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가바드기따』의 유신론적 업(karma) 해석에 대한 고찰
임승택 (경북대학교)
(철학연구 제109집, 대한철학회논문집, 2008년 2월)
▒ 목 차 ▒
[논문개요]
인도인의 철학적 여정에서 『바가바드기따』가 출현하기 이전의 업 관념은 대체로 무신론적 입장들과 친화적이었다. 예컨대 자이나교와 초기불교에서는 신의 존재를 요청하지 않고서 삶과 죽음의 문제를 해명해 들어갔다. 거기에는 인간 자신의 주체적․자존적 능력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는 업 관념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러한 사문 종교들의 실천적 경향은 한결같이 출세간적이었으며, 그러한 이유에서 일상적인 범부 중생의 삶을 포용하지 못하는 취약점을 안고 있었다. 바로 거기에 대응하여 등장한 『바가바드기따』에서는 유신론적 입장을 토대로 대중적인 구원의 메시지를 펼쳤다. 즉 스스로의 노력보다는 신에 대한 믿음과 은총을 통해 업의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점을 강조하였다. 사상사적 맥락에서, 이것은 신의 은총을 업의 문제에 적용한 최초의 구체적 사례가 된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러나 『바가바드기따』는 모든 행위의 근거를 신으로부터 찾는 과정에서 계급이나 신분의 차별마저 용인하는 치명적인 과오를 범한다. 또한 바로 그러한 이유에서 일반 민중들의 삶의 전면적으로 수용하지 못하는 한계를 노출한다. 결국 이 문헌은 특정 계급에 의한 지배 질서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기능했다는 비난의 표적이 되기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은 내용들을 중심으로, 본고는 『바가바드기따』에 나타나는 유신론적 업 해석의 긍정적․부정적 측면들에 대해 고찰해 보았다.
주제분야: 인도철학, 초기불교, 서사시 문학
주제어: 업(業, karman), 신애의 요가(bhakti-yoga), 행위의 요가(karma-yoga), 지혜의 요가(jñāna-yoga), 은총(prasāda), 해탈(解脫, mokṣa)
1. 시작하는 말 ▲ 위로
이슬람의 역사학자 Al-Biruni(973-1048)가 지적했듯이, 업(業, karma, kamma) 개념은 거의 모든 인도종교에서 발견되는 전제라 할 수 있다.2) 인도에서 발생한 여러 종파 혹은 학파에서는 이것에 대한 독창적인 해석 속에서 자신들만의 고유한 종교적․철학적 입장을 분명히 하였다. 따라서 이 개념은 다양한 분파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필자는 선행 연구를 통해, 업이라는 용어를 인도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로 언급한 적이 있다.3)
또한 Rādhākrishnan이 지적하듯이, 업 개념은 인도철학의 골격을 이루는 여타의 주요 개념들과도 긴밀한 상관 관계에 있다.4) 예컨대 업의 논리를 현생의 삶 너머로까지 확대․적용하면 윤회(輪廻, saṃsāra)의 관념이 도출된다. 나아가 윤회의 속박을 벗어난 이상적 경지가 해탈(解脫, mokṣa)이고, 해탈을 달성하기 위한 실천 수단이 요가(yoga)이다. 이들 4가지는 고래로부터 현재에 이르기까지 인도철학사의 쟁점이 되어왔다. 이들 중에서도 업 개념은 그것 자체에 대한 해석 여부에 따라 나머지 다른 개념들의 내용 규정마저 달라지게 만드는 각별한 위치에 있다.5)
기존의 연구에서 필자는 『브라흐마나』 문헌의 제식주의에서부터 초기불교에 이르기까지의 업 개념의 생성 경로를 추적해 보았다.6) 최초의 제식주의에서는 미래의 삶과 연관된 제사의 집행과 관련하여 업에 관한 시원적 사고를 개시하였다. 『우빠니샤드』는 일상의 모든 행위가 과거와 미래의 삶에 연결된다는 방식으로 업 관념을 구체화하는 데에 기여했다. 한편 자이나교에서는 업을 물질입자로 이해하여 그것이 실재적으로 존재한다는 믿음을 확고히 정착시켰다. 이상의 논의를 비판적으로 계승한 초기불교에서는 업 개념을 내면적인 의도의 차원으로 확대․해석하여 제식주의라든가 금욕주의가 갖는 형식성을 극복하기에 이른다.
업 관념은 이상과 같이 점진적인 발달의 과정을 거쳤다. 그러나 Wilhelm Halbfass에 따르면, 이것에 대한 체계적 정교화(systematic elaboration)는 자이나교와 초기불교에 이르러 비로소 본격화되었다.7) 다시 말해서 그 이전까지는 업에 대한 논의가 특정 종교 혹은 문헌의 전체 영역을 담보하지 못한 채 단편적인 수준에서만 진행되었다. 그러나 자이나교와 초기불교는 그들만의 고유한 완결적 교리체계를 지녔고, 또한 업에 관련한 논의에 있어서도 그것에 부합하는 형태로 나아갔다. 따라서 이전의 모습과 구분되는 차별적인 논의를 전개할 수 있었다.
자이나교와 초기불교는 공히 사문(samaṇa) 전통에 속한 종교로서 무신론적 입장과 친화적이었다. 또한 그들의 업 해석은 “스스로 지은 업은 스스로에게 책임이 있다.”는 전제를 공유하였고, 그러한 맥락에서 초월적 절대자의 섭리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는 유사성을 지닌다. 바로 이점은 업에 관한 최초의 체계적 논의가 무신론적이었다는 사실을 의미한다. 특히 이러한 경향은 무신론적 관점에서 『브라흐마나』의 제식주의를 계승한 미망사(Mīmāṁsā) 학파를 통해 더욱 극명한 형태로 드러났다. 미망사에 따르면, 현상계의 전개에는 초월적 인격신이 개입될 여지가 없으며 정교한 제사의 실천과 그것에 따르는 냉정한 업의 법칙만이 작용할 뿐이었다.8)
그러나 초기불교 이후의 인도철학사는 유신론적 사고가 농후해지는 추세로 나아간다. 물론 일부에서는 여전히 무신론적 입장을 고수했지만, 요가(Yoga)․와이세시까(Vaiśeṣika)․니야야(Nyāya) 등을 비롯하여 Viśiṣṭādvaita(制限不二論)를 주창했던 Rāmānuja(A.D. 11세기)에 이르기까지, 이슈와라(Īśvara)라는 인격신의 존재를 수용하는 입장들이 차츰 대중적 영향력을 발휘하게 된다. 이들 유신론 학파들은 이미 만연해 있었던 업 관념을 무시할 수 없었고, 그러한 이유에서 자신들의 기본 신념 위에 그것을 결부시키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무신론적 입장에 친화적이었던 원래의 업 관념이 유신론 학파들에 의해 재해석․변용되는 계기를 맞게 된다.
본고는 이러한 철학사적 과정을 염두에 두고서 업 개념의 변화 양상에 대해 고찰하고자 한다. 특히 본고는 여러 유신론 학파들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바가바드기따(Bhagavadgīta)』에 일단의 초점을 모으고자 한다. 이 문헌에서 부각된 신애(bhakti)와 은총(prasāda)의 교의는 이후 전개된 유신론 사상들의 신학적 토대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바가바드기따』는 고래로부터 인도인의 종교적 감성을 대변해 주는 문헌으로 평가되고 있으며, 또한 힌두이즘의 결정체로까지 일컬어진다. 따라서 업 관념의 발달사적 과정을 추적하고자 하는 필자에게 이 문헌은 피해 나갈 수 없는 관문으로 느껴진다.
