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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화선 무차대회] 5. 도의국사에서 성철스님까지 … 佛性을 깨우다

작성자석천|작성시간15.04.29|조회수158 목록 댓글 0

[간화선 무차대회] 5. 도의국사에서 성철스님까지 … 佛性을 깨우다

한국 선불교의 법맥(法脈)

 


신라 말기 구산선문 ‘발흥’

자주적인 인간성 계발 표방
 

중국이 인정한 한국 유학승

고려시대 담선법회 ‘활성화’
 

조선조 법등 되살린 청허휴정

임제선풍, 종정 스님들이 계승


 
한국 선불교사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긴 스님들의 진영. 왼쪽부터 도의국사, 태고보우국사, 경허성우선사, 퇴옹(退翁) 성철대종사.


한국 선불교의 기원은 삼국시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신라 28대 진덕여왕 4년(650) 법랑(法朗) 선사가 당나라로 건너가 중국 선종 제4조 도신(道信) 선사의 법을 전해온 것을 시초로 본다. 이후 구산선문(九山禪門)이 들어서면서 본격적인 역사가 열렸다.


구산선문이란 서기 821년 도의(道義) 국사가 개창한 가지산문부터 932년 이엄(利嚴) 선사가 연 수미산문까지, 나말여초(羅末麗初) 시기의 선승들에 의해 성립된 아홉 곳의 참선근본도량을 일컫는다. 가지산문(전남 장흥) 수미산문(황해 해주) 사굴산문(강원 강릉) 사자산문(강원 영월) 성주산문(충남 보령) 희양산문(경북 문경) 동리산문(전남 곡성) 실상산문(전북 남원) 봉림산문(경남 창원) 등이다.


구산선문의 지리적 위치는 통일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와 일정한 거리를 두고 있었다. 이는 우리나라의 선종(禪宗)이 당시 기득권 불교에 대한 회의와 저항에서 출발했음을 일러주는 대목이다. 구산선문을 개창한 선승들은 신라 하대 왕권 해체기에 대두된 지방호족세력들의 후원을 기반으로 전라도와 강원도의 오지를 본거지로 삼았다. 아울러 화엄과 밀교를 바탕으로 한 교학불교와 기복 중심의 신앙을 비판하면서, 자주적인 인간성의 계발을 표방하는 선법(禪法)을 펼쳐나갔다.


진리는 문자와 개념으로 전달할 수 없으며 인간의 불성을 단박에 밝힌다는 ‘불립문자(不立文字) 교외별전(敎外別傳)’은 그야말로 혁신적인 사상체계였다. 단출하고 담백한 가르침은 교학불교의 이론적 번쇄함과 귀족적 사치에 지친 지식인과 민중의 지지와 신뢰를 끌어냈다. 무엇보다 선승들은 신도들의 보시에 의존하지 않고 직접노동에 참여해 자급자족의 경제기반을 이룩하면서 솔선수범했다.


구산선문의 주역들 가운데 첫손을 꼽는다면 오늘날 대한불교조계종의 종조로 추앙받는 도의국사(?~825)다. 스님은 홍주 개원사로 유학해 중국 조사선의 중흥조인 마조도일(馬祖道一)의 제자 서당지장(西堂地藏) 아래서 공부했다. 특출한 지혜와 정진력으로 인해 서당지장으로부터 “진실로 법을 전한다면 그대와 같은 사람이 아니면 누구에게 법을 전하랴”는 진심어린 찬사를 받았다.


마조의 또 다른 문하였던 백장회해(百丈懷海) 역시 도의스님을 보자마자 “강서(江西)의 선맥(禪脈)이 모두 동국(東國, 한국)으로 돌아가는구나!”라며 탄식했다. 사실 도의국사 외에도 무상(無相, 684~762) 쌍봉도윤(雙峯道允) 등 중국 본토에서 인정받은 한국의 선사들이 적지 않았다. 한국인 특유의 풍부한 정서와 직관력, 강인한 체력과 의지가 선수행을 통해서 발현된 셈이다.

    

 
구산선문 가운데 하나인 사굴산문 굴산사지 당간지주(보물 제86호).


나말여초에 성립돼 한국 선의 기틀을 마련한 구산선문은 고려 선종(宣宗, 재위 1083~1094) 대에 이르러 완연히 정착했다. 희양산문의 승형(承逈), 사굴산문의 혜소(慧炤), 가지산문의 학일(學一) 등이 해당 산문의 중흥조로 속속 등장했다. 특히 불교를 건국이념으로 삼은 태조 왕건의 선종에 대한 애정은 각별했다. 풍수지리설의 대가이며 동리산문의 법맥을 이은 도선(道詵), 사자산문의 절중(折中), 사굴산문의 행적(行寂)과 형미(逈微), 수미산문의 개조 이엄, 희양산문의 긍양(兢讓) 선사를 적극 후원하며 구산선문의 성장에 크게 기여했다.


