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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와 역사

[불교쟁론] 9. 불교논리학과 힌두논리학 논쟁

작성자석천|작성시간13.06.12|조회수96 목록 댓글 0


[불교쟁론] 9. 불교논리학과 힌두논리학 논쟁

"500여년에 걸친 격론의 파노라마"


인도는 두 가지 대조되는 전통을 갖고 있다. 하나는 침묵 가운데서 모든 분별과 망식(妄識)을 추구하는 신비적, 명상적(=요가적) 전통이고, 다른 하나는 다른 사람과 만나서 토론하고 논쟁하는 합리적, 논리적 전통이다. 그와 같이 논리적으로 비판하고 논쟁하는 관행 속에서 논쟁법, 논리학(正理學)을 얻는 방법(量論)에 관한 학문이 발달하게 되었다.


유식(唯識) 논서의 하나인 《유가사지론(瑜伽師地論)》엔 이타행을 하고자 발원한 보살로서 익혀야 할 학문을 다섯 가지(五明)로 열거하는데 그 가운데는 불교학, 의학, 공예 및 기술, 언어학과 더불어 논리학(因明)이 포함되어 있다. 타 학파의 주장이나 견해를 논박하고 불교의 진리를 변론하고 논증하기 위해서는 논리학의 지식이 반드시 필요하기 때문이다.


연기(緣起)와 공(空), 중도(中道)라는 석존의 정법(正法)을 드러내기 위해 실체론적 분별과 희론을 파사(破邪)하는데 집중했던 나가르주나(龍樹)는 승론(勝論)의 실체론적 존재론에 바탕한 힌두의 논리학파(正理學派)를 공박했지만, 단지 사견을 논박하는 것이 아니라 보다 적극적으로 대승의 교학체계를 수립하고자 했던 유식(唯識) 논사들에겐 논리학이 필요했으며, 처음엔 힌두논리학를 빌려서 사용하였다.

 

그러나 승론학파의 실체론에 바탕한 힌두논리학에 만족할 수 없었던 세친(世親)의 제자인 진나(陳那-디그나가)는 《집량론(集量論)》을 지어 불교의 연기적, 찰라 생멸적 존재론에 바탕한 불교논리학(因明)의 체계를 확립시켰고, 후에 《양평석(量評釋)》을 지은 법칭(法稱-다르마끼르띠)에 의해서 보다 정교하고 풍부한 내용을 갖추게 되었다.


초기불교의 18계설에 따르면 인간의 모든 경험(一切法)은 6근(根, 인식기관), 6경(境, 인식대상), 6식(識, 인식주관) 3자의 연기관계로 분석된다.


인식능력인 안(眼), 이(耳), 비(鼻), 설(舌), 신(身), 의(意)의 6근이 그 각각의 대상인 색(色), 성(聲), 향(香), 미(未), 촉(觸), 법(法)의 6경에 작용할 때 그 둘에 의존하여(緣), 안식(眼識), 이식(耳識), 비식(鼻識), 설식(舌識), 신식(身識), 의식(意識) 등 6식이 일어난다(起). 여기서 안, 이, 비, 설, 신 등 전5식은 개념이나 언어와 결합되기 이전의 특수한 개물 자체에 대한 순수감각이고 마지막 의식은 판단, 추리, 상상, 기억을 포함하여 개념이나 언어와 결합된 인식이다.


디그나가는 대상을 6경으로 분류하는 대신 연기법에 따라 찰라생멸하며 실재하는 특수상(自相)과, 마음의 작용으로 만들어진 따라서 실재가 아닌 관념이나 개념적 대상, 즉 보편상(共相)의 둘로 나누었고, 그에 따라 인식도 특수상을 인식하는 현량(現量, 지각)과 보편상을 인식하는 비량(比量, 추리)으로 이분하여 종전의 성언량(聖言量)을 비량에 포함시켰다. 18계설에 비교하면 현량은 전5식에, 비량은 제 6식에 대응한다.


좁은 의미에서의 불교 논리학(因明)은 문자 그대로 이유(因)에 관한 학문(明)이며, 현량.비량 가운데서 비량을 가리킨다. 현량이 대상을 직접 인식하는 수단이라면, 비량은 직접 인식할 수 없는 것을 증거(因)를 매개로 간접적으로 인식하는 수단이다. 비량은 다시 혼자만의 인식을 목적으로 한 위자비량(爲自比量, 추리)과 타인에게 자기의 주장을 알리고자 하는 위타비량(爲他比量, 논증)으로 이분되며, 논쟁에 있어 필요한 것은 바로 후자이다.