2. 유신론적 업 관념의 전개 ▲ 위로
주지하다시피, 『베다(Veda)』는 인도철학사 최고의 문헌(earliest literary)으로 간주된다.9) 이후 인도에서 등장한 모든 철학적․종교적 논의들은 『베다』의 가르침에 직․간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그러나 『베다』에는 유독 업에 관련한 언급이 나타나지 않으며, 또한 유사한 관념이 존재했다는 흔적도 없다.10) 따라서 William K. Mahony는 업 관념이 『베다』 문헌과는 별개로 성립되었을 가능성이 높다는 언급을 하였다.11)
『베다』 문헌의 주된 관심은 신들에 대한 찬미에 집중되는데, 이와 관련하여 Dasgupta는 이것의 특징적 사유를 다신론(polytheism)․단일신론(henotheism)․유일신론(monotheism)이라는 3가지로 집약하였다.12) 『베다』의 찬가를 지었던 현인들은 단순하고 소박한 방식으로 자연현상을 노래했고 그것의 이면에 감추어진 신비로움에 경의를 표했다. 즉 자연의 신비를 초인격적 존재의 권위와 능력에 연계하여 해석하였다. 『베다』 신관의 최종 형태라 할 수 있는 유일신론은 이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형성되었다. 『베다』의 현인들은 그러한 속에서 창조주(prajāpati)와 인간의 관계를 설정하였으며, 또한 그의 지배 아래에 인간의 운명을 귀속시켰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신에 대한 인간의 종속을 당연시하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그 결과 『리그베다』 후반부에는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어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타적 경향들이 농후하게 드러난다.13) 즉 『베다』의 시인들은 어떠한 바람이나 소원을 성취하는 데 있어서 자신의 노력보다는 신의 도움을 더욱 중요시하게 되었다. 바로 그러한 생각들은 “자신이 지은 행위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책임을 진다.”라는 업의 논리와 배치된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을 고려할 때, 유신론적 성격의 『베다』 문헌은 본래적인 특성상 업의 관념과 그 궤도를 달리했다고 말할 수 있다.
유신론적 사유는 인간 자신을 신의 도구로 만들 위험성을 내포하며, 스스로의 논리 내에서 행위의 주체에 관한 문제를 해결하기 어려운 난점으로 남긴다. 이점을 반영하듯이, 『베다』의 신들은 인간 위에 군림하면서 인간의 운명을 거머쥔 존재로 묘사된다. 즉 『베다』 시대의 인간들은 스스로의 판단에 의해 행위를 하면서도 그 결과에 대해서는 신의 도움과 관용에 의지하는 어중간한 입장을 취하였다. 『베다』 문헌에서 업 관념이 부각되지 못한 이유를 바로 여기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사고는 『베다』 이후에도 단절되지 않았으며, 오히려 후대에 이르러 대중적인 힌두교의 융성과 더불어 더욱 만연하였다.
그러나 인간의 주체적 능력에 대한 확신을 전제로 하는 업 관념은 유신론자들에게 풀기 어려운 난제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한 어려움을 대변하는 사례가 『베다』 직후 성립된 『브라흐마나』의 제식주의이다. 제식주의는 원래 신에 대한 공경과 숭배의 의례에서 기원하였다. 그러나 제사 행위의 형식적 측면이 강조되면서 공경의 대상이었던 신의 위상이 약화되기에 이른다. 즉 합당한 형식에 의해 집행된 제사는 신의 의지와 상관없이 상응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것으로 간주되었다.14) 이러한 과정을 걸치면서 인간 위에 군림하던 신의 위상은 인간의 행위 즉 업의 논리에 종속되고 만다. 결국 『브라흐마나』의 제식주의는 무신론으로 귀착된다.
따라서 업 관념과 유신론적 사고의 최초 만남은 후자의 붕괴로 끝났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브라흐마나』에 나타나는 원시적 형태의 업 관념 또한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이 사실이다. William K. Mahony가 언급했듯이, 제사라는 물리적․비인격적 체계는 제사를 수행하는 행위자의 ‘성스러운 의지(divine will)’를 반영하지 못했다.15) 즉 제사의 목적이라든가 의도보다는 거기에서 낭송된 주문이 제대로 발음되었는가의 여부가 더 중요하게 생각되었던 것이다. 나아가 “짓는 대로 받는다”는 업의 논리는 이미 저지른 행위에 대해서는 돌이킬 수 없다는 관념을 전제로 하였고, 그러한 이유에서 결정론적․숙명론적 사고로 이어질 위험성을 내포하였다. 이러한 내용은 초창기의 무신론적 업 해석이 갖는 난점으로서, 이것에 대한 재해석의 필요성을 야기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이상과 같은 실재론적 업 해석은 해탈과 구원의 가능성을 요원한 것으로 만드는 또 다른 문제를 발생시켰다. 즉 이미 지은 업은 반드시 그 효력을 발한다고 믿어졌고, 또한 그것을 상쇄하기 위해서는 그만큼의 대가가 요구된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사고의 전형적인 사례는 자이나교에서 찾을 수 있는데, 그들은 미세한 물질입자인 업의 속박을 제거하기 위해서는 그것에 상응하는 고행을 반드시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16) 그러나 이러한 사고는 전문 고행자가 아닌 대다수 범부들의 미래를 이미 결정된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가져왔다. 즉 출가 고행자가 아닌 이상 업의 속박을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여겨지게 되었다.
이러한 상황은 초기불교에 이르러 다소 완화되는 양상을 보였다고 할 수 있다. 즉 초기불교에서는 업을 내면적인 의도(cetāna)의 차원으로 해석하였고, 특히 마음으로 짓는 업(manokamma)을 중요하게 생각하였다.17) 이러한 의도 중심의 업 해석은 『브라흐마나』의 제식주의라든가 자이나교의 금욕주의에서 시도된 업 이해의 형식적 폐쇄성을 넘어선 것이라는 점에서 중대한 의미를 지닌다. 즉 인식의 전환을 통해 현재의 삶 안에서 궁극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연 것이다. 이러한 초기불교의 업 이해는 계급이나 신분 혹은 직업이나 성별에 구애됨이 없는 보편적 구원의 희망을 제공했다고 할 수 있다.
초기불교에서는 완고한 카스트(caste) 제도에 맞서 천민이나 여성들까지도 아라한(arhant)이라는 궁극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고 가르쳤다. 거기에는 바로 이러한 업 이해가 전제되어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진전에도 불구하고 그 가르침이 대중화에 완전히 성공했다고 보기에는 문제가 있다. 업의 결과로서 주어진 현실 삶을 일종의 조건(緣, paccaya)으로 파악하여 개인적인 노력과 의지의 개입 가능성을 부각시킨 점은 분명 업적으로 꼽을 수 있다.18) 그러나 초기불교의 전반적인 경향이 출세간 지향적이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Lily de Silva가 지적하듯이, 궁극의 구원 즉 아라한의 실현 가능성을 출가자로 제한하였던 것이다.19) 바로 그 점에서 초기불교는 범부의 일상적 삶을 전면적으로 포용해 내지 못하는 취약점을 노출한다.
바로 그러한 상황에서 『바가바드기따』(이하 『기따』)는 신의 은총을 통한 대중적 구원의 메시지를 펼쳤다. “나에게 귀의하면 미천한 태생, 여자, 바이샤, 수드라라고 할지라도 지고의 경지에 도달한다. (9장 32절)”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 내용은 『베다』 이래의 유신론적 사유를 계승한 것으로, 이후의 인도철학사에서 유신론의 화려한 부활을 예고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모든 의무를 포기하고 나를 유일한 귀의처로 삼아라. 나는 그대를 모든 악에서 해방시킬 것이다. 슬퍼하지 말라. (18장 66절)”라는 유명한 경구 또한 동일한 맥락이다. 이러한 가르침과 더불어 나약하고 죄 많은 범부 중생들은 신의 존재에 대한 자각과 더불어 스스로에 대한 구원의 희망을 갖게 되었다.