그러나 이렇듯 선종이 왕이 비호하는 기득권 세력으로 입장이 바뀌면서 조금씩 변질되기 시작했다. 왕실의 화려하고 무분별한 기복불사에 편승한 승려들의 부패로 구산선문의 수행력과 청빈, 대중교화능력은 쇠퇴일로를 걸었다. 아울러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일으킨 천태종이 발전하면서 수많은 선승들이 천태종에 흡수됐다. 누란의 위기에 놓인 선문의 부흥을 주도한 인물이 보조국사 지눌(知訥)이다. 보조지눌은 정혜결사(定慧結社) 운동을 통해 세속의 명리를 초월해 수행에만 전념하는 가풍을 복원했다. 이와 더불어 선정과 지혜를 함께 닦는 정혜쌍수(定慧雙修)와 깨달은 뒤에도 수행을 이어가야 한다는 돈오점수(頓悟漸修) 이론으로 한국 선종사의 새 지평을 열었다.


도의국사가 조계종의 종조라면 태고보우 선사는 제2의 중흥을 이끌었다.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 선사는 현대 한국 선종 법맥의 원류에 위치하는 조사(祖師)다. 그는 임제선(臨濟禪)의 사상과 법통을 수용해 고려시대 접어들어 분열과 갈등 양상을 보이던 구산선문을 하나로 통합했다. 임제종의 종풍을 계승함으로써 오늘날 종단의 사상적 정체성을 정립한 인물이다. 아울러 고려 후기 태고보우 이래로 환암혼수(幻庵混修)-구곡각운(龜谷覺雲)-벽계정심(碧溪淨心)-벽송지엄(碧松智嚴)-부용영관(芙蓉靈觀)-청허휴정(淸虛休靜)으로 이어지는 계보가 완성됐다.


한국 최대의 공안집인 <선문염송(禪門拈頌)>(전30권)을 편찬한 진각혜심(眞覺慧諶) 선사도 고려시대 선불교사를 논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다. <선문염송>은 선의 핵심적인 요강을 설명하는 동시에 당시 국가 차원에서 거행됐던 담선(談禪) 법회에서 제창됐던 역대 공안(公案, 검증된 화두)들을 집대성한 저작이다. 우리나라 선불교의 위대한 유산으로 중국의 선종에 전혀 뒤지지 않는 한국 선승들의 역량을 드러내며 주체성을 수립했다. 이밖에도 세계 최고(最古)의 금속활자로 간행된 <불조직지심체요절(佛祖直指心體要節)>의 저자인 백운경한(白雲景閑) 스님과 조선 태조 이성계의 왕사(王師)였던 나옹혜근(裸翁惠勤) 스님도 선문화의 융성에 이바지했다.


알다시피 조선왕조의 숭유억불정책으로 불교는 질곡의 세월을 겪어야 했다. 특히 <경국대전>의 편찬으로 성리학적 국가질서가 구축되면서 가히 멸불(滅佛)의 위기에 처하고 만다. 이때 불교를 나락에서 건진 스님이 청허휴정 선사다. 임진왜란의 영웅인 서산대사로 널리 알려진 청허휴정은 단절되다시피 한 종통(宗統)을 복원했다. 동시에 선의 종지를 불교의 근본 가르침으로 천명한 <선가귀감(禪家龜鑑)>은 지금껏 선불교 고전의 자리를 지키고 있다.


일제강점기 한국불교는 이른바 왜색불교에 의해 오염됐지만 선각자들의 활약으로 불교 현대화와 대중화의 발판을 마련했다. 선불교 분야에서도 일대 전기가 세워졌다. 경허성우(鏡虛惺牛, 1849~1912) 선사는 현대 한국 선의 중흥조로 불린다. 투철한 정진과 독특한 기백으로 패배의식과 매너리즘에 빠진 선가에 신선한 활력을 불어넣었다.


이후 경허성우 선사의 제자인 만공월면(滿空月面) 선사와 만공스님의 법을 이은 금오(金烏)스님은 오늘날 종단의 ‘활발발한’ 가풍을 정착시키는 데 크게 기여했다. 이와 더불어 백용성 스님과 방한암 스님으로 주로 회자되는 용성진종(龍城震宗) 선사와 한암중원(漢巖重遠) 선사 또한 선과 교를 겸비한 고승으로서 수행과 포교, 후학 양성에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다.


1962년 통합종단 대한불교조계종의 출범으로 한국불교는 임제선에 기반한 선풍(禪風)을 정립했다. 무엇보다 종단을 대표하는 종정(宗正)은 수행력의 상징으로 교단의 중심을 지키고 불교의 나아갈 길을 가르치는 지남(指南)으로 자리했다. 효봉(曉峰. 제1대) 청담(靑潭, 2대) 고암(古菴, 3·4대) 서옹(西翁, 5대) 성철(性徹, 6·7대) 서암(西庵, 8대) 월하(月下, 9대) 혜암(慧菴, 10대) 법전(法傳, 11·12대) 스님 등 역대 종정은 종단 안팎에서 존경받는 대선사였다. 특히 중도법문과 3000배, ‘자기를 바로 봅시다’로 대변되는 ‘가야산 호랑이’ 성철스님의 열반(1993년)은 전국민적인 추모와 존숭의 열기를 일으켰다. 장영섭 기자


[불교신문3095호/2015년4월8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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