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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령이야기

좁은문

작성자다니엘박|작성시간11.05.07|조회수11 목록 댓글 0

좁은문

 

성도가 이것에 대하여 가지고 있는 개념은, 하늘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무척이나 어렵다라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자기의 행실과 생각에 대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는 열심이 " 얼마나 되는가? "라는 것이 기준이 됩니다.

 

결코 쉽게, 호락호락 들어갈 곳이 아니라 여깁니다. 자기 몸을 치고 죄를 짓지 않으려 각고의 노력을 하고, 혹 죄를 짓게 되면 통곡으로 회개하여 날마다 자기의 행실을 살펴 말씀을 어기지 않으려 최선을 다합니다. 그런 열심과 열정으로 행하며 생각하기를 " ! 참으로 하늘나라로 가는 문은 좁구나! 주님 말씀은 참말이구나! " 합니다. 그리고 더욱 자기를 다잡으며 다시 말씀을 어기지 않기 위하여 최선을 다 합니다.

 

그러나 결코 그러한 열심을 가리키는 것이 좁은 문이 아닙니다.

 

세상에는 각자의 삶의 방식과 배움의 정도와 성격적기질 등에 따라 여러가지 각자의 기준이 있습니다. 성경이 말하고 있는 " " 라는 것 또는, " " 라는 것에서도 그 이해의 정도가 다 다릅니다. 같은 말을 하고 같은 이해를 가지고 있는 듯하나 실제는 서로 다른 이해와 다른 의미를 부여하고 있습니다.

 

사람들이 주님을 영접하고 하나님의 자녀가 된 후에도, 여전히 행하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자기의 기준대로 행함 말입니다.

 

주님을 영접한 후, 그러니까 예수님을 주인 으로 영접하는 모든 예식과 입술의 시인함을 이룬 후에도 성도들은 자기의 기준을 가지고 성경을 봅니다. 처음에는 성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잘 모르지만, 설교를 듣고 배우면서 자기의 기준들이 정리되기 시작합니다.

 

자기의 기준으로 바라보는 성경은 결코 그런 뜻이 아닌데, 목사는 앞에서 딴소리 하는 것 같아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자기 기준대로 설교하는 목사를 만나면 교회를 옮기고 주님 감사합니다. ” 합니다. 그가 교회를 옮긴 것은 주님이 하신 것이 아니라, 자기의 기준과 같은 이해를 가진 목사를 만났을 뿐임을 그는 모릅니다.

 

이런 것들, 이런 각 사람의 기준들이 주님이 말씀하시는 넓은 문입니다.

각 사람의 기준으로 성경을 보면 볼수록 이 말씀이 저 말씀을 모순 되게 하는 것들을 만나게 됩니다. 그러면, 자기의 기준에 맞게 이쪽이든 저쪽이든 고쳐서 이해합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은 분명히 그 뜻이 아닌데도, 자기의 기준을 위하여 한 말씀을 무시하거나, 또는 자기 기준에 부합되도록 억지 해석을 합니다. 영어를 찾는다든지, 원어를 본다든지, 많은 전문가의 책들을 보면서 같은 이해를 가지는 것을 찾아 위로를 얻습니다. 그리고 자기의 기준을 더욱 든든히 합니다.

 

누군가 반론을 제기하면, 자기의 모든 지식을 총 동원하여 다툴 준비가 된 것이지요. 그렇게 전쟁을 준비하는 이유는, 자기의 기준이 무너지면 그는 공황상태가 될 줄 알기 때문이지요. 그것은 자기가 거하는 집이 한순간에 무너짐을 당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자기 기준이 틀렸다는 것이 증명 된다는 것은........ 그 사람에게는 죽음 과도 같은 것입니다.

 

넓은 문은 예수를 보지 못하게 하는 문입니다.

예수를 보는 것 같지만, 실상 자기의 기준을 통과하여 자기 자신을 보는 것 뿐입니다. 하나님을 섬기는 것 같지만, 자기 기준을 위하여 자기들의 의를 찾는 것 뿐입니다. 각자 생각해 보시지요. 하나님 말씀 앞에서 자기의 기준이 얼마나 넓은지 말입니다. 정말 정직하게 시간좀 내서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자기의 철학과 학식과 경험과 성격적기질로 세워진 그 기준이 말씀 앞에 얼마나 넓은 문인지 조금만 양심이 있어도 다 알게 됩니다.