일반적으로 『기따』는 인격적 절대자에 대한 믿음과 은총의 교의를 중심으로 기존의 여러 가르침을 종합한 문헌으로 평가된다. 또한 그러한 맥락에서 의무(sarva-dharma)의 실천보다 신에 대한 귀의가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강조한다.20) 이것은 신의 은총만이 최종적인 중요성을 지닌다는 것으로, 일견 업 관념의 부정 혹은 무력화를 겨냥한 것으로 보일 수 있다. 그러나 이 문헌은 신의 은총이 무조건적인 것만은 아니라고 가르쳤다. 예컨대 신애(bhakti)의 수행자들은 신으로부터 사랑을 받을 만한 장점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는 내용이 나타난다.21) 바로 이것은 인간적인 노력과 실천의 필요성을 인정한 것으로, 유신론적 사고와 업 관념에 대한 융합의 시도로 이해할 수 있다.
Wilhelm Halbfass가 지적하듯이, 인격신을 인정했던 대부분의 유파에서는 신 스스로가 업의 법칙을 준수한다고 생각했던 듯하다.22) 그러나 그러한 입장의 이면에는 스스로의 의지에 따라 업의 효력을 강화시킬 수도 있고 상쇄시킬 수도 있는 초월적 인격신에 대한 믿음이 전제되어 있었다고 보는 것이 옳을 듯하다. 심지어 일부에서는 궁극의 목적인 해탈이 신에 대한 ‘인간의 믿음(bhakti)’으로부터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신의 은총(prasāda)’ 자체에 의해 주어진다는 언급으로까지 나아갔다.23) 그들에 따르면 개아의 해탈은 전적으로 신의 은총에 따른 선물일 뿐이다.
구원의 문제를 둘러싼 이러한 논의들은 『기따』 이후 형성된 유신론 학파들에서 주요 이슈가 되었다. 그러나 그들은 이미 『베다』의 사례를 통해 신에 대한 배타적이고 이기적인 의존성이 야기하는 문제점을 간파하고 있었다. 또한 신이 사랑의 신일 뿐만 아니라 정의의 신이라는 점도 간과하지 않았다. 나아가 신의 은총은 누구에게나 공평하게 내려지지만 이것을 받기 위해서는 노력과 책임이 뒤따라야 한다는 생각도 건재하였다. 즉 해탈은 신의 은총에 의한 선물이지만 준비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무의미한 선물일 수 있다는 것이다. 특히 Rāmānuja에게서 두드러진 이러한 관념들은 『기따』에 토대를 둔 것으로, 유신론의 지평 위에 정착된 업 해석의 전형적 면모를 보여준다고 할 수 있다.24)
3.『바가바드기따』의 업 해석 ▲ 위로
『기따』는 서사시 문학 시대에 속한 전형적 문헌으로 꼽힌다. 서사시 문학 시대란 B.C. 4세기 무렵에 일단락 된 『우빠니샤드』와 A.D. 2-3세기 이후부터 본격화된 힌두 철학(六派哲學) 사이에 배속된 시기를 일컫는다. 이들 서사시 문헌은 『베다』 문화의 바탕 위에서 비베다적인 종교 관념들을 수용하는 일반적 양상을 보였다. 이들로 인해 아리안족에 한정되었던 고대 바라문 문화는 인도사회에서 대중적인 확산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배타적이었던 바라문교는 힌두교라는 포용적 종교로 탈바꿈하게 되었다고 할 수 있다.
업의 해석과 관련하여 『기따』가 지닐 수 있는 의의는 2가지로 압축해 볼 수 있다. 첫째, 여기에는 개개인이 짓는 업 즉 행위의 내용 규정과 관련하여 기존의 바라문교 계통 문헌에서는 찾아 볼 수 없는 사색이 나타난다. 즉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행위의 형식보다는 행위의 내용과 의도를 중요시하는 경향이 현저해진다.25) 둘째, 이 문헌은 그러한 개인의 행위(karma-yoga)를 신에 대한 믿음(bhakti-yoga)의 문제와 연계시킨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이것은 유신론적 사고와 업 관념의 공존 가능성을 의미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크다. 또한 이 문헌에는 그러한 공존의 구체적 사례와 함께 그것의 근거에 관한 모색이 나타난다.
행위의 내용 규정에 관련한 『기따』의 문제 의식은 선한 행위를 포함한 일체의 행위가 과보(vipāka)를 야기한다는 데에 있다. 이것은 “짓는 대로 받는다”는 업 개념의 기본 모토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선과 악을 불문하고 일체의 행위가 과보를 가져올 수 있다는 것은 해탈을 위한 시도마저 부적절한 것으로 만들 위험이 있다. 즉 해탈을 위해 새로운 행위를 짓지 않으려 노력하는 것 자체가 또 하나의 업이 될 수 있다. 예컨대 일체의 행위를 포기하는 가장 확실한 방법 중의 하나로는 자살이 고려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살 자체는 결코 찬양될 수 없는 죄악이며, 그러한 의미에서 새로운 다른 업을 남기는 것일 수밖에 없다. William K. Mahony가 지적하듯이, 『기따』는 이러한 문제를 충분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26)
『기따』를 처음 접하는 사람들은 이 문헌이 고요한 명상의 상태만을 높이 평가하는 것으로 오해할 수도 있다. 사실 『기따』에는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모두를 버리고서 내면의 평정을 회복하라는 가르침도 적지 않게 나타난다. 예컨대 “지혜로써 수련된 자는 이 세상에서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양쪽을 다 버린다. (2장 50절)”는 언급이라든가, “거북이가 사방으로부터 사지를 거두어들이듯, 감각대상으로부터 감관을 [거두어들일 때], 그의 지혜는 확고히 선다. (2장 58절)”는 가르침이 그것이다. 이들은 해탈의 성취를 위해 선․악을 불문하고 일체의 행위를 포기하라는 의미로 해석될 여지를 남긴다.
그러나 『기따』의 주된 입장은 행위의 완전한 포기가 가능하지 않다는 데에 있다. 오히려 본성에 따른 행위는 마땅히 수행해야 한다고 적극 권장한다. “그대는 부과된 행위를 행하라. 행위는 행위하지 않는 것보다 낫다. 행위하지 않고서는 그대의 신체를 부양하기도 어려울 것이다. (3장 8절)”는 문구라든가, “어느 누구라도 행위하지 않고는 한 순간도 있을 수 없다. 또한 모든 것은 본성적으로 타고난 덕성에 의해서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행위를 하도록 되어있다. (3장 5절)”는 언급이 그것이다. 이들 구절은 인간 존재가 행위와 뗄 수 없는 관계에 있는 것임을 명확히 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선한 행위와 악한 행위 양쪽을 버려라”는 가르침과 “행위하지 않는 것보다 행위가 낫다”는 가르침은 분명 모순되어 보인다. 그러나 『기따』에서는 각각의 행위가 지닌 세부적 특성을 구분함으로써 이러한 모순을 헤쳐나간다. “집착을 제거하고서 애욕과 증오 없이 행한 절제된 행위는 순수하다. (18장 23절)”라는 언급을 비롯하여, “지혜로써 수련된 현명한 사람들은 행위로부터 생겨난 결과를 포기하여 환생의 속박을 벗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한다. (2장 51절)”는 가르침이 그러한 맥락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행위 자체가 단순하게 부정의 대상이 될 수 없다는 사실을 분명히 한다. 즉 모든 행위를 일반화하여 업에 의한 속박과 동일하게 결부시켜서는 안 된다는 점을 나타내고 있다.