논증은 주장(宗), 이유(因), 실례(喩)의 세 명제로 구성되며, 또한 추론의 주제(宗), 이유(因 혹은 能證) 추리의 대상(所證)의 세 요소로 구성된다. 예를 들어 '저 안에 불이 있다'는 주장(宗)을 논증할 때 '저 안'이 추리의 주제이고 그곳에 있을지도 모를 '불'이 추리의 대상(소증)이다. '왜냐하면 연기가 있기 때문에'는 그러한 주장에 대해서 근거가 되는 이유명제이며 여기서 연기가 인(因), 혹은 소증(所證)이다. 불이라는 소증에 대해서 연기가 논증이 될 수 있는 것은 '연기 있는 곳엔 반드시 불이 있다'는 연기와 불 사이의 필연적인 수반관계이다.


이 보편적 관계와 그것을 확인시켜주는 구체적 사례가 세 번째의 실례(喩)이다. 이것은 불교의 이 추리론이 추리의 타당한 형식을 다루는 서양의 형식논리학과 달리 진리를 발견함을 목표로 하는 실제적인 것임을 시사한다.


연기설에 바탕한 인명학파는 단지 자학파의 이론정립에만 몰두했던 것이 아니라 실체론에 근거한 힌두논리학파(正理學派)와 다양한 철학적 주제들을 놓고 수세기에 걸쳐서 논쟁을 전개하였고, 그것은 세계 철학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어려운 화려한 지적 파노라마이다.


적극적으로 자기 주장을 논증하기보다 귀류논법을 사용하여 실체론적 견해가 초래하는 부조리를 폭로하는데 치중하였던 용수와는 대조적으로 인명학파는 종.인.유의 3단논법(三枝作法)으로써 힌두의 주장을 논박하고 보다 적극적으로 불교의 견해를 논증하고자 하였다.

 

수많은 주제들이 논쟁거리가 되었으나 그 중에서 몇 가지만 소개하면 자재신(自在神, 이슈와라)이 존재하는가 아닌가, 영구불변하는 자아(아뜨만)가 있는가 없는가, 불변의 실체가 있는가 아니면 모든 것은 찰라에 생멸하는 무상한 존재인가, 하나의 류(類, 클라스)에 속하는 모든 개체에 공통된 성질, 즉 보편이 실재하는가 아니면 그것은 다만 말뿐이며, 우리의 마음이 만들어낸 관념에 지나지 않는가, 하는 따위의 문제들이다.


원자라든가 시간, 공간, 자아 등 불변의 실체를 주장하는 힌두논리가에 대해 모든 유위법의 부당성과 찰라생멸을 주장하는 인명학파는 참다운 존재란 유효한 작용을 행사하는 힘이며, 그러한 힘은 변치 않는 실체에는 없고 불이나 물처럼 오직 끊임없이 변하는 사물에만 있다고 논박한다. 또 한 예로서 힌두논리가는 '소'라는 사물이 '소'라고 불리우는 것은 '소'라고 불리우는 모든 사물, 다시 말해서 소의 종(類)에 공통된 성질 혹은 소의 본질은 마치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이 소라는 개체와 독립적인 실재라고 주장한다.

 

이에 반해 인명학파는 유일한 실재는 연기법에 따라 변화하는 특수 뿐이고 언어나 그 언어가 나타내는 보편은 힌두논리가의 마음(분별됨)의 소산이라고 주장한다. 예를 들어 인명학파는 a를 '소'라고 부를 때 '소'라는 모든 사물을 소와 소아닌 것으로 이분하여 a로부터 소 아닌 것을 배제하고 부정함으로써 a와 a아닌 것을 구분짓는 기능을 할 뿐 소라는 말에 대응하는 실재로서의 a를 뜻하는 것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a는 연기법에 따라 끊임없이 찰라생멸하는 개체로서 어떤 영속적인 자기 동일이나 본질이 없으므로 '소'라는 말은 단지 세간의 소통을 위해 편의상 약정된 가명(假名)이자 가설(假設)일 뿐이다.


이지수 / 동국대 교수


[출처 : 법보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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