 

어떤 말씀은 자기 기준에 모순이 되니 억지 해석하고, 그것이 안 되면 하나님의 뜻은 사람이 모릅니다. ” 라고 합니다. 자기의 삶 속에서도 이럴 땐 저 말씀을, 저럴 땐 이 말씀을, 꼭 기호 식품을 고르듯이 자기의 기준에 합당하게 합리화하여 적절히 사용하지요. 그의 삶 속에 모든 말씀을 일관되게 작용하도록 결코 하지 못합니다. 그러면서 다툴때는 이마에 힘줄이 튀어나옵니다. 이것이 위선 아니겠습니까?

 

예수께서 왜 육신으로 오셨는지 도대체 관심이 없습니다.

그는 모든 창조물의 창조주라 요한복음이 선언합니다. 고로 사람은 그의 창조물입니다. 그는 말씀이신데 육신으로 오셨지요. 잘 생각해 보십시오. 창조주가 사람이 되셔서 오시되 그것도 하늘에서 뚝! 하고 내려 오심이 아니라, 여자의 자궁을 통해 아기로 오셨음이 작은 일인가요? 그는 왜 육신으로 오심도 부족하여 아기까지 되셔서 오셨을까요?

 

여하간, 사람을 지으신 분이 육체가 되어 오셨습니다. 여기에 이론이고 뭐고 생각할 것 없이, 그가 육신으로 오신 사건 하나로 모든 육신은 그와 붙은 것입니다. 바리새인이 욕을하고 때리고 믿든지 말든지 하나님 입장에서는 한 육체가 되어 주신 것이지요.

 

그 하나님이 죽었습니다.

그러면 그와 같은 모든 육체는 다 죽은 것입니다. 그래도 죽지 않았다고 하는 자들은 하나님이 만드신 물건이 아닙니다. 어디서 나왔는지 모르는 존재입니다. “ 내가 너를 도무지 모르겠다. ” 하심은 주님께서 우리를 놀리시려는 것이 아닙니다. 주님의 말씀 중에는 허튼 말씀이 없습니다. 그가 말하면 무화과 나무도 말라 죽고, 물고기 입에도 동전이 물려 있게 됩니다. 하물며, “ 내가 널 도무지 모르겠다. ” 라는 것이 성도에게 작은 말씀인가요?

 

좁은 문은 오직 예수만 봐야만 하는 단 하나의 문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세상에 많은 사람의 기준으로 세워진 문들이 많이 있습니다. 어디든 들어갈 수 있고 또는 자기 자신이 스스로 그 문을 만들 수도 있지요. 정말 원한다면 어디든 들어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좁은 문은 오직 하나밖에 없는데, 예수를 통하여 들어가는 문 뿐입니다.

그가 육체로 오신 은혜를 받아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고, 그의 몸을 받아 그의 몸이 되어 한 십자가에 한 몸으로 죽는 것, 그것이 좁은 문, 곧 예수그리스도를 통하는 하늘의 문입니다.

 

좁은 문을 자기의 열심과 말씀을 지켜 행하려는 것으로 여기는 자는 실상 자기 열심으로 하나님의 의를 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이 말을 그들에게 하면 눈빛이 달라집니다.

 

좁은 문은 하나님께서 들어가기 어렵게 하셨다는 문이 아니라, 오직 예수그리스도라는 하나의 문을 의미하며, “ 나를 따르라 하심처럼 따라가서 함께 십자가에 달리는 것입니다. 날마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 합니다. 주님의 십자가가 우리의 십자가, 우리 뿐 아니라, 모든 육체의 십자가입니다. 이 세대가 지나기 전에 내 말이 다 이루어 질 것이다라는 것은 주님의 허풍이 아닙니다. 주님이 십자가에 달리실 때 모든 민족은 다 죽은 것과 같습니다.

 

예수만 보는 것이 좁은 문입니다.