이러한 사고의 연장선에서 『기따』는 특정한 행위와 관련하여 개인적인 선호 여부를 개입시키지 말라고 가르친다. 즉 의무로서 주어진 직무에 대해서는 성실하게 수행하되, 거기에 대해 좋아하거나 싫어하는 감정을 개입시키지 않으면 과보가 발생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무를 성취하는 것보다 낫다. (2장 35절)”는 문구라든가, “집착을 버리고 성공과 실패를 평등하게 여기고 [행위를 하라.] 평등성을 요가라고 한다. (2장 48절)”는 언급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용들은 『기따』의 업 이해가 행위 자체가 아닌 행위의 내용과 동기에 역점을 둔 것임을 분명히 해준다.
한편『기따』에서는 이러한 가르침의 근거를 고유의 신학적 입장에서 찾는다. 아래의 경구는 행위의 근거를 신성한 브라흐만으로부터 구한다는 점에서 매우 주목할만하다.
행위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생겨난 것이고 브라흐만은 불멸하는 것으로부터 생겨난 것임을 알라. 그러므로 모든 곳에 존재하는 브라흐만은 언제나 [행위의] 제사에 머물러 있다. (karma brahmodbhavaṁ viddhi brahmā ’kṣarasamudbhavam. tasmāt sarvagataṁ brahma nityaṁ yajñe pratiṣṭhitam; 3장 15절)
이와 같이 인간의 행위는 브라흐만으로부터 유래한다. 따라서 각 개인은 자신에게 주어진 그것을 성실히 수행해야 한다. 예컨대 바라문은 제사를 수행해야 하고, 군인은 전쟁터에 나가 싸워야 하며, 상인들은 사업을 수행해야 한다.27) 이들 의무 행위는 신의 명령에 의해 수행되는 것이며, 바로 그렇기 때문에 죄악으로 간주되지 않고 재생으로 이어지지도 않는다.28) 바로 이러한 내용은 유신론적 가르침과 업 관념을 상보적 관계로 이해할 수 있는 근거를 제공한다고 할 수 있다.
『기따』 이전의 인도철학사에서 행위의 과보에 관한 논의의 일반적 양상은 행위 주체의 자존적 능력을 부각시키는 방향으로 나아가곤 하였다. 그리하여 행위 주체와 분리된 상태에 있는 것으로 믿어지는 신의 존립 근거를 약화시키는 쪽으로 기울었다. 『브라흐마나』의 제식주의라든가 자이나교 및 초기불교 등의 사례가 그것이다. 그러나 『기따』에서는 인간에게 요구되는 행위 자체를 신의 명령으로 해석하였고, 또한 바로 그것을 통해 업의 문제에 관한 유신론적 접근의 가능성을 열었다. 이것은 행위의 실천이 단순하게 신의 호의를 얻기 위한 목적에서가 아니라 신의 존재 자체에서 기인하는 것임을 나타낸다는 점에서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다음에서 인용하는 구절들 역시 그러한 입장에 기초하여 설해진 전형적인 가르침들이라 할 수 있다.
모든 행위를 나에게 맡기고 지고의 자아에 대한 일념으로 바람도 이기심도 없이 [개인적인] 열정을 버린 자로서 싸워라. 나의 이 가르침을 항상 신뢰하며 불평하지 않고 따르는 사람은 반드시 행위로부터 해방된다. (3장 30절, 31절)
내 안에서 모든 행위를 포기하고, 나를 최고로 [여기며], 오로지 요가에 전념하여, 나에 대해 명상하고 공경하는 자들, 나에게 마음이 몰입된 자들에게, 나는 머지않아 죽음과 윤회의 바다로부터 [그들을 구제하는] 구제자가 될 것이다. (12장 6절, 7절)
이렇게 해서 개개인은 자신의 행위 속에서 신의 은총을 감지하고 또한 해탈의 가능성을 보게 된다. 즉 행위의 내용과 동기에 주목함으로써 제식주의라든가 고행주의에서 드러났던 형식성을 탈피함은 물론, 브라흐만 자체로부터 행위의 정당성을 확보해 내기에 이른 것이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업 개념은 신의 은총이라는 교리와 공존할 수 있는 건실한 여건을 마련하게 되었다. 또한 그 결과로서 경제적․신분적 제약에 아래에 갇혀 있었던 일반 대중들은 신의 은총에 의해 궁극의 구원에 이를 수 있는 존재로 거듭나게 되었다. 이상의 논의를 바탕으로, 필자는 『기따』에서 시도된 업 관념과 유신론적 사고의 만남이 일단 성공을 거두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과연 그것이 완결적이었던가에 대해서는 아직 논의의 여지가 많다.
4.『바가바드기따』 업 이해의 문제점 ▲ 위로
주지하다시피, 『기따』는 궁극의 구원에 도달할 수 있는 여러 가능성을 인정한다. 이 문헌에 제시되는 구원의 방법은 흔히 ‘信愛의 요가(bhakti-yoga)’․‘행위의 요가(karma-yoga)’․‘지혜의 요가(jñāna-yoga)’라는 3가지로 집약된다. 이들 3종 요가는 개개인이 지닌 이질적 성향에 부응하는 것으로, 조화로운 삶을 위해 균형 있게 실천되어야 하는 것으로 권장되곤 한다.29) 또한 이 문헌에는 각각의 요가를 상호 보완적인 관계로 엮는 듯한 대목들이 나타난다. 즉 앞에서 보았듯이, ‘신애의 요가’를 ‘행위의 요가’에 결부시키는가 하면 ‘행위의 요가’를 ‘지혜의 요가’에 일치시키기도 한다.30)
그러나 『기따』에 대해서는 논리적 일관성이 결여되어 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그것은 배경을 달리하는 여러 학파의 형이상학적 입장들이 일관된 체계 없이 수용되고 있다는 사실에서 비롯한다. 예컨대 ‘지혜의 요가’는 상키야의 이원론적 형이상학과 『우빠니샤드』의 일원론적 형이상학 사이를 배회하는 모습을 노출한다. 즉 “밭(kṣetra)과 밭을 아는 자(kṣetrajña)에 관한 지식이 [참된] 지식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13장 2절)”는 구절은 상키야 학파의 이원론적 형이상학을 반영하고 있다. 그러나 “존재하는 각각의 것이 [실로] 하나이며 그것으로부터 확장된 것임을 알면 브라흐만에 이른다. (13장 30절)”는 구절은 『우빠니샤드』의 일원론을 연상케 한다.
상키야 및 『우빠니샤드』의 형이상학적 실재는 인간적인 감성과 정서를 지니지 않는다는 점에서 공통적인 면모를 지닌다. 양자는 현상세계의 전개와 운행 과정에 직접적으로 개입하지 않으며 초월적 방관자 혹은 궁극의 목적으로 기능한다. 그러나 이러한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거기에는 이원론과 일원론이라는 입장의 차이가 존재한다. 따라서 이들에 대해서는 동일한 존재로 취급하기 힘들다. 특히 업의 문제를 행위의 책임 소재에 관련한 논의로 확대할 경우, 상키야와 『우빠니샤드』의 형이상학은 상반된 입장을 지닌 것으로 판명된다.31) 그러나 『기따』에는 이러한 차이에 관한 문제 의식이 나타나지 않는다. 바로 이점은 논리적 일관성이라는 측면에서 노출되는 중대 취약점으로 꼽지 않을 수 없다.
또한 상키야와 『우빠니샤드』를 반영하는 대목에서의 궁극의 실재는 비인격적․초인격적 존재로 묘사되는 반면에, 다른 대부분의 구절들에 나타나는 절대자의 모습은 인간적인 감정과 정서를 지닌 존재로 나타난다. 특히 ‘신애의 요가’를 강조하는 대목에서의 절대자는 전형적인 인격신의 면모를 보인다. “정의가 쇠퇴하고 불의가 범람할 때마다 나는 내 자신을 나타낸다. (4장 7절)”라든가, “마음과 생각을 바쳐 나에게 귀의한 자는 내게 있어 사랑스러운 자이다. (12장 14절)”는 구절이 그것이다. 이러한 내용은 세계의 운행과 인간의 삶에 적극 관여하는 주재자로서의 신을 묘사한 것으로, 상키야 및 『우빠니샤드』의 형이상학적 분위기와 완전히 이질적이다.
물론 『기따』에 대해서는 일관된 맥락에서 그 중심 사상을 이해해 보려는 시도들이 예로부터 존재해 왔다.32) 특히 이와 관련해서는 유신론적 관점에서 이질적인 형이상학적 실재들을 통합하려는 움직임이 두드러졌다고 할 수 있다.33) 개체적 자아(ātman) 위에 최고아(puruṣottama, adhyātman)를 상정하고 그 최고아를 인격신(Kṛṣṇa)과 동격으로 파악한 경우라든가,34) 물질원리(prakṛti)를 낮은 것(aparā)과 높은 것(parā) 것으로 나누고 다시 그 위에 인격신(kṛṣṇa)을 상정하는 경우는 그러한 시도들의 주요 근거가 되었다.35) 그러나 그러한 측면들만이 강조되면 ‘행위의 요가’라든가 ‘지혜의 요가’는 ‘신애의 요가’에 완전히 귀속되어 버리는 상황이 발생한다. 다시 말해서 3종 요가의 포용적 가르침은 ‘신애의 요가’를 강조하기 위한 예비적 장치에 불과한 것으로 전락하게 된다.
이러한 해석에 반발하여, 일부에서는 ‘신애의 요가’ 이외의 항목들에 대해서도 독자적인 존립 가능성을 주장한다.36) 즉 『기따』는 수세기에 걸쳐 전해져 내려온 이질적인 사상들을 취합한 문헌인 까닭에 거기에 나타나는 각각의 측면들에 대해서는 그 독자성을 인정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사실 신의 은총만이 일변도로 강조되게 되면 개개인의 노력과 실천의 필요성은 간과되기 쉽다. 또한 그렇게 되면 업 관념은 다시 희미해 질 수밖에 없고 이상에서 논의한 유신론과 업 개념의 공존 가능성 또한 사라지게 된다. 이점을 고려하면 이 문헌의 비일관적 특성이 오히려 장점으로 거론될 상황이다. 그러나 이러한 장점이란 『기따』의 포용성이 맥락 없이 취합된 잡다한 견해들의 기계적 조합에 불과한 것이라는 사실만을 확인시켜 줄뿐이다.
한편 『기따』에는 사성제(Caste)의 계급제도를 옹호하는 대목들이 나타난다. 바로 이점은 이 문헌이 지닌 나름의 사상적․종교적 탁월성에도 불구하고 사회적 평등이라는 측면에서 드러내는 결정적인 취약점으로 지적된다.37) 예컨대 “브라흐마, 끄샤뜨리야, 바이샤, 수드라 등의 행위는,...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덕성에 의해 구분되었다. (18장 41절)”라는 구절이라든가, “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무를 성취하는 것보다 낫다. 본성적으로 정해진 행위를 하면 죄과를 얻지 않는다. (2장 35절)”는 언급이 그것이다. 이들 내용은 불평등한 바라문교의 사회윤리와 궤도를 같이하는 것으로, 이 문헌의 결정적인 한계를 드러내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사성제의 계급제도는 인간의 귀천이 태생에 의해 결정된다는 것으로, 현실의 불평등을 그대로 수용케 한다는 점에 문제가 있다. 특히 “나는 [개개인이 지닌] 덕성(guṇa)과 업(karma)에 따라 사성제의 계급제도(cāturvarṇya)를 만들었다. (4장 13절)”는 따위의 구절은 인도사회 최대의 고질적 폐단이라 할 수 있는 계급제도가 신 자신으로부터 유래했다는 사실을 고백하는 것이다. 바로 이러한 가르침을 통해 바라문들은 스스로에 의한 계급적 지배를 합리화하는 근거를 확보했다고 할 수 있다. 길희성 교수가 지적하듯이, 이러한 방식으로 개개인의 업(karma)이 사성제에 결부되면 현재의 불평등은 과거에 지은 행위의 결과로서 정당화된다. 즉 정의와 평등은 주어진 현실 속에서 이미 구현된 것으로 인식되기에 이르고 개혁에 대한 의지는 감퇴할 수밖에 없다.38)
사실 모든 인간이 동일한 환경과 능력을 지니는 것은 아니며, 그러한 이유에서 태생(jāti)에 의한 차이를 원천적으로 부정할 수 없는 문제이다. 예컨대 좋은 집안에 태어난 경우라든가 천부적 재능을 가진 사람들의 경우는 얼마든지 존재한다. 업이라든가 신의 존재는 바로 그러한 천부적 차이를 건전한 방향으로 해명하는 데에 적절히 활용될 수 있다. 그리하여 분수에 맞는 성실한 삶의 자세를 갖도록 하는 데에 도움이 될 수도 있다. 그러나 이것이 고착화된 지배 이데올로기로 둔갑할 경우에는 대다수 인간에 대한 폭력적 억압 수단이 된다. 이와 관련하여 Ambedkar가 업 개념을 재생이나 윤회와 관련하여 해석하는 것에 대해 사기(jugglery)라고 혹평했던 사실을 유념해 둘 필요가 있다.39)
그러나 유감스럽게도 『기따』는 바로 이러한 취약점을 그대로 노출한다. 더욱이 인도철학사에는 『기따』 이전부터 업과 윤회의 상관성을 언급하면서도 그것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악용하지 않았던 사례가 이미 존재해 있었다. 예컨대 “악한 업을 지었다고 하더라도 선한 행위로써 [그것을] 차단하면 그는 구름으로부터 벗어난 달과 같이 세상을 비춘다. (MN. II. 140쪽)”라는 내용을 비롯하여, “태생(jāccā)에 의해 바라문이 되는 것이 아니며 태생에 의해 비바라문이 되는 것도 아니다. 행위(kammanā)에 의해 바라문도 되고 행위에 의해 비바라문도 된다. (Sn. 게송 650)”라는 게송을 노래한 초기불교가 그것이다. 이러한 가르침들은 천부적인 불평등을 계급질서와 연계시켜 해석한 『기따』의 그것과 극명한 대조를 이룬다고 할 수 있다.
