아에 대한 붓다의 논의는 경험적 인식의 영역으로 제한된다는 점이다. 붓다에게 있어서 경험적 인식의 영역을 벗어난 영구불변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거나 존재한다고 할지라도 논의 자체가 무의미해진다.


붓다가 이렇게 우파니샤드의 아트만론을 비판한 이유는 영구적 실체로서의 자아가 존재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그러한 자아가 있다고 하는 의식이 바로 고통의 원인이 된다는 점 때문이다. 존재에의 욕구가 존재를 낳고 존재의 존재욕구가 다시 존재의 변화를 수용하지 못하게 하는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해, 당대사상 혹은 인간일반의 상식적 경향을 비판한다. 존재에 대한 신념이 있는 한 존재의 변화인 생노병사에 대한 두려움은 결코 극복될 수 없다. 종래에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누리도록 하는 중심주체였던 아트만은 붓다의 직관에 의해 고통의 원인으로 변화한다.


“많이 들어 아는 성스러운 제자는 이 오음이 내가 아니고 나의 것도 아니라는 것을 이와 같이 진실 그대로 관찰한다. 진실 그대로 관찰하고 나면, 모든 세간에 대해 전혀 취하는 것이 없고 취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집착하는 것도 없고 집착하는 것이 없기 때문에 스스로 열반을 자각하여 ‘나의 生은 이미 다하였고 범행은 이미 세워졌으며 해야 할 것은 이미 다 하였다’고 하고, 스스로 후세에 어떤 존재로 태어나는 일이 없음을 안다”.


경험적 자아의 어디에도 영구적 실체로서의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을 관찰함으로써, 집착을 버리고 열반에 도달하여 모든 고통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게 된다.


이상을 통해 붓다의 自我論은 첫째 논의의 범주에 있어서 경험으로 영역, 곧 오온을 벗어나지 않고, 둘째 목적론적으로는 오온에 대한 바른 이해를 통해 집착으로 인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 자유를 얻는 것을 지향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목적을 지녔기 때문에, 고통의 내용과 원인에 대한 판단이 몸과 마음에 대한 논의의 전개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점유하게 되는데, 이러한 분석은 다음 장에서 다룬다.

 


Ⅳ. 초기불교의 자아관에 나타난 몸과 마음의 성격 및 지위 ▲ 위로


본장의 목적은 붓다의 자아관에 대한 분석적 고찰을 통해, 불교사상을 심신가치론이라는 틀 속에서 이해하는 것이다. 먼저 붓다가 시설한 경험적 자아의 구성요소인 오온의 성격을 고찰한다. 이를 통해 불교의 심신론은 구성요소에 대한 이해방식에 있어서, 唯心論도 아니고 唯物論도 아닌, 二元論이라는 점이 밝혀질 것이다. 다음으로 몸과 마음의 성격에 대한 이해를 통해 붓다의 이원론은, 데카르트와 같은 실체적 이원론이 아닌 非實體的 이원론임을 밝혀본다. 마지막으로 붓다가 몸과 마음의 관계에 있어서, 마음을 강조할 수 밖에 없었던 이유를 고찰하려고 한다. 이 속에서 마음에 대한 강조는 일반적 오해처럼 몸에 대한 부정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 드러날 것이다. 또한 붓다의 심신론에 대한 가치론적 접근은 몸과 마음이라는 대립항 사이에서의 문제라는 측면에서가 아니라, 마음과 마음의 문제라는 각도에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점도 드러날 것이다.

 


1.蘊∙處∙界:경험적 자아의 구성요소 ▲ 위로


우파니샤드의 초월적 자아를 부정하고 붓다가 인정한 경험적 자아는 이미 서술한 것처럼 오온이라는 다섯 가지 요소의 집합으로 정의된다.


“비사가 우바이가 물었다. ‘어진이여, 자기 자신(自身)을 자신이라고 말하는데 어떤 것을 자신이라고 하는가?’ 법락비구니가 대답했다. ‘붓다는 五盛陰을 설하였다. 곧 자신이란 色盛陰․覺盛陰․想盛陰․行盛陰․識盛陰이니 이것이 붓다가 말한 오성음이다’”.


색온은 인간의 육체 및 객관세계 일반을 가리킨다. 정신과 대응하는 모든 객관을 통틀어서 일컫는 말이다. 수온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과 접촉함으로써 생겨나는 苦․樂․非苦非樂의 감수작용이고, 상온은 대상을 접하였을 때 우리 안에 떠오르는 표상작용이며, 행온은 대상을 접하였을 때 우리 안에 생겨나는 행위에의 의지작용이고, 식온은 인식주체가 인식대상에 대해 내리는 판단작용이다. 아함경에는 수․상․행․식을 각각 독립된 마음작용으로 보는 경우와 후대의 아비달마에서 보이는 것처럼 식을 마음의 주체로 보고, 수상행은 마음(식)이 육체 및 외부경계와 인연하여 생겨나는 마음의 작용이라고 하여 식에 종속되는 것으로 보는 경우가 모두 나타난다.


이밖에 자아와 관련된 개념으로는 十二處 가운데 六根, 十八界 가운데 六根과 六識이 있다. 六根이란 眼根․耳根․鼻根․舌根․身根․意根의 여섯 가지 기관을 가리키는데, 앞의 五根은 몸의 구성요소로 오온 가운데 색온을 세분화한 것이고, 마지막 意根은 오근 전체를 총괄하여 그 문을 통해 들어오는 일체의 인식을 관리하는 기관, 곧 마음작용 전부를 포함한 것 으로 오온 가운데 수온․상온․행온․식온을 하나로 묶은 것이다. 십팔계에서의 육근과 육식에서, 육근 가운데 앞의 오근은 몸의 구성요소이고, 의근와 眼識․耳識․鼻識․舌識․身識․意識의 六識을 합한 것이 마음의 구성요소이다. 오근이 외계에 대한 관문으로서 각각 일정한 자극을 내부로 전달할 때 意根이 이에 교묘히 응함으로써 내부에 특유의 반응을 일으키는 것이 前五識이고 다시 意根 자신이 인식주관으로서의 일반적 반응을 나타내는 것이 第六意識이다. 다만 식이라는 것은 본질상 하나이지만 작용에 의해 여섯 가지로 발현하는 것인가, 혹은 육식은 본질상으로도 서로 다른 것인가에 대해서는 후대에 이르러 해석자 사이에 의견의 차이가 생겨난 문제이다.


오온이든, 육근이든, 육근과 육식이든 자아의 구성요소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졌다는 것에는 변함이 없다. 몸도 이미 주어진 것이고 마음도 이미 주어진 것이다. 특히 육체를 포함한 물질계는 四大를 그 본질로 하는데, 사대 그 자체도 이미 주어진 것으로 보아, 그 기원에 대해 논한 적이 없다.


초기불교의 자아관에 있어서 인간이란 물질만으로 이루어졌거나 오직 정신만으로 이루어졌거나 하는 입장은 배제된다. 인간이라는 존재는 정신적 요소와 물질적 요소의 결합이고, 어느 하나는 진실이고 다른 하나는 허상이라거나 하는 설명은 없다. 또한 어느 하나로 환원하여 일원화하고자 하는 유물론이나 유심론적 해명도 하지 않는다.


“意內入處란 心․意․識은 色이 아니어서 볼 수도 없고 장애하는 성질도 없으니, 이것을 의내입처라 한다”.


의내입처는 의근이고 이 의근은 초기 불교에서 심ㆍ의ㆍ식과 동일한 뜻으로 사용된다. 인용문에서는 의근이 물질적인 것과 질적으로 구별되는 것임을 명기하고 있다. 곧 극미한 물질로 조성되어 공간을 점유하여 장애하는 성질을 가진 육체와는 달리 볼 수도 없고 공간을 점유하지도 않는 것이다. 인간에게는 육체와 구별되는 비물질적인 마음이 존재한다. 이러한 의미에서 초기불교의 존재론은 몸과 마음을 모두 인정하는 物心二元論이다.

 


2. 경험적 자아의 존재양태:몸과 마음의 성격

1) 無常ㆍ無我:늘 변화하는 몸과 마음
 ▲ 위로


붓다가 자아를 시설한 것은 새로운 자아를 정립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아의 실제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영구적 자아는 존재하지 않음을 깨닫게 하려는데 목적이 있었다. 따라서 역설적이게도 붓다의 자아관은 무아설로 귀결된다. 붓다는 우리의 자아가 오온 이외의 것이 아님을 가르치고, 다시 이러한 오온으로 이루어진 자아는 영원하지 않고, 따라서 불변의 실체로서의 자아(我)란 없는 것임을 강조함으로써 고통의 원인인 자아의식을 뿌리뽑고자 하였다. 오온의 구성요소 각각도 무상하고 무아이며, 그러한 것의 화합으로서의 자아 또한 무상하고 무아인 것이다.


“色은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닌 것은 나의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진실하고 바른 관찰이라 한다. 이와 같이 受∙想∙行∙識도 역시 영원하지 않다. 영원하지 않은 것은 고통스러운 것이다. 고통스러운 것은 내가 아니고 내가 아닌 것은 나의 것도 아니다.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진실한 관찰이라 한다”.


육체와 마음은 왜 무상하고 무아인가? 위의 인용문은 아함경에서 정형화된 문구로 수처에서 나오지만, 선언적 형식에 그칠 뿐이고 왜 그러한지에 대해서는 설명하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우선 몸과 마음의 무상함은 우리가 잠시만 관찰하여도 상식적으로도 충분히 이해가 가능한 것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무상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그 속에 불변의 어떤 실체가 있어서 자신의 정체성을 유지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무상에 대한 지식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무상한 것에 대한 인식을 無我의 自覺으로 이끌어가는 것이 중요해진다. 붓다는 무상한 것 속에는 어디에나 영구적 실체란 찾을 수 없고, 그렇기 때문에 영구적 자아라는 것도 존재하지 않는다고 하는 논법을 구사한다.


몸과 마음의 무상성에 대한 구체적 논의는 다른 곳에서 이루어진다. 우선 몸에 대해서, “四大로 이루어졌는데, 地大는 몸 가운데 단단한 것, 곧 근골, 피부 등을 구성하고, 水大는 몸 가운데 濕性을 지닌 것, 곧 피․오줌 등을 구성하며, 火大는 몸가운데 溫暖性을 지닌 것, 곧 온기를 구성하고, 風大는 몸 가운데 운동성을 지닌 것, 곧 호흡을 구성한다. 몸은 바로 이러한 여러 가지 요소들이 화합하여 생겨난 것이다”라고 한다. 여러 요소들의 결합에 의해 생겨난 것은 결합의 요소들과 열린 관계에 있기 때문에 독자적이고 불변하는 실체로서 존재할 수 없다는 점을 밝힌 것이다. 또한 마음은 언제나 인연에 의해 생겨난 것이기 때문에, 그것의 조건인 인연이 무상하기에 마음도 또한 무상하다고 한다. 이밖에 몸과 마음의 상호의존성에 근거하여 몸과 마음이 무상이고 무아임이 밝혀지는데, 이 부분에 대한 고찰은 다음 장으로 미룬다.

 


2)緣起:서로 의존하는 몸과 마음 ▲ 위로


분석적 입장에서 보면 몸과 마음은 비록 질적으로 차이가 있는 자아의 구성요소이지만, 우리의 삶 속에서 경험되는 몸과 마음은 어떤 형태로는 서로 관계를 맺고 있어서, 몸을 떠난 마음이라든가 마음을 떠난 몸이라든가 하는 것은 있을 수 없다.


“손이 있으므로 취하거나 버림이 있음을 알고, 발이 있으므로 가고 옴이 있음을 알며, 관절이 있으므로 구부리고 펴는 것이 있음을 알고 배가 있기 때문에 배고픔과 목마름이 있음을 안다. 이와 같다. 비구여. 눈이 있기 때문에 눈이 접촉을 인연으로 하여 감수작용을 낳아, 안으로 고통이라거나 즐거움이라거나 고통도 아니고 즐거움도 아니라거나 하는 감수작용을 일으킨다. 귀와 코와 혀와 집촉기관인 몸과 意도 다시 이와 같다”.


우리에게 어떤 정신의 작용이 일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육체가 있지 않으면 안된다. 그렇다고 해서 정신이 육체에 종속되어 있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정신이든 육체이든 모두 그 자체로 독립자존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것과의 상관성을 벗어날 수 없음을 강조하는 것일 뿐이다.


“무엇을 名을 안다고 하는가? 색이 아닌 네 가지 陰을 名이라고 하는 것이다. 무엇을 色을 안다고 하는가? 四大와 사대로 이루어진 것을 색이라고 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색을 말하고 앞에서는 명을 말했는데 이것이 곧 명색이고, 이것을 명색을 참되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고 한다. 무엇을 명색의 원인[習]을 참되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고 하는가? 識으로 말미암아 곧 명색이 있다고 하는 것이니, 이것을 명색의 원인을 참되게 있는 그대로 아는 것이라 한다”.


인용문에 나오는 오온의 구성요소로서의 식과 오온을 구성하는 원인으로서의 식의 관계에도 일방성은 인정되지 않는다. 오랜 세월동안 계속되어온 식의 습기가 몸과 마음의 정체성에 영향을 미치고, 다시 이렇게 형성된 몸과 마음이 능산자로서의 식에 保持됨을 반복하는 것이다. 경전에서는 이것을 세 개의 갈대 중 하나가 없어도 설 수 없는 것에 비유하고 있다. 셋 중 어느 것이 중심축인가를 따지는 것은 불가능할 뿐 아니라 무의미하다.


붓다가 자아란 무엇인가에 대한 질문에 대해 항상 정신과 육체를 들었던 것은 그 분석에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화합에 의한 존재자라는 존재의 성격을 드러내는데 목적이 있었다. 붓다는 몸과 마음을 몸과 마음 그 자체만으로 보는 것이 아니라, 몸과 마음 그리고 외계와의 관련성 속에서 고찰한다. 이러한 점에서 앞에서 잠정적으로 내렸던 불교의 심신이원론은 非實體的二元論 그리고, 不二的二元論 혹은 心身相關論이라고 해야 더욱 정확한 표현이 될 것이다.

 


3. 몸과 마음의 가치론적 지위 해명

1) 고통의 의미에 대한 분석
 ▲ 위로


이미 서술한 바와 같이 붓다의 자아관은 자아 자체에 대한 분석이 아닌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목적을 갖는다. 불교에서는 세속적인 의미에서의 선과 악의 가치를 부정하지는 않지만, 이것은 모두 고통으로부터 벗어나는데 궁극적으로 도움을 주지 않기 때문에, 有漏善이라고 한다. 오직 고통으로부터의 자유를 주는 것 만이 無漏善이라고 하여 궁극적인 가치를 지닌다. 따라서 몸과 마음의 가치론적 지위를 해명함에 있어서도 이러한 규정이 적용되어야 한다. 고통의 발생과 소멸에 있어서 몸과 마음의 역할이 이들에 대한 가치론적 입장을 좌우한다.


이것을 살펴보기에 앞서 붓다가 극복하고자 했던 고통의 의미에 대한 분석이 이루어져야 한다. 붓다는 몸과 마음, 그리고 그것으로 이루어진 자아가 무상하고, 무아임을 강조할 때 항상 고통이라는 사실도 강조하였다. 여기서 문제가 되는 것은 이렇게 무상한 자아가 왜 고통인가 하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서 보통 무상은 실상인데 고통이라는 판단은 그러한 실상을 이해하지 못한 사람들의 눈에 비친 세계로 인해 나타나는 현상에 대한 규정이라고 해석한다. 고통은 객관적 사실이 아니라 다분히 주관적이라는 것이다.


이런 해석은 불교를 비관주의로부터 일탈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인 것으로 생각되지만, 붓다 자신이 말했듯이 있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인정하는데서 불교의 모든 사유가 시작되어야 한다면, 업에 의해 무상한 이 세계에 태어나 살아가는 인간의 현존은 고통스러울 밖에 없다. 어떤 것도 내가 원하는대로 될 수는 없다. 나는 모든 것의 주재자가 아니라 모든 것과의 관계 속에서 존재하는 존재자일 뿐이기 때문이다.


불교의 진리관에 입각할 때, 태어난다는 것 자체가 이미 無明의 소산이다. 붓다의 고뇌는 삶 속에 필연적으로 존재하는 생노병사에 대한 두려움에서 시작되었고, 붓다는 모든 고통에서 자유를 얻었음을 선언하였지만, 붓다 역시 늙고 병들어 죽음을 맞이할 수 밖에 없었다. 만약 고통이 주관적이라고 한다면 생노병사는 고통이 아니어야 하지만, 분명 생노병사는 붓다의 입을 통해 고통이라고 말해지고 있다. 또한 붓다에게 생노병사는 없어야 하지만 붓다도 이것을 피할 수는 없었다. 마지막으로 이 세계에서의 고통이 전부 주관적인데 불과하다면 윤회로부터의 해탈, 더 이상 태어나지 않는 경지에 도달할 것을 지향할 이유가 없어진다.


이런 의미에서 붓다의 교설에서 고통의 의미는 둘로 분류되어야 한다고 본다. 八苦 등과 같은 원초적 고통과 이것을 제외한 이차적 고통이다. 연기적 존재로서의 인간이란 주재성을 갖지 못하기 때문에, 존재하는 한 八苦는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우리가 현존의 상태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은 고통을 수용하는 방식에 있어서 잘못된 인식에 의해 배가되는 고통들이다. 깨달은 이에게 있어서 사라지는 것은 고통의 조건 속에 놓여진 존재 자체가 아니라, 고통의 조건 속에 놓여진 존재 자체를 수용하지 못함으로써 발생하는 이차적 고통일 뿐이다. 깨달은 이에게서 사라지는 것은 생노병사 자체가 아니라 생노병사에 대한 두려움이다. 깨달은 이가 존재 자체의 고통에서 벗어나는 것은 현세가 아니라 미래세의 일이다. 그는 존재에의 욕망을 벗어남으로써 더이상 존재하지 않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2) 몸과 마음에 있어서 마음이 중점적으로 부각되는 이유 ▲ 위로


초기불교에서 인간은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져 있되, 그 몸과 마음은 실체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강조한다. 몸과 마음의 현상적 존재성은 부정되지 않으며, 이런 의미에서 가치론적으로 等價性을 갖는다. 또한 어느 하나가 어느 하나에 일방적인 영향력을 행사하지 않는다는 점에서도 등가성을 갖는다. 이렇게 등가적 관계를 가지는 것이 수차례 강조됨에도 불구하고, 마음에 더욱 비중을 두는 양상이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도 사실이다.


예컨대 붓다는 자아나교의 중흥조인 Nigantha Nataputta의 제자가 자신의 교단에서는 身業을 가장 중시하여 오로지 그것을 괴롭힘으로써 口業과 意業까지 소멸시킨다고 하자, 자신은 의업을 제어함으로써 신업과 구업이 저절로 제어되도록 한다고 하였다. 또한 마음은 모든 것의 주인으로, 수레가 가야할 길을 결정하는 이미 나 있는 수레바퀴 자국에 비유되기도 한다.


그러나 이것을 붓다가 마음을 몸보다 중시하였다고 하는 근거로 삼는 것은 곤란하다. 몸이든 입이든 마음에 의해 조정을 받는다고 했기 때문에 마음을 중시한 것으로 볼 수도 있지만, 마음은 善業의 근거이기도 하지만 惡業의 근거이기도 하기 때문에, 다만 우리에게 고통을 일으키고 깨달음을 성취하도록 유도하는 중심주체는 마음이라고 한 것으로 이해해야 한다. 마음은 청정성의 측면만이 아니라 오염성의 측면도 동시에 가진 존재라면, 육체야말로 가치중립적이라는 점이 부각될 수 있을 뿐이다.


그렇다면 마음은 왜 주재성을 갖는가? 붓다가 부정한 것은 몸의 어떤 측면인가? 이것은 불교의 이상인 고통으로부터의 자유와 관련지워져서 이해되어야 한다. 고통의 원인은 집착이고 집착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다. 마음이 집착을 벗어남으로써 자유를 얻는 것이지, 몸을 부정함으로써 자유를 얻는 것은 아니다.


“마땅히 色이 無常함을 관찰해야 할 것이니,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이 곧 바른 관찰이다. 바른 관찰을 하는 이는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내고, 싫어하여 떠나려는 마음을 내는 이는 즐거워하고 탐착하는 마음이 다한다. 즐거워하고 탐착하는 마음이 다하는 것, 이것을 心解脫이라 한다. 이와 같이 受ּ想ּ行ּ識이 無常함을 관찰할지니, 이와 같이 관찰하는 것을 바른 관찰이라 한다”.


몸이 무상한 것임을 알지 못할 때 탐착하는 마음을 낸다. 몸에 대한 탐착이란 몸에서 일어나는 생노병사 등을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의미한다. 생노병사가 괴로운 것은 생노병사 그 자체 때문이기도 하지만, 생노병사를 받아들이지 못하는 우리의 마음때문이기도 하다. 우리는 변화하는 몸을 받아들이지 않고, 젊고 건강한 모습을 유지하고 싶어한다. 늙은 모습이 우리를 힘들게 하는 것이 아니라, 젊은 모습의 불변성에 대한 집착이 우리를 힘들게 한다. 오염된 마음은 몸을 영원한 것이라고 생각하고, 이로써 몸의 변화는 더이상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된다. 오염된 것은 몸이 아니라 마음이기 때문에 우리가 본질적 자아를 회복하기 위해 행해야 할 것은 몸에 대한 부정이 아니라, 실상을 바르게 관찰하여 몸의 바른 작용을 막는 오염된 마음을 제거하는 일이다. 문제가 되는 것은 몸 자체가 아니라 몸에 깃든 우리의 마음이다. 감각기관에 대한 올바른 제어법에 대한 제자 Ānanda의 질문에 붓다는 다음과 같이 답한다.


“눈과 色을 인연으로 하여 眼識이 생기면, 좋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좋지 않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한다. 좋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고 좋지 않다는 마음이 생기기도 하면, 그 거룩한 제자는 그것을 이와 같이 참다이 안다. ‘나는 눈과 색을 인연으로하여 안식이 생김으로써, 좋다는 마음을 내고 좋지 않다는 마음을 내었다. 좋다는 마음과 좋지 않다는 마음이 생겨남에,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이 곧 적멸의 경지이고, 이렇게 관찰하면 그것이 곧 뛰어나고 묘한 경지인 것이다’. 이른바 [좋아하는 마음과 좋지 않다는 마음을] 함께 버리는 것이니, 그것을 버릴 수 있으면 싫어하고 싫어하지 않음을 떠나게 된다”.


몸이 문제가 되는 것은 몸이 외부대상을 만나, 번뇌의 원인이 되는 마음이 생겨나도록 하는 중심체이기 때문이다. 몸이 없다면, 설령 있다고 해도 대상과 더블어 작용을 하지 않는다면, 분명 번뇌는 생겨나지 않는다. 그러나 붓다는 이러한 방식으로 번뇌를 없애는 것을 인정하지 않았다. 몸의 작용을 내버려 두되, 그 작용에 있어서 생겨나는 문제를 해소하려고 하였다. 그리고 몸의 작용에 있어서 생겨나는 문제는 필연적으로 마음과 맞닿아 있다.


“그대들은 여러 감각기관의 문을 수호하여 그 마음을 잘 제어하라. 눈으로 색을 보되 색의 相을 취하지 말고, 겉으로 드러난 좋아하는 모양을 취하고 집착하여 가지려는 마음을 지니지 말라.”


“세존은 눈으로 색을 보아, 혹은 좋고 혹은 나쁘더라도 욕탐을 일으키지 않는다. 그 밖의 중생들은 눈으로 색을 보아 혹은 좋고 혹은 나쁘면 곧 욕탐을 일으킨다.  그러므로 세존은 욕탐을 끊으면 곧 마음이 해탈한다고 설하였다”.


초기불교에서 마음이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이러한 주재적 측면때문이지, 몸 자체를 부정한 것으로 보아서는 아니다. 붓다는 몸 자체를 부정하고 더러운 것이며 버려야 할 것이라고 한 적이 없다. 다만 몸에 깃든 마음의 오류를 시정할 것을 요청하였을 뿐이다. 이러한 형태의 심신론에 대해 마음의 가치론적 우위를 주장한다는 판단을 내린다는 것은 타당하지 않다.

 


3) 五蘊과 五取蘊:마음은 어떻게 몸과 마음을 장애하는가 ▲ 위로


불교의 가치관에 입각할 때 우리를 고통으로 이끄는 것은 악이고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하는 것은 선이다. 붓다가 제거하려고 했던 고통이란 이미 살펴본 것처럼 무상․무아인 것에 대한 바른 인식을 결여함으로써 생겨나는 모든 종류의 고통이었고, 이 고통은 마음의 얽매임과 관련된 것이다. 얽매인 것이 마음이기 때문에 벗어나는 것도 마음이다. 불교에서 몸과 마음에 대한 가치론적 논의가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은 바로 이 지점부터이다. 곧 속박과 해탈은 마음과 마음의 문제라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마음이 몸에 대해 어떤 작용도 할 수 없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마음은 몸이라는 질료가 구체적 양태를 띄어가는데 주도적 역할을 한다. 마음이 일으킨 모든 종류의 과오에 의해 왜곡된 몸은 오직 마음에 의해서 치유된다는 것을 의미할 뿐이다.


우리의 마음은 어떻게 있는 그대로의 마음과 몸을 오염시키며, 이러한 오염으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무엇인지를 알아보기로 한다. 경전에서는 잘못된 인식을 기초로 성립된 오온을 五取蘊이라고 하여 가치중립적인 의미에서의 오온과 구별하고 있다. 오온이란 있는 그대로의 몸과 마음이라면 오취온이란 마음에 의해 오염된 몸과 마음이다.


“어떤 경우에는 陰이 盛陰이고, 어떤 경우에는 음은 곧 성음이 아니다. 음이 곧 성음인 경우는 어떤 것인가? 만일 색에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고, 각․상․행․식에 번뇌가 있고 집착이 있으면 이 음은 곧 성음이다. 음이 곧 성음이 아닌 경우는 어떤 것인가? 만일 색에 번뇌가 없고 집착이 없고 각․상․행․식에 번뇌가 없고 집착이 없으면 이 음은 성음이 아니다.”


오온이 오취온이 되는 것, 곧 있는 그대로의 몸과 마음이 왜곡되는 결정적 근거가 되는 것은 바로 집착과 번뇌이다. 오취온의 발생근거에 대해 붓다는 탐욕이 뿌리가 되고, 탐욕이 모인 것이며, 탐욕이 낳은 것이고, 탐욕이 개입한 것이라고 선언하며, 탐욕의 구체적인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했다.


“어떤 비구가 실로 눈이 있어서, 좋아할 만한 色임을 알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색을 사랑하고, 욕망과 상응하며, 마음으로 즐거워하되, 근본을 더듬어 볼 때 근본이 곧 과거이다. 그것은 과거의 식이 욕망을 일으키고 물들고 집착한 것이다. 識이 욕망을 일으키고 물들고 집착하면 곧 그것을 즐거워하게 되고, 그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곧 과거를 기억하게 된다. 이와 같이 귀․코․혀․몸에 있어서도 또한 그러하다. 어떤 비구가 실로 마음이 있어서 좋아하는 개념임을 알고, 마음으로 생각하며, 법을 사랑하고, 욕망과 상응하며, 마음으로 즐거워하되, 근본을 더듬어 볼 때, 그 근본이 곧 과거이다. 그것은 과거의 식이 욕망을 일으키고 물들고 집착한 것이다. 식이 욕망을 일으키고 물들고 집착하면 곧 그것을 즐거워하게 되고, 그것을 즐거워하기 때문에 곧 과거를 기억하게 된다. 여러분, 이와 같이 비구는 과거를 기억하게 된다”.


우리의 몸과 마음이 어떻게 오염되는가? 그리고 오염된 결과는 어떤 문제가 생겨나는지를 설명한 것이다. 연기가 모든 존재의 존재원리라고 할 때 정신과 육체, 그리고 물리세계 일반을 통틀어서 변하지 않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그런데 우리는 경험의 내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그것에 대해 실체성을 부여한다. 이 때문에 과거의 경험이 현재의 발목을 붙잡는다. 고장난 냉장고에서 얼어죽은 예는 감수작용을 실체화함으로써 생겨나는 장애이다. 냉장고에 대한 과거의 감수작용의 실체화가 있는 그대로의 몸과 마음을 보는 것을 장애한다. 똥통에 빠진 무를 아무리 잘 씻어내도 먹을 수 없는 것, 먹는다고 할지라도 구역질을 할 수 밖에 없는 것은 과거세를 포함한 모든 과거의 무상한 경험내용을 실체화함으로써 생겨나는 장애이다.


이렇게 몸과 마음이 대상을 접하여 생겨나는 모든 종류의 경험이 무상하다는 것을 알지 못함으로써, 우리는 즐거움과 괴로움의 양극단에 처하게 된다. 즐거움은 들뜨게 하는 감정이고 괴로움은 가라앉게 하는 감정이다. 즐거운 감정과 괴로운 감정은 현재 우리의 육체가 누려야 할 적합한 조건을 알지 못하게 한다. 즐거운 감정은 몸의 조건을 고려하지 않고 탐닉하게 하고, 괴로운 감정은 몸을 고려하지 않고 배척하도록 한다. 우리의 몸은 이로 인해 누려야 할 조건을 상실하고 황폐해진다.


무상함을 이해하고, 욕망을 제거할 때 우리는 현재 우리의 몸과 마음의 상태를 있는 그대로 이해하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가장 즐거운 상태를 유지할 수 있다. 이렇게 얻는 즐거움이란 상대적 즐거움을 넘어선 즐거움이기에 즐거움이라기 보다 평화라고 해야 한다. 들뜨지 않고 가라앉지 않는 평화로운 마음의 지속이 바로 자유이다. 이렇게 볼 때 몸과 마음의 관계에 있어서 역시 주도적 위치를 차지하는 것은 마음이다. 상주성에 집착하는 마음은 해탈을 장애하기 때문에 가치론적으로 악이며, 상주성에 대한 집착을 벗어난 마음은 해탈로 인도하기 때문에 가치론적으로 선한 것이다.

 


Ⅴ. 맺음말 ▲ 위로


몸은 정신주의라고 하는 서구의 지배적 전통 안에서 마음의 활동을 위한 도구적 존재로 인식되었으며 나아가 마음의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로 간주되었다. 불교 또한 마음에 대한 해명에 치중함으로써 몸을 무의미하고 부정한 것으로 간주했다는 오해를 받는 경우가 종종 있어왔다.


본논문의 연구결과에 따르면 우리의 몸과 마음의 자유로운 활동을 가로막는 장애물은 오히려 마음이다. 불교에서 부정하는 것은 몸이 아니라, 몸에가시처럼 박힌 올바르지 못한 정신이다. 그러나 이러한 정신에 의해 본연의 상태를 상실한 몸의 청정성을 회복하게 하는 것도 마음이다. 이 때문에 심신관계에 있어서 몸과 마음의 가치론적 지위는 판정할 수가 없다. 몸과 마음은 그저 무상한 흐름 그 자체로 존재할 뿐이기 때문이다.


가치판단의 대상이 될 수 있는 것은 마음이다. 마음은 청정성과 오염성의 이중적 의미를 갖고, 청정한 마음은 선이고 오염된 마음은 악이다. 그렇다고 해서 청정한 마음이라고 하는 어떤 실체가 있다고 보아서는 안된다. 이미 청정하다는 의식이 존재하면, 청정하지 못한 것과의 분별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고, 이때 우리의 의식은 다시 분열되어 마음의 평정을 상실한다. 청정을 얻고 부정을 물리치려는 시도는 탐욕과 분노라는 큰 번뇌의 뿌리가 된다. 우리는 오염된 마음을 제거할 때 본연의 상태로서의 몸과 마음으로 돌아간다고 말해야 한다. 참된 자유의 세계란 다름 아닌 있는 그대로의 몸과 마음이 걸림없이 노니는 세계이기 때문이다.


주제어

초기불교(Early Buddhism), 자아(self), 심신가치(axiology of mind and body), 무기(the Undeclared), 일향기(the Dclared), 오온(the five aggregates), 오취온(the five grasping aggregates), 무아(no-self, non-substantiality), 연기(dependent arising), 염오와 정화(defilement and purification)

 

 

Mind-Body Axiological Consideration

of The Early Buddhism's View on the Self
- Discussing the character and position of the body and the mind -

 

Han, Myung-Sook


This study has been put an effort to analyze the consideration of the self as reflected in the Early Buddhism and has taken into consideration of the position of the Buddhism related to the rela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mind and axiological position that has been a hot issue in the field of philosophy society for a long time.


Until now, the Undeclared(the avyākṛta) has been understood the thought that Buddha refused the discussion on the subject of the rela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mind. The writer first revealed the point of view that Buddha's the Undeclared must be considered as the refusal of discussion in the form of proposal of a question about the attitude to the question maker who tries to obtain an affirmative opinion about the topic. Therefore, I think, the legitimacy on the Buddhist discussion between the rela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mind has been established.


In the Early Buddhism, it was said that human beings were made up of the body and the mind, but the body and the mind had no real substantiality. The phenomenological existence of the body and the mind was not denied, in this sense both of them have same equivalence in ontology.


 In addition, they also have same equivalence in relations in that either of them is not able to have an one-way effect on the other. Accordingly, the axiological prospect shall not be established in the given framework of the rela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mind.


When seen from the viewpoint of the Buddhism, what leads us to suffering is evil, but what takes us out of suffering is good. Suffering arises when we lacks in righteous recognition to the things, and this suffering is closely related to defilement of the mind. If the mind gets defiled(bonded),  suffering arises therefore, and if the mind is purified(released), the suffering will disappear. Therefore, axiological argument about the relation between the body and the mind cannot help being converted into the framework, the relation between the mind and the mind.


The reason that the mind was put more import!ance on in the Early Buddhism gets down to that the body distorted by all types of mistakes and errors resulted by the mind can only be cured by the mind itself. Nevertheless, we should not suppose that there is a certain type of substance such as a pure mind.


Once we have a consciousness that our mind is already clean, we can't get away from the separatory consciousness, at the same time our consciousness will be divided again to lose peacefulness in our mind. Our effort to have pure mind and remove defiled mind will be nothing but creating a big root of lust and hatred.
 

When removing defiled mind, we have to say that we are going back to the original state of our body and mind.  ▲ 위로



[출처: 불교학연구 Vol.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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