아니! 이렇게 쉬울 수 있소? ” 라고 묻지 마시고, 그가 육체로 오셨음을 다시 묵상해 주시기 바랍니다. 나를 지으신 분이 나와 같은 육체가 되어 오셨다가 십자가에 죽었음을 성경이 말하고 있고, 내가 그 성경을 믿는다면, 육체를 지닌 나는 죽은 것인지 산 것인지, 각 사람이 판단할 문제니까요.

 

! 이제 어떻습니까?

주와 함께 이미 죽었구나! 라고 받아지시나요?

못 받으시겠다구요? 그렇지요. 못 받으시는 분들 많을 것입니다. 그러니 참으로 좁은 문 아니겠습니까?

 

만일, 함께 죽었음을 받으신 분이 계십니까?

그러면, 이제 자기의 기준을 다 내려 놓으시기 바랍니다. 기준이 내려졌는지 아닌지는 성경을 펴 보시면 압니다. 성경을 보실 때 예수를 보려고 보는지, 아니면 자기의 상태를 보려고 보는지 가만히 생각하시면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예수를 보는 것이 아니라, 자기의 상태나 자기의 죄성, 자기의 관점이 어떤가 하며 보신다면, 죽은 것이 아닙니다. 죽은척 하는 것이지.

 

죽은 사람은 성경에서 자기를 볼 수 없습니다.

오직 주 예수그리스도가 어떠하심인지만 볼 뿐입니다. ! 어떤가요? 성경에서 자기의 얼굴을 보지 않고, 오직 죽은 자답게 예수그리스도만 바라 봐 지십니까? 아니면, 자꾸 자기 얼굴에 뭐가 묻었는지, 말씀을 자기 입장에 대입하여 보게 되나요? 그럼, 아직 넓은 문 앞에 서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다시 주님의 십자가를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그가 육체로 오심이 어떤 기가막힌 일인지.......

그가 포도나무가 되심을 인정하고 그의 유월절에 다시 참여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절대 유다처럼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주의 몸을 먹고 자기의 기준을 따라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십자가에 주님이 주신 떡으로 한 몸이 되어 함께 죽으셨음을 묵상하시기 바랍니다. 주님이 지신 십자가가 실상, “ 날마다 네 십자가를 지라! ” 하신 그 십자가였습니다. 나의 십자가를 주님이 육신이 되셔서 지셨고, 모든 사람은 그와 함께 죽은 것입니다.

 

모든 죄의 몸은 십자가에서 다 죽었습니다.

누가 이 사망의 몸에서 우리를 건지겠는가? ! 그러나 예수그리스도로 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감사하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정죄함이 없다...... 이 고백은 바울의 고백입니다. 우리의 기준은 넓은 문이며, 넓은 문에 있으면 언제나 정죄가 쫓아다닙니다. 틀림없는 일입니다. 죄의 권능은 율법이니까요. 실상 우리의 기준이라는 것은 우리가 만들고 세상이 다듬은 신종 율법 과 같습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습니다. 오라고 하고서는 좁게 만들어 사람을 약올리시려는 하나님이 아니십니다. 누구든지 오라는 문입니다. 다만, 그가 겸손히 낮아지셔서 육체가 되시고 십자가에 달렸으니 함께 한 몸을 받아먹고 그와 함께 죽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좁은 문은 어려운 문을 말함이 아니라, 오직 하나의 문인 예수그리스도를 통과하여 한 몸 이 되는 문을 일컫는 것입니다. 좁은 문은 세상의 기준과 자기의 법칙과 규칙들 입장에서 볼 때 좁은 것이지, 하나님의 은혜의 관점에서는 참으로 누구든지 들어갈 수 있는 엄청나게 넓은 은혜의 문입니다.

 

주님이 그랬잖아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와라!

내가 너희를 쉬게하마!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다!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우니까 누구든지 와라!

라고 말입니다.

 

모든 사람이 좁은 문에 들어왔지만, 도로 뛰쳐나가고 있다는 것을 성도인 우리가 알려 주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주님으로 인하여 좁은 문을 거저 받았습니다. 우리도 주와 함께 날마나 십자가를 지고 거저 주어야 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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