물론 『기따』에도 이상적인 경지로서 ‘평등(samaya, samatvā, samatā)’이라는 술어가 여러 곳에서 나타난다.40) 그리고 이러한 평등성은 개별 존재의 구분의식을 벗어나도록 유도하는 측면이 없지 않다. 따라서 일부에서는 『기따』에서의 카스트 구분이 본래적인 것이 아니라는 주장을 펼치기도 한다.41) 그러나 길희성 교수의 지적을 다시 인용하자면, 그들 용어는 내면의 정신적 평정(śanti) 상태를 의미할 뿐으로 도덕적 사회적 평등성의 개념과는 거리가 있다.42) 즉 『기따』의 전체 줄거리는 태생에 의해 주어진 계급적 의무를 평정된 의식으로 성실히 수행하라는 것이며,43) 바로 그러한 속에서 죄를 벗어나 구원에 이를 수 있다는 것으로 집약된다.44) 이러한 내용을 감안하면 『기따』에서 사회적 평등에 관한 관념을 기대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기따』의 최종 편찬 연대는 초기불교 이후이다. 일반적으로 이 문헌은 초기불교에서 나타나는 사상적 성취를 적절히 수용하면서 힌두교의 대중화라는 작업을 성공적으로 수행해 낸 것으로 평가된다. 그러나 신의 사랑에 도취된 민중들로 하여금 현세적 속박과 불평등에 대한 의식을 무디게 했다는 비판이 가능하다. 사실 중세 이후 인도에는 수많은 성자들이 출현하여 열렬한 ‘신애의 요가’를 실천하였다. 그리고 그들 중에는 여자들을 비롯하여 천한 신분의 사람들과 수드라 등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들이 전개한 ‘신애의 요가’는 결코 카스트의 타파라는 적극적 방식의 사회 개혁으로 이어지지 못했다.
『기따』는 행위 즉 업의 논리를 신의 은총과 관련시켜 공론화 시켰고, 또한 양자를 상보적 관점에서 바라보게 했다는 점에서 그 공로를 인정할 수 있다. 그러나 절대적 존재의 성격에 관련하여 일관된 체계를 형성하지 못했다는 일차적인 취약점을 노출한다. 나아가 행위의 근거를 신에게서 구하는 과정에서 신분의 차별마저 용인하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야기한다. 바로 이점은 업 개념을 미래지향적으로 해석한 초기불교가 태생에 의한 계급의 차별에 적극 반대했다는 사실과 선명한 대조를 이룬다. 결국 이 문헌에 나타나는 포용적 분위기는 특정 계급에 의한 사회적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으로 악용된 측면이 없지 않다. 또한 이점은 대부분의 유신론적 힌두 학파들의 업 관념이 현실 삶의 고통을 감내하도록 유도하는 수구적 관점을 취했다는 사실과도 궤도를 같이하는 것이다.
5. 마치는 말 ▲ 위로
업 개념을 둘러 싼 제반 논의는 인도철학사에서 다양한 분파적 발전의 원동력이 되었다. 필자는 본고를 통해 무신론적 입장에 친화적이었던 원래의 업 관념이 유신론 학파들에 의해 재해석되는 계기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그리하여 『바가바드기따』를 중심으로 그것의 구체적 양상에 대해 조명해 보았다. 이 문헌에서 부각된 신애(bhakti)와 은총(prasāda)의 교의는 후대의 여러 유신론적 학파들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까닭이다.
2장에서는 인도철학사의 진행에 비추어 업 관념의 추이에 대해 살펴보았다. 최초로 등장했던 『베다』 문헌에서는 유신론적 분위기가 지배적이었다. 거기에는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어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하고자 하는 의타적 경향들이 나타난다. 그러한 경향은 “자신이 행한 행위에 대해서는 그 자신이 책임을 진다.”는 업의 논리와 배치된다. 이후 『베다』의 계보를 잇는 『브라흐마나』 문헌은 제식주의라는 독특한 방식으로 인간 행위의 적극적 측면을 강조하게 된다. 그러나 이러한 강조는 업 관념 자체의 형성에는 긍정적인 역할을 했지만, 신의 위상을 인간의 제사 행위에 종속시키는 아이러니를 연출한다.
『브라흐마나』 이후의 업 해석은 무신론적 입장을 지닌 학파들에 의해 주도된다. 이 개념을 주체적․비결정론적 입장에서 바라 본 자이나교와 초기불교가 그 전형이다. 그러나 자이나교에서는 업 개념을 지나치게 실재론적으로 이해하여 업으로부터의 해탈 가능성을 요원한 것으로 만드는 결과를 초래하였다. 한편 초기불교는 업을 내면적인 의도의 차원으로 해석하여 현재의 삶 안에서도 궁극의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열었다. 그러나 초기불교 역시 출세간적인 경향이 농후했던 까닭에 일상적인 범부 중생의 삶을 포용해 내지 못하는 취약점을 노출한다.
그러한 상황에서 등장한 『기따』는 신의 은총을 통한 대중적 구원의 메시지를 펼쳤고, 바로 그러한 점에서 나름의 성과를 이루었다. 3장에서는 바로 이 문헌에 나타나는 업 해석의 구체적 내용에 대해 살펴보았다. 『기따』는 『베다』를 정점으로 하는 바라문교의 맥락을 이으면서도, 초기불교의 가르침을 수용하여 행위의 내용과 의도를 중요시하는 경향을 드러낸다. 나아가 행위의 근거를 신성한 브라흐만에 두고서 개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직분에 맞는 행위를 성실히 수행할 것을 권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이 문헌은 업의 논리와 신의 관념을 상보적 관점에서 엮어 낸다.
그러나 『기따』의 유신론적 업 해석이 과연 완결적이었던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많다. 4장에서는 이 문제를 집중적으로 다루었다. 이 문헌은 업의 논리를 신의 은총과 일치시켜 공론화 했다는 점에서 나름의 진전을 이루어 냈다. 그러나 배경을 달리하는 여러 학파의 형이상학적 입장을 일관된 체계 없이 수용하고 있다는 점에서 일차적인 문제점을 노출한다. 나아가 행위의 근거를 신에게서 구하는 과정에서 계급의 차별마저 용인하는 결정적인 문제점을 발생시킨다. 이러한 사실은 이 문헌에 나타나는 포용적 분위기가 특정 계급에 의한 사회 지배를 강화하기 위한 수단에 불과했다는 비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하다.
업 관념을 과거 지향적으로 해석해 들어가면 지배 계급에 의한 억압의 이데올로기로 변질되기 쉽다. 태생에 의한 신분의 차별은 과거의 삶에서 지은 업의 결과인 까닭에 그대로 감수해야 한다는 논리가 그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지배 이데올로기로 악용하지 않았던 사례 또한 존재한다. 이 개념을 미래 지향적 관점에서 추구해 들어간 초기불교와 자이나교가 그것이다. 이들은 업 관념이 현실 삶의 변화를 위한 원리로 해석될 수 있다는 실증적 사례를 제공해 준다. 바로 이들의 존재는 『기따』의 유신론적 업 해석에 심각한 부담이 아닐 수 없다.
중세 이후 인도철학사는 유신론적 사고가 농후해 졌으며, 수많은 시인과 성자들이 출현하여 열렬한 ‘신애의 요가’를 펼쳤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고질적인 계급 제도의 문제에 대해 소극적 자세로 일관하였거나 혹은 침묵하였다. 바로 거기에는 이 문헌으로부터 드리워진 부정적 그림자가 존재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만큼 이 문헌은 중세 이래의 힌두교에 많은 영향을 끼친 것이다. 결론적으로 『기따』의 업 관념은 대중적 측면에서는 얼마간의 성공을 거두었지만, 내용적 측면에서는 이전 시대에 논의되었던 수준을 넘어서지 못한 것으로 최종 평가할 수 있겠다.
**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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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On the Theistic Idea of Karma in Bhagavadgīta
Lim, Seung Taek
The early interpretations about karma in the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showed the tendencies to be familiar with the atheism. But as time went by, many schools have transferred to the theistic standpoints. Especially Bhagavadgīta was the driving force in these changes. This text has given a great number of Indian the hopeful message that all human can get the salvation from the redemption of karma by the grace of God. I think this is the reason why Bhagavadgīta was so widely supported by the general public. And it also can be said that Bhagavadgīta has got the important academic achievements in which the theory of karma is associated with the tenet of God. But regretfully, it is true that Bhagavadgīta has defended the caste system (cāturvarṇya) which has become the target of criticism, and has regarded as the obstacle to the social development in India. Centering around these topics, I have tried to shed light on the idea of karma in Bhagavadgīta.
Key word: karman, bhakti-yoga, karma-yoga, jñāna-yoga, prasāda, mokṣ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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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 논문은 2007년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신진교수연구지원사업에 의하여 연구되었음. (KRF-2006-332-A00087)
2) Wilhelm Halbfass, “Karma and Rebirth, Indian Conceptions of” (1998), 209쪽 재인용; 임승택, 「업(karma) 개념의 형성과 발달 과정에 대한 고찰」 (2007), 154쪽 재인용.
3) 임승택, 앞의 논문, 152-153쪽.
4) 이거룡 옮김, Rādhākrishnan 지음, 『인도철학사』 1권, 334-349쪽; 임승택, 앞의 논문, 152쪽.
5) 예컨대 업을 물리적 법칙으로 이해하게 되면, 윤회의 세계는 실재론(realism)의 그것이 된다. 반면에 심리적 차원에서 접근해 들어가면 윤회는 주관주의(subjectivism) 혹은 유심론(idealism)의 맥락에서 이해될 수 있다. 실제로 자이나교(Jainism) 등에서는 업을 객관적 물질입자(pudgala)로 이해한 까닭에 윤회의 세계 또한 소박실재론(naive realism)의 관점에서 바라보았다. 즉 윤회하는 세계를 객관적 실재로 이해한 것이다. 반면에 초기불교라든가 상까라(Śaṅkara)의 입장에 따르면, 윤회는 개개인의 무지(無明, avidya)에 근거한 것으로 극복의 대상이 된다. 임승택, 앞의 논문, 167-175쪽 참조.
6) 임승택, 앞의 논문, 169-175쪽 참조.
7) Wilhelm Halbfass, 앞의 논문, 209쪽.
8) William K. Mahony, “Karman” (1981), 262쪽.
9) Surendranath Dasgupta, A History of Indian Philosophy, vol.1. (1969) 10쪽.
10) Wendy Doniger O'Flaherty, “Karma and Rebirth in the Vedas and Purāṇas” (1983), 3쪽.
11) William K. Mahony, 앞의 논문, 262쪽; Wilhelm Halbfass, 앞의 논문, 209쪽; 임승택, 앞의 논문, 158쪽 재인용.
12) Surendranath Dasgupta, 앞의 책, 17쪽 이하 참조.
13) 다음의 찬가는 초월적 존재의 힘을 빌어 현실적 어려움을 극복한다는 내용의 전형으로 꼽을 수 있다; 나를 같은 또래의 무리들 중 황소가 되게 하고, 경쟁자를 이기는 자, 적을 격멸하는 자가 되게 하고, 지배자, 암소의 주인이 되게 하소서..... 나는 경쟁자를 격멸하는 자이니..... 바차스빠띠여, 그들이 나보다 뛰어난 말을 하지 못하도록 그들을 억누르소서... (Ṛg Veda, X. 166)” 정승석 편역, 『리그베다』 (1984), 323쪽 인용.
14) 임승택, 앞의 논문, 158-162쪽.
15) William K. Mahony, 앞의 논문, 262쪽; 임승택, 앞의 논문, 161쪽.
16) 임승택, 앞의 논문, 167-169쪽.
17) 임승택, 앞의 논문, 169-175쪽 참조.
18) 임승택, 앞의 논문, 153쪽, 173쪽 등.
19) Lily de Silva, Nibbāna As Living Experience, 8쪽.
20) 예컨대 앞에서 언급한 다음의 구절이 그것이다: 모든 의무를 포기하고 나를 유일한 귀의처로 삼아라. (sarvadharmān parityajya mām ekaṁ śaraṇaṁ vraja; 18장 66절) 그러나 『기따』에서 시도된 기존의 여러 가르침들에 대한 종합이 과연 성공적이었는지에 관해서는 논의의 여지가 많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본고의 4장에서 구체적으로 다루기로 한다.
21) 예컨대 다음의 구절들이 그것이다: 항상 만족하는 요가행자, 자신을 제어하고 굳건한 결심을 지닌 자, 마음과 생각을 바쳐 나에게 귀의한 자는 내게 있어 사랑스러운 자이다. (12장 14절); 세인이 두려워하지 않으며, 세인으로 인해 두려워하지 않으며, 환희․불쾌․공포․동요로부터 해방된 자가 내게 있어 사랑스러운 자이다. (12장 15절); 바라는 것이 없고 순수하며 능력이 있는 자, 초연하고 걱정이 없는 자, 모든 계획을 포기하고 나에게 귀의한 자가 내게 있어 사랑스러운 자이다. (12장 16절); 비방과 찬사에 무관심하며 침묵하는 자, 무엇에나 만족하며 거처가 없는 자, 확고 부동하며 신심이 있는 자가 내게 있어 사랑스러운 자이다. (12장 19절); 그러나 [내가] 말한 대로 진리의 감로를 공경하고, 신심을 지니고서 나를 최고로 여기며 신봉하는 자가 내게 있어 가장 사랑스러운 자이다. (12장 20절) 안옥선, 「Bhagavadgītā의 Bhakti에 대한 연구」 (1987), 99쪽 참고 및 재인용.
22) Johannes Bronkhorst, Karma and Teleogy (2000), 49-51쪽.
23) 이거룡, 「업설과 은총의 양립 문제」 (1995), 241쪽.
24) 이거룡, 앞의 논문, 242-247쪽; 한편 J. J. Lipper는 Rāmānuja에게서 나타나는 신과 인간의 관계가 ‘①유지자와 피유지자, ②통제자와 통제받는 자, ③주인과 예속된 자’라는 3가지 성격을 지니는 동시에 상호 의존적이라는 점에 대해 언급한다. 그에 따르면 신은 개아의 운명을 결정하는 위치에 있지만 개아 역시 신에게 접근해 나가는 데서 도덕적인 자율성을 지닌다. 안옥선, 앞의 논문, 16-19쪽.
25) 임승택, 앞의 논문, 169-175쪽; 길희성, 「『바가바드기타』에 나타난 힌두교의 사회윤리: 불평등의 문제를 중심으로」 (1989), 73쪽.
26) William K. Mahony, 앞의 논문, 265쪽.
27) 브라흐만, 끄샤뜨리야, 바이샤, 수드라 등의 행위는, 파람타파(아르쥬나)여! 본성으로부터 생겨난 덕성에 의해 구분된다. (18장 41절); 평정, 자제, 고행, 순결, 인내, 정직, 지혜, 통찰, 믿음 등은 본성적으로 브라흐만의 행위이다. (18장 42절); 용맹, 활력, 굳셈, 기술, 전쟁에서의 불퇴, 보시, 지배자적 기질 등은 본성적으로 끄샤뜨리야의 행위이다. (18장 43절); 농사, 목축, 상업은 바이샤의 본성적인 행위이다. 또한 봉사의 성질을 지닌 행위는 본성적으로 수드라에 속한다. (18장 44절)
28) 이와 같은 나의 출생과 행위의 신비로움을 진실로 아는 자는 육신을 버리고 난 후 재생하지 않고 나에게로 온다. (4장 9절); 지혜로써 수련된 현명한 사람들은 행위로부터 생겨난 결과를 포기하여 환생의 속박을 벗고 욕망으로부터 자유로운 경지에 도달한다. (2장 51절); 나에게 도달하여 지고의 완성에 이른 위대한 자아를 지닌 자는 고통이 멈추지 않는 무상한 재생을 얻지 않는다. (8장 15절)
29) Rādhākrishnan, Contemporary Indian Philosophy (1950), 503쪽; I. C. Sharma, Ethical Philosophy of India (1963), 266쪽; 허우성 역, 『마하뜨마 간디의 도덕․정치사상』 (2004), 121-130쪽; 김호성, 「『바가바드기따』에 나타난 까르마 요가의 윤리적 조명」 (1992), 131쪽 등.
30) ‘신애의 요가’와 ‘행위의 요가’를 일치시킨 사례는 앞 소절의 인용문에 제시된 것으로 충분할 듯하다. 한편 ‘행위의 요가’와 ‘지혜의 요가’의 상관성에 관해서는 “행위 속에서 행위하지 않음을 보는 자, 행위하지 않음 속에서 행위를 보는 자는 지혜로운 자이며 절제된 이로서 완전한 행위자이다. (4장 18절)”라든가, “어리석은 자들은 이론(=지혜)과 실천(=행위)을 다르게 말하지만 현명한 자들은 그렇게 보지 않는다. 하나라도 바르게 전념한 자는 둘의 결과를 얻는다. (5장 4절)” 등의 구절을 주목할 만하다.
31) 예컨대 상키야에서 업 개념은 물질 세계의 전개 원리일 뿐이며, 정신적 원리이자 주체적 존재인 뿌루샤(puruṣa)에 대해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따라서 상키야의 업 논리는 윤리적 측면에서 그다지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한다. 반면에 『우빠니샤드』에 따르면, 개인의 모든 행위는 우주의 질서와 조화를 반영하며 특정한 결과를 야기하는 능동적 힘을 지닌다. 따라서 개인의 행위는 그 자신의 미래 모습을 규정하는 방식으로 윤리적 의미를 지니게 된다. Wilhelm Halbfass, 앞의 논문, 212쪽; 임승택, 앞의 논문, 153쪽, 162-165쪽 참조.
32) 『기따』에 대한 주석을 남긴 대표적인 두 인물로 Śaṇkara와 Rāmānuja을 꼽을 수 있다. 전자는 불이론(不二論, advaita)의 입장에서 ‘지혜에 요가’에 비중을 두고서 이 문헌을 해석하였고, 후자는 한정불이론(Viśiṣṭādvaita)의 입장에서 人格神에 대한 ‘신애의 요가’라는 관점으로 이것에 대한 일관된 이해를 시도하였다. R. C. Zaehner, The Bhagavad-Gita: with a commentary based onthe original sources (1976), 8-9쪽.
33) 『기따』를 유신론적 관점에서 접근해 들어간 대표적인 사례로는 Rāmānuja를 거론할 수 있다. Rādhākrishnan, The Bhagavadgītā (1976), 28쪽, 58-66쪽; 한편 김호성 교수에 따르면, Śaṅkara와 Rādhākrishnan는 ‘지혜의 요가’ 입장에서, Gandhi는 ‘행위의 요가’ 입장에서, Rāmānuja와 Zaehner는 ‘신애의 요가’ 입장에서 『기따』를 주석하고 있다. 김호성, 앞의 논문 (1992), 131쪽.
34) 예컨대 다음의 구절들이 그 구체적 사례가 될 수 있다. 즉 “모든 존재는 변화하지만 [그것의] 정상에 있는 것은 변화하지 않는다고 말해진다. (15장 16절)”는 구절에 이어, “그러나 다른 최고의 정신이 있으니 [그를] 최고아라고 한다. [그는] 삼계에 스며들어 [삼계를] 유지하는 불멸의 주재자이다. (15장 17절)”라는 문구가 그것이다.
35) 이와 관련해서는 다음의 구절들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나의] 낮은 [본성]이다. 이것과 다른 나의 높고도 생생한 본성을 알라.... (7장 5절)”라는 문구로부터, “모든 존재가 이것을 모태로 한다.... (7장 6절)”라는 게송을 거쳐, “나(kṛṣṇa)보다 더 높은 다른 어떤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 (7장 7절)”로 연결되는 내용이 그것이다.
36) Chandradhar Sharma, A Critical Survey of Indian Philosophy (1976), 37쪽; 이태영, 「『바가바드기타』의 즈나나 요가에 관한 연구」 (1989), 331쪽; 또한 이와 관련하여 Śaṅkara가 ‘지혜의 요가’와 ‘행위의 요가’를 대립적으로 본 사실은 주목할 만하다. “지혜가 확립되면 행위는 사라진다. 지혜와 행위는 빛과 어둠처럼 상호 대립적이다. (When wisdom is attained action falls away. Wisdom and action are mutually opposed as light and darkness.)” Rādhākrishnan, The Bhagavadgītā (1976) 17쪽 재인용.
37) 이와 관련하여 길희성 교수는 『기따』에 나타나는 보편윤리와 특수윤리에 주목한다. 그에 따르면 『기따』에서는 계급적 신분에 의해 결정되는 특수윤리가 보편적 도덕규범으로서의 보편윤리보다 우선권을 지닌다. 바로 이점은 『기따』가 풍부한 종교적 메시지를 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철저하게 계급질서를 옹호하기 위한 의도에서 편집되었음을 의미한다. 한편 김호성에 따르면, 이러한 특수윤리는 무주상보시를 설하는 대승불교의 『금강경』 등에 의해 극복의 대상이 되었다. 길희성, 앞의 논문 (1989), 76-81쪽; 김호성, 앞의 논문 (1992), 143-146쪽.
38) 길희성, 앞의 논문, 78-79쪽.
39) 이명권, 「암베드카르와 현대인불교」 (2003), 188쪽; 임승택, 앞의 논문, 156쪽 재인용.
40) 고통 속에서도 마음에 혼란이 없고, 즐거움 속에서도 탐착을 떠나, 탐욕과 공포와 분노가 평정된 자를 성자라고 한다. (2장 56절);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대립을 초월하여 질투심 없이 성공과 실패에 평등한 사람은 행위를 한다고 하더라도 속박되지 않는다. (4장 22절)
41) 유경희, 「인도 사상의 해탈 개념: 우빠니샤드와 바가바드기따를 중심으로」 (1997), 246쪽.
42) 길희성, 앞의 논문 (1989), 76-81쪽.
43) 이 문헌의 전체 줄거리를 이끌어 가는 대표적인 구절들로 다음을 꼽을 수 있다. 자신의 의무를 생각한다면 동요할 필요가 없다. 왜냐하면 끄샤뜨리야에게 의무에 따르는 싸움보다 더 나은 다른 것이 없기 때문이다. (2장 31절); 만약 그대가 이 의무적인 싸움을 수행하지 않는다면, 그것으로 인해 자신의 의무와 명예를 버리게 되므로 죄를 초래할 것이다. (2장 33절); 이익이 없다 하더라도 자신의 의무[를 수행하는 것이] 다른 사람의 의무를 성취하는 것보다 낫다. (3장 35절)
44) 복이 있는 끄샤뜨리야인 까닭에, 천계의 문을 열어 주는 전쟁을 이처럼 접하게 된다. (2장 32절); [싸움에서] 죽임을 당한다면 천국에 이를 것이요, 승리한다면 땅을 누릴 것이다. 그러하니 싸움을 위해 결단을 내리고 일어서라. (2장 37절);
즐거움과 고통, 이익과 손해, 승리와 패배를 동등하게 여기고 싸울 준비를 하라. 그리하면 그와 같은 죄를 받지 않을 것이다. (2장 38절). ▲ 위로
[출처: 철학연구 Vol